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희도 듣자니 머리가 아파 났다. 여자의 마음은 참 헤아리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해하면…“대표님, 사모님이 대표님한테 무슨 죄송한 일이라도 하셨나요?”그리고 바로 저쪽에서 전화를 끊었다.서다희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고 나서 어이없어했다.유남준이 지금 마음이 너무 여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 말해도 안 들을 거면서 왜 자기한테 묻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서다희가 막 잠을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자 한 통이 왔다. 누군가가 그에게 2억을 송금했다는 문자였다. “장난해? 사기인가?”그가 혼잣말할 때, 방성원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네 여자친구에게 물어봐. 설인하란 내 딸은 어떻게 되었는지, 2억은 팁이야.”서다희는 금방 민수아와 전화를 다 했는데 돈이 들어온 것을 보고 바로 다시 민수아를 찾아갔다.계속 설인하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다.설인하는 요즘 잘 지내고 있고 몸도 빨리 회복되었고 아이도 건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민수아는 의아해했다. “왜 그렇게 인하 씨랑 그 사람 딸한테 관심이 많은 거야?”“그냥 물어보는 거지. 자기야, 우리 설날 때 결혼하자. 나도 빨리 딸이 있었으면 좋겠어.”“누가 낳아준대?”민수아는 수줍어하며 전화를 끊었다.방성원은 서다희가 전화하는 것을 자정까지 기다려서야 설인하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지금 박민정이 옛 저택에 갔으니 설인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무서웠다. 그는 지금 설인하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른다.박민정은 박씨 가문 옛 저택에 살지 않지만 자기 전에 영상통화를 한다.설인하는 이미 마음대로 걸을 수 있고 몸도 회복되었다. 가끔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일에 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그녀는 지금 일에 매우 관심이 있다. 산후조리를 잘하지 못하면 후유증을 남길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지금 당장 나가서 일을 찾고 싶어한다.“인하 씨,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요. 정말 일자리가 필요하면 서연이 일을 도와도 됐고요.”박
함미현은 자기 남편을 생각했다. 정수미의 도움으로 평범한 프로그래머에서 회사 사장이 되었다.정수미가 말했다. “미현아, 너도 출근하고 싶으면 엄마가 회사 하나 맡겨줄게.”이건 정말 함미현에게 있어서 너무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윤소현이 너무 인색해서 아이를 돌본다는 이유로 정수미를 거절하라고 했다.함미현은 윤소현이 너무 미웠다. 그녀가 자신의 약점을 잡지 않았다면 자기는 정수미의 친딸이 될 것이다. 그러면 회사 하나는 물론, 정씨 가문도 자기 것이 되는 셈이다.“엄마, 여기 엄청나게 커. 공원 같아. 심지어 공원보다 더 예뻐.”동하는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그의 세상 물정 모르는 모습을 보고 도우미들은 하나같이 눈총을 쏘았다. 이들의 경멸하는 시선을 단번에 본 정수미는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너희들은 얼마나 잘났는데? 동하는 나의 친 외손자야. 너희가 내 외손자를 무시할 자격이 있어?”그들은 좀 당황했다. 그들은 이 아이가 정수미 부하의 아이인 줄 알았다. 정수미와 조금도 닮지 않았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정 대표님.”이들은 바로 정수미에게 사과했다.고영란이 전에 당부한 적이 있다. 절대 정씨 가문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유씨 가문의 시중을 드는 것보다도 신경 써야 한다고 했었다.정수미는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집사는 어디 있어?”곧 집사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정 대표님.”“이 사람들 너무 거슬려.”“네, 바로 내보내겠습니다.”집사는 도우미들처럼 뭐를 모르지 않는다.1분도 안 돼서 방금 동하를 업신여기던 사람들을 해고했다. 함미현의 손을 잡고 있던 동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엄마, 외할머니께서 왜 화를 내시는 거야?”함미현은 어렸을 때부터 억울함을 참았어야 했다. 그녀는 이제야 강한 엄마가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요즘 그녀는 친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정씨 가문에서 너무 잘 지낸 탓인지 친엄마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도 그리 신경 씨지 않았다.정수미는 동하한
“사돈, 이분이 금방 만난 친딸 맞죠? 정말 닮았네요.”고영란이 본의 아니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정수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전에 그녀는 원수가 찾아와 복수할까 봐 무서워서 성형했었다. 함미현은 지금의 자신을 닮지 않는 게 맞다.“미현아, 이분은 영란 이모야. 네 언니 미래의 시어머니셔.”함미현은 정수미의 소개로 고영란을 바라보았다. 비록 오십이 넘었지만 보기에 겨우 삼사십 세밖에 안 돼 보였다. 매우 예쁘게 꾸며서 그녀 옆에 서 있는 자신이 마치 미운 오리 새끼 같았다.“안녕하세요.”그녀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리고 동하를 불렀다. “동하야, 할머니라고 불러야지.”동하는 낯선 곳에 와서 아직 적응되지 않았다. 그는 고영란을 쳐다보다가 민망해서 엄마 뒤에 숨었다.정수미가 말했다. “제 외손자예요. 딸과 함께 금방 제 곁에 왔어요. 아직 낯가림이 좀 심한데 신경 쓰지 마세요.”“그럴 리가요.”고영란은 부드럽게 웃었다.그러자 박민정이 앞으로 나섰다. “정 대표님, 미현 씨, 제가 사람을 시켜서 쉬는 곳까지 안내하라고 했어요. 방은 다 마련됐으니 좀 쉬었다가 우리 엄마와 결혼 얘기를 하시는 게 어때요?”정수미는 박민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의 두 딸이 모두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는 박민정을 무시하고 고영란한테 말했다. “그럼 가서 좀 쉴게요.”“네, 그러세요.”몇 사람이 떠나자 고영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름이 아니라, 정수미의 아우라가 너무 강해서 그녀가 눌리는 느낌이었다.하긴 고영란은 몇 년 동안 쇼핑몰을 운영하지 않았지만 정수미는 지금 지엔 그룹의 회장이니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꽤 컸다.“민정아, 어떻게 함미현한테 미움을 산 거야? 단지 지난번 그 작은 일뿐이야?”고영란은 좀 의아해했다. 정수미는 지난번의 작은 오해에 뒤끝이 있는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박민정은 당연히 그녀에게 윤소현 책임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 대표와 오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윤소현은 계산해보았다. 정씨 가문의 거액 혼수에 아버지 윤석후한테 가서 좀 더 달라고 하면 그녀는 가슴을 쭉 펴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모든 얘기를 끝나고 윤소현은 함미현이랑 불러서 함께 유씨 가문을 둘러보자고 제안했다.“그래, 너희들 가서 둘러 봐. 나는 좀 쉬어야겠어.”정수미는 윤소현이 함미현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윤소현과 함미현은 친자매와 다름없이 친하기 때문이다. 함미현도 자기한테 윤소현의 미담을 자주 꺼낸다.밖에 도착하자마자 윤소현의 본성이 드러났다. “함미현, 네 아들을 다른 사람보고 잠시 돌보라고 해. 너에게 할 얘기가 있어.”“알겠어요.”함미현은 마치 그녀의 종과 같았다.그녀는 동하를 달래서 도우미를 따라 놀라고 한 다음 윤소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함미현, 너도 알다시피 난 곧 결혼해. 근데 박민정이 너무 거슬려. 요 며칠 유씨 가문에서 있는데 박민정도 있어. 엄마 앞에서 박민정에 대한 험담을 많이 해야겠어, 알겠어?”이 말을 들은 함미현은 잠시 망설였다.“소현 씨,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아무 이유 없이 민정 씨의 험담을 할 수도 없잖아요. 더군다나 우리도 알다시피 민정 씨야말로...”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소현은 손을 들어 뺨을 한 대 갈겼다.“너 죽고 싶어?”함미현은 맞아서 얼굴이 화끈했다.윤소현이 차갑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데, 엄마는 주변 사람들한테만 마음이 약하고 말이 잘 통해. 그녀를 배신하거나 속인 사람은 죽는 길밖에 없어.”함미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죄송합니다.”“앞으로 그런 말 좀 하지 마, 짜증 나게.”윤소현은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박민정의 험담을 하기 싫으면 지어내서 말해. 이런 건 좀 혼자 알아서 하고. 일일이 가르치게 하지 마.”“네.”함미현은 고개를 숙여 사나운 눈빛을 감추었다.그녀는 지금 윤소현이 그냥 죽기를 바랬다. 그러면 자신은 정수미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들킬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동하는 선천성 당뇨병이 있어서 유지훈의 상대가 아니다. 그는 땅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그를 데리고 나온 도우미는 순간 당황했다.“동하 도련님, 괜찮으세요?”유지훈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병신아, 그러고도 감히 나를 노려봐? 메롱.”그를 책임지는 가정부가 달려왔다. “도련님, 왜 밀었어요?”“내가 왜 못 밀어? 여긴 내 집이야, 내 구역이라고.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넌 그냥 가정부야! 지금 나를 나무라는 거야? 내가 너를 저를 수도 있어!”유지훈은 자신의 가정부에게 심한 말로 쏘아 붙었다.이런 아이를 상대로 가정부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한두 살 때 그렇게 귀여웠던 유지훈이 이렇게 됐다니 너무 실망이었다.동하를 돌보던 도우미가 가정부에게 얼른 유지훈을 데려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정씨 가문 사람들이 보면 큰일 날 것이다. 오늘 정씨 가문 사람들이 와서 동하를 차가운 시선으로 보았던 도우미들을 다 해고하게 한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분명히 난리 날 것이다. 자기들도 덩달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지훈 도련님, 그런 뜻이 아닙니다. 먼저 돌아가시죠.”가정부도 상황파악을 해서 목소리를 낮춰 유지훈을 달랬다.가정부의 약한 모습을 보고 유지훈은 더욱 분수 넘치게 행동했다.그는 두 팔을 가슴 앞으로 놓고 일부러 울음을 그치지 않는 동하를 바라보았다.“난 안가, 이 울보 좀 더 봐야겠어.”그는 매일 집에서 너무 심심했다. 어렵게 이런 즐거움을 찾았는데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가정부는 더욱 난처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몰랐다. 유지훈을 강제로 데리고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유지훈은 동하를 향해 걸어갔다. “울긴 왜 울어, 너 엄청 사납잖아? 계속 째려봐야지!”“넌 나쁜 아이야. 지금 당장 우리 외할머니한테 가서 너를 내쫓으라고 할 거야!”동하는 바로 땅에서 일어나 정수미한테 가서 일러바치려 했다.도우미는 겁이 나서 그를 가로막았다. “동하 도련님, 제발
박윤우는 그쪽으로 보았다. 알고 보니 또 유지훈이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너무하네.”박윤우는 유지훈이 괴롭히는 아이를 보았는데 유지훈보다 훨씬 마르고 연약한 아이였다.계속 이렇게 때리면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는 라이브를 끄고는 유지훈을 향해 걸어갔다.“유지훈, 뭐 하는 거야?”익숙한 목소리에 유지훈은 어리둥절했다.두 아이를 돌보는 도우미는 박윤우를 보니 더욱 머리가 아팠다. 박윤우와 유지훈도 유난히 갈등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만약 이 세 아이가 싸운다면 정말 난장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지훈은 동하를 풀어주고 대답했다. “봤잖아, 내가 얘를 때리고 있는데? 이 울보가 방금 나를 째려봤다고.” 지금의 유지훈은 박예찬의 말을 잘 들어야 해서 당연히 박윤우한테도 함부로 할 수 없다.박윤우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너 미쳤지? 널 한번 봤다고 지금 이렇게 때리는 거야?”유지훈은 말문이 막혔다. “때리면 안 되는 건가?”“안 되는 게 아니라 너무 어처구니없다는 거지. 널 째려보는 건지 아니면 원래 눈을 그렇게 뜨는 건지 네가 어떻게 알아?”박윤우가 또 말했다.그의 말을 듣고 유지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동하는 누군가가 와서 자기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윤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박윤우가 유지훈보다 더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피부는 하얗고 까만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는데 마치 동화에서 나오는 어린 왕자 같았다.그는 구원자를 만난 듯 박윤우의 등 뒤로 숨었다.“나를 구해준 것을 꼭 외할머니께 말씀 드릴 거야. 외할머니께서 분명히 큰 상을 내려주실 거야.”박윤우는 그에게 괜찮다고 눈짓을 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봤으니 됐어. 난 절대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아.”그리고 그는 또 유지훈에게 말했다. “유지훈, 네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우리 형한테 말해볼까?”박예찬의 이름을 듣고 유지훈은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됐어. 다시
‘윤우 형?’순간 책임감이 온몸으로 가득 차오른 박윤우이다.박윤우는 동하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형인 박예찬의 말투를 흉내며 입을 열었다.“그래. 이제야 사나이답네! 사나이한테 그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동하를 돌보던 도우미는 그 말을 듣고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박윤우에게 이런 귀여운 모습이 있을 줄 몰랐다면서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오늘 윤우가 있어서 다행이네.’오전 내내 동하는 껌딱지처럼 박윤우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박윤우를 ‘보스’로 생각하면서 박윤우의 말이라면 그게 뭐든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한참 놀고 나서야 동하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지기 시작한 박윤우가 물었다.“동하야, 넌 유씨 가문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누구 친척이야?”동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굼뜨며 대답했다.“우리 외할머니 따라서 온 거야.”“네 외할머니는 누군데?”동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입을 열었다.“다들 ‘정 대표님’이라고 부르던데.”‘정 대표님?’순간 윤소현의 엄마가 떠오른 박윤우이다.‘형을 납치했었던 그 여자 엄마?’전에 박예찬에게서 윤소현이 자기를 납치했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었다.‘뭐야? 그럼, 내가 원수를 도운 셈이 된 거야?’‘원수의 외손자를 내가 구했다고?’박윤우는 지금 동하가 유지훈에게 맞든 말든 상관하지 말았어야 한다면서 내심 후회하고 있다.갑자기 말이 없어진 박윤우를 바라보면서 동하는 의문만 들었다.“왜 그래?”“아니야.”순간 전과 상반되는 쌀쌀한 모습을 보이면서 박윤우는 다시 덧붙였다.“그만 가 볼게. 시간도 많이 늦었고 너랑 이렇게 놀 시간도 없어.”이윽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박윤우는 떠났다.동하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바로 일어서서 뒤따라 나섰다.“윤우 형, 우리 조금만 더 놀고 가자.”“아니면 내가 형네 집으로 갈게. 그러면 안 돼?”멋있고 의리도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된 동하는 이대로 박윤우와 헤어지기 아쉬웠다.박윤우는 걸음을 멈추고서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안 돼. 네 외할머
박윤우 이름 석 자를 듣게 되는 순간 정수미는 확신이 들었다.동하를 때린 사람이 바로 박윤우라는 것을.이윽고 정수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고영란을 바라보면서 물었다.“사돈, 박윤우가 누구죠?”옆에 서 있던 함미현은 일찍이 윤소현에게서 박윤우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엄마, 박윤우는 박민정 씨 아들일 거예요.”‘박민정? 또 걔야?’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정수미는 씩씩거리면서 고영란에게 말했다.“손님 대접이 참으로 특이하네요! 사돈, 설명 좀 해주시죠!”고영란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슨 오해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박윤우는 워낙 몸이 좋지 않고 먼저 나서서 남을 때릴 아이도 아니니 말이다.“오해요? 우리 동하를 보고서도 오해라는 말이 나오세요? 우리 동하 얼굴 좀 보시고 말씀하시라고요!”차라리 자기가 맞았으면 하는 정수미는 동하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바로 비서에게 의사까지 불러오라고 했다.어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동하는 그들이 오해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설명하려고 했었다.그러나 바로 그때 정수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돈, 박윤우 좀 데리고 나오시죠. 우리 동하한테 직접 사과하라고 하세요.”“사과하지 않으면 소현이랑 남우가 파혼하는 건 물론이고 앞으로 우리 두 가문은 원수 사이가 될 것입니다!”함미현과 동하가 정수미의 전부이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정수미는 유씨 가문 사람에게 미움을 사는 것 따위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갑작스러운 상황이 고영란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도우미에게 눈짓을 보냈다.“윤우 데리고 와. 민정이도 같이.”자기 손자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고영란이지만, 그래도 똑똑히 물어보고 싶었다.같은 시각, 박민정은 방에서 쉬고 있었고 박윤우는 바로 옆에서 장난감으로 놀고 있었다.급하게 달려온 도우미가 다급한 목소리로 박민정에게 말했다.“큰 사모님, 큰일 났습니다.”“정 대표님께서 윤우 도련님이 정 대표님 외손자인 동하 군을 때렸다면서 지금 언성을 높이고 계십니다.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