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진서연에게 정민기를 소개해 주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진서연을 차에 태우고 나서 바로 박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보스, 선물로 뭘 가지고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차 안에서 진서연이 물었다.“뭔데?”박민정은 어리둥절한 채로 되물었다.지금의 박민정은 예전과 달리 자기한테 너무 관심이 없다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 진서연이다.“해외에서 제가 보스 앞으로 인맥을 좀 쌓았거든요.”“그리고 연지석 씨께서 대신 좀 전해주라고 음식을 줬고요. 에리 씨는 새로 녹음한 곡을 전해달라고 했고요.”박민정은 음식이랑 에리의 곡에 대해서 큰 반응이 없었지만, 해외 인맥에 대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너무 잘 됐어!”박민정은 흥분한 마음에 진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넌 정말로 행운의 여신이야!”진서연은 다소 의문이 그려졌다.“그 어떠한 노력도 없이 생긴 것도 아닌데 행운의 여신이라니 말도 안 돼요.”박민정은 웃으며 말했다.“여하튼 넌 행운의 여신이 맞아.”박민정은 이미 탐욕이 끝이 없는 최현아 부부를 어떻게 처리할지 계획이 그려졌다.“해외에 있는 그분들께 연락 좀 해 줘. 나랑 계약 좀 하자고.”돌아오자마자 바로 박민정과 업무상의 문제로 얘기를 주고받게 될 것으로 생각지 못한 진서연이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박씨 가문 본가에 이르게 되었다.박민정은 진서연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고 정민기가 있는 객실 밖으로 다가갔다.“얼마 지나지 않으면 윤우랑 같이 올 거야.”박민정은 시계를 확인하면서 말했다.전에 했었던 말을 기억하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서 진서연은 감격해 마지 못했다.“보스, 역시 우리 보스밖에 없어요!”“민기 씨는 말수가 적은 편이야. 네가 나서서 많이 얘기해야 할 거야.”말을 내뱉자마자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진서연은 단번에 긴장하기 시작했다.솔직히 외모도 기질도 일반인보다 한 수위인 정민기이다.진서연이 바라오던 미래의 남편 이미지에 적합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민기 씨,
잔뜩 의기소침해진 진서연을 박민정은 천천히 위로해 주었다.“서연아, 너무 그러지 마. 넌 여중호걸이고 절대 남에게 못지않은 존재야! 너무 그렇게 자신을 내리깍지 마.”진서연은 쿠션 하나를 안고서 잔뜩 힘이 빠진 채로 말했다.“보스, 그만 좀 놀리세요.”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진서연이다.싸움할 줄도 알지만, 정민기 같은 남자는 자기한테 의지할 수 있는 여린 여자를 좋아할 것이라면서.“내가 나서서 두 사람 이어줄까?”박민정은 지금껏 소개팅 주선을 자처한 적이 없지만, 진서연과 정민기만큼은 이어주고 싶었다.진서연은 귀엽고 정민기는 멋지며 외적으로도 선남선녀가 따로 없을 것 같았다.게다가 싸움을 좀 할 줄 아는 진서연이기에 정민기와 배우면서 겨루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아니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진서연은 바로 박민정을 말렸다.“그냥 단순히 민기 씨 외모에만 마음이 쏠린 것이고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감정은 아니거든요.”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했다.“알았어. 그래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만 해.”진서연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게 할게요.”“오늘 뭐 먹고 싶어?”“뭐든 다 좋아요.”“참, 보스, 저 이쪽 회사 등록 절차도 모두 마쳤어요.”“벌써?”진서연의 업무 효율에 다시금 감탄한 박민정이다.“당연하죠! 보스께서 맡기신 일인데 바로바로 끝내야죠. 근데 호산 그룹에서는 언제 나오세요?”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직은 때가 아니야. 서연아, 일단은 너도 호산 그룹으로 들어와서 나 좀 도와야 할 것 같아.”호산 그룹의 원래 직원보다는 그래도 진서연이 더욱 믿음직스럽다.진서연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늘 바로 호산 그룹 마케팅 부서에 이력서 넣을게요.”박민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말했다.“역시 말하지 않아도 아는구나.”진서연은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마케팅 부서에 들어갔고 그 누구도 진서연의 정체를 모르니 업무를
상황상 유남준은 바로 대답할 수 없어 손을 내밀어 박민정을 꼭 끌어안았다.순간 그대로 얼어붙은 박민정이다.“남준 씨...”유남준은 고개를 숙인 채 박민정의 품에 살포시 기대었다.“자자.”예전이라면 상상치도 못한 유남준의 말투와 행동이다.박민정은 지금 이런 유남준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서 완쾌한 유남준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다.유남준에게 이불을 꼭 덮어주고 난 뒤, 박민정은 어깨까지 부드럽게 토닥거려주면서 재우기 시작했다.“그래요. 우리 그만 자요.”불까지 끄고 눈을 감고 편안하게 누우니 바로 잠에 들었다.다음날,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다급한 벨 소리에 박민정은 그만 깨어나고 말았다.핸드폰을 들어 확인해 보니 간병인이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윤소현이 또 찾아갔나?’“민정 씨, 저... 살려... 살려...”전화를 받자마자 기진맥진한 간병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주머니, 괜찮으세요?”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은은하게 한 남자의 목소리만 들려왔다.“젠장! 누구한테 전화한 거야!”이윽고 전화는 끊겨버렸다.이상함을 감지하고 박민정은 바로 일어나서 간병인의 집으로 향했다.허겁지겁 달려온 박민정에게 간병인의 이웃은 간병인 일가족은 얼마 전에 이미 이사하였다고 알려주었다.박민정은 마냥 이상하기만 하여 이웃에게 간병인의 행방에 관해 물었으나 이웃 역시 모르는 눈치였다.돌아가는 길에 박민정은 계속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이가 없었다.남의 일에 계속 신경과 시간을 들일 여유가 없어서 정민기에게 시간 내서 한번 알아보라고 했다.모든 걸 당부하고 나서 박민정은 회사로 향했다.오늘 회사에는 새 직원이 입사했고 그 사람은 바로 진서연이었다.진서연은 유학파 인재로서 모든 면에서 우수한 사람이다.오전에 면접을 보자마자 바로 합격할 만큼으로 말이다.최현아는 실력파 진서연을 보자마자 바로 마케팅 1팀으로 끌어당겼다.마케팅 1팀으로 들어가게 된 진서연은 바로 박민정에게 상황을 보고했다.[보스, 저 마케팅 1팀 내부로 들어
함미현은 그 말을 듣고서 탄복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언니,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윤소현은 남에게 추앙받는 기분을 몹시나 즐기는 사람이다.“너도 정씨 가문의 딸로서 앞으로 우리 회사에도 네 몫이 있게 될 거야.”함미현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그런 거 필요 없어요. 전 그냥 우리 동하만 회복하면 되고 우리 모자가 살 곳만 있으면 돼요.”그 말을 듣고서 윤소현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말로만 싫다고 하지 속으로는 얼마나 욕심내고 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돈을 마다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래?’‘그렇지 않고서야 박민정 대신 들어올 리도 없잖아.’“가자. 내려.”“네.”함미현은 차에서 내려 윤소현의 뒤를 따라서 호산 그룹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호화롭기 그지없는 실내장식에 함미현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약혼자가 이렇게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니... 정씨 가문도 돈이 엄청 많은 것 같던데... 팔찌 하나에 몇십억이 될 만큼.’‘안타깝게도 우리 남편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직장인일 뿐이네.’함미현은 팔찌를 만지면서 자기가 정말로 정씨 가문의 천금이었으면 했다.“전에는 무슨 일 했었어?”윤소현이 물었다.“아주 작은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했었어요.”함미현이 대답했다.일반 대학을 나온 함미현이라 그런 직업이 전부였다.윤소현은 정수미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함미현을 곁에 두면서 앞으로 가족 회사를 관리할 수 있게끔 배우라고 말이다.“그럼, 앞으로 나랑 같이 일하자. 임금은 네가 원하는 대로 줄게.”“정말이에요?”“그럼! 일단은 부사장으로 일하면 어때?”윤소현은 마음속으로 다 계획이 있었다.부사장이라고 한들 유명무실이니 말이다.정수미에게 자기가 얼마나 잘했는지 말할 것도 있게 되니 더할 나위 없는 계획이었다.“부 사장이요? 저 이제 막 일하기 시작했고 아는 것도 없는데...”함미현은 무척이나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괜찮아. 어차피 다 같이 배우면서 일하는 처지라 괜찮아.”윤소현은 이내 부드러운 모습
오후, 회의 시간.박민정도 함미현을 보게 되었는데 익숙하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간병인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박 팀장님, 여긴 제 친동생 함미현이라고 해요. 앞으로 우리가 하는 얘기를 미현이도 옆에서 들을 거예요. 제가 회사에 없다면 미현이한테 직접 얘기하시면 되고요.”윤소현은 아주 공손한 모습으로 말했다.정수미에게 있어서 함미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는 윤소현이다.따라서 만약 함미현이 박민정 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된다면 정수미가 절대 박민정을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회의를 마치고 나서 박민정은 함미현과 정씨 가문의 사이를 알아보라고 했다.그리고 그제야 정수미가 오랫동안 찾아다닌 친딸이 바로 함미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사실을 알게 된 박민정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팀장님, 조금 전에 온 함미현 씨말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팀원이 노크하고 들어왔다.박민정은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윤 대표님은요?”“윤 대표님은 산모에게 있어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면서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비즈니스상으로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함미현 씨에게 물으시라고 했습니다.”팀원은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맡긴 행위에 어이가 없었다.“그럼, 일단은 우리 회사 규칙대로 해요.”“네.”한편, 함미현 사무실에서.함미현은 어느새 녹초가 되어 있었다.줄지어 들어오는 직원들의 질문 공세에 말이다.“뭐가 이렇게 일이 많은 거야!”부사장으로 일하면 엄청 한가한 줄 알았는데 말이다.그렇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최현아가 또각또각 다가와서 문을 두드렸다.“부 사장님.”함미현은 의혹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누구시죠?”“안녕하세요. 최현아라고 합니다. 윤 대표님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고요.”“윤 대표님께서 몸이 좀 무거우셔서 먼저 가셨는데, 혹시나 홀로 감당하기엔 버거우실까 봐 저를 보내신 거예요. 좀 도와드리라고요.”최현아는 웃
“박 팀장님?”정수미는 의혹이 들었다.“누군데?”호산 그룹에서 책임성이 없는 사람을 보냈을 리가 없다면서 말이다.“박민정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박민정의 이름 석 자를 듣게 되는 순간 정수미는 바로 안색이 달라졌다.“또 박민정이야?”함미현은 갑자기 일그러진 정수미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왜... 왜 그러세요?”“박민정이라는 여자가 예전부터 네 언니 자주 괴롭혔었거든. 네 언니만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너까지 괴롭히다니! 자기가 무슨 아직도 유씨 가문의 작은 사모님인 줄 아나!”정수미는 유난히 화난 모습을 보였다.옆에서 묵묵히 모든 걸 보고 있던 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엄마, 저 오늘 검사받으러 가느라고 먼저 일어났었거든요. 저도 없고 하여 박민정이 우리 미현이를 부하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막...”“우리 미현이가 부하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딸인데! 미현이가 내 딸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정수미는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이때 윤소현은 다급히 해석하기 시작했다.“처음 소개할 때부터 제 친동생이라고 했었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냥 제 말을 무시한 것 같아요.”“널 무시한 게 아니라 우리 정씨 가문을 무시한 거야.”정수미는 본래 잠자코 있으려고 했으나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내일 호산 그룹에 같이 가야겠어! 대체 얼마나 기어오르는지 똑똑히 봐야겠어!”“네, 엄마.”‘박민정, 너 이제 끝이야!’한편, 박민정은 저택에서 유남준을 돌보면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전에 최현아에게 준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나서 또다시 프로젝트 몇 개를 가지고 왔는데, 유성혁은 그 모든 걸 최현아에게 주었다.그 프로젝트들은 모두 박민정이 해외에 있는 고객들과 체결한 것이다.“보스, 최현아가 거의 성공할 때 그분들께 프로젝트에서 빠져나오라고 할게요.”진서연이 전화로 말했다.“그래. 막대한 손실을 보게 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래야 최현아가 기어오르지 않을 거야.”“네!”내일 정수미가 회사로 찾아와
하물며 방성원에게는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배 딸이 있다.유남준은 그런 방성원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알았어.”방성원은 유남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그동안 방성원은 아이의 출산으로 유남준, 김인우와 연락이 뜸해졌었다.바로 그러한 이유로 유남우의 주의력은 방성원 쪽으로 향하지 않은 것이었다.이윽고 방성원은 소중한 보물을 조심스레 내놓듯이 자기 딸을 유남준에게 보여주었다.“남준아, 우리 딸 좀 봐봐. 엄청 예쁘지 않아?”두 뺨만 한 크기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딸의 모습에 사르르 녹아내린 방성원이다.그전까지 유남준처럼 아들만 생기게 될까 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예쁜 딸이었다.유남준은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예쁘네.”“그래도 딸이 좋아. 딸이 아빠한테는 최고야. 남준아, 너 앞으로 네 아들 교육 잘해야 할 거야. 남우처럼 저렇게 되게 하지 말고.”방성원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앞으로 자기 딸은 무조건 자기한테 효도를 다 할 것이라면서.방성원은 딸에게 뽀뽀하고 싶었지만, 어른에게 있는 세균이 아이한테 옮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딸바보나 다름없는 방성원의 모습에 유남준은 참지 못해 말했다.“나한테도 딸이 있을 거야. 민정이 지금 배 속에 아이가 둘이거든.”“또 아들만 둘이면 어떻게 하려고?”“그럴 리 없어.”“단언하기 힘든 일이야.”방성원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유남준은 점점 안색이 일그러지게 되었다.더는 아들을 안고 싶지 않았고 첫 아이로 딸을 안게 된 방성원이 무척이나 부러웠다.“나 좀 쉬고 싶어. 넌 제수씨한테 가 봐.”‘제수씨’ 석 자에 방성원은 바로 안색이 달라졌다.“알았어.”방성원은 딸을 가정부에게 맡기고서 침실로 돌아갔다.커다란 침대 위에 피부가 하얗고 머리카락은 새까만 여자가 누워있었다.여자는 방성원이 들어오는 것을 들었음도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방성원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이때
“팀장님, 대표이사실의 홍 비서님께서 조금 전에 오셨습니다.”“팀장님 출근하시자마자 바로 대표이사실로 오시라고 하셨습니다.”팀원이 박민정에게 보고를 올렸다.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바로 대표이사실로 가려고 했으나 팀원이 주저하면서 덧붙였다.“지엔 그룹 정 대표님께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팀장님께 책임을 물으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정수미?’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려줘서 고마워요.”이윽고 박민정은 화장실로 가서 어디론가 전화하고 난 뒤 대표이사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사무실 밖에서 몇몇 비서들은 좋은 구경이라도 난 듯이 박민정을 바라보았다.그때 홍주영이 다가와서 귀띔을 해주었다.“정 대표님께서 지금 엄청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아마 작은딸 때문일 거예요.”박민정은 홍주영이 먼저 다가와서 알려주리라고 생각지 못한 모습이었다.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홍주영에게 인사를 하고서 대표이사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박민정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가장자리에 앉은 유남우가 먼저 보였다.이윽고 소파에 앉아 있는 정수미 모녀 세 사람을 보게 되었다.함미현은 자기가 박민정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것으로 죄책감에 시달려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그러한 함미현의 모습을 보고서 정수미는 자기 딸이 박민정에게 하도 괴롭힘을 심하게 당하여 무서워서 못 보는 줄로 착각했다.“벌써 10시가 지났네? 호산 그룹 직원들의 복지가 이리도 좋은 건가?”정수미는 늦게 온 박민정을 겨냥하면서 말했다.유남우는 박민정을 한 번 보고서 그 말에 대답했다.“아니요. 박 팀장님은 다른 직원들과 다른 근무 조건으로 보통 3, 4시간만 출근하고 바로 퇴근하거든요.”“역시나 빽이 좋아서 그러한지 참 여러모로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네.”“그러나 우린 지금 비즈니스 관계고 우리 지엔 그룹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거든.”정수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서류를 가득 꺼내 들었다.“지금까지 해냈다는 게 겨우 이거야?”말하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