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랑이 한 말을 듣고 박민정은 깨달았다. 전에 고영란이 왜 추경은이 고씨 가문으로 가는 것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행운을 빌어야겠네.”박민정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추경은은 셋째 도련님을 찾지 못하고 여자들 사이에서 자랑하고 있었다.그 여자 중 셋째 도련님의 인품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몰래 그녀를 비웃었는데 모르는 사람은 정말 그녀를 부러워했다.그중에는 추경은이 자랑하는 꼴을 못 봐주겠어서 셋째 도련님은 누구나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추경은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그 여자들과 같은 줄 알아? 나는 그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젊고 예뻐.”박민정은 이 말을 듣고서야 추경은도 셋째 도련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심지어 자신이 셋째 도련님의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여자들보다 낫다고 느꼈다.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참하게 죽는다.이렇게 보면 앞으로 추경은이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하는 수 없다. 모두 그녀가 자초한 일이니까.그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유씨 가문의 룰에 따르면 먼저 술을 따르고 그다음에 결혼식을 한다.윤소현과 유남우는 어른들에게 술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때 유씨 가문에서 누군가가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남준 형은 왜 안 왔어요? 형이 안 왔는데 술을 올리는 것은 격식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유씨 가문의 남자들은 누구든지 다 그룹 안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한다. 예전에는 유남준을 상대로 어떻게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그가 바보로 되고 눈도 멀었으니 한바탕 망신을 주고 싶었다. 그가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것임을 알아들은 유남우는 집사에게 말했다. “가서 형 모셔와.”집사는 어리둥절해졌다.옆에 있던 고영란도 표정이 안 좋았다. “남준이는 아직 아파서 나오기 불편할 거야.”“뭐가 불편해요? 남준이는 바보가 되었지만 유씨 가문 사람이고 남우의 사
같은 여자로서 윤소현은 홍주영이 유남준에 대한 감정이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윤소현이 그녀를 까발리지 않은 것은 그녀는 생긴 것도 별로고 꾸밀 줄도 모른다. 여성스러운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빽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여자는 자기의 상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유남우가 그녀를 좋아할 리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했다.이 말을 들은 홍주영은 윤소현에게 말했다. “업무상의 일입니다.”“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제가 더 알아야 하겠죠. 우리 정씨 가문은 호산 그룹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라는 거, 아시죠?”윤소현은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그녀는 말할 때, 계속 정수미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정수미가 와서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게 하려는 이 못된 사람을 혼내 주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말이다. 홍주영은 윤소현이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유남우를 쳐다보았다.“도련님.”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 사람들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유남우는 홍주영이 공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분명히 남이 들으면 안 되는 무슨 일이 생긴 거로 생각했다. “소현아, 금방 다녀올게.”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유남우가 가려 하자 윤소현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의 팔을 덥석 껴안았다.“안 돼요. 아무 데도 못 가요. 우린 곧 어른들께 술을 올려야 해요. 남우 씨가 가면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요?”윤소현은 아직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냥 지금 유남우와 홍주영이 가버리면 자신의 체면이 깎일 것으로 생각했다.정수미도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걸어왔다.“무슨 일이야?”그러자 윤소현이 바로 일렀다. “남우 씨 비서라는 사람이 어떻게 된 건지 남우 씨와 따로 나가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저한테는 말을 하지 않고요. 이미 시간이 늦었고 이따가 어른들께 술을 대접해야 하는데 때를 놓치면 안 좋을 거로 생각했어요.”정수미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
결혼식이 시작되었다.보디가드 한 명이 유석진의 곁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추어 무슨 말을 했다. 그러자 유석진은 흥분해서 물었다.“정말?”“확실합니다.”보디가드가 말했다.주름이 가득한 유석진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쯧쯧. 유남우가 유남준과 같은 독한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지금 어르신께 말씀드릴까요?”보디가드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유석진은 손사래를 쳤다. “급할 것 없어. 오늘은 유남우의 결혼식 날이잖아. 그래도 내가 엄연히 큰아버지인데 그렇게까지 나쁘게 굴 수는 없지. 하하하.”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유남우를 어떻게 처리할지 속으로 생각했다.방금 보디가드가 알려준 건 IM 그룹이 유남우와 윤소현이 결혼하는 틈을 타 호산 그룹의 핵심 프로젝트를 많이 인수했다는 소식이었다.게다가 호산 그룹의 오래된 고객들도 파갔다. 그 고객들과 프로젝트들은 호산 그룹 주주들의 수익과 엄밀히 관련되어 있다. 유남우가 지금 정수미의 빽이 있더라 해도 호산 그룹에서의 자리를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유석진은 호산 그룹을 인수한 후 큰아들을 돌아오게 할 생각이었다.그때가 되면 호산 그룹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생각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유남준이 한 짓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결혼식 현장에서는 지금 윤소현과 유남우가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틀었다.그런데 갑자기 스크린에 양도된 프로젝트와 빼앗기는 계약서의 사진으로 변했다. 그리고 호산 그룹의 급락한 주식을 캡처한 사진도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보지만 호산 그룹의 주주는 한눈에 알아보았다.“이건 우리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 아니야? 어떻게 된 일이야?”“장난해? 지금 우리 프로젝트 다 뺏긴 거야?”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박민정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그녀의 휴대폰에 지금 메시지가 한가득 와있었다. 열어보니 회사 단톡방이었다.[우리 허산 그룹 망하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많은 협력업체가 투자를 철회한 거야?][몰라요. 오늘이 대
시종일관 덤덤한 모습으로 유남우는 오히려 애간장이 타들어 가고 있는 홍주영을 위로했다.“괜찮아. 좀 쉬고 있어.”유남우의 비서로서 이제야 소식을 알게 된 홍주영은 쉴 수도 쉬어서도 안 되는 입장이었다.홍주영에 대한 유남우의 마음이 각별한 것으로 보이자 윤소현은 더더욱 언짢아했다.“남우 씨, 지금 이 상황에서 홍 비서 편드는 거예요? 홍 비서만 제때 얘기하고 보고했더라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리는 없었잖아요.”그 말을 듣고서 유남우는 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순간 윤소현은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떨게 되었다.다정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는 유남우이지만, 그러한 눈빛을 마주하게 된 순간 숨통이 턱 막히고 말았다.눈빛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면, 윤소현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고영란은 직원에게 바로 동영상부터 끄라고 했다.이윽고 고영란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여러분, 잠깐 소란이 있었던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하지만 하객 중 회사 주주들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 회사 프로젝트들 아닙니까? 근데 왜 다 빼앗기게 된 거죠? 이미 알고 있었던 일입니까?”“우리 주주들 바보 아니에요. 오늘 이 일에 대해서 보다 분명한 답변 부탁드립니다.”“남준이 자리에 남우를 몰래 앉혀 놓고 우리랑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잊은 거예요? 남우가 남준이보다 잘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거죠?”“회사 수익이 점점 바닥을 치고 있는 거 아시죠? 이게 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자신의 이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이라 주주들은 꺼리는 거 하나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연이어 날아오는 펙트 폭격에 고영란은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어느덧 후회하는 감정도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남준이만 대표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것인데...’사태가 이 지경으로 번지자 유석진은 마음속으로 폭죽을 터뜨
주주들이 한사코 물고 늘어지자 보다 못한 정수미도 앞으로 나서게 되었다.“주주 여러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씨 가문이 주주로 들어온 이상 절대 여러분을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요.”유석진은 말뿐이지만, 정수미는 정말로 호산 그룹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서울에서 악랄하고 독하기도 명성이 자자한 정수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따라서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고 있던 주주들은 동시에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고영란은 상황이 어느 정도 완화되자 결혼식을 계속 진행했다.오늘과 같은 광경은 인생에서 처음이라 함미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동하는 박예찬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갔다.“동하야.”뒤늦게 정신을 차리게 된 함미현은 동하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아이를 찾아 나섰다.한편, 동하는 박예찬을 박윤우로 착각하고 쪼르르 달려와 말을 걸었다.“윤우 형, 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박예찬은 덤덤한 모습으로 동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난 윤우가 아니라 윤우의 쌍둥이 형인 박예찬이라고 해.”순간 동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박윤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나 박윤우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으니 말이다.어린아이에게는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동하를 찾아 나선 함미현은 곧바로 두 아이를 보게 되었다.함미현 역시 박예찬을 보자마자 박윤우인 줄 알았다.‘아닌데... 윤우는 오늘 화동으로 서고 있잖아...’그렇게 모자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박민정과 조하랑이 다가왔다.“동하야, 동하가 잘못 본 거야. 얘는 윤우가 아니라 예찬이 형이야.”“예찬이는 윤우랑 쌍둥이라 똑같이 생긴 거야.”그 말을 듣고서 동하는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몰랐는지 어슴푸레한 두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함미현은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두 아이 모두 멋지고 귀엽고 영특하니 말이다.박민정은 박예찬에게 잠깐 동하랑 같이 놀아주라고 했다.이윽고 함미현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미
간신히 주주들을 달래 놓자마자 빅뉴스가 터지고 말았다.기사 헤드 라인에는 유남우가 권씨 가문 두 형제와 연합하여 호산 그룹의 많은 재산을 옮긴 것으로 적혀 있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만약 저 기사가 사실이라면... 유 대표, 이건 범죄야!”“정말로 우리 돈을 몰래 옮긴 거야?”“...”주주들은 마침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평범하게 흘러갈 줄 알았던 결혼식에서 이렇게 많은 일이 터질 것으로 생각지도 못한 고영란이다.주주들은 유남우에게 해답을 요구하고 있었다.누군가가 일부러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유남우는 알고 있었다.다만 요즘 경계하지 않았을 뿐이고 상대가 누군지도 전혀 모른다.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크게 번지자 윤소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남우 씨, 이게 다 사실이에요?”유남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주주를 포함한 하객들에게 말했다.“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모든 걸 지켜본 박민정 역시 덩달아 조급해졌다.‘누굴까? 왜 남우 씨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걸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걸까?’하지만 주주들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다.“유 대표, 지금 당장 설명하도록 해! 아니면 결혼이고 뭐고 나 그런 거 몰라.”“맞아!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 다른 대표 앉힐 거야!”“...”고영란과 유씨 가문의 친척들만 제외하고 모두 좋은 구경이라도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고영란도 어찌 할 수 없었다.설령 고씨 가문을 입 밖으로 낸다고 하더라도 그 어떠한 역할도 일으키지 못할 것 같았다.정수미 역시 나서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재산을 몰래 옮겼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게 된다면, 그건 바로 감옥행이나 다름없는 일이다.유남우를 사지로 몰고 있던 그 찰나, 홀 대문이 열리면서 경호원 복장을 한 사람들 사이로 유남준이 걸어 나왔다.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유남준에게 쏠리게 되었다.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채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결혼식장에 나타난 유남준.유남준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오랜 시간 호산 그룹에서 일해 온 주주가 유남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유 대표님, 괜찮으셔서 참 다행입니다. 이제 그만 돌아오시기 바랍니다.”“그래요. 대표님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단 말이에요.”“유 대표님, 사실이 그러합니다. 호산 그룹은 대표님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듭니다.”“...”주주들의 말을 듣게 된 유석진은 얼굴이 점점 험상궂어졌다.‘미친 거 아니야? 유남준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내가 이렇게 버젓이 서 있는데도?’유남준의 윗사람으로서 유석진은 그런 말들이 거북하기만 했다.지금 가장 황당하고 다급한 사람은 윤소현일 것이다.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으로서 결혼식이 망친 건 고사하고 자기 남편의 자리를 대체하려고 하는 사람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다들 똑바로 알고 계세요! 남우 씨가 아니면 우리 엄마는 절대 호산 그룹에 그 어떠한 지지도 하지 않을 거예요!”윤소현은 발끈하며 말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그 말을 듣게 된 정수미는 윤소현이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껏 펼쳐진 모든 상황으로 보아 유남우에게 불리한 국면인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만약 이러한 시국에서 협박하는 말까지 서슴지 않게 한다면 유남우에게 화만 안겨줄 것이다.“윤소현 씨, 그 말은 지엔 그룹의 지지가 없다면 우리 호산 그룹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까?”“우리 호산 그룹, 지엔 그룹보다 못난 게 없어요. 지엔 그룹의 투자금을 받게 된다면 호산 그룹에 있어서는 금상첨화일 뿐이에요. 그 말인즉슨, 지엔 그룹의 투자금이 호산 그룹의 생사를 좌우지할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에요.”“호산 그룹의 생사는 결정할 수 없지만, 윤소현 씨 남편이 앞으로 호산 그룹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지는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네요.”주주들은 윤소현의 말을 듣고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더 이상 윤소현의 체면을 돌보지도 않고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오랜 시간 동안 상인으로 일해 온 주주들이
“그리고 유남준 시력은 대체 언제 회복한 거야?”궁금증이 폭발한 조하랑이다.박민정은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대충 둘러댔다.“말하자면 길어. 궁금하면 인우 씨한테 물어봐봐.”“인우 씨도 아는 일이야?”조하랑은 더더욱 어리둥절해졌다.“대충 알 거야.”박민정은 지금 머릿속이 제법 복잡하다.‘남준 씨 대체 왜 저러는 걸까?’동생이 망쳐놓은 걸 수습하고 있는 형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동생을 미친 듯이 깎아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윤소현은 어느새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시집오자마자 이런 치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말이다.‘젠장!’만약 정수미가 계속 눈짓을 보내고 참으라고 한 게 아니었다면 윤소현은 이미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하지만 유남우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서류를 건네받으면서 인사까지 했다.“형, 고마워.”평온한 모습으로 뱉은 말이었지만, 살기가 가득한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그렇다, 유남우는 아주 철저하게 지고 말았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유남준은 유남우에게 길이길이 남을 교훈을 남겨 주었다.서다희는 유남우에게 서류를 건네주고 나서 나지막한 소리로 유남우의 귓가에 속삭였다.“남우 도련님, 저희 대표님께서 이미 봐주신 겁니다. 도련님께서 대표님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던 건 이로써 끝마치겠으나 앞으로 부디 잠자코 지내시길 바랍니다.”필경 유남우는 유남준을 완전히 헤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유남준은 자기 동생을 직접 죽일 수도 없었다.하지만 이번 교훈은 직접 죽이는 것보다 유남우에게 더욱 치명적일 것이라는 점을 유남준은 믿고 있었다.유남우의 쌍둥이 형으로서 유남준은 동생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아 하고 덤덤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지만, 그 누구도 보다도 존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남우라는 것을.모든 걸 마치고 서다희는 다시 유남준의 곁으로 돌아왔다.결혼식은 계속 진행되었지만,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