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가드가 공손한 자세를 하고 대답했다. “총 128마리를 키우는데 별로 신경은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 떠들어서 고소하는 사람도 많은 모양입니다.”“그렇게 무책임하다고? 그냥 개 먹이로 줘.”유남준이 무심코 말했다.“네.”보디가드는 즉시 유성혁을 향해 걸어갔다.유성혁은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남준아,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내가 진짜 파렴치한 놈이야. 앞으로 제수씨한테 진짜 잘할게.”그는 말하면서 자신의 뺨을 때렸다.그는 유남준이 장난을 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난번에 얼어 죽을 뻔했을 때도 유명훈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이번에는 자기도 지금 어디로 끌려왔는지 모르는 상황이라 유명훈이 구하러 오는 것을 바라지 못한다.박민정도 유남준이 이런 수단을 생각해 낼 줄은 몰랐다. 그녀는 가서 말리려고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유성혁 같은 파렴치한 사람한테 마음이 약해질 필요가 없었다.유남준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유성혁은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그는 완전히 기절한 상태로 떠났다.유성혁을 처리한 후, 유남준은 부하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는 아직 유남우가 자신이 병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보디가드들이 떠난 후 방 안에는 박민정과 유남준 두 사람만 남았다.그는 박민정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볼이 불룩해서 먹는 모습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볼을 만졌다.박민정은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어서 뒤로 피했다. “뭐에요? 또 이러기에요?”유남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바로 손을 뗐다.역시 아직 자기가 싫어서 얼굴 한 번 만지는 것도 안 되는 거로 생각했다. “어제 유성혁을 혼내주겠다고 한 게 일자리를 잃게 하고 이름을 더럽히는 거였어?”유남준은 평소와 같이 침착한 모습을 되찾았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죠.”“그래도 다시는 이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마.”유남준은
서다희도 듣자니 머리가 아파 났다. 여자의 마음은 참 헤아리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해하면…“대표님, 사모님이 대표님한테 무슨 죄송한 일이라도 하셨나요?”그리고 바로 저쪽에서 전화를 끊었다.서다희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고 나서 어이없어했다.유남준이 지금 마음이 너무 여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 말해도 안 들을 거면서 왜 자기한테 묻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서다희가 막 잠을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자 한 통이 왔다. 누군가가 그에게 2억을 송금했다는 문자였다. “장난해? 사기인가?”그가 혼잣말할 때, 방성원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네 여자친구에게 물어봐. 설인하란 내 딸은 어떻게 되었는지, 2억은 팁이야.”서다희는 금방 민수아와 전화를 다 했는데 돈이 들어온 것을 보고 바로 다시 민수아를 찾아갔다.계속 설인하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다.설인하는 요즘 잘 지내고 있고 몸도 빨리 회복되었고 아이도 건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민수아는 의아해했다. “왜 그렇게 인하 씨랑 그 사람 딸한테 관심이 많은 거야?”“그냥 물어보는 거지. 자기야, 우리 설날 때 결혼하자. 나도 빨리 딸이 있었으면 좋겠어.”“누가 낳아준대?”민수아는 수줍어하며 전화를 끊었다.방성원은 서다희가 전화하는 것을 자정까지 기다려서야 설인하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지금 박민정이 옛 저택에 갔으니 설인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무서웠다. 그는 지금 설인하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른다.박민정은 박씨 가문 옛 저택에 살지 않지만 자기 전에 영상통화를 한다.설인하는 이미 마음대로 걸을 수 있고 몸도 회복되었다. 가끔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일에 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그녀는 지금 일에 매우 관심이 있다. 산후조리를 잘하지 못하면 후유증을 남길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지금 당장 나가서 일을 찾고 싶어한다.“인하 씨,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요. 정말 일자리가 필요하면 서연이 일을 도와도 됐고요.”박
함미현은 자기 남편을 생각했다. 정수미의 도움으로 평범한 프로그래머에서 회사 사장이 되었다.정수미가 말했다. “미현아, 너도 출근하고 싶으면 엄마가 회사 하나 맡겨줄게.”이건 정말 함미현에게 있어서 너무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윤소현이 너무 인색해서 아이를 돌본다는 이유로 정수미를 거절하라고 했다.함미현은 윤소현이 너무 미웠다. 그녀가 자신의 약점을 잡지 않았다면 자기는 정수미의 친딸이 될 것이다. 그러면 회사 하나는 물론, 정씨 가문도 자기 것이 되는 셈이다.“엄마, 여기 엄청나게 커. 공원 같아. 심지어 공원보다 더 예뻐.”동하는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그의 세상 물정 모르는 모습을 보고 도우미들은 하나같이 눈총을 쏘았다. 이들의 경멸하는 시선을 단번에 본 정수미는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너희들은 얼마나 잘났는데? 동하는 나의 친 외손자야. 너희가 내 외손자를 무시할 자격이 있어?”그들은 좀 당황했다. 그들은 이 아이가 정수미 부하의 아이인 줄 알았다. 정수미와 조금도 닮지 않았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정 대표님.”이들은 바로 정수미에게 사과했다.고영란이 전에 당부한 적이 있다. 절대 정씨 가문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유씨 가문의 시중을 드는 것보다도 신경 써야 한다고 했었다.정수미는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집사는 어디 있어?”곧 집사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정 대표님.”“이 사람들 너무 거슬려.”“네, 바로 내보내겠습니다.”집사는 도우미들처럼 뭐를 모르지 않는다.1분도 안 돼서 방금 동하를 업신여기던 사람들을 해고했다. 함미현의 손을 잡고 있던 동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엄마, 외할머니께서 왜 화를 내시는 거야?”함미현은 어렸을 때부터 억울함을 참았어야 했다. 그녀는 이제야 강한 엄마가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요즘 그녀는 친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정씨 가문에서 너무 잘 지낸 탓인지 친엄마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도 그리 신경 씨지 않았다.정수미는 동하한
“사돈, 이분이 금방 만난 친딸 맞죠? 정말 닮았네요.”고영란이 본의 아니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정수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전에 그녀는 원수가 찾아와 복수할까 봐 무서워서 성형했었다. 함미현은 지금의 자신을 닮지 않는 게 맞다.“미현아, 이분은 영란 이모야. 네 언니 미래의 시어머니셔.”함미현은 정수미의 소개로 고영란을 바라보았다. 비록 오십이 넘었지만 보기에 겨우 삼사십 세밖에 안 돼 보였다. 매우 예쁘게 꾸며서 그녀 옆에 서 있는 자신이 마치 미운 오리 새끼 같았다.“안녕하세요.”그녀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리고 동하를 불렀다. “동하야, 할머니라고 불러야지.”동하는 낯선 곳에 와서 아직 적응되지 않았다. 그는 고영란을 쳐다보다가 민망해서 엄마 뒤에 숨었다.정수미가 말했다. “제 외손자예요. 딸과 함께 금방 제 곁에 왔어요. 아직 낯가림이 좀 심한데 신경 쓰지 마세요.”“그럴 리가요.”고영란은 부드럽게 웃었다.그러자 박민정이 앞으로 나섰다. “정 대표님, 미현 씨, 제가 사람을 시켜서 쉬는 곳까지 안내하라고 했어요. 방은 다 마련됐으니 좀 쉬었다가 우리 엄마와 결혼 얘기를 하시는 게 어때요?”정수미는 박민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의 두 딸이 모두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는 박민정을 무시하고 고영란한테 말했다. “그럼 가서 좀 쉴게요.”“네, 그러세요.”몇 사람이 떠나자 고영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름이 아니라, 정수미의 아우라가 너무 강해서 그녀가 눌리는 느낌이었다.하긴 고영란은 몇 년 동안 쇼핑몰을 운영하지 않았지만 정수미는 지금 지엔 그룹의 회장이니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꽤 컸다.“민정아, 어떻게 함미현한테 미움을 산 거야? 단지 지난번 그 작은 일뿐이야?”고영란은 좀 의아해했다. 정수미는 지난번의 작은 오해에 뒤끝이 있는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박민정은 당연히 그녀에게 윤소현 책임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 대표와 오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윤소현은 계산해보았다. 정씨 가문의 거액 혼수에 아버지 윤석후한테 가서 좀 더 달라고 하면 그녀는 가슴을 쭉 펴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모든 얘기를 끝나고 윤소현은 함미현이랑 불러서 함께 유씨 가문을 둘러보자고 제안했다.“그래, 너희들 가서 둘러 봐. 나는 좀 쉬어야겠어.”정수미는 윤소현이 함미현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윤소현과 함미현은 친자매와 다름없이 친하기 때문이다. 함미현도 자기한테 윤소현의 미담을 자주 꺼낸다.밖에 도착하자마자 윤소현의 본성이 드러났다. “함미현, 네 아들을 다른 사람보고 잠시 돌보라고 해. 너에게 할 얘기가 있어.”“알겠어요.”함미현은 마치 그녀의 종과 같았다.그녀는 동하를 달래서 도우미를 따라 놀라고 한 다음 윤소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함미현, 너도 알다시피 난 곧 결혼해. 근데 박민정이 너무 거슬려. 요 며칠 유씨 가문에서 있는데 박민정도 있어. 엄마 앞에서 박민정에 대한 험담을 많이 해야겠어, 알겠어?”이 말을 들은 함미현은 잠시 망설였다.“소현 씨,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아무 이유 없이 민정 씨의 험담을 할 수도 없잖아요. 더군다나 우리도 알다시피 민정 씨야말로...”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소현은 손을 들어 뺨을 한 대 갈겼다.“너 죽고 싶어?”함미현은 맞아서 얼굴이 화끈했다.윤소현이 차갑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데, 엄마는 주변 사람들한테만 마음이 약하고 말이 잘 통해. 그녀를 배신하거나 속인 사람은 죽는 길밖에 없어.”함미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죄송합니다.”“앞으로 그런 말 좀 하지 마, 짜증 나게.”윤소현은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박민정의 험담을 하기 싫으면 지어내서 말해. 이런 건 좀 혼자 알아서 하고. 일일이 가르치게 하지 마.”“네.”함미현은 고개를 숙여 사나운 눈빛을 감추었다.그녀는 지금 윤소현이 그냥 죽기를 바랬다. 그러면 자신은 정수미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들킬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