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우는 그쪽으로 보았다. 알고 보니 또 유지훈이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너무하네.”박윤우는 유지훈이 괴롭히는 아이를 보았는데 유지훈보다 훨씬 마르고 연약한 아이였다.계속 이렇게 때리면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는 라이브를 끄고는 유지훈을 향해 걸어갔다.“유지훈, 뭐 하는 거야?”익숙한 목소리에 유지훈은 어리둥절했다.두 아이를 돌보는 도우미는 박윤우를 보니 더욱 머리가 아팠다. 박윤우와 유지훈도 유난히 갈등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만약 이 세 아이가 싸운다면 정말 난장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지훈은 동하를 풀어주고 대답했다. “봤잖아, 내가 얘를 때리고 있는데? 이 울보가 방금 나를 째려봤다고.” 지금의 유지훈은 박예찬의 말을 잘 들어야 해서 당연히 박윤우한테도 함부로 할 수 없다.박윤우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너 미쳤지? 널 한번 봤다고 지금 이렇게 때리는 거야?”유지훈은 말문이 막혔다. “때리면 안 되는 건가?”“안 되는 게 아니라 너무 어처구니없다는 거지. 널 째려보는 건지 아니면 원래 눈을 그렇게 뜨는 건지 네가 어떻게 알아?”박윤우가 또 말했다.그의 말을 듣고 유지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동하는 누군가가 와서 자기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윤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박윤우가 유지훈보다 더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피부는 하얗고 까만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는데 마치 동화에서 나오는 어린 왕자 같았다.그는 구원자를 만난 듯 박윤우의 등 뒤로 숨었다.“나를 구해준 것을 꼭 외할머니께 말씀 드릴 거야. 외할머니께서 분명히 큰 상을 내려주실 거야.”박윤우는 그에게 괜찮다고 눈짓을 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봤으니 됐어. 난 절대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아.”그리고 그는 또 유지훈에게 말했다. “유지훈, 네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우리 형한테 말해볼까?”박예찬의 이름을 듣고 유지훈은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됐어. 다시
‘윤우 형?’순간 책임감이 온몸으로 가득 차오른 박윤우이다.박윤우는 동하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형인 박예찬의 말투를 흉내며 입을 열었다.“그래. 이제야 사나이답네! 사나이한테 그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동하를 돌보던 도우미는 그 말을 듣고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박윤우에게 이런 귀여운 모습이 있을 줄 몰랐다면서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오늘 윤우가 있어서 다행이네.’오전 내내 동하는 껌딱지처럼 박윤우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박윤우를 ‘보스’로 생각하면서 박윤우의 말이라면 그게 뭐든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한참 놀고 나서야 동하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지기 시작한 박윤우가 물었다.“동하야, 넌 유씨 가문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누구 친척이야?”동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굼뜨며 대답했다.“우리 외할머니 따라서 온 거야.”“네 외할머니는 누군데?”동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입을 열었다.“다들 ‘정 대표님’이라고 부르던데.”‘정 대표님?’순간 윤소현의 엄마가 떠오른 박윤우이다.‘형을 납치했었던 그 여자 엄마?’전에 박예찬에게서 윤소현이 자기를 납치했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었다.‘뭐야? 그럼, 내가 원수를 도운 셈이 된 거야?’‘원수의 외손자를 내가 구했다고?’박윤우는 지금 동하가 유지훈에게 맞든 말든 상관하지 말았어야 한다면서 내심 후회하고 있다.갑자기 말이 없어진 박윤우를 바라보면서 동하는 의문만 들었다.“왜 그래?”“아니야.”순간 전과 상반되는 쌀쌀한 모습을 보이면서 박윤우는 다시 덧붙였다.“그만 가 볼게. 시간도 많이 늦었고 너랑 이렇게 놀 시간도 없어.”이윽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박윤우는 떠났다.동하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바로 일어서서 뒤따라 나섰다.“윤우 형, 우리 조금만 더 놀고 가자.”“아니면 내가 형네 집으로 갈게. 그러면 안 돼?”멋있고 의리도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된 동하는 이대로 박윤우와 헤어지기 아쉬웠다.박윤우는 걸음을 멈추고서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안 돼. 네 외할머
박윤우 이름 석 자를 듣게 되는 순간 정수미는 확신이 들었다.동하를 때린 사람이 바로 박윤우라는 것을.이윽고 정수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고영란을 바라보면서 물었다.“사돈, 박윤우가 누구죠?”옆에 서 있던 함미현은 일찍이 윤소현에게서 박윤우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엄마, 박윤우는 박민정 씨 아들일 거예요.”‘박민정? 또 걔야?’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정수미는 씩씩거리면서 고영란에게 말했다.“손님 대접이 참으로 특이하네요! 사돈, 설명 좀 해주시죠!”고영란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슨 오해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박윤우는 워낙 몸이 좋지 않고 먼저 나서서 남을 때릴 아이도 아니니 말이다.“오해요? 우리 동하를 보고서도 오해라는 말이 나오세요? 우리 동하 얼굴 좀 보시고 말씀하시라고요!”차라리 자기가 맞았으면 하는 정수미는 동하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바로 비서에게 의사까지 불러오라고 했다.어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동하는 그들이 오해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설명하려고 했었다.그러나 바로 그때 정수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돈, 박윤우 좀 데리고 나오시죠. 우리 동하한테 직접 사과하라고 하세요.”“사과하지 않으면 소현이랑 남우가 파혼하는 건 물론이고 앞으로 우리 두 가문은 원수 사이가 될 것입니다!”함미현과 동하가 정수미의 전부이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정수미는 유씨 가문 사람에게 미움을 사는 것 따위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갑작스러운 상황이 고영란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도우미에게 눈짓을 보냈다.“윤우 데리고 와. 민정이도 같이.”자기 손자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고영란이지만, 그래도 똑똑히 물어보고 싶었다.같은 시각, 박민정은 방에서 쉬고 있었고 박윤우는 바로 옆에서 장난감으로 놀고 있었다.급하게 달려온 도우미가 다급한 목소리로 박민정에게 말했다.“큰 사모님, 큰일 났습니다.”“정 대표님께서 윤우 도련님이 정 대표님 외손자인 동하 군을 때렸다면서 지금 언성을 높이고 계십니다.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윤소현을 바라보면서 동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윤소현은 그 모습을 보고서 함미현에게 사인을 보냈다.함미현 역시 동하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앞서 윤소현이 협박한 바가 있어서 일단은 윤소현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동하야,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도 돼.”“엄마도 있고 이모도 있고 외할머니도 지금 동하 곁에 있잖아.”“그 누구도 우리 동하 다치게 할 수 없단 말이야.”지금 가장 애가 타는 사람은 동하일 것이다.아직 어린아이라 동하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 발만 동동 굴리게 되었다.“엄마, 윤우 형은 나 때린 적 없어. 정말이야...”윤소현은 동하가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다.절호의 기회 앞에서 박윤우의 편을 들면서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엄마, 제가 보기엔 동하가 많이 놀란 것 같아요. 일단은 동하를 방으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미현아, 동하 데리고 먼저 방으로 가.”함미현이 동하를 데리고 떠나려고 하자, 박민정이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일단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밝히는 게 좋지 않겠어요?”자기 아들이 억울하게 남에게 당하는 꼴을 절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함미현은 그대로 제자리에 멈춰 섰고 박민정은 동하와 눈높이를 맞추고 나서 물었다.“동하야, 우리 윤우가 너 때린 거 아니라고 했었지? 그럼, 얼굴이랑 몸에 난 상처들은 누가 그런 거야?”유지훈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동하는 한참이나 머리를 긁적였다.“윤우 형은 아니에요. 저 때린 사람은 엄청 나쁜 아이였어요.”박민정이 부드러운 모습으로 묻자, 동하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서 단숨에 말했다.화가 잔뜩 나 있던 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서 의문이 잔뜩 한 모습으로 물었다.“엄청 나쁜 아이? 그게 누군데?”바로 그때 박윤우가 입을 열었다.“유지훈이에요.”유지훈 이름 석 자에 윤소현은 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다.박윤우의 말을 듣고 동하도 고개
돌발 상황에 윤소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망설일 틈도 없이 바로 최현아에게 소식을 미리 알렸다.지금 윤소현과 최현아는 같은 배를 탄 사람이라, 서로 돕고 지내야 하는 상황이다.따라서 유지훈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떠난 정수미를 보고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정수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윤소현이다.끔찍이도 아끼는 동하가 유지훈에게 맞은 이상 정수미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한편, 유지훈은 한창 점심을 먹고 있었다.배불리 먹고 난 뒤 유지훈은 도우미에게 이러저러한 일을 시키면서 왕 놀이를 했다.만약 할아버지께서 계시면 그런 유지훈을 혼내줄 수 있겠지만, 친구분을 만나시러 나간 바람에 왕 놀이가 성사된 것이었다.“여기 맞아요?”바로 그때 문밖에서 정수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영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르신께서 가장 아끼시는 증손자예요. 지금까지 함께 생활할 정도로요.”‘어쩐지 버릇없다 했어! 감히 손님으로 온 우리 동하한테 손을 대다니!’‘내가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고 말 거야!’“누구야?”이 시간에 집으로 올 사람이 없다면서 유지훈은 어리둥절했다.도우미는 고영란과 정수미가 왔다고 유지훈에게 아직 알리지도 못했는데,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들어서자마자 정수미는 건방진 모습으로 어느 한 도우미의 등 위에 타고 있는 유지훈을 보게 되었다.“자, 누가 왔는지 가보자! 앞으로 기어가 봐!”유지훈은 도우미를 말로 삼아 지시하고 있었다.고영란과 낯설기만 한 정수미를 보게 된 순간 유지훈은 다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할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증조할아버지 뵈러 오신 거예요?”고영란은 엄격한 모습으로 언성을 높였다.“유지훈, 당장 내려와!”“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여기 이 할머니랑 같이 온 거야.”유지훈은 마지못해 도우미의 등에서 내려왔다.“무슨 일인데요?”“너 오늘 무슨 나쁜 일 하지 않았어?”고영란이 물었다.누군가에게 손찌검한 것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할 리가 없는 유지훈이다.유지
지금껏 건방지게 자라온 유지훈은 어른에게 맞는 것이 처음이었다.“아, 감히 날 때려? 엄마! 이 할망구가 저 때렸어요!”정수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속 몇 번 더 때렸다.말리고 싶어도 그 틈을 주지 않은 정수미이다.물론 최현아는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 같았어도 말릴 수가 없었다.자기가 나섬으로 하여 작은 일이 큰일로 변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정수미에게 맞은 유지훈은 대성통곡을 했고 그제야 이 세상 모든 건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인생 진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자기 부모님도 천하무적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정수미가 아주 호되게 유지훈을 혼냈다는 것을 박민정은 도우미를 통해 듣게 되었다.엉엉 울면서 동하에게 사과했다는 것까지 말이다.소식을 듣고 유명훈도 급히 돌아왔으나, 유지훈이 정씨 가문의 외손자를 때렸다는 것을 듣고 감히 토씨 하나도 뱉지 못했다.박민정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역시나 권력이 제일이구나...’만약 자기도 정수미처럼 대단하다면 감히 그 누구도 박윤우와 박예찬을 괴롭힐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집으로 돌아온 고영란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내내 혀를 찼다.“정 대표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 유지훈을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알아? 앞으로 우리 윤우랑 동하 사이에 절대 그 어떠한 모순도 없게 조심해야겠어.”고영란까지 그렇게 말하자, 박민정은 지금 이 자리까지 정수미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더욱더 궁금해졌다.“네, 그럴게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와서 동하의 몸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다행히도 외상 외에는 이상이 없었다.함미현과 정수미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괜찮으면 됐어.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면 바로 외할머니한테 말해.”정수미의 말에 동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동하는 주위를 살펴보더니 물었다.“윤우 형은요?”“돌아간 거 같은데, 왜 그래?”정수미는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우 형이랑 놀고 싶은데... 아
어른들은 박윤우의 말에 다소 난처한 모습을 드러냈다.어린아이가 어른답게 말하는 것을 보고 정수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하지만 그런 아들의 모습에 이미 익숙하기 짝이 없는 박민정이다.박윤우는 어릴 적부터 드라마를 애청했으니 말이다.전에는 은정숙과 함께 지금은 민수아, 진서연과 함께.박윤우가 자기를 용서하려고 하지 않자, 동하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함미현은 아들이 우는 것을 보게 되자,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윤우야, 그만 좀 용서해 주면 안 돼? 동하도 처음부터 설명하고 싶었는데,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서 바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뿐이야.”정수미도 맞장구를 쳤다.“그래. 너만 우리 동하 용서해 준다면, 할머니가 윤우 소원 하나 들어줄게. 그게 뭐든 다 들어줄게.”순간, 박윤우는 두 눈이 번쩍 뜨였다.“정말이에요? 뭐든 다 들어줄 거예요?”어린아이의 소원은 장난감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심 확신하고 있던 정수미이다.“그럼, 뭐든 다 들어줄 테니, 말만 해.”“우리 엄마한테 너무 막 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제 소원은 할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사과하는 거예요.”박윤우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아직 너무 어려서 엄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하지만 이런 절호의 찬스가 주어졌으니 당연히 잘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정수미는 박윤우의 소원이 박민정에게 사과하는 것일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박민정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색함이 가득했다.두 딸이 박민정과 모순이 있는 건 사실이고 자기 역시 박민정을 싫어하고 있다.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짜고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박민정에게 사과하는 건 좀...박민정 역시 마찬가지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대체 무슨 생각으로 박윤우가 이러한 소원을 제기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정수미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박윤우는 콧방귀를 뀌었다.“뭐든 다 들어주신다고 하더니... 됐어요! 거짓말쟁이셨네요!”“거짓말쟁이 손자랑은 절대 놀고 싶은 말 없으니 전 그만!”이윽고 박윤우는 바로 자
두 아이에게 과일을 주려고 챙겨온 박민정은 문 앞에 이르자마자 동하의 말을 듣게 되었다.그동안 함미현과 동하의 낯이 익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어디서 봤는지 떠오르지 않았었다.그러나 동하의 말을 듣게 된 순간, 문뜩 염혜란을 구했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오르게 되었다.즉, 한수민 간병인의 딸과 사위에 관한 일이었다.‘저 아이는...’‘미현 씨가 아주머니 딸인가?’박민정은 방으로 들어서면 물었다.“동하야, 혹시 외할머니 성이 염 씨야?”동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들 우리 외할머니를 염혜란이라고 부르시거든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바로 방에서 나와 한수민 간병인의 자료를 다시 훑어보았다.과연 한수민 간병인의 이름은 염혜란이 맞았다.확신하고 난 뒤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탁 치게 되었다.‘이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거야? 이런 바보...’단번에 함미현을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이 마냥 어리석기만 했다.하지만 구조하던 그날, 날도 워낙 어둡고 함미현 일가족의 얼굴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잠깐! 근데 미현 씨는 나를 알 거잖아? 분명히 날 알고 있을 건데, 왜 모른 척을 했지?’여하튼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하고 염혜란한테서 박민정의 이름도 들었을 것인데 말이다.순간 박민정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되어 버렸다.도통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게다가 함미현 일가족을 구해낸 뒤로 염혜란과 연락이 뚝 끊겼다.박민정은 곧 염혜란이 마지막으로 왔었던 그 전화를 떠올렸다.‘살...’‘설마 살려달라고 그랬던 거야?’이윽고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전화를 걸었다.“민기 씨, 염혜란 씨에 관해서 조사 좀 해주세요. 한수민 간병인 말이에요. 이번 달초 부터 조사하면 돼요.”그때 박민정은 염혜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더는 조사하지 않았었다.“알았어요.”정민기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지시를 받자마자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전화를 끊고 난 뒤, 박민정은 함미현이
박민정은 물컵을 챙긴 뒤 보안실로 향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그녀는 경비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넸고 곧바로 어제 퇴근 후의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영상 속에서 주영리가 자신의 물컵에 뭔가를 넣는 모습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좋아, 아주 좋아.’증거는 충분했다.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박민정은 일부러 화장실에 간 척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물컵 속 남은 물을 감식 의뢰하기 위해서였다.컵에 남아 있는 물에 약물이 들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했으니까.병원을 다녀오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회사 내에서는 이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보란 듯이 대놓고 결근이네. 뭐, 이제는 최 사장님 같은 백이 있으니까 다 무시하나 봐. 화장실 간다더니 한 시간은 넘게 있었을걸?”질투 어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속삭였지만 박민정은 이런 말을 신경 쓸 리 없었다.한편, 주영리는 책상 한쪽에 앉아 있었지만 마냥 긴장을 풀지 못했다.직속 상사인 제임스가 아까 말하기를, 곧 최 사장님이 회사를 방문한다고 했고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직접 찾겠다고도 했다.주영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설마 최 사장이 박민정의 말을 듣고 그녀의 편을 들어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닐까?그녀는 불안에 휩싸여 일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결국, 최 사장이 들어왔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주 비서, 당장 이리 와!”최 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주영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에 손이 떨렸다.밖에서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모두 최 사장이 박민정을 위해 직접 나선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하던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박민정 역시 이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었다.‘참 간사하네.’휴게실.최 사장은 들어오자마자 주영리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너, 네가 어제 나를 죽일 뻔한 거 알아?”주영리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최 사장님, 무슨 말씀이
주영리는 우유를 마시며 비웃듯 고개를 끄덕였다.“참나, 그때 밥 먹을 때는 얼마나 고상한 척하던데. 뒤에서는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옆에 있던 동료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요. 어쩌면 이제 최 사모님이 됐을지도 모르잖아요. 괜히 건드렸다가 큰일 난다고요.”주영리는 조롱하듯 덧붙였다.“흥, 그 여자가 사모님 자리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예쁜 여자는 넘쳐나는데 고작 그런 애가? 겁낼 거 없어요.”다른 여직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맞아요. 겨우 그런 걸로 뭐가 무섭다고. 하!”주영리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때 누군가 외쳤다.“어? 저거 봐, 한정판 벤틀리잖아! 혹시 회사에 또 대형 고객이 온 거야?”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그 차로 향했다.그리고 곧이어 그 차에서 내리는 박민정을 보고는 다들 말을 잃었다.주영리는 한순간 멍해졌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봤죠? 저거 분명 최 사장님 차일 거예요.”곁에 있던 동료가 주영리를 치켜세우듯 말했다.“주 비서님, 진짜 대단하네요.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저 여자 진짜 못됐네요.”박민정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 사이에 있는 주영리를 발견했다.그녀는 손을 꽉 쥐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주영리는 원래 박민정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 박민정이 고급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같은 부류라고 착각했다.뻔뻔하게도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민정 씨, 어제 재미있었어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맙다고요?”박민정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올라가더니 주영리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팍! 소리가 울리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주영리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아파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날 쳤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오늘 민정 씨가 그 고급 차 타고 출근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천한 주제에 겉으로만 고상한 척하려고?”주변 동료들이 이 장면을 지켜
유남우의 온화한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그래? 정말 우연이네.”그는 여태껏 박민정을 잘 감춰왔지만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이게 유남준에게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어쨌든 형의 겉모습에 속아선 안 돼. 그리고 회사에서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다면 진작에 나에게 말했어야지.”유남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뭐든 오빠한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제힘으로 해내고 싶어요.”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남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대로 둘 수 없어요? 회사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주영리가 감히 자신을 함부로 대하다니, 그녀는 반드시 주영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부탁이에요.” 박민정은 손을 뻗어 유남우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도와줘요. 네?”박민정의 간절한 애원이었지만 유남우는 난감한 얼굴로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돼. 난 네가 걱정돼서 안심할 수가 없어.”박민정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하지만 저는 이 일이 정말 필요해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왜 꼭 떠나야 하는 거예요? 그냥 오빠 형 문제잖아요. 그걸 가지고 저를 강요할 순 없잖아요?”유남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만하자. 알겠어. 회사 문제는 정리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그 뒤엔 같이 떠날 거야.”박민정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지난 1년간 그녀는 모든 걸 유남우에게 맞춰왔다.그를 사랑했으니까.하지만 겨우 이 작은 부탁조차 들어주지 않다니.박민정이 말을 잃고 침묵하자 유남우는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눈치채고 달래듯 말했다.“화내지 마. 다른 곳으로 가도 네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이 원래는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기침 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왜 이렇게 심하게 기침해요? 혹시 병이 재발한 거 아니에요?”유남우는 그
박민정은 처음으로 유남우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유남우를 부축하며 유남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저기요, 형이라는 사람은 원래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빠가 몸이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어떻게 오빠를 때릴 수 있어요? 게다가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체면 하나 세워주지 않고요.”박민정은 이렇게 지나치게 차가운 형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꾸짖음에 유남준은 마치 목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빠, 우리 그냥 가요.”박민정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남우에게 말했다.“그래.”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유남준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순간적으로 막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예전에 자신만을 사랑하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를 이렇게 따뜻하게 대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한편 최 사장의 정보를 모두 조사한 서다희는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과 대표님이 함께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그는 막 부르려던 찰나, 대표님이 방에서 지친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고 멈췄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서다희는 한 걸음씩 유남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젯밤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성은 최씨라고 하더군요. 본토에서 활동하는 무역상입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남준이 고개를 들었다.“뭐 해야 할지는 알겠지?”“네.” 서다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사람을 붙여서 민정이와 유남우를 따라가게 해.”“유... 유남우 도련님이요?”서다희는 놀랐고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아까 대표님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 동생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이 왜 유남우와 함께 떠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더는 묻지 않고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은 유남우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내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많이 아프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그러나 유남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
유남준은 유남우가 방에 들어오는 걸 보고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의 눈엔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유남우, 나한테 설명할 건 없나?”유남우는 여기에 유남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러니 어젯밤, 박민정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유남준이란 말인가?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박민정은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두 사람의 외모가 이렇게 똑같은데, 왜 유남우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민정아, 먼저 가서 쉬어. 내가 조금 있다가 갈게.”“알겠어요.”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남준은 단호히 말했다.“안 돼. 민정이는 아무데도 못 가.”겨우 다시 찾은 박민정을 그냥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이 말을 들은 유남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옆 방에서 잠깐 쉬고 있어.”“좋아요.” 박민정은 유남우의 말대로 옆 방으로 이동했다.그녀가 떠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유남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민정이가 실종된 게 네가 한 짓이었어?”이젠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유남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민정이는 원래부터 내 사람이었어.”이 뻔뻔스러운 말에 유남준은 주먹을 쥐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그런데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그 질문에 유남우는 오히려 비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기억에서 지우는 법이지.”이어 그는 도발하듯 말했다.“형, 충고 하나 할게. 형 것이 아닌 건 억지로 붙잡아봤자 아무 소용없어.”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그 말을 너 자신에게 하는 게 맞겠지. 민정이는 내 아내야. 우리에겐 네 명의 아이도 있어. 그리고 너는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 네 자리로 돌아가서 네 인생이나 책임져!”그러나 유남우는 비웃으며 대꾸했다.“나랑 윤소현은 애초에 결혼한 사이가 아니야. 우린 결혼증명서도 없어. 그리고 그 애? 하하, 그건 내
박민정은 오늘의 유남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남... 남우 오빠...”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 속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그의 목구멍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쓰렸다.박민정이 손을 내리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 지금 뭐라고 불렀어? 남우 오빠?”그의 눈가는 점점 더 붉어졌다.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박민정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놀라 움찔했다.그리고 며칠 전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꿈속에서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도 지금처럼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난 유남우가 아니야. 난 유남준이야!”“너... 날 잊어버린 거야?”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쉰 듯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유남우가 아니라고?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똑같이 생겼단 말인가?박민정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스러웠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다시 물었다.“말해봐, 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왜 나를 잊었어? 왜 유남우만 기억하는 거지?’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와 분위기를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그가 진짜로 유남우가 아니라면...그녀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그리고 덧붙였다.“어젯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박민정은 몇 걸음 물러나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이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뻗은 다리로 그녀 앞으
“여보세요, 혹시 민정 씨 남자친구 되세요?” 주영리는 일부러 친절한 척하며 물었다.유남우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민정이의 핸드폰이 왜 당신에게 있죠? 누구시죠?”“아, 저는 민정 씨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예요. 오늘 야근하다가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 혹시 무슨 급한 일인가 해서 받았습니다.”주영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민정 씨가 부탁해서 전화하신 건가요?”“민정이가 집에 오지 않았어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유남우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다.박민정은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그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집에 안 갔다고요? 혹시 최 사장님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에요?”주영리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오늘 퇴근 후에도 우리 회사 고객인 최 사장님과 함께 있던데요. 제가 두 사람이 같이 나가는 걸 봤거든요.”그녀는 이리저리 돌려 말했는데 박민정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속셈이었다.“민정 씨가 말하지 않았나요? 전 다 얘기한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니... 혹시...”주영리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아니겠죠? 그래도 민정 씨는 그런 사람 같진 않은데요.”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영리가 노리는 속셈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그는 박민정을 믿었다.“그 최 사장이라는 분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어요?”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영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저 같은 작은 직원이 고객님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민정 씨는 워낙 예쁘고 사교적이니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이어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전에 민정 씨가 최 사장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우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전화를 끊
박민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최 사장의 손에서 벗어나 유남준에게 몸을 던졌다.그녀의 온기가 그의 품에 닿는 순간, 유남준은 깊은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온 몸에 힘이 풀린 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며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성채를 찾은 기분이었다.“두 분, 아는 사이인가요?”최 사장은 눈앞의 큰 키에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주춤했다. 그의 강렬한 아우라에 기가 눌려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남준은 품에 안긴 박민정을 다시 한번 꼭 안으며 현실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차가운 눈빛으로 최 사장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꺼져.”최 사장은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겁을 먹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떠나며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였어요.”비록 유남준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 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격을 알고 있던 최 사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박민정 같은 평범한 직원이 이런 남자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는 뒷모습이 초라하게 사라졌다.최 사장이 떠난 후, 유남준은 자신의 품에서 안도하며 깊이 잠든 박민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소중히 들어올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그는 그녀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다음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1년이었다.그는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박민정은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유남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아니면 또다시 그녀가 환영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다행히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끝에 또렷이 전해졌다. 그녀는 환상이 아니었고 진짜로 그의 앞에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서 이리로 와.”서다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급히 달려왔다. 방
지난번 춤을 추었을 때 박민정은 두꺼운 화장을 해서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하지만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 선명히 드러난 흉터를 보고 최 사장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들며 혀를 찼다.“참 안타깝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완벽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흠이 있네! 알았더라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최 사장은 미모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그는 수많은 미녀와 유명 인사들을 상대하며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말이 들려오는 동안 박민정은 오히려 얼굴의 흉터에 안도했다. ‘이 흉터 때문에 나를 포기해줬으면...’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너무나도 순진한 희망이었다.“하지만...” 최 사장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내려가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몸매는 정말 훌륭하군.”그는 탐욕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 했다.순간 박민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절대 이런 사람에게 내 몸을 내줄 순 없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렵게 입을 벌린 그녀는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순간적인 통증과 입 안에 퍼지는 쇠 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했다.통증 덕분에 여태 흐릿했던 그녀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마침내 눈을 떠낸 박민정은 모든 의지를 쏟아 최 사장을 힘껏 밀쳐냈다.최 사장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깼지?”박민정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꺼져! 아니면 내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최 사장은 그녀의 말에 비웃으며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하하하,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박민정은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느끼고 몸을 재빨리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최 사장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겼다.그녀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