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고서 함미현은 더욱 초조해졌다.“너 계속 고집 피울 거야? 엄마가 가자고 하면 바로 따라서 가는 거야!”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해진 함미현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일초라도 더 있으면 박민정이 모든 사실을 알 것만 같아서 말이다.결국 동하는 눈물범벅이가 된 채로 함미현에게 안겨서 갔다.박민정은 문 앞에서 서서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착잡하기만 했다.“엄마, 왜 그래?”멍하니 서 있는 박민정을 보고서 박윤우는 박민정이 함미현 모자를 싫어하는 줄 알고 먼저 말했다.“엄마, 저 사람들 싫으면 나 앞으로 동하랑 같이 놀지 않을게.”“아니, 윤우야, 내일 동하 집으로 불러. 우리 집에서 동하랑 놀아.”박민정의 말에 박윤우는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왜 그래야 하는데?”“엄마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박민정은 박윤우와 눈높이를 맞추면서 말했다.박민정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에 박윤우는 두말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엄마한테 도움만 된다면, 나 누구랑도 놀 수 있어.”그 말에 박민정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고마워. 근데 놀고 싶은지 아닌지 선택권은 너한테 달렸고 무리하지 않아 돼.”이러한 상황에서도 박민정은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면서 가장 첫 순위에 놓았다.하지만 박윤우는 고개를 저었다.“실은 동하랑 노는 거 재미있어. 나한테 형이라고 한 사람도 동하도 처음이야.”줄곧 동생으로 살아온 박윤우인지라 형 소리를 듣는 것이 무척이나 좋고 흥분되었다.“그래? 그럼, 계속 동하랑 놀도록 해.”“그렇게 할게.”박윤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저녁.밥을 먹고 난 뒤, 박민정은 유남준을 찾아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정 대표님 실력이 그정도 일 줄은 몰랐어요. 듣기로는 어르신도 뭐라고 하시지 못했데요.”박민정 역시 도우미에게서 들은 내용이다.정수미가 유지훈을 혼내고 있을 때, 유명훈은 말리기는 커녕 함께 유지훈을 혼냈다고 한다.“서울에서 정씨 가문의 실력은
“얼른 내려줘요.”근육으로 다져진 유남준의 튼실한 어깨를 때리면서 박민정은 계속 발버둥을 쳤다.물론 유남준에게는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주먹질’이었다.별로 반응이 없자, 박민정은 어이가 없어서 꼬집기 시작했다.유남준은 그제야 약간 아파하면서 박민정을 침대 위로 살포시 내려놓았다.“좀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이윽고 유남준도 침대 위로 올라와 박민정을 품속으로 끌어안았다.“실명한 뒤로 어두운 게 딱 질색이란 말이야. 나도 어두운 거 무서워.”무서울 게 하나 없어 보이는 남자가 어둠이 무섭다고 하고 있다.박민정은 약간 믿어지지 않았다.‘말도 안 돼...’물론 이 또한 박민정을 자기 곁에 남겨두려고 유남준이 짓어낸 거짓말일 뿐이다.마음이 약해진 박민정이 서둘러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역시나 그 확신은 한 치의 오차도 벗어나지 않았다.박민정은 더 이상 급히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아무리 강한 남자에게도 약한 모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남기로 했다.“그럼, 남준 씨 잘 때까지 여기 있을게요. 남준 씨 잠에 들고 나면 그때 갈게요.”유남준의 뜻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30분 뒤, 유남준은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한 시간 뒤, 유남준은 여전히 두 눈에 잠이 하나도 없었다.오히려 유남준의 품에 기대어 있던 박민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잠에 들게 되었다.바로 그때 박민정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유남준은 곤히 잠든 박민정을 깨우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갔다.“엄마, 왜 아직도 안 와?”아들 박윤우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려왔다.유남준은 그 소리를 듣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민정이 오늘 여기서 잘 거야. 집에 안 간다는 소리야.”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윤우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이윽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물었다.“아빠?”“그래. 나야.”“바보 된 거 아니었어요?”박윤우는 이 상황이 매우 반가웠다.그 질문에 유남준은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 그렇게 하지 마요.”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박민정은 유남준을 등지고 재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방으로 달려갔다.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확인해 보니 목에 키스 마크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머릿속에는 온통 꿈속의 장면들뿐이었다.유남준은 밖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조금 전 꽤 화난 듯한 박민정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다.그윽한 눈빛으로 옷방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박민정이 걸어 나왔다.박민정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채 키스 마크를 가리고 있었다.워낙 더운 계절이라 목폴라를 입을 수도 목수건을 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그뿐만 아니라 임신한 몸으로 많이 입을수록 답답하기도 하다.“그만 갈게요. 우리 윤우 지금 잔뜩 뿔났을 거예요.”박민정은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보고서 유남준은 덥석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화났어?”박민정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유남준이다.왜 화가 났는지, 지금 박민정의 마음속에서 자기와 유남우 사이에 누가 더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박민정은 화난 척을 하면서 대답했다.“화 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새벽에 간다고 미리 약속까지 했는데... 앞으로 이러지 말아요.”이윽고 유남준의 손을 뿌리치고 서둘러 ‘탈출’했다.왠지 모르게 유남준과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이런 모습이 수줍음의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고 유남준은 박민정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착각하게 되었다.박민정이 가고 나서 도우미는 홀로 멍하니 창가에 앉아 있는 유남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큰 도련님 또 베란다에 앉아계셔. 맨날 저러시는데 어떡하지?”유남준에게 아침상을 가져다줘도 유남준은 먹지 않았다.“아침도 안 드시고 혹시 화나신 거 아니야?”그 누구도 도우미들 사이의 의문을 풀어줄 수 없었다.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아침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웃음이 얼굴이 걸려 있는 박윤우를 보게 되었다.“엄마, 왔어?”외박한 자기한테 박윤우가 당연히 화를 낼
박윤우와 얘기를 마치고 난 뒤, 두 사람은 동하네 집으로 계속 향했다.실은 동하도 박윤우네 집으로 가겠다면서 아침부터 조르고 있었다.다만 박민정에게 들통나게 될까 봐 함미현이 안 된다고 막고 있었다.“흑흑, 나 윤우 형이랑 놀고 싶단 말이야!”“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엄마가 분명 안 된다고 했지? 벌써 몇 번이나 얘기해?!”켕기는 게 있는 함미현은 언성까지 높이면서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한편 정수미 일행은 마침 윤소현의 혼사로 아침 일찍 외출했다.집 앞에 이른 박민정과 박윤우는 동하의 울음소리와 함미현의 호통 소리를 듣게 되었다.집으로 들어서면서 박민정이 말했다.“미현 씨, 우리 윤우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어요? 아니면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왜 우리 윤우랑 놀지 못하게 하는 거죠?”박민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함미현은 본능적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여기저기 시선이 떠돌면서 당황한 빛이 가득했다.“그게...”동하는 박윤우를 보게 된 순간, 울음을 뚝 그치고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윤우 형.”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동하야.”두 아이의 사이가 꽤 좋아 보였고 어제도 잘 어울려 노는 것으로 보였던 박민정이다.함미현은 뭐라고 둘러대면 좋을지 몰라서 인사치레하기 시작했다.“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뜻이 아니라 자꾸 찾아가서 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요... 듣자 하니 임신까지 한 상황이라고...”“아니에요. 괜찮아요.”박민정은 단번에 말을 잘라버리면서 동하에게 말했다.“동하야, 윤우 형이 좋으면 우리 집으로 자주 놀러 와도 돼.”“좋아요!”동하는 입꼬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두 아이가 어울려서 노는 동안 박민정과 함미현은 자연스레 서로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미현 씨, 정 대표님과 어렵게 다시 만났다면서요? 그럼, 양부모님은 지금 어디에 계세요?”박민정의 물음에 함미현은 또다시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두 분도 돌아가셨어요.”짤막이 대답하고 난 뒤 함미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민정 씨, 엄마
물론 염혜란의 목숨에도 관련된 일이다.박민정은 함미현에게 사실을 알리고 염혜란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물어볼 작정이었다.오후.오전 내내 닥치는 대로 돌고 돌아온 함미현은 박민정 모자가 이미 갔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집으로 들어서니 박민정은 책을 보고 있었고 두 아이는 여전히 지칠 줄 모른 채 놀고 있었다.함미현은 그 광경을 보고서 박민정을 피하고자 다시 나가려고 했다.발걸음을 돌리려던 그 순간, 박민정의 소리가 들려왔다.“미현 씨, 저 이제서야 생각났어요! 미현 씨 양모 존함이 염혜란 맞죠?”함미현은 그대로 얼어붙고서 계속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민정 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그러나 거짓말을 채 하기도 전에 동하가 입을 열었다.“아줌마가 우리 할머니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함미현은 더 이상 변명하고 싶어도 변명할 길이 없었다.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해진 채로 인정할 수밖에.“맞아요. 양모 이름이 염혜란이에요. 돌아가신 민정 씨 어머니 간병인으로 일했었고요.”순간 모든 걸 순순히 내뱉고 있는 함미현의 모습을 보고서 박민정은 이상하기만 했다.‘물어볼 때는 아니라고 하더니...’“그럼, 그 별장에서 우리 처음 만난 거 맞죠? 윤소현 씨가 미현 씨 일가족을 납치했었던 그때 말이에요.”박민정은 계속 물었다.궁지로 몰린 함미현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그날은 하도 늦은 밤이기도 하여 시야도 밝지 않았어요. 미현 씨도 저처럼 얼굴을 확인하지 못해서 기억나지 않았나 봐요.”함미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한번 보고서 박미정의 말에 따라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깜빡하고 있었어요. 워낙 기억력이 좀 약한 편이라...”“저도 그래요. 이제서야 생각났지 뭐예요.”박민정은 조심스레 하나씩 떠보았는데, 떠보면 떠 볼 수록 함미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분명 숨기고 있는 게 있어.’‘설마 아주머니 실종과 관련되어 있을까?’“저 9월이면 아이 출산하는 데, 아주머니한테 좀 부탁하려고 했었거든요.
하나둘씩 떠보고 난 박윤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동하야, 정수미가 네 외할머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어?”동하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박윤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잠시 후, 동하는 큰 결심을 내린 듯한 모습을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지금 외할머니는 가짜라고 했어.”“가짜라고?”박윤우는 믿어지지 않았다.하지만 동하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윤우 형한테만 알려주는 일이니 비밀 꼭 지켜야 해.”“알았어. 약속 지킬게.”힘껏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박윤우는 동하를 데리고 구석으로 가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듣게 되었다.“우리 엄마랑 외할머니 통화 내용을 내가 들은 적이 있어. 지금 ‘정 대표님’이라고 불리는 그 사람은 우리 엄마의 엄마가 아니라고...”박윤우는 그냥 박민정을 도와 대략적인 상황만 알아보려고 했으나, 하늘을 뒤흔들 만 한 비밀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그러나 동하는 이제 겨우 4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라 진실성 여부 판단이 필요하다.정수미처럼 똑똑하고 예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딸을 친딸로 받아들일 리도 없다면서 순간 백 가지 의문이 치밀어올랐다.하물며 친자 확인 검사도 했을 것인데...“두 사람 친자확인 검사는 했어?”‘친자확인 검사?’동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윤우 형, 친자확인 검사가 뭐야?”“병원에서 하는 일종의 검사인데, 네 엄마랑 ‘정 대표님’ 사이에 혈연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검사야.”박윤우는 간단한 말로 설명해 주었다.그러나 동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로 박윤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머리를 가로저었다.‘그래... 너무 어려운 단어일 거야.’동하와 헤어지고 나서 박윤우는 보물을 받치듯이 박민정에게 자기가 알아낸 비밀을 알려주었다.“엄마, 아까 동하가 그랬는데, 동하 정씨 가문의 외손자가 아니래.”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뭐라고?”“자기 엄마랑 외할머니 통화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때
함미현에게 정수미 앞에서 박민정의 험담을 밥 먹듯이 하라고 지시한 윤소현이다.정수미가 나서서 박민정을 상대할 수 있게끔 말이다.함미현은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열었다.“어제도 했었잖아요...”“어제? 대체 무슨 염치로 어제 일을 꺼내는 거야?”윤소현은 두 손을 꽉 움켜쥐고 덧붙였다.“야, 경고하는데 너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지훈이 나랑 친한 친구 아들이거든 그러니 알아서 해.”“네... 조심할게요.”아이처럼 꾸지람을 당하고 있는 함미현이다.윤소현을 향해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순간이었다.어느 한 순간부터 함미현도 알 것 같았다.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언니’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자기를 박민정을 상대하는 데 여기저기 이용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만약 윤소현의 뜻대로 박민정을 깔아뭉갠다면, 다음 차례는 자기가 되리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함미현은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정수미의 친딸은 박민정일 가능성이 높으니 윤소현이 자기를 남겨둔 이유는 오로지 두 모녀의 상봉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확신이 들기도 했다.그리고 지금 윤소현은 자기의 손을 빌려 박민정을 없애려고 꿍꿍이를 세우고 있는 것까지 한순간에 머리가 번쩍 뜨이게 되었다.일단 박민정이 사라지게 되면, 정수미는 평생 자기 친딸을 찾을 수 없게 되니 말이다.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정수미는 함미현만 탓할 것이고 함미현 역시 개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다.“얼른 가서 엄마한테 말해. 박민정이 얼마나 나쁜지 얼마나 악랄한지.”윤소현은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재촉했다.함미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윽고 두 사람은 함께 방에서 나왔다.정수미는 동하랑 놀아주고 있었고 두 사람이 나온 것을 보고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방에서 뭐 한 거야?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한 거야?”윤소현이 바로 대답했다.“미현이한테 결혼사진이랑 예물 같은 것들 좀 보여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재 안에는 홍주영도 함께 있었다.30분 내내 첫 페이지만 보고 있는 유남우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도련님, 눈 좀 붙이시는 건 어때요?”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유남우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이윽고 책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눈앞이 희미해졌다.홍주영은 바로 다가가 유남우를 부축했다.“도련님...”걱정이 가득 묻어 있는 눈빛으로 유남우를 바라보았다.윤소현과 결혼하고 싶지 않으나 결혼해야만 하는 유남우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똑똑히 알고 있다.눈앞이 캄캄해진 유남우는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천천히 고개를 돌린 유남우는 홍주영을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놀랐지?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홍주영은 씁쓸한 모습으로 고개를 저었다.“이미 익숙한 상황이라 괜찮아요.”어느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홍주영은 그만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도련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결혼하고 싶지 않으시면 지금 사모님께 말씀드리세요. 도련님 뜻대로 하실 거예요.”“호산 그룹 대표 자리는 하고 싶은 사람한테 내주고요. 도련님은 집에서 일단 건강부터 챙기세요. 제발 그러시면 안 될까요?”유남우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바보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하고 싶다고 하고, 하고 싶지 않다고 그만두고 가지고 싶다고 가지고, 가지고 싶지 않다고 버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하물며 나 슬프지도 않아. 결혼하는 거 좋아. 누구나 결혼하듯이 너도 언젠가는 결혼하게 될 거야.”홍주영은 코를 훌쩍이면서 말했다.“전 절대 결혼 안 해요.”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면 이번 생은 솔로로 지내기로 마음 먹은 홍주영이다.“또 바보 같은 소리한다.”유남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더니 그만 참지 못하고 박민정에 대해 물었다.“민정이는 요즘 뭐 하고 있어?”홍주영은 언젠가는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 알고 미리 박민정에게 사람
박민정은 물컵을 챙긴 뒤 보안실로 향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그녀는 경비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넸고 곧바로 어제 퇴근 후의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영상 속에서 주영리가 자신의 물컵에 뭔가를 넣는 모습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좋아, 아주 좋아.’증거는 충분했다.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박민정은 일부러 화장실에 간 척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물컵 속 남은 물을 감식 의뢰하기 위해서였다.컵에 남아 있는 물에 약물이 들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했으니까.병원을 다녀오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회사 내에서는 이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보란 듯이 대놓고 결근이네. 뭐, 이제는 최 사장님 같은 백이 있으니까 다 무시하나 봐. 화장실 간다더니 한 시간은 넘게 있었을걸?”질투 어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속삭였지만 박민정은 이런 말을 신경 쓸 리 없었다.한편, 주영리는 책상 한쪽에 앉아 있었지만 마냥 긴장을 풀지 못했다.직속 상사인 제임스가 아까 말하기를, 곧 최 사장님이 회사를 방문한다고 했고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직접 찾겠다고도 했다.주영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설마 최 사장이 박민정의 말을 듣고 그녀의 편을 들어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닐까?그녀는 불안에 휩싸여 일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결국, 최 사장이 들어왔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주 비서, 당장 이리 와!”최 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주영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에 손이 떨렸다.밖에서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모두 최 사장이 박민정을 위해 직접 나선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하던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박민정 역시 이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었다.‘참 간사하네.’휴게실.최 사장은 들어오자마자 주영리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너, 네가 어제 나를 죽일 뻔한 거 알아?”주영리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최 사장님, 무슨 말씀이
주영리는 우유를 마시며 비웃듯 고개를 끄덕였다.“참나, 그때 밥 먹을 때는 얼마나 고상한 척하던데. 뒤에서는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옆에 있던 동료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요. 어쩌면 이제 최 사모님이 됐을지도 모르잖아요. 괜히 건드렸다가 큰일 난다고요.”주영리는 조롱하듯 덧붙였다.“흥, 그 여자가 사모님 자리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예쁜 여자는 넘쳐나는데 고작 그런 애가? 겁낼 거 없어요.”다른 여직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맞아요. 겨우 그런 걸로 뭐가 무섭다고. 하!”주영리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때 누군가 외쳤다.“어? 저거 봐, 한정판 벤틀리잖아! 혹시 회사에 또 대형 고객이 온 거야?”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그 차로 향했다.그리고 곧이어 그 차에서 내리는 박민정을 보고는 다들 말을 잃었다.주영리는 한순간 멍해졌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봤죠? 저거 분명 최 사장님 차일 거예요.”곁에 있던 동료가 주영리를 치켜세우듯 말했다.“주 비서님, 진짜 대단하네요.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저 여자 진짜 못됐네요.”박민정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 사이에 있는 주영리를 발견했다.그녀는 손을 꽉 쥐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주영리는 원래 박민정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 박민정이 고급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같은 부류라고 착각했다.뻔뻔하게도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민정 씨, 어제 재미있었어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맙다고요?”박민정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올라가더니 주영리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팍! 소리가 울리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주영리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아파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날 쳤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오늘 민정 씨가 그 고급 차 타고 출근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천한 주제에 겉으로만 고상한 척하려고?”주변 동료들이 이 장면을 지켜
유남우의 온화한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그래? 정말 우연이네.”그는 여태껏 박민정을 잘 감춰왔지만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이게 유남준에게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어쨌든 형의 겉모습에 속아선 안 돼. 그리고 회사에서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다면 진작에 나에게 말했어야지.”유남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뭐든 오빠한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제힘으로 해내고 싶어요.”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남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대로 둘 수 없어요? 회사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주영리가 감히 자신을 함부로 대하다니, 그녀는 반드시 주영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부탁이에요.” 박민정은 손을 뻗어 유남우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도와줘요. 네?”박민정의 간절한 애원이었지만 유남우는 난감한 얼굴로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돼. 난 네가 걱정돼서 안심할 수가 없어.”박민정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하지만 저는 이 일이 정말 필요해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왜 꼭 떠나야 하는 거예요? 그냥 오빠 형 문제잖아요. 그걸 가지고 저를 강요할 순 없잖아요?”유남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만하자. 알겠어. 회사 문제는 정리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그 뒤엔 같이 떠날 거야.”박민정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지난 1년간 그녀는 모든 걸 유남우에게 맞춰왔다.그를 사랑했으니까.하지만 겨우 이 작은 부탁조차 들어주지 않다니.박민정이 말을 잃고 침묵하자 유남우는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눈치채고 달래듯 말했다.“화내지 마. 다른 곳으로 가도 네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이 원래는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기침 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왜 이렇게 심하게 기침해요? 혹시 병이 재발한 거 아니에요?”유남우는 그
박민정은 처음으로 유남우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유남우를 부축하며 유남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저기요, 형이라는 사람은 원래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빠가 몸이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어떻게 오빠를 때릴 수 있어요? 게다가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체면 하나 세워주지 않고요.”박민정은 이렇게 지나치게 차가운 형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꾸짖음에 유남준은 마치 목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빠, 우리 그냥 가요.”박민정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남우에게 말했다.“그래.”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유남준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순간적으로 막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예전에 자신만을 사랑하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를 이렇게 따뜻하게 대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한편 최 사장의 정보를 모두 조사한 서다희는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과 대표님이 함께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그는 막 부르려던 찰나, 대표님이 방에서 지친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고 멈췄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서다희는 한 걸음씩 유남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젯밤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성은 최씨라고 하더군요. 본토에서 활동하는 무역상입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남준이 고개를 들었다.“뭐 해야 할지는 알겠지?”“네.” 서다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사람을 붙여서 민정이와 유남우를 따라가게 해.”“유... 유남우 도련님이요?”서다희는 놀랐고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아까 대표님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 동생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이 왜 유남우와 함께 떠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더는 묻지 않고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은 유남우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내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많이 아프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그러나 유남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
유남준은 유남우가 방에 들어오는 걸 보고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의 눈엔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유남우, 나한테 설명할 건 없나?”유남우는 여기에 유남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러니 어젯밤, 박민정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유남준이란 말인가?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박민정은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두 사람의 외모가 이렇게 똑같은데, 왜 유남우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민정아, 먼저 가서 쉬어. 내가 조금 있다가 갈게.”“알겠어요.”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남준은 단호히 말했다.“안 돼. 민정이는 아무데도 못 가.”겨우 다시 찾은 박민정을 그냥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이 말을 들은 유남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옆 방에서 잠깐 쉬고 있어.”“좋아요.” 박민정은 유남우의 말대로 옆 방으로 이동했다.그녀가 떠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유남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민정이가 실종된 게 네가 한 짓이었어?”이젠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유남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민정이는 원래부터 내 사람이었어.”이 뻔뻔스러운 말에 유남준은 주먹을 쥐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그런데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그 질문에 유남우는 오히려 비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기억에서 지우는 법이지.”이어 그는 도발하듯 말했다.“형, 충고 하나 할게. 형 것이 아닌 건 억지로 붙잡아봤자 아무 소용없어.”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그 말을 너 자신에게 하는 게 맞겠지. 민정이는 내 아내야. 우리에겐 네 명의 아이도 있어. 그리고 너는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 네 자리로 돌아가서 네 인생이나 책임져!”그러나 유남우는 비웃으며 대꾸했다.“나랑 윤소현은 애초에 결혼한 사이가 아니야. 우린 결혼증명서도 없어. 그리고 그 애? 하하, 그건 내
박민정은 오늘의 유남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남... 남우 오빠...”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 속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그의 목구멍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쓰렸다.박민정이 손을 내리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 지금 뭐라고 불렀어? 남우 오빠?”그의 눈가는 점점 더 붉어졌다.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박민정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놀라 움찔했다.그리고 며칠 전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꿈속에서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도 지금처럼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난 유남우가 아니야. 난 유남준이야!”“너... 날 잊어버린 거야?”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쉰 듯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유남우가 아니라고?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똑같이 생겼단 말인가?박민정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스러웠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다시 물었다.“말해봐, 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왜 나를 잊었어? 왜 유남우만 기억하는 거지?’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와 분위기를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그가 진짜로 유남우가 아니라면...그녀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그리고 덧붙였다.“어젯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박민정은 몇 걸음 물러나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이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뻗은 다리로 그녀 앞으
“여보세요, 혹시 민정 씨 남자친구 되세요?” 주영리는 일부러 친절한 척하며 물었다.유남우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민정이의 핸드폰이 왜 당신에게 있죠? 누구시죠?”“아, 저는 민정 씨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예요. 오늘 야근하다가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 혹시 무슨 급한 일인가 해서 받았습니다.”주영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민정 씨가 부탁해서 전화하신 건가요?”“민정이가 집에 오지 않았어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유남우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다.박민정은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그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집에 안 갔다고요? 혹시 최 사장님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에요?”주영리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오늘 퇴근 후에도 우리 회사 고객인 최 사장님과 함께 있던데요. 제가 두 사람이 같이 나가는 걸 봤거든요.”그녀는 이리저리 돌려 말했는데 박민정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속셈이었다.“민정 씨가 말하지 않았나요? 전 다 얘기한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니... 혹시...”주영리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아니겠죠? 그래도 민정 씨는 그런 사람 같진 않은데요.”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영리가 노리는 속셈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그는 박민정을 믿었다.“그 최 사장이라는 분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어요?”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영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저 같은 작은 직원이 고객님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민정 씨는 워낙 예쁘고 사교적이니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이어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전에 민정 씨가 최 사장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우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전화를 끊
박민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최 사장의 손에서 벗어나 유남준에게 몸을 던졌다.그녀의 온기가 그의 품에 닿는 순간, 유남준은 깊은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온 몸에 힘이 풀린 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며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성채를 찾은 기분이었다.“두 분, 아는 사이인가요?”최 사장은 눈앞의 큰 키에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주춤했다. 그의 강렬한 아우라에 기가 눌려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남준은 품에 안긴 박민정을 다시 한번 꼭 안으며 현실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차가운 눈빛으로 최 사장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꺼져.”최 사장은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겁을 먹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떠나며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였어요.”비록 유남준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 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격을 알고 있던 최 사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박민정 같은 평범한 직원이 이런 남자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는 뒷모습이 초라하게 사라졌다.최 사장이 떠난 후, 유남준은 자신의 품에서 안도하며 깊이 잠든 박민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소중히 들어올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그는 그녀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다음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1년이었다.그는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박민정은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유남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아니면 또다시 그녀가 환영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다행히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끝에 또렷이 전해졌다. 그녀는 환상이 아니었고 진짜로 그의 앞에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서 이리로 와.”서다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급히 달려왔다. 방
지난번 춤을 추었을 때 박민정은 두꺼운 화장을 해서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하지만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 선명히 드러난 흉터를 보고 최 사장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들며 혀를 찼다.“참 안타깝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완벽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흠이 있네! 알았더라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최 사장은 미모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그는 수많은 미녀와 유명 인사들을 상대하며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말이 들려오는 동안 박민정은 오히려 얼굴의 흉터에 안도했다. ‘이 흉터 때문에 나를 포기해줬으면...’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너무나도 순진한 희망이었다.“하지만...” 최 사장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내려가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몸매는 정말 훌륭하군.”그는 탐욕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 했다.순간 박민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절대 이런 사람에게 내 몸을 내줄 순 없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렵게 입을 벌린 그녀는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순간적인 통증과 입 안에 퍼지는 쇠 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했다.통증 덕분에 여태 흐릿했던 그녀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마침내 눈을 떠낸 박민정은 모든 의지를 쏟아 최 사장을 힘껏 밀쳐냈다.최 사장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깼지?”박민정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꺼져! 아니면 내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최 사장은 그녀의 말에 비웃으며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하하하,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박민정은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느끼고 몸을 재빨리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최 사장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겼다.그녀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