“새언니, 둘째 사촌 오빠 곧 결혼한다고 들어서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어요. 새언니한테 감사 인사도 드릴 겸으로요.”추경은이 웃으며 말했다.“감사 인사요?”박민정은 그녀가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맞아요, 고마워요. 새언니가 나에게 오빠를 양보하지 않은 덕분에 셋째 도련님을 만났으니까요.”추경은은 말하면서 손을 내밀어 박민정과 조하랑에게 자기의 비둘기 알보다 큰 보석 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께서 주신 건에요. 예쁘죠?”박민정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옆에 있던 조하랑은 더욱 어이없어했다. 추경은을 미친 사람으로 보았다. 물건 양보하는 건 들어봤는데 남편 양보하는 건 난생처음 듣는다. 정말 생각하는 게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예쁘네요. 축하해요.”박민정은 그녀가 자랑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축하해줬다.박민정은 고영란이 자신의 친조카를 불구덩이에 밀어 넣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지난번 고영란이 말했다시피 셋째 도련님은 절대 치정 남이 아니다.추경은은 박민정이 자기를 조금도 자신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재미없어했다.그녀는 박민정이 자기가 더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을 보고 화가 날 거라고 생각했다. “새언니, 사실 너그러운 척할 필요 없어요. 다 여자끼리. 저는 지금 남준 오빠가 바보로 되고 눈도 안 보이게 돼서 언니가 얼마나 힘들지 알아요.”박민정은 어이기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추경은은 말문이 막혔다.“저는 그냥 새언니가 무슨 일이든 마음속에 숨겨두지 말고 털어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임신 중인데 남준 오빠가 그렇게 됐으니 힘들겠죠. 그걸 털어놓아야지 참으면 병이 생길 것 같아요.”그녀는 겉으로 박민정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박민정이 화나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만족시키고 싶었다. 박민정은 당연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려 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요. 힘든 거 없어요. 매일 잘 먹고 잘살고 있으니까. 참, 우리 시어
조하랑이 한 말을 듣고 박민정은 깨달았다. 전에 고영란이 왜 추경은이 고씨 가문으로 가는 것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행운을 빌어야겠네.”박민정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추경은은 셋째 도련님을 찾지 못하고 여자들 사이에서 자랑하고 있었다.그 여자 중 셋째 도련님의 인품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몰래 그녀를 비웃었는데 모르는 사람은 정말 그녀를 부러워했다.그중에는 추경은이 자랑하는 꼴을 못 봐주겠어서 셋째 도련님은 누구나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추경은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그 여자들과 같은 줄 알아? 나는 그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젊고 예뻐.”박민정은 이 말을 듣고서야 추경은도 셋째 도련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심지어 자신이 셋째 도련님의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여자들보다 낫다고 느꼈다.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참하게 죽는다.이렇게 보면 앞으로 추경은이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하는 수 없다. 모두 그녀가 자초한 일이니까.그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유씨 가문의 룰에 따르면 먼저 술을 따르고 그다음에 결혼식을 한다.윤소현과 유남우는 어른들에게 술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때 유씨 가문에서 누군가가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남준 형은 왜 안 왔어요? 형이 안 왔는데 술을 올리는 것은 격식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유씨 가문의 남자들은 누구든지 다 그룹 안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한다. 예전에는 유남준을 상대로 어떻게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그가 바보로 되고 눈도 멀었으니 한바탕 망신을 주고 싶었다. 그가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것임을 알아들은 유남우는 집사에게 말했다. “가서 형 모셔와.”집사는 어리둥절해졌다.옆에 있던 고영란도 표정이 안 좋았다. “남준이는 아직 아파서 나오기 불편할 거야.”“뭐가 불편해요? 남준이는 바보가 되었지만 유씨 가문 사람이고 남우의 사
같은 여자로서 윤소현은 홍주영이 유남준에 대한 감정이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윤소현이 그녀를 까발리지 않은 것은 그녀는 생긴 것도 별로고 꾸밀 줄도 모른다. 여성스러운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빽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여자는 자기의 상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유남우가 그녀를 좋아할 리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했다.이 말을 들은 홍주영은 윤소현에게 말했다. “업무상의 일입니다.”“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제가 더 알아야 하겠죠. 우리 정씨 가문은 호산 그룹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라는 거, 아시죠?”윤소현은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그녀는 말할 때, 계속 정수미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정수미가 와서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게 하려는 이 못된 사람을 혼내 주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말이다. 홍주영은 윤소현이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유남우를 쳐다보았다.“도련님.”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 사람들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유남우는 홍주영이 공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분명히 남이 들으면 안 되는 무슨 일이 생긴 거로 생각했다. “소현아, 금방 다녀올게.”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유남우가 가려 하자 윤소현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의 팔을 덥석 껴안았다.“안 돼요. 아무 데도 못 가요. 우린 곧 어른들께 술을 올려야 해요. 남우 씨가 가면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요?”윤소현은 아직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냥 지금 유남우와 홍주영이 가버리면 자신의 체면이 깎일 것으로 생각했다.정수미도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걸어왔다.“무슨 일이야?”그러자 윤소현이 바로 일렀다. “남우 씨 비서라는 사람이 어떻게 된 건지 남우 씨와 따로 나가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저한테는 말을 하지 않고요. 이미 시간이 늦었고 이따가 어른들께 술을 대접해야 하는데 때를 놓치면 안 좋을 거로 생각했어요.”정수미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
결혼식이 시작되었다.보디가드 한 명이 유석진의 곁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추어 무슨 말을 했다. 그러자 유석진은 흥분해서 물었다.“정말?”“확실합니다.”보디가드가 말했다.주름이 가득한 유석진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쯧쯧. 유남우가 유남준과 같은 독한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지금 어르신께 말씀드릴까요?”보디가드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유석진은 손사래를 쳤다. “급할 것 없어. 오늘은 유남우의 결혼식 날이잖아. 그래도 내가 엄연히 큰아버지인데 그렇게까지 나쁘게 굴 수는 없지. 하하하.”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유남우를 어떻게 처리할지 속으로 생각했다.방금 보디가드가 알려준 건 IM 그룹이 유남우와 윤소현이 결혼하는 틈을 타 호산 그룹의 핵심 프로젝트를 많이 인수했다는 소식이었다.게다가 호산 그룹의 오래된 고객들도 파갔다. 그 고객들과 프로젝트들은 호산 그룹 주주들의 수익과 엄밀히 관련되어 있다. 유남우가 지금 정수미의 빽이 있더라 해도 호산 그룹에서의 자리를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유석진은 호산 그룹을 인수한 후 큰아들을 돌아오게 할 생각이었다.그때가 되면 호산 그룹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생각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유남준이 한 짓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결혼식 현장에서는 지금 윤소현과 유남우가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틀었다.그런데 갑자기 스크린에 양도된 프로젝트와 빼앗기는 계약서의 사진으로 변했다. 그리고 호산 그룹의 급락한 주식을 캡처한 사진도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보지만 호산 그룹의 주주는 한눈에 알아보았다.“이건 우리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 아니야? 어떻게 된 일이야?”“장난해? 지금 우리 프로젝트 다 뺏긴 거야?”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박민정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그녀의 휴대폰에 지금 메시지가 한가득 와있었다. 열어보니 회사 단톡방이었다.[우리 허산 그룹 망하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많은 협력업체가 투자를 철회한 거야?][몰라요. 오늘이 대
시종일관 덤덤한 모습으로 유남우는 오히려 애간장이 타들어 가고 있는 홍주영을 위로했다.“괜찮아. 좀 쉬고 있어.”유남우의 비서로서 이제야 소식을 알게 된 홍주영은 쉴 수도 쉬어서도 안 되는 입장이었다.홍주영에 대한 유남우의 마음이 각별한 것으로 보이자 윤소현은 더더욱 언짢아했다.“남우 씨, 지금 이 상황에서 홍 비서 편드는 거예요? 홍 비서만 제때 얘기하고 보고했더라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리는 없었잖아요.”그 말을 듣고서 유남우는 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순간 윤소현은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떨게 되었다.다정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는 유남우이지만, 그러한 눈빛을 마주하게 된 순간 숨통이 턱 막히고 말았다.눈빛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면, 윤소현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고영란은 직원에게 바로 동영상부터 끄라고 했다.이윽고 고영란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여러분, 잠깐 소란이 있었던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하지만 하객 중 회사 주주들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 회사 프로젝트들 아닙니까? 근데 왜 다 빼앗기게 된 거죠? 이미 알고 있었던 일입니까?”“우리 주주들 바보 아니에요. 오늘 이 일에 대해서 보다 분명한 답변 부탁드립니다.”“남준이 자리에 남우를 몰래 앉혀 놓고 우리랑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잊은 거예요? 남우가 남준이보다 잘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거죠?”“회사 수익이 점점 바닥을 치고 있는 거 아시죠? 이게 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자신의 이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이라 주주들은 꺼리는 거 하나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연이어 날아오는 펙트 폭격에 고영란은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어느덧 후회하는 감정도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남준이만 대표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것인데...’사태가 이 지경으로 번지자 유석진은 마음속으로 폭죽을 터뜨
주주들이 한사코 물고 늘어지자 보다 못한 정수미도 앞으로 나서게 되었다.“주주 여러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씨 가문이 주주로 들어온 이상 절대 여러분을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요.”유석진은 말뿐이지만, 정수미는 정말로 호산 그룹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서울에서 악랄하고 독하기도 명성이 자자한 정수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따라서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고 있던 주주들은 동시에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고영란은 상황이 어느 정도 완화되자 결혼식을 계속 진행했다.오늘과 같은 광경은 인생에서 처음이라 함미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동하는 박예찬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갔다.“동하야.”뒤늦게 정신을 차리게 된 함미현은 동하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아이를 찾아 나섰다.한편, 동하는 박예찬을 박윤우로 착각하고 쪼르르 달려와 말을 걸었다.“윤우 형, 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박예찬은 덤덤한 모습으로 동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난 윤우가 아니라 윤우의 쌍둥이 형인 박예찬이라고 해.”순간 동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박윤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나 박윤우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으니 말이다.어린아이에게는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동하를 찾아 나선 함미현은 곧바로 두 아이를 보게 되었다.함미현 역시 박예찬을 보자마자 박윤우인 줄 알았다.‘아닌데... 윤우는 오늘 화동으로 서고 있잖아...’그렇게 모자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박민정과 조하랑이 다가왔다.“동하야, 동하가 잘못 본 거야. 얘는 윤우가 아니라 예찬이 형이야.”“예찬이는 윤우랑 쌍둥이라 똑같이 생긴 거야.”그 말을 듣고서 동하는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몰랐는지 어슴푸레한 두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함미현은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두 아이 모두 멋지고 귀엽고 영특하니 말이다.박민정은 박예찬에게 잠깐 동하랑 같이 놀아주라고 했다.이윽고 함미현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미
간신히 주주들을 달래 놓자마자 빅뉴스가 터지고 말았다.기사 헤드 라인에는 유남우가 권씨 가문 두 형제와 연합하여 호산 그룹의 많은 재산을 옮긴 것으로 적혀 있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만약 저 기사가 사실이라면... 유 대표, 이건 범죄야!”“정말로 우리 돈을 몰래 옮긴 거야?”“...”주주들은 마침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평범하게 흘러갈 줄 알았던 결혼식에서 이렇게 많은 일이 터질 것으로 생각지도 못한 고영란이다.주주들은 유남우에게 해답을 요구하고 있었다.누군가가 일부러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유남우는 알고 있었다.다만 요즘 경계하지 않았을 뿐이고 상대가 누군지도 전혀 모른다.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크게 번지자 윤소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남우 씨, 이게 다 사실이에요?”유남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주주를 포함한 하객들에게 말했다.“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모든 걸 지켜본 박민정 역시 덩달아 조급해졌다.‘누굴까? 왜 남우 씨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걸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걸까?’하지만 주주들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다.“유 대표, 지금 당장 설명하도록 해! 아니면 결혼이고 뭐고 나 그런 거 몰라.”“맞아!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 다른 대표 앉힐 거야!”“...”고영란과 유씨 가문의 친척들만 제외하고 모두 좋은 구경이라도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고영란도 어찌 할 수 없었다.설령 고씨 가문을 입 밖으로 낸다고 하더라도 그 어떠한 역할도 일으키지 못할 것 같았다.정수미 역시 나서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재산을 몰래 옮겼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게 된다면, 그건 바로 감옥행이나 다름없는 일이다.유남우를 사지로 몰고 있던 그 찰나, 홀 대문이 열리면서 경호원 복장을 한 사람들 사이로 유남준이 걸어 나왔다.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유남준에게 쏠리게 되었다.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채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결혼식장에 나타난 유남준.유남준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오랜 시간 호산 그룹에서 일해 온 주주가 유남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유 대표님, 괜찮으셔서 참 다행입니다. 이제 그만 돌아오시기 바랍니다.”“그래요. 대표님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단 말이에요.”“유 대표님, 사실이 그러합니다. 호산 그룹은 대표님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듭니다.”“...”주주들의 말을 듣게 된 유석진은 얼굴이 점점 험상궂어졌다.‘미친 거 아니야? 유남준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내가 이렇게 버젓이 서 있는데도?’유남준의 윗사람으로서 유석진은 그런 말들이 거북하기만 했다.지금 가장 황당하고 다급한 사람은 윤소현일 것이다.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으로서 결혼식이 망친 건 고사하고 자기 남편의 자리를 대체하려고 하는 사람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다들 똑바로 알고 계세요! 남우 씨가 아니면 우리 엄마는 절대 호산 그룹에 그 어떠한 지지도 하지 않을 거예요!”윤소현은 발끈하며 말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그 말을 듣게 된 정수미는 윤소현이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껏 펼쳐진 모든 상황으로 보아 유남우에게 불리한 국면인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만약 이러한 시국에서 협박하는 말까지 서슴지 않게 한다면 유남우에게 화만 안겨줄 것이다.“윤소현 씨, 그 말은 지엔 그룹의 지지가 없다면 우리 호산 그룹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까?”“우리 호산 그룹, 지엔 그룹보다 못난 게 없어요. 지엔 그룹의 투자금을 받게 된다면 호산 그룹에 있어서는 금상첨화일 뿐이에요. 그 말인즉슨, 지엔 그룹의 투자금이 호산 그룹의 생사를 좌우지할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에요.”“호산 그룹의 생사는 결정할 수 없지만, 윤소현 씨 남편이 앞으로 호산 그룹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지는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네요.”주주들은 윤소현의 말을 듣고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더 이상 윤소현의 체면을 돌보지도 않고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오랜 시간 동안 상인으로 일해 온 주주들이
박민정은 물컵을 챙긴 뒤 보안실로 향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그녀는 경비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넸고 곧바로 어제 퇴근 후의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영상 속에서 주영리가 자신의 물컵에 뭔가를 넣는 모습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좋아, 아주 좋아.’증거는 충분했다.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박민정은 일부러 화장실에 간 척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물컵 속 남은 물을 감식 의뢰하기 위해서였다.컵에 남아 있는 물에 약물이 들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했으니까.병원을 다녀오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회사 내에서는 이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보란 듯이 대놓고 결근이네. 뭐, 이제는 최 사장님 같은 백이 있으니까 다 무시하나 봐. 화장실 간다더니 한 시간은 넘게 있었을걸?”질투 어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속삭였지만 박민정은 이런 말을 신경 쓸 리 없었다.한편, 주영리는 책상 한쪽에 앉아 있었지만 마냥 긴장을 풀지 못했다.직속 상사인 제임스가 아까 말하기를, 곧 최 사장님이 회사를 방문한다고 했고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직접 찾겠다고도 했다.주영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설마 최 사장이 박민정의 말을 듣고 그녀의 편을 들어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닐까?그녀는 불안에 휩싸여 일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결국, 최 사장이 들어왔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주 비서, 당장 이리 와!”최 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주영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에 손이 떨렸다.밖에서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모두 최 사장이 박민정을 위해 직접 나선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하던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박민정 역시 이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었다.‘참 간사하네.’휴게실.최 사장은 들어오자마자 주영리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너, 네가 어제 나를 죽일 뻔한 거 알아?”주영리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최 사장님, 무슨 말씀이
주영리는 우유를 마시며 비웃듯 고개를 끄덕였다.“참나, 그때 밥 먹을 때는 얼마나 고상한 척하던데. 뒤에서는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옆에 있던 동료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요. 어쩌면 이제 최 사모님이 됐을지도 모르잖아요. 괜히 건드렸다가 큰일 난다고요.”주영리는 조롱하듯 덧붙였다.“흥, 그 여자가 사모님 자리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예쁜 여자는 넘쳐나는데 고작 그런 애가? 겁낼 거 없어요.”다른 여직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맞아요. 겨우 그런 걸로 뭐가 무섭다고. 하!”주영리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때 누군가 외쳤다.“어? 저거 봐, 한정판 벤틀리잖아! 혹시 회사에 또 대형 고객이 온 거야?”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그 차로 향했다.그리고 곧이어 그 차에서 내리는 박민정을 보고는 다들 말을 잃었다.주영리는 한순간 멍해졌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봤죠? 저거 분명 최 사장님 차일 거예요.”곁에 있던 동료가 주영리를 치켜세우듯 말했다.“주 비서님, 진짜 대단하네요.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저 여자 진짜 못됐네요.”박민정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 사이에 있는 주영리를 발견했다.그녀는 손을 꽉 쥐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주영리는 원래 박민정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 박민정이 고급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같은 부류라고 착각했다.뻔뻔하게도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민정 씨, 어제 재미있었어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맙다고요?”박민정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올라가더니 주영리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팍! 소리가 울리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주영리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아파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날 쳤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오늘 민정 씨가 그 고급 차 타고 출근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천한 주제에 겉으로만 고상한 척하려고?”주변 동료들이 이 장면을 지켜
유남우의 온화한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그래? 정말 우연이네.”그는 여태껏 박민정을 잘 감춰왔지만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이게 유남준에게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어쨌든 형의 겉모습에 속아선 안 돼. 그리고 회사에서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다면 진작에 나에게 말했어야지.”유남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뭐든 오빠한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제힘으로 해내고 싶어요.”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남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대로 둘 수 없어요? 회사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주영리가 감히 자신을 함부로 대하다니, 그녀는 반드시 주영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부탁이에요.” 박민정은 손을 뻗어 유남우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도와줘요. 네?”박민정의 간절한 애원이었지만 유남우는 난감한 얼굴로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돼. 난 네가 걱정돼서 안심할 수가 없어.”박민정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하지만 저는 이 일이 정말 필요해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왜 꼭 떠나야 하는 거예요? 그냥 오빠 형 문제잖아요. 그걸 가지고 저를 강요할 순 없잖아요?”유남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만하자. 알겠어. 회사 문제는 정리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그 뒤엔 같이 떠날 거야.”박민정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지난 1년간 그녀는 모든 걸 유남우에게 맞춰왔다.그를 사랑했으니까.하지만 겨우 이 작은 부탁조차 들어주지 않다니.박민정이 말을 잃고 침묵하자 유남우는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눈치채고 달래듯 말했다.“화내지 마. 다른 곳으로 가도 네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이 원래는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기침 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왜 이렇게 심하게 기침해요? 혹시 병이 재발한 거 아니에요?”유남우는 그
박민정은 처음으로 유남우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유남우를 부축하며 유남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저기요, 형이라는 사람은 원래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빠가 몸이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어떻게 오빠를 때릴 수 있어요? 게다가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체면 하나 세워주지 않고요.”박민정은 이렇게 지나치게 차가운 형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꾸짖음에 유남준은 마치 목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빠, 우리 그냥 가요.”박민정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남우에게 말했다.“그래.”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유남준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순간적으로 막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예전에 자신만을 사랑하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를 이렇게 따뜻하게 대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한편 최 사장의 정보를 모두 조사한 서다희는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과 대표님이 함께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그는 막 부르려던 찰나, 대표님이 방에서 지친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고 멈췄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서다희는 한 걸음씩 유남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젯밤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성은 최씨라고 하더군요. 본토에서 활동하는 무역상입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남준이 고개를 들었다.“뭐 해야 할지는 알겠지?”“네.” 서다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사람을 붙여서 민정이와 유남우를 따라가게 해.”“유... 유남우 도련님이요?”서다희는 놀랐고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아까 대표님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 동생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이 왜 유남우와 함께 떠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더는 묻지 않고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은 유남우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내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많이 아프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그러나 유남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
유남준은 유남우가 방에 들어오는 걸 보고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의 눈엔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유남우, 나한테 설명할 건 없나?”유남우는 여기에 유남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러니 어젯밤, 박민정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유남준이란 말인가?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박민정은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두 사람의 외모가 이렇게 똑같은데, 왜 유남우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민정아, 먼저 가서 쉬어. 내가 조금 있다가 갈게.”“알겠어요.”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남준은 단호히 말했다.“안 돼. 민정이는 아무데도 못 가.”겨우 다시 찾은 박민정을 그냥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이 말을 들은 유남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옆 방에서 잠깐 쉬고 있어.”“좋아요.” 박민정은 유남우의 말대로 옆 방으로 이동했다.그녀가 떠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유남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민정이가 실종된 게 네가 한 짓이었어?”이젠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유남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민정이는 원래부터 내 사람이었어.”이 뻔뻔스러운 말에 유남준은 주먹을 쥐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그런데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그 질문에 유남우는 오히려 비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기억에서 지우는 법이지.”이어 그는 도발하듯 말했다.“형, 충고 하나 할게. 형 것이 아닌 건 억지로 붙잡아봤자 아무 소용없어.”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그 말을 너 자신에게 하는 게 맞겠지. 민정이는 내 아내야. 우리에겐 네 명의 아이도 있어. 그리고 너는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 네 자리로 돌아가서 네 인생이나 책임져!”그러나 유남우는 비웃으며 대꾸했다.“나랑 윤소현은 애초에 결혼한 사이가 아니야. 우린 결혼증명서도 없어. 그리고 그 애? 하하, 그건 내
박민정은 오늘의 유남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남... 남우 오빠...”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 속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그의 목구멍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쓰렸다.박민정이 손을 내리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 지금 뭐라고 불렀어? 남우 오빠?”그의 눈가는 점점 더 붉어졌다.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박민정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놀라 움찔했다.그리고 며칠 전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꿈속에서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도 지금처럼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난 유남우가 아니야. 난 유남준이야!”“너... 날 잊어버린 거야?”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쉰 듯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유남우가 아니라고?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똑같이 생겼단 말인가?박민정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스러웠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다시 물었다.“말해봐, 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왜 나를 잊었어? 왜 유남우만 기억하는 거지?’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와 분위기를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그가 진짜로 유남우가 아니라면...그녀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그리고 덧붙였다.“어젯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박민정은 몇 걸음 물러나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이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뻗은 다리로 그녀 앞으
“여보세요, 혹시 민정 씨 남자친구 되세요?” 주영리는 일부러 친절한 척하며 물었다.유남우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민정이의 핸드폰이 왜 당신에게 있죠? 누구시죠?”“아, 저는 민정 씨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예요. 오늘 야근하다가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 혹시 무슨 급한 일인가 해서 받았습니다.”주영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민정 씨가 부탁해서 전화하신 건가요?”“민정이가 집에 오지 않았어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유남우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다.박민정은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그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집에 안 갔다고요? 혹시 최 사장님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에요?”주영리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오늘 퇴근 후에도 우리 회사 고객인 최 사장님과 함께 있던데요. 제가 두 사람이 같이 나가는 걸 봤거든요.”그녀는 이리저리 돌려 말했는데 박민정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속셈이었다.“민정 씨가 말하지 않았나요? 전 다 얘기한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니... 혹시...”주영리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아니겠죠? 그래도 민정 씨는 그런 사람 같진 않은데요.”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영리가 노리는 속셈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그는 박민정을 믿었다.“그 최 사장이라는 분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어요?”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영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저 같은 작은 직원이 고객님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민정 씨는 워낙 예쁘고 사교적이니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이어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전에 민정 씨가 최 사장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우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전화를 끊
박민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최 사장의 손에서 벗어나 유남준에게 몸을 던졌다.그녀의 온기가 그의 품에 닿는 순간, 유남준은 깊은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온 몸에 힘이 풀린 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며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성채를 찾은 기분이었다.“두 분, 아는 사이인가요?”최 사장은 눈앞의 큰 키에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주춤했다. 그의 강렬한 아우라에 기가 눌려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남준은 품에 안긴 박민정을 다시 한번 꼭 안으며 현실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차가운 눈빛으로 최 사장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꺼져.”최 사장은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겁을 먹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떠나며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였어요.”비록 유남준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 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격을 알고 있던 최 사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박민정 같은 평범한 직원이 이런 남자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는 뒷모습이 초라하게 사라졌다.최 사장이 떠난 후, 유남준은 자신의 품에서 안도하며 깊이 잠든 박민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소중히 들어올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그는 그녀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다음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1년이었다.그는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박민정은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유남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아니면 또다시 그녀가 환영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다행히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끝에 또렷이 전해졌다. 그녀는 환상이 아니었고 진짜로 그의 앞에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서 이리로 와.”서다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급히 달려왔다. 방
지난번 춤을 추었을 때 박민정은 두꺼운 화장을 해서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하지만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 선명히 드러난 흉터를 보고 최 사장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들며 혀를 찼다.“참 안타깝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완벽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흠이 있네! 알았더라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최 사장은 미모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그는 수많은 미녀와 유명 인사들을 상대하며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말이 들려오는 동안 박민정은 오히려 얼굴의 흉터에 안도했다. ‘이 흉터 때문에 나를 포기해줬으면...’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너무나도 순진한 희망이었다.“하지만...” 최 사장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내려가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몸매는 정말 훌륭하군.”그는 탐욕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 했다.순간 박민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절대 이런 사람에게 내 몸을 내줄 순 없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렵게 입을 벌린 그녀는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순간적인 통증과 입 안에 퍼지는 쇠 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했다.통증 덕분에 여태 흐릿했던 그녀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마침내 눈을 떠낸 박민정은 모든 의지를 쏟아 최 사장을 힘껏 밀쳐냈다.최 사장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깼지?”박민정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꺼져! 아니면 내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최 사장은 그녀의 말에 비웃으며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하하하,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박민정은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느끼고 몸을 재빨리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최 사장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겼다.그녀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