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박민정은 더는 거절하고 싶어도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세 사람은 함께 문을 나섰고 유남준은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유남우가 보는 앞에서 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을 꼭 잡고 거의 박민정에게 누울 기세로 온몸을 기울이고 있었다.박민정은 그런 유남준을 거절하지 않고 아이를 달래듯이 마음껏 기대게 가만히 두었다.“민정아,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유남우가 물었다.박민정은 본래 유남준을 데리고 김인우에게 가려고 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두원 별장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쩌면 남준 씨도 좋아할 거예요.”박민정이 말했다.유남우는 그 말을 듣고서 운전 기사에게 두원 별장으로 향하라고 했다.두원 별장에 이르자 박민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남준에게 말했다.“남준 씨, 우리 집에 도착했어요.”이윽고 유남준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유남우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따라서 들어갔다.왠지 모르게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것만 같았다.거의 바보나 다름없는 유남준임에도 불구하고 박민정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싫어하지도 않았다.그런 모습에 유남우는 의문이 들면서 답답하기도 했다.두원 별장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졸음이 밀려왔다.“나 잘래.”“그래요. 우리 그만 침실로 가요.”박민정은 두 사람이 전에 지냈던 침실로 유남준을 데리고 갔다.유남준을 침대에 눕히고 나서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모든 걸 마치고서 박민정은 김인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어떻게든 몰래 두원 별장 뒷문으로 들어오라면서 침실 위치까지 알려주었다.좀 지나서 박민정은 핸드폰을 끄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에 앉아 있는 유남우는 상상치도 못했을 것이다.박민정이 몰래 김인우를 불렀다는 사실을 말이다.“형은 자?”유남우가 물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네, 이제 막 잠들었어요. 언제 깰지 모르니 일 있으면 먼저 가 봐요. 깨고 나면 바로 저택으로 데리고 갈게
유남우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박민정도 시선을 돌렸다.긴장감을 숨길 수 없는 순간이었다.‘인우 씨 왔겠지?’다행히도 유남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면서 웃었다.“나도 알아. 넌 예전의 박민정이 아니라는 거.”“저쪽으로 가서 산책하자.”유남우가 말했다.“네.”‘휴. 다행이다.’한편, 김인우는 이미 두원 별장에 이르렀고 뒷문으로 들어와서 유남준의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검사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없었던 박민정은 계속 유남우랑 산책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이것저것 화제를 찾아가면서 얘기를 이어 나갔다.그렇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박민정은 내용을 확인하고 유남우에게 말했다.“우리 그만 가요. 남준 씨도 슬슬 깨어날 것 같아요.”달콤하기 그지없는 박민정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남우는 사실을 들추어내기에 안타까웠다.“그래.”함께 두원 별장으로 다시 들어온 두 사람은 유남준이 아직 자는 것을 보게 되었다.허기가 진 박민정은 배달 음식을 시켜 유남우와 함께 먹었다.이러한 분위기가 하도 오랜만인 유남우이다.함께 배달 음식을 먹고 산책하고 수다를 떠는 것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커플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배가 점점 커지고 있는 박민정은 뒤돌아서면 배가 고팠다.하지만 유남우 앞이라 다소 민망한지 그렇게 마음 편히 먹지는 못했다.그 모습을 단번에 알아차린 유남우가 먼저 말했다.“많이 먹어. 음식 낭비면 벌받아.”순간 박민정은 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네!”이윽고 아주 마음 편히 본격적으로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그런 박민정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유남우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그때 음식을 가져다주었을 때도 박민정은 유남우 앞이라 조신하게 조금만 먹었었다.오늘처럼 ‘음식 낭비면 벌받아’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 편히 먹고 했었다.‘예전 그대로네... 이 모습만...’지난 추억에 잠시 잠겼던 유남우는 고개를 숙이고 헛기침까지 했다.“괜찮아요?”박민정은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걱정하면서
유남준의 품에 기대고 있는 박민정은 순간 의문이 들었다.“남준 씨...”의문을 드러내려고 하던 순간 유남준의 우람한 몸집이 그대로 박민정에게 쏠렸다.유남준은 자기 머리를 꽉 잡고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머리가 너무 아파.”“머리 아파요? 의사 불러올게요.”“가지 마. 나 좀 안아줘.”박민정은 유남준의 말을 듣고서 큰일이 아니라 판단했다.“남준 씨, 생각난 거라도 있는 거예요?”“쉿, 아무 말도 하지 마. 여기 위험해.”유남준이 말했다.박민정은 순간 토끼 눈이 되었지만, 유남준의 말대로 입을 다물었다.그렇게 한참이나 꼭 끌어안고 나서 유남준은 또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졌다.박민정은 바로 손을 내밀어 유남준의 이마를 만져보았는데, 열이 펄펄 나고 있었다.지체하지 않고 박민정은 바로 해열제를 먹이고 젖은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 주었다.그 모든 걸 밖에서 보고 있던 집사는 보기만 하고 끼어들지 않았다.유남준의 상황은 그때그때 달랐고 자기 전에 박민정은 대화를 시도했지만, 유남준은 또다시 바보가 되어 있었다.지금의 유남준은 아직 회복 중이고 완전한 바보가 된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박민정이다.다음 날, 월요일이라 박민정은 예전 그대로 회사에 갔다.하지만 호산 그룹에 이르기도 전에 차 한 대가 박민정을 막아섰다.서다희가 차에서 내려오면서 입을 열었다.“사모님.”박민정은 그 모습을 보고서 바로 차에서 내렸다.“서 비서님,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대표님은 좀 괜찮으세요?”서다희는 지금 유남준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이고 주위에는 온통 유남우 쪽 사람들이다.IM 그룹의 대표가 유남준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서다희는 유남우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거의 숨어서 지내고 있다.“남준 씨는 괜찮아요.”박민정의 대답에 서다희는 한시름을 놓게 되었지만 그래도 귀띔을 해주었다.“사모님, 고맙습니다만 조금만 더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대표님 곁에 꼭 있어 주시고 절대 그 어떠한 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박
“왜 밖에 서 있는 거예요? 들어와요.”유리문을 통해 박민정을 보게 된 유성혁이 말했다.지금 유성혁은 박민정의 온몸을 위아래로 열심히 훑고 있다.비록 임신한 몸으로 약간 살이 찐 박민정이지만 아리따운 모습은 여전했으니 말이다.옥에 티라면 얼굴에 흉터가 생긴 것이다.박민정은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입을 열었다.“유 팀장님, 저 찾으셨어요?”유성혁은 등을 의자에 기댄 채 한 손으로 턱을 짚고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했다.“큰일은 아니고 일단 앉아봐요.”박민정이 의자를 빼면서 앉자 유성혁은 다시 물음을 던졌다.“지난달에 실적 1위 했다면서요?”“네.”“여 팀장으로서 꼴찌를 했었던 마케팅 5팀을 한 달 내로 실적 1위로 만들다니... 대단하네요.”박민정은 도통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알 수 없었다.“과찬이십니다.”유성혁은 다리까지 꼬고서 본격적으로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남준이랑 이혼했다면서요? 걔도 참, 이렇게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를 싫어하고 이혼을 하다니 내가 다 아쉽네요.”사적인 일을 꺼내기 시작하자 박민정은 눈빛이 싸늘해졌다.“유 팀장님, 분부하실 일 없으시면 그만 가 보겠습니다.”이윽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유성혁은 그 모습을 보고서 따라나서면서 박민정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민정아, 여기 우리 둘밖에 없어. 나 이렇게 온 것도 너 절대 가만히 두지 않으려고 마음먹고 온 거야.”“근데 내 여자로 살겠다고 네가 고개만 끄덕인다면 가만히 둘 의향은 있어.”유성혁은 나지막한 소리로 협박을 더 했다.바보가 된 유남준이 나서서 도와줄 리도 없는 상황이니 더더욱 대놓고 위협하고 있는 유성혁이다.유성혁은 일단 찜해 놓은 여자라면 모조리 자기 여자로 만드는 ‘습관’이 있다.그런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박민정은 바로 유성혁의 손을 뿌리쳤다.“유 팀장님 와이프도 아는 일인가요?”유성혁은 흠칫거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그럴 리가.”“그럼, 지금 가서 물어봐 봐요. 유 팀장님 와이프도 좋다고 하
최현아가 요구하는 대로 모조리 주고 있는 박민정이다.박민정은 지금 이러한 상황으로 조급해하지는 않았다.왜냐하면 히든카드를 손에 꼭 쥐고 있기 때문이다.만약 최현아와 유성혁이 계속 박민정을 사지로 몰아넣게 된다면 박민정 역시 두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온갖 잘난 척은 다 하더니 꼴좋다.”박민정의 프로젝트를 빼앗아 온 최현아는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회사 복도에서 마주친 두 사람, 최현아는 박민정을 보자마자 그만 참지 못하고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너 그거 알아? 나 프로젝트 몇 개 더 책임지게 됐어. 너희 5팀에서 힘들게 맺은 고객이라면서? 아무튼 수고했어.”“나도 염치가 있어서 받기만 하는 건 좀 그렇고 해서 너희 팀으로도 프로젝트 몇 개 보냈어. 대표님한테 내가 널 구박했다고 말하지는 말고.”박민정은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최현아를 바라보았다.“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고자질할 리도 없고 1팀에서 보낸 프로젝트는 도로 돌려보낼 테니 용돈으로 챙기세요.”생각할 것도 없이 최현아가 보낸 프로젝트는 절대 좋을 리가 없고 수익도 엄청나게 적을 것이다.최현아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바로 이를 악물고 비아냥거렸다.“박민정, 너 언제까지 그렇게 도도한 척하는지 두고 볼 거야. 넌 지금 유씨 가문에서 키우는 개나 다름없어!”“네 뱃속에 유씨 가문의 핏줄이 없었더라면 숙모님이 널 회사에 남겨두셨을 것 같아? 일개 팀장 주제에 어디 감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건데!”박민정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지금으로서는 최현아 부부에 맞설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다행히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고영란이 있었다.오후, 고영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일은 좀 어때? 안 힘들어? 힘들면 내가 남우한테 얘기해 놓을게. 집에서 쉴 수 있게끔 말이야.”“앞으로 달마다 20억 줄 테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지내.”고영란의 목숨을 구해준 뒤로 고영란이 자기한테 이렇게까지 잘해 줄 것으로 생각지도 못했다.
박민정은 진서연에게 정민기를 소개해 주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진서연을 차에 태우고 나서 바로 박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보스, 선물로 뭘 가지고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차 안에서 진서연이 물었다.“뭔데?”박민정은 어리둥절한 채로 되물었다.지금의 박민정은 예전과 달리 자기한테 너무 관심이 없다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 진서연이다.“해외에서 제가 보스 앞으로 인맥을 좀 쌓았거든요.”“그리고 연지석 씨께서 대신 좀 전해주라고 음식을 줬고요. 에리 씨는 새로 녹음한 곡을 전해달라고 했고요.”박민정은 음식이랑 에리의 곡에 대해서 큰 반응이 없었지만, 해외 인맥에 대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너무 잘 됐어!”박민정은 흥분한 마음에 진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넌 정말로 행운의 여신이야!”진서연은 다소 의문이 그려졌다.“그 어떠한 노력도 없이 생긴 것도 아닌데 행운의 여신이라니 말도 안 돼요.”박민정은 웃으며 말했다.“여하튼 넌 행운의 여신이 맞아.”박민정은 이미 탐욕이 끝이 없는 최현아 부부를 어떻게 처리할지 계획이 그려졌다.“해외에 있는 그분들께 연락 좀 해 줘. 나랑 계약 좀 하자고.”돌아오자마자 바로 박민정과 업무상의 문제로 얘기를 주고받게 될 것으로 생각지 못한 진서연이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박씨 가문 본가에 이르게 되었다.박민정은 진서연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고 정민기가 있는 객실 밖으로 다가갔다.“얼마 지나지 않으면 윤우랑 같이 올 거야.”박민정은 시계를 확인하면서 말했다.전에 했었던 말을 기억하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서 진서연은 감격해 마지 못했다.“보스, 역시 우리 보스밖에 없어요!”“민기 씨는 말수가 적은 편이야. 네가 나서서 많이 얘기해야 할 거야.”말을 내뱉자마자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진서연은 단번에 긴장하기 시작했다.솔직히 외모도 기질도 일반인보다 한 수위인 정민기이다.진서연이 바라오던 미래의 남편 이미지에 적합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민기 씨,
잔뜩 의기소침해진 진서연을 박민정은 천천히 위로해 주었다.“서연아, 너무 그러지 마. 넌 여중호걸이고 절대 남에게 못지않은 존재야! 너무 그렇게 자신을 내리깍지 마.”진서연은 쿠션 하나를 안고서 잔뜩 힘이 빠진 채로 말했다.“보스, 그만 좀 놀리세요.”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진서연이다.싸움할 줄도 알지만, 정민기 같은 남자는 자기한테 의지할 수 있는 여린 여자를 좋아할 것이라면서.“내가 나서서 두 사람 이어줄까?”박민정은 지금껏 소개팅 주선을 자처한 적이 없지만, 진서연과 정민기만큼은 이어주고 싶었다.진서연은 귀엽고 정민기는 멋지며 외적으로도 선남선녀가 따로 없을 것 같았다.게다가 싸움을 좀 할 줄 아는 진서연이기에 정민기와 배우면서 겨루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아니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진서연은 바로 박민정을 말렸다.“그냥 단순히 민기 씨 외모에만 마음이 쏠린 것이고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감정은 아니거든요.”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했다.“알았어. 그래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만 해.”진서연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게 할게요.”“오늘 뭐 먹고 싶어?”“뭐든 다 좋아요.”“참, 보스, 저 이쪽 회사 등록 절차도 모두 마쳤어요.”“벌써?”진서연의 업무 효율에 다시금 감탄한 박민정이다.“당연하죠! 보스께서 맡기신 일인데 바로바로 끝내야죠. 근데 호산 그룹에서는 언제 나오세요?”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직은 때가 아니야. 서연아, 일단은 너도 호산 그룹으로 들어와서 나 좀 도와야 할 것 같아.”호산 그룹의 원래 직원보다는 그래도 진서연이 더욱 믿음직스럽다.진서연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늘 바로 호산 그룹 마케팅 부서에 이력서 넣을게요.”박민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말했다.“역시 말하지 않아도 아는구나.”진서연은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마케팅 부서에 들어갔고 그 누구도 진서연의 정체를 모르니 업무를
상황상 유남준은 바로 대답할 수 없어 손을 내밀어 박민정을 꼭 끌어안았다.순간 그대로 얼어붙은 박민정이다.“남준 씨...”유남준은 고개를 숙인 채 박민정의 품에 살포시 기대었다.“자자.”예전이라면 상상치도 못한 유남준의 말투와 행동이다.박민정은 지금 이런 유남준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서 완쾌한 유남준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다.유남준에게 이불을 꼭 덮어주고 난 뒤, 박민정은 어깨까지 부드럽게 토닥거려주면서 재우기 시작했다.“그래요. 우리 그만 자요.”불까지 끄고 눈을 감고 편안하게 누우니 바로 잠에 들었다.다음날,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다급한 벨 소리에 박민정은 그만 깨어나고 말았다.핸드폰을 들어 확인해 보니 간병인이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윤소현이 또 찾아갔나?’“민정 씨, 저... 살려... 살려...”전화를 받자마자 기진맥진한 간병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주머니, 괜찮으세요?”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은은하게 한 남자의 목소리만 들려왔다.“젠장! 누구한테 전화한 거야!”이윽고 전화는 끊겨버렸다.이상함을 감지하고 박민정은 바로 일어나서 간병인의 집으로 향했다.허겁지겁 달려온 박민정에게 간병인의 이웃은 간병인 일가족은 얼마 전에 이미 이사하였다고 알려주었다.박민정은 마냥 이상하기만 하여 이웃에게 간병인의 행방에 관해 물었으나 이웃 역시 모르는 눈치였다.돌아가는 길에 박민정은 계속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이가 없었다.남의 일에 계속 신경과 시간을 들일 여유가 없어서 정민기에게 시간 내서 한번 알아보라고 했다.모든 걸 당부하고 나서 박민정은 회사로 향했다.오늘 회사에는 새 직원이 입사했고 그 사람은 바로 진서연이었다.진서연은 유학파 인재로서 모든 면에서 우수한 사람이다.오전에 면접을 보자마자 바로 합격할 만큼으로 말이다.최현아는 실력파 진서연을 보자마자 바로 마케팅 1팀으로 끌어당겼다.마케팅 1팀으로 들어가게 된 진서연은 바로 박민정에게 상황을 보고했다.[보스, 저 마케팅 1팀 내부로 들어
박민정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했다.심각한 정신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외 대기업들과 협력할 수 있지?그녀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는 기분이었다.“민정아, 무슨 생각해?”유남우가 차에 올라탄 그녀를 보고 조용히 묻자 박민정이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니에요.”유남우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박민정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며 물었다.“혹시 저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없어요?”이 말에 유남우의 목젖이 떨렸다.“민정아, 날 믿어줘. 내가 너를 해칠 리 없잖아.”박민정도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요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정말 기억이 흐릿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죠?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질 않아요. 그리고 정숙 아줌마에 대해서도...”유남우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기억이 안 나면 그냥 잊어버려. 굳이 떠올리려고 하지 마.”그는 다시 박민정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박민정은 이번에도 피했다.유남우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지난 1년 넘게 쌓아온 노력이 허물어질까 봐 두려웠다.‘여기서 모든 걸 망칠 순 없어.’“전에 네가 꽃밭을 보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래서 내가 비행기 표를 준비했어. 게다가 꽃으로 가득한 저택도 한 채 샀는데 정말 아름다워.”그는 비행기 표를 꺼내 박민정에게 내밀었다.박민정이 표를 들여다보니 출발 시간은 오늘 새벽이었다.“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난다고요?”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여기 환경이 네 회복에 좋지 않은 것 같아. 의사도 그랬잖아. 치료를 조금만 더 받으면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그때는 더 이상 과거를 물어볼 필요도 없을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부여잡았다.“어쩌다가 교통사고로 기억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자, 피곤할 텐데 이제 좀 쉬어.”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또 부부라니?박민정의 눈에 의심이 가득했다.‘혹시 이 남자, 머리가 좀 이상한 거 아니야?’“저기요, 혹시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제가 어떻게 당신의 아내일 수 있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깊이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엔 떠날 기색이 없었다.“우린 단순히 결혼한 사이가 아니야. 아이만 네 명이나 있잖아. 이 모든 걸 잊어버린 거야?”‘결혼에, 아이가 넷이라니!’박민정의 얼굴에 더욱 큰 충격이 스쳤다.“유남준 씨, 농담하지 마세요. 저한테 애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유남준은 그녀의 이런 반응에 마음이 저려왔다.“유남우가 대체 너한테 뭘 한 거야?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데?”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휴대폰을 들어 증거를 보여주겠다는 듯 전화를 걸었다.“지금 바로 윤우와 예찬이에게 전화해 볼게. 직접 보고 나서도 믿기 어려우면 그때 말해.”영상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화면 속 아이가 소리쳤다.“나쁜 아빠, 왜 전화했어요?”유남준이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건 처음이라 여덟 살의 박윤우는 놀라움과 의아함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보이는 박민정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엄마! 엄마! 엄마, 진짜 엄마에요? 나 꿈꾸고 있는 거 아니죠? 정말 엄마 맞아요?”아이가 흥분해서 소리치자 박민정의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웠다.“네가... 내 아들이라고?”박윤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엄마, 무슨 말이에요? 전 당연히 엄마 아들이죠. 설마 절 잊은 건 아니죠? 아니면 장난치는 거예요?”박민정의 눈앞에 나타난 이 귀여운 소년은 그녀의 상상을 넘어섰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듯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분명 당신이 꾸민 일이죠, 그렇죠?”그러나 화면 속 박윤우는 계속 울먹였다.“엄마, 왜 그래요? 아픈 거예요? 나쁜 아빠, 엄마 얼른 데려와요. 저랑 형, 동생들도 엄마 너무 보고 싶어요.”유남준은 다급한 박윤우를 진정시키며 말했다.“알겠으니까
“월급 정산하고 당장 꺼져요!” 제임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네...”그 직원은 이렇게 쉽게 직장을 잃을 줄은 몰랐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며 고개를 숙였다.주영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서 있었고 잠시 후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변명했다.“사장님, 정말로 박민정이 먼저 손을 댔습니다!”제임스는 더욱 분노하며 소리쳤다.“주 비서가 여기 버젓이 서 있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지금 당장 사모님께 사과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를 적으로 돌리는 셈입니다.”주영리는 눈가가 붉어졌지만 제임스를 적으로 돌릴 자신은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박민정에게 사과하는 일이 너무 억울하고 치욕스러웠다.박민정도 유남준이 이렇게까지 영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의 가벼운 한마디가 사장까지 움직이게 하다니,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주영리는 어쩔 수 없이 박민정을 향해 다가가 말했다.“죄송합니다, 유 사모님. 다 제 잘못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박민정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병원에서 보내온 검사 결과가 떠 있었는데 물컵 안에서 약물의 잔여물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박민정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로 다 해결된다면 경찰은 왜 필요하겠어요?”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주영리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휴대폰을 들어 신고 전화를 걸었다.제임스는 조금 의아했다. 이런 싸움 문제는 경찰을 부르는 것보다 내부에서 해결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박민정이 그쪽을 향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었다.“어제 밤 회사 동료가 제게 약을 탄 음료를 건네고 저를 어떤 남자의 방으로 보냈어요. 여기에 관련 CCTV 영상과 병원의 감정서가 있습니다.”이 말을 들은 직원들은 웅성거리며 속닥이기 시작했다.“세상에... 어제 밤 민정 씨가 자발적으로 최 사장을 따라간 줄 알았는데, 사실이 아니었다니?”“주 비서가 이런 짓까지 하다니
“지금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주 비서, 왜 먼저 손을 댄 겁니까?” 제임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질책하자 주영리는 억울한 표정으로 먼저 변명했다.“사장님, 먼저 손을 댄 건 박민정이에요. 저는 단지 방어를 했을 뿐입니다.”제임스는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어서 손부터 놔요!”주영리는 마지못해 박민정을 풀어주면서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위협했다.“오늘은 운이 좋았네. 두고 봐, 회사에 계속 있는 한 내 손에서 벗어나진 못할 거야.”박민정은 주영리와 다른 여자가 잡아당겨 흐트러진 옷을 정리한 뒤, 자리에 앉았다.‘병원에서 감정 결과만 나오면 누가 회사를 떠날지 뻔히 알겠지.’방금 두 여자를 상대한 탓에 박민정의 손과 얼굴에는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상처를 처리하며 사장과 유남준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한편, 주영리는 키 크고 잘생긴 유남준을 보고 자연스레 다가갔다.“사장님, 이분은 누구신가요?”제임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은 주영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박민정에게 걸어갔다.박민정의 얼굴과 손에 난 상처를 보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그 여자 말고 또 누가 너한테 손댔어?”박민정은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박민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 사이 주영리가 다가왔다.“아, 유 대표님이시군요! 방금은 오해였어요. 근데 박민정 씨 그렇게 무고하지 않아요. 방금 제 뺨을 두 대나 때렸어요.”주영리는 유남준을 보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이렇게 잘생기고 돈도 많은 남자라니. 좀 더 얘기 나눠봐야겠어.’그러나 유남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내 아내가 누구를 때리든 무슨 문제가 됩니까?”아내?주영리는 멍해졌다.박민정도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언제 이 사람 아내가 됐지? 난 남우 오빠 여자
주영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멀지 않은 곳에서 최 사장이 거대한 트럭에 치여 십 미터나 튕겨 나간 것이다. 그의 상태를 보니 살아남는다고 해도 불구가 될 게 뻔했다.주영리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다.밖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북적였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신을 차린 주영리는 생각했다.‘최 사장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이제 협력이 취소될 일은 없겠지.’불안과 안도의 감정을 동시에 품고 그녀는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주 비서님, 무슨 일이에요?”동료들은 그녀를 둘러싸며 묻기 시작했는데 저마다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주영리가 회사에서 쫓겨날 거라고 믿고 그녀의 자리와 권력을 탐내는 듯한 눈빛이었다.이 회사에 진정한 우정 따위는 없었다. 모두가 경쟁자일 뿐, 주영리가 쫓겨나면 비서 자리는 새로운 사람이 차지할 터였다.얼굴이 창백해진 주영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아까 최 사장님이 나가다가... 트럭에 치였어요.”“뭐라고요?”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박민정 역시 믿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그렇게 사고를 당했다니.잠시 후, 아래층에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몇몇 직원들은 구경하려고 달려 나갔고 돌아온 이들은 안타까워하며 수군거렸다.“진짜 크게 당했어. 이미 손쓸 방법도 없대. 세상에, 이렇게 될 줄이야.”그 중 한 사람이 박민정을 향해 말했다.“박 비서, 그래도 마음은 좀 쓰이겠네.”박민정이 냉소적으로 대꾸했다.“마음 쓸 이유가 없어요. 최 사장님과 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직원들은 이 말을 듣고 비웃기 시작했다.“참, 사람 너무 냉정하다. 오늘 아침까지 그 사람 차 타고 출근하더니 이제 와서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발뺌해?”“그래도 한때 서로 좋았을 텐데 이렇게 단칼에 끝내는 것도 참 매정하네.”그들의 말은 점점 더 독설로 변했다.하지만 박민정은 이들의 조롱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때 주영리가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최
박민정은 물컵을 챙긴 뒤 보안실로 향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그녀는 경비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넸고 곧바로 어제 퇴근 후의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영상 속에서 주영리가 자신의 물컵에 뭔가를 넣는 모습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좋아, 아주 좋아.’증거는 충분했다.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박민정은 일부러 화장실에 간 척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물컵 속 남은 물을 감식 의뢰하기 위해서였다.컵에 남아 있는 물에 약물이 들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했으니까.병원을 다녀오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회사 내에서는 이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보란 듯이 대놓고 결근이네. 뭐, 이제는 최 사장님 같은 백이 있으니까 다 무시하나 봐. 화장실 간다더니 한 시간은 넘게 있었을걸?”질투 어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속삭였지만 박민정은 이런 말을 신경 쓸 리 없었다.한편, 주영리는 책상 한쪽에 앉아 있었지만 마냥 긴장을 풀지 못했다.직속 상사인 제임스가 아까 말하기를, 곧 최 사장님이 회사를 방문한다고 했고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직접 찾겠다고도 했다.주영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설마 최 사장이 박민정의 말을 듣고 그녀의 편을 들어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닐까?그녀는 불안에 휩싸여 일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결국, 최 사장이 들어왔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주 비서, 당장 이리 와!”최 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주영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에 손이 떨렸다.밖에서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모두 최 사장이 박민정을 위해 직접 나선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하던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박민정 역시 이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었다.‘참 간사하네.’휴게실.최 사장은 들어오자마자 주영리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너, 네가 어제 나를 죽일 뻔한 거 알아?”주영리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최 사장님, 무슨 말씀이
주영리는 우유를 마시며 비웃듯 고개를 끄덕였다.“참나, 그때 밥 먹을 때는 얼마나 고상한 척하던데. 뒤에서는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옆에 있던 동료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요. 어쩌면 이제 최 사모님이 됐을지도 모르잖아요. 괜히 건드렸다가 큰일 난다고요.”주영리는 조롱하듯 덧붙였다.“흥, 그 여자가 사모님 자리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예쁜 여자는 넘쳐나는데 고작 그런 애가? 겁낼 거 없어요.”다른 여직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맞아요. 겨우 그런 걸로 뭐가 무섭다고. 하!”주영리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때 누군가 외쳤다.“어? 저거 봐, 한정판 벤틀리잖아! 혹시 회사에 또 대형 고객이 온 거야?”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그 차로 향했다.그리고 곧이어 그 차에서 내리는 박민정을 보고는 다들 말을 잃었다.주영리는 한순간 멍해졌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봤죠? 저거 분명 최 사장님 차일 거예요.”곁에 있던 동료가 주영리를 치켜세우듯 말했다.“주 비서님, 진짜 대단하네요.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저 여자 진짜 못됐네요.”박민정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 사이에 있는 주영리를 발견했다.그녀는 손을 꽉 쥐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주영리는 원래 박민정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 박민정이 고급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같은 부류라고 착각했다.뻔뻔하게도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민정 씨, 어제 재미있었어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맙다고요?”박민정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올라가더니 주영리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팍! 소리가 울리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주영리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아파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날 쳤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오늘 민정 씨가 그 고급 차 타고 출근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천한 주제에 겉으로만 고상한 척하려고?”주변 동료들이 이 장면을 지켜
유남우의 온화한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그래? 정말 우연이네.”그는 여태껏 박민정을 잘 감춰왔지만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이게 유남준에게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어쨌든 형의 겉모습에 속아선 안 돼. 그리고 회사에서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다면 진작에 나에게 말했어야지.”유남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뭐든 오빠한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제힘으로 해내고 싶어요.”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남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대로 둘 수 없어요? 회사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주영리가 감히 자신을 함부로 대하다니, 그녀는 반드시 주영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부탁이에요.” 박민정은 손을 뻗어 유남우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도와줘요. 네?”박민정의 간절한 애원이었지만 유남우는 난감한 얼굴로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돼. 난 네가 걱정돼서 안심할 수가 없어.”박민정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하지만 저는 이 일이 정말 필요해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왜 꼭 떠나야 하는 거예요? 그냥 오빠 형 문제잖아요. 그걸 가지고 저를 강요할 순 없잖아요?”유남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만하자. 알겠어. 회사 문제는 정리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그 뒤엔 같이 떠날 거야.”박민정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지난 1년간 그녀는 모든 걸 유남우에게 맞춰왔다.그를 사랑했으니까.하지만 겨우 이 작은 부탁조차 들어주지 않다니.박민정이 말을 잃고 침묵하자 유남우는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눈치채고 달래듯 말했다.“화내지 마. 다른 곳으로 가도 네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이 원래는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기침 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왜 이렇게 심하게 기침해요? 혹시 병이 재발한 거 아니에요?”유남우는 그
박민정은 처음으로 유남우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유남우를 부축하며 유남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저기요, 형이라는 사람은 원래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빠가 몸이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어떻게 오빠를 때릴 수 있어요? 게다가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체면 하나 세워주지 않고요.”박민정은 이렇게 지나치게 차가운 형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꾸짖음에 유남준은 마치 목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빠, 우리 그냥 가요.”박민정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남우에게 말했다.“그래.”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유남준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순간적으로 막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예전에 자신만을 사랑하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를 이렇게 따뜻하게 대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한편 최 사장의 정보를 모두 조사한 서다희는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과 대표님이 함께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그는 막 부르려던 찰나, 대표님이 방에서 지친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고 멈췄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서다희는 한 걸음씩 유남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젯밤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성은 최씨라고 하더군요. 본토에서 활동하는 무역상입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남준이 고개를 들었다.“뭐 해야 할지는 알겠지?”“네.” 서다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사람을 붙여서 민정이와 유남우를 따라가게 해.”“유... 유남우 도련님이요?”서다희는 놀랐고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아까 대표님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 동생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이 왜 유남우와 함께 떠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더는 묻지 않고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은 유남우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내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많이 아프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그러나 유남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