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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월계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0-29 19:42:56
첫 번째는 우리가 약혼하고 나서였다.

나는 마침내 대출금을 모아 회사와 가까운 곳에 신혼집으로 쓸 아파트를 마련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반대했고 가족들과 번갈아 가며 나에게 장단점을 설명해주었다.

결국, 내가 산 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20년 동안 살던 낡은 아파트였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은 그 아파트를 나에게 팔고 받은 돈과 내 결혼 혼수금을 더해 새로 개발된 강변 대형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때 아내는 내 품에 안겨 달콤하게 ‘여보'라고 불렀다.

그녀는 이 집이 최고의 학군과 가까워서 우리 아이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며 나와 함께 미래를 계획하고 꿈꾸었다.

그때 내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낡은 아파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니까.

회사와 좀 멀긴 했지만 내가 조금 더 노력해서 차를 사면 출퇴근도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아내가 유산한 직후였다.

그 당시 아내의 남동생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신부 쪽에서 1억 2천만의 혼수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집을 사는 데 돈을 다 써버렸기에 그녀는 나에게 동생의 결혼비용을 대신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아직 몸조리 중이었던 아내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간절히 바라보며 내가 들었던 것 중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용히 나를 ‘여보'라고 불렀다.

아내에 대한 사랑과 미안한 마음에 나는 술 접대 때문에 피를 토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때 받은 프로젝트 보너스 전액과 차를 사려고 모아둔 돈까지 모두 보태서 남동생의 혼수금을 마련했다.

그 두 번을 제외하고 아내는 늘 차갑게 나를 태성오빠라고 불렀다.

나는 늘 그녀가 부모의 남아선호 사상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동생만 신경 쓰는 환경에서 자라서 감정 표현에 서툴고 사랑을 내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녀도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이 ‘사랑하는 여보’가 주고받는 대화는 열정적이고 솔직했으며 그런 말들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만약 내가 그녀의 법적 남편이 아니었다면 정말 행복한 세 식구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대화 내용에는 재민이가 처음 웃었던 순간, 처음 기어 다녔던 순간, 그리고 처음 ‘아빠'라고 불렀던 순간을 그 남자와 함께 공유한 기록들이 있었다.

그건 내가 너무 아쉬워하며 놓친 아들의 소중한 성장 순간들이었다.

그 사진들을 보며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재민을 바라보면서 전에는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아들의 모습이 이제는 전혀 닮은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의 감각은 매우 예민했다. 재민은 내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전의 다정한 아빠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평소 재민의 버릇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서둘러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때 아내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곧 깨어날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급히 메시지를 읽지 않은 상태로 돌려놓고 휴대폰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음. 당신 왔어.”

심청하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재민을 안고 있는 것을 보더니 서둘러 일어나 아이를 받았다.

“고생했어. 밥솥에 남은 밥 있으니까 가서 먹어.”

그녀는 항상 이렇게 나와 재민이가 가까워지는 걸 극도로 꺼렸다. 재민이가 나와 더 친해질까 봐 걱정하는 듯 말이다.

전에는 그녀가 정말 내 고생을 이해해서 내가 집에 오면 아이까지 돌보는 수고를 덜어주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먹었어. 오늘은 좀 피곤해서 먼저 잘게.”

지금의 나로서는 어떤 표정으로 그녀와 재민을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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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들킬까 봐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깊은 밤, 심청하와 재민은 이미 잠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그동안 심청하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되새겨보며 나는 이 모든 게 거짓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래 함께했지만, 그녀는 내가 야근으로 늦게 귀가해도 불평하지 않았고 숱한 회식에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그래서 매번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좋은 아내가 있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그런데 지금 보면 그게 다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집에 돌아오든, 누구랑 회식하든 신경 쓰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매일 밤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와도, 몇 번이나 피를 토하고 허약해진 모습이었어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그걸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나는 몰래 심청하의 휴대폰을 가져와 그녀의 보조 번호를 확인하고 둘의 채팅 기록을 전부 백업해 두었다.그리고 ‘사랑하는 여보’라는 계정을 열어 꼼꼼히 살펴보았다.상대도 부계정을 쓰는 것 같았다.프로필 사진은 까맣게 되어 있었고 이름은 GQ, 카카오스토리에는 재민의 사진 외에 다른 유용한 정보는 없었다.카톡을 닫고 다른 것들을 살펴보니 심청하의 계좌에는 매달 GQ로부터 600~1000만 원씩 입금받은 기록이 있었다.카드에는 잔액이 5억6천만 정도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나 자신을 바보라고 욕했다.허허…. 심청하는 이렇게 돈이 많았던 거야. 내가 몇 년 동안 힘들게 모은 몇천만 원을 좋게 봐줬다니 너무 웃기잖아.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입금 기록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처럼 일어나 두 사람의 아침을 준비했다.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에 갑자기 몸을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참, 청하야. 처남도 이젠 그 돈을 갚을 수 있겠지?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좋은 프로젝트를 하나 가지고 있더라고. 그래서 나도 한번 해볼까 해서. 좀 어려우면 먼저 1억만 돌려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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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아요, 승진했어요. 월급은 아마 다음 달부터 오르겠죠.”아이를 안고 있는 심청하와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짐가방을 보자마자 나는 그 패턴을 단번에 알아챘다.매번 그랬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심청하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리곤 했다.그들은 내가 심청하와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심청하를 데리러 가서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게 했다.역시나 윤숙희는 또 나를 비난하며 깎아내렸다.“그 돈은 자네가 알아서 해결하게. 누나가 동생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준 돈을 다시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지.”옆에 앉아 있던 심진수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청하랑 아이는 내가 데려가마. 잘 생각하고 우리를 찾아와.”윤숙희도 서둘러 일어나더니 심청하의 짐을 들고 재빨리 문밖으로 나섰다.“빨리 갑시다. 이 집은 작고 후져서 해도 안 들어오는데 청하랑 재민이가 어떻게 여기서 살았는지 몰라.”과거에 이 집을 나에게 팔기 위해 얼마나 치켜세웠는지는 이미 잊어버린 모양이었다.심청하가 아이를 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심청하가 나를 그저 이용만 하고 사랑이란 전혀 없었다는 걸 까맣게 몰랐으니. 게다가 요즘은 그마저도 숨기려 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족의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결혼 후에도 그저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가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그러다 보니 결국 이 한심한 일가족은 거머리처럼 내게 기대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해왔다.그렇다면 나도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심 씨네 식구들이 떠난 후 나는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재민은 아직 너무 어려서 머리카락을 찾지 못했지만, 휴지통에서 심청하가 재민에게 잘라준 손톱을 발견했다.나는 손톱을 모으고 재민이 자주 쓰던 젖꼭지 같은 물건도 챙겼다.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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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재민의 아빠는 누구일까?심청하는 별로 친구가 없는 것 같았고 예전 동창들과도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 듯했다.내 기억으로는, 심청하는 가끔 친정에 들르긴 했을 뿐 그 외에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딩동.휴대폰 알림 소리가 내 생각을 끊었다.심청하였다. 하긴 심 씨네 집안도 가만히 있지 못할 만했다. 예전에 심청하가 친정에 갔다 하면 거의 이틀이 지나기 전에 나는 선물을 들고 찾아갔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번에는 5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심청하의 친정집은 그녀의 부모님과 동생네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꽤 널찍한 편이었다.하지만 심청하와 재민이가 들어가면 약간 비좁았다. 더군다나 그녀의 부모님 인식 속에 시집간 딸은 다른 집의 사람이었다.집에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너무 오래 친정에서 공짜로 지내는 것은 또 싫어했다.[태성 오빠, 요즘 바빠? 왜 집에 안 가?]심청하의 메시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분명히 승진 소식을 심청하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다음 날 윤숙희는 곧바로 찾아와서 승진해서 월급이 올랐는지 물어보았다.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며칠 휴가를 내서 심청하를 몰래 따라다니려 했던 생각을 포기했다.나는 인터넷에서 꽤 비싼 탐정을 고용해 정보를 보낸 후, 보증금을 걸고 조용히 기다렸다.심청하의 친정 쪽은 며칠 더 시간을 끌어야 할 것 같았다.[네 동생, 돈은 좀 모았어?]메시지를 보냈지만 심청하는 답장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그녀가 준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고 눈치 없는 행동을 했다고 화가 나서 말도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사흘이 지났지만 사설 탐정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심청하는 며칠 동안 친정에 콕 박혀있었던 것이다.이제 그들에게 뭔가 일거리를 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심청하의 남동생 심승우가 그때 나에게 쓴 차용증을 법원에 제출했다.심청하만 있으면 나를 계속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때 심승우는 나를 달래려고 대충 차용증을 써줬었다.그 집안사람들은 다 똑같이 자만하고 무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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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나는 일찍부터 유치원 앞에서 기다렸고 마침내 사진과는 약간 닮은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가 손잡고 있는 여자아이가 재민이랑 너무 닮지 않았다면 나는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사진 속 여자는 날씬하고 키가 컸지만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은...솔직히 너무 뚱뚱해서 예전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단지 키만 그대로였는데 몸무게가 늘어서인지 더 웅장해 보였다.엄하연이 아이를 유치원에 들여보내고 돌아서자 나는 황급히 다가갔다.“엄하연 씨, 실례합니다. 여기 진 전무님에 관한 사진이 있는데, 혹시 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엄하연은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경계하면서도 내 말에 약간의 호기심을 보였다.이에 나는 서둘러 휴대폰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보였다.엄하연은 사진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이번에 엄하연은 아주 통쾌하게 나를 데리고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프라이버시가 적당히 보장되는 장소였다.나는 조사한 진준규와 심청하의 다정한 사진들을 엄하연에게 보여주었다.“심청하?”엄하연은 사진을 자세히 본 후 놀라며 소리쳤다.“심청하를 아세요?”엄하연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당신은?”“조태성입니다. 심청하의... 남편이죠.”엄하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내가 자신과 같은 처지임을 깨달은 듯 경계를 풀고 의자에 기대어 말했다.“심청하요? 결혼한 지 얼마나 됐나요?”“3년 됐습니다.”“3년? 그럼, 사람 보는 눈이 좀 없으셨네요. 6년 전, 나는 준규가 심청하랑 바람피우는 걸 알아채고 심청하의 회사에 가서 난리를 쳤어요. 그 후 심청하는 직장을 잃고 사라졌고 준규는 몇 번이나 다 끝났다고 맹세했었죠. 그동안 정말로 얌전해 보였는데 결국 보니 그들은 계속 연락하고 있었던 거네요!”이 말을 하며 엄하연은 다시 분노에 휩싸였다.6년 전, 나는 심청하와 사귀고 있었다. 즉, 우리가 연애하던 중에 심청하는 유부남인 진준규와 바람을 피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청혼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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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숙희는 기회를 틈타 조재민을 내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이 아이는 자네가 키운 거나 다름없잖아. 청하 그년이 지독하게도 애를 버리고 가는 바람에 불쌍한 재민은 종일 울면서 아빠를 찾고 있다네.”나는 품속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이제는 진재민이라고 불러야겠지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서 달래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 안타까웠다.하지만 나도 호구가 아니었으니 그들의 아이를 돌봐줄 수는 없었다.윤숙희는 내가 아이를 안은 걸 보자 급히 등을 돌려 떠나려 했다.나와 심청하에 관련된 모든 일을 알고 있던 동업자 강도현은 상황을 보자마자 서둘러 윤숙희의 길을 막아섰다.재민을 달랜 후 나는 그를 다시 윤숙희의 품에 돌려주며 차갑게 말했다.“이 아이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내가 돌볼 이유가 없어요. 앞으로 제발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안 그러면 바로 경찰을 부를 겁니다. 그리고 청하에게도 말해 주세요.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키라고요.”윤숙희가 나를 찾아온 것도 분명 심청하의 지시였을 것이다. 나와 강도현이 회사를 차린 일은 예전 친구들 사이에서는 비밀이 아니었으니 그녀는 내 소식을 쉽게 알아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윤숙희도 나를 이렇게 쉽게 찾아올 리가 없었다.내가 이렇게 냉정하게 반응하자 윤숙희는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욕을 퍼부었다.하지만 회사 직원들은 모두 남자였으니 그 누구도 미친년과 논쟁하려고 하지 않았다.강도현은 경비를 불러 윤숙희를 억지로 끌어냈다.그리고 그녀가 또 찾아오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도록 경비들에게 일러두었다.1년 후, 나와 강도현의 회사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그때 주목했던 프로젝트는 정말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짧은 시간 안에 우리의 자산은 급격히 상승했다.한 번은 연회에서 나는 멀리서 엄하연을 본 적이 있었다.그때 그녀는 이미 사진 속에서 봤던 날씬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채 사람들

  • 잿빛 그림자   제8화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외도를 한 건 내가 아니었으니 내가 그들 대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다 설명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참. 전무님, 전무님 아들도 얼른 데려가세요.”요즘 들어 심청하는 정신이 없어서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숨어버렸다. 나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한 푼도 그 밑도 끝도 없는 집에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윤숙희는 아직도 재민이가 내 친아들이 아니란 걸 모르고 매일 전화해서 아이를 데려가라고 재촉했다.재민에게 애정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애초부터 인연이 없었으니 차라리 지금 끝내는 것이 더 나았다.재민이가 나중에 원망한다면 그건 무책임한 친부모를 탓해야 할 것이다.이 말까지 하고 난 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고 엄하연에게 고마운 눈빛을 주고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굳이 이 일을 소문내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것으로 내가 진실을 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심청하가 구청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모습은 매우 초췌해 보였다.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날카롭게 물었다.“조태성, 당신 맞지? 당신은 진작에 다 알고 있었어!”“뭘 안다는 거지?”팔 년이나 사랑했던 사람을 마주하고 나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남은 미련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뿐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것은 모두 심청하가 자초한 일일 것이다.며칠 전 엄하연은 진준규가 공금을 유용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아마 조만간 진준규도 감옥에 갈 것이다.그렇게 되면 심청아가 진준규에게서 받은 돈은 모두 회수될 테고 앞으로는 나도 없고 진준규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심청하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이 순간 나의 차분한 태도에 그녀는 내가 정말로 자신을 포기했다는 걸 깨달은 듯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태성

  • 잿빛 그림자   제7화

    내가 더 이상 그들의 호구가 아니고 심청하가 나 몰라라 한다면 심승우는 돈을 갚을 여력이 없을 것이고 법원은 그의 재산을 압류할 것이다.심청하의 부모는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사에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윤숙희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미친 여자처럼 그녀는 회사 로비에 앉아 나를 천하의 비열한 인간이라며 막말을 퍼부었고 하나하나 내 잘못을 지적하며 비난했다.내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부모에게 불효하며 처남의 가정까지 파탄에 이르게 했다고 말이다.마침 점심시간이라 회사 문 앞에는 구경하는 직원들로 가득했다.사람들은 눈물 흘리며 호소하는 심청하의 어머니를 동정하며 나를 손가락질했고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조 팀장이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그러게, 전혀 몰랐어.”“자기 아내와 자식에게도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 어떻게 승진했을까?”내가 변명할 새도 없이 지나가던 진준규는 간단히 상황을 알아본 후 즉시 분노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조태성 씨, 당장 직무 정지하고 집안일을 처리하세요. 우리 회사는 사생활이 좋지 않은 직원을 용납하지 않아요.”그의 단호하고 공정한 처분에 직원들은 박수를 보냈다.사람들이 흩어진 뒤 윤숙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를 보며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잘 생각해 봐. 돈을 원하나 아니면 일을 계속하고 싶나.”정직 처분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내가 심청하에게 말했던 프로젝트는 진짜였기 때문이다.고등학교 친구와 나는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 매우 친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준비해왔고 갑작스러운 승진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미 사직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해고를 당한다면 절대 이런 평판으로 회사를 떠날 수는 없었다.윤숙희가 회사까지 찾아와서 소란을 피운 걸 보면 그녀는 자신의 딸이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는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이대로 둘 수는 없지.그날 나는 익명으로 심청하의 은행 계좌 잔액 캡처 사진을 심승우에게 보냈고 또 모든 이체 내역의 시간을 친절히

  • 잿빛 그림자   제6화

    다음 날, 나는 일찍부터 유치원 앞에서 기다렸고 마침내 사진과는 약간 닮은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가 손잡고 있는 여자아이가 재민이랑 너무 닮지 않았다면 나는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사진 속 여자는 날씬하고 키가 컸지만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은...솔직히 너무 뚱뚱해서 예전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단지 키만 그대로였는데 몸무게가 늘어서인지 더 웅장해 보였다.엄하연이 아이를 유치원에 들여보내고 돌아서자 나는 황급히 다가갔다.“엄하연 씨, 실례합니다. 여기 진 전무님에 관한 사진이 있는데, 혹시 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엄하연은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경계하면서도 내 말에 약간의 호기심을 보였다.이에 나는 서둘러 휴대폰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보였다.엄하연은 사진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이번에 엄하연은 아주 통쾌하게 나를 데리고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프라이버시가 적당히 보장되는 장소였다.나는 조사한 진준규와 심청하의 다정한 사진들을 엄하연에게 보여주었다.“심청하?”엄하연은 사진을 자세히 본 후 놀라며 소리쳤다.“심청하를 아세요?”엄하연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당신은?”“조태성입니다. 심청하의... 남편이죠.”엄하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내가 자신과 같은 처지임을 깨달은 듯 경계를 풀고 의자에 기대어 말했다.“심청하요? 결혼한 지 얼마나 됐나요?”“3년 됐습니다.”“3년? 그럼, 사람 보는 눈이 좀 없으셨네요. 6년 전, 나는 준규가 심청하랑 바람피우는 걸 알아채고 심청하의 회사에 가서 난리를 쳤어요. 그 후 심청하는 직장을 잃고 사라졌고 준규는 몇 번이나 다 끝났다고 맹세했었죠. 그동안 정말로 얌전해 보였는데 결국 보니 그들은 계속 연락하고 있었던 거네요!”이 말을 하며 엄하연은 다시 분노에 휩싸였다.6년 전, 나는 심청하와 사귀고 있었다. 즉, 우리가 연애하던 중에 심청하는 유부남인 진준규와 바람을 피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청혼을 받아

  • 잿빛 그림자   제5화

    그렇다면 재민의 아빠는 누구일까?심청하는 별로 친구가 없는 것 같았고 예전 동창들과도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 듯했다.내 기억으로는, 심청하는 가끔 친정에 들르긴 했을 뿐 그 외에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딩동.휴대폰 알림 소리가 내 생각을 끊었다.심청하였다. 하긴 심 씨네 집안도 가만히 있지 못할 만했다. 예전에 심청하가 친정에 갔다 하면 거의 이틀이 지나기 전에 나는 선물을 들고 찾아갔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번에는 5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심청하의 친정집은 그녀의 부모님과 동생네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꽤 널찍한 편이었다.하지만 심청하와 재민이가 들어가면 약간 비좁았다. 더군다나 그녀의 부모님 인식 속에 시집간 딸은 다른 집의 사람이었다.집에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너무 오래 친정에서 공짜로 지내는 것은 또 싫어했다.[태성 오빠, 요즘 바빠? 왜 집에 안 가?]심청하의 메시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분명히 승진 소식을 심청하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다음 날 윤숙희는 곧바로 찾아와서 승진해서 월급이 올랐는지 물어보았다.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며칠 휴가를 내서 심청하를 몰래 따라다니려 했던 생각을 포기했다.나는 인터넷에서 꽤 비싼 탐정을 고용해 정보를 보낸 후, 보증금을 걸고 조용히 기다렸다.심청하의 친정 쪽은 며칠 더 시간을 끌어야 할 것 같았다.[네 동생, 돈은 좀 모았어?]메시지를 보냈지만 심청하는 답장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그녀가 준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고 눈치 없는 행동을 했다고 화가 나서 말도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사흘이 지났지만 사설 탐정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심청하는 며칠 동안 친정에 콕 박혀있었던 것이다.이제 그들에게 뭔가 일거리를 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심청하의 남동생 심승우가 그때 나에게 쓴 차용증을 법원에 제출했다.심청하만 있으면 나를 계속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때 심승우는 나를 달래려고 대충 차용증을 써줬었다.그 집안사람들은 다 똑같이 자만하고 무지했다.

  • 잿빛 그림자   제4화

    “맞아요, 승진했어요. 월급은 아마 다음 달부터 오르겠죠.”아이를 안고 있는 심청하와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짐가방을 보자마자 나는 그 패턴을 단번에 알아챘다.매번 그랬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심청하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리곤 했다.그들은 내가 심청하와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심청하를 데리러 가서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게 했다.역시나 윤숙희는 또 나를 비난하며 깎아내렸다.“그 돈은 자네가 알아서 해결하게. 누나가 동생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준 돈을 다시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지.”옆에 앉아 있던 심진수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청하랑 아이는 내가 데려가마. 잘 생각하고 우리를 찾아와.”윤숙희도 서둘러 일어나더니 심청하의 짐을 들고 재빨리 문밖으로 나섰다.“빨리 갑시다. 이 집은 작고 후져서 해도 안 들어오는데 청하랑 재민이가 어떻게 여기서 살았는지 몰라.”과거에 이 집을 나에게 팔기 위해 얼마나 치켜세웠는지는 이미 잊어버린 모양이었다.심청하가 아이를 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심청하가 나를 그저 이용만 하고 사랑이란 전혀 없었다는 걸 까맣게 몰랐으니. 게다가 요즘은 그마저도 숨기려 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족의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결혼 후에도 그저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가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그러다 보니 결국 이 한심한 일가족은 거머리처럼 내게 기대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해왔다.그렇다면 나도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심 씨네 식구들이 떠난 후 나는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재민은 아직 너무 어려서 머리카락을 찾지 못했지만, 휴지통에서 심청하가 재민에게 잘라준 손톱을 발견했다.나는 손톱을 모으고 재민이 자주 쓰던 젖꼭지 같은 물건도 챙겼다.다음 날

  • 잿빛 그림자   제3화

    나는 들킬까 봐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깊은 밤, 심청하와 재민은 이미 잠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그동안 심청하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되새겨보며 나는 이 모든 게 거짓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래 함께했지만, 그녀는 내가 야근으로 늦게 귀가해도 불평하지 않았고 숱한 회식에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그래서 매번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좋은 아내가 있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그런데 지금 보면 그게 다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집에 돌아오든, 누구랑 회식하든 신경 쓰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매일 밤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와도, 몇 번이나 피를 토하고 허약해진 모습이었어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그걸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나는 몰래 심청하의 휴대폰을 가져와 그녀의 보조 번호를 확인하고 둘의 채팅 기록을 전부 백업해 두었다.그리고 ‘사랑하는 여보’라는 계정을 열어 꼼꼼히 살펴보았다.상대도 부계정을 쓰는 것 같았다.프로필 사진은 까맣게 되어 있었고 이름은 GQ, 카카오스토리에는 재민의 사진 외에 다른 유용한 정보는 없었다.카톡을 닫고 다른 것들을 살펴보니 심청하의 계좌에는 매달 GQ로부터 600~1000만 원씩 입금받은 기록이 있었다.카드에는 잔액이 5억6천만 정도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나 자신을 바보라고 욕했다.허허…. 심청하는 이렇게 돈이 많았던 거야. 내가 몇 년 동안 힘들게 모은 몇천만 원을 좋게 봐줬다니 너무 웃기잖아.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입금 기록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처럼 일어나 두 사람의 아침을 준비했다.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에 갑자기 몸을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참, 청하야. 처남도 이젠 그 돈을 갚을 수 있겠지?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좋은 프로젝트를 하나 가지고 있더라고. 그래서 나도 한번 해볼까 해서. 좀 어려우면 먼저 1억만 돌려줘도 괜찮아.

  • 잿빛 그림자   제2화

    첫 번째는 우리가 약혼하고 나서였다.나는 마침내 대출금을 모아 회사와 가까운 곳에 신혼집으로 쓸 아파트를 마련하려고 했다.하지만 아내는 반대했고 가족들과 번갈아 가며 나에게 장단점을 설명해주었다.결국, 내가 산 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20년 동안 살던 낡은 아파트였다.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은 그 아파트를 나에게 팔고 받은 돈과 내 결혼 혼수금을 더해 새로 개발된 강변 대형 아파트로 이사했다.그때 아내는 내 품에 안겨 달콤하게 ‘여보'라고 불렀다.그녀는 이 집이 최고의 학군과 가까워서 우리 아이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며 나와 함께 미래를 계획하고 꿈꾸었다.그때 내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그래서 낡은 아파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니까.회사와 좀 멀긴 했지만 내가 조금 더 노력해서 차를 사면 출퇴근도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두 번째는 아내가 유산한 직후였다.그 당시 아내의 남동생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신부 쪽에서 1억 2천만의 혼수금을 요구했다.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집을 사는 데 돈을 다 써버렸기에 그녀는 나에게 동생의 결혼비용을 대신 내달라고 부탁했다.그때 아직 몸조리 중이었던 아내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간절히 바라보며 내가 들었던 것 중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용히 나를 ‘여보'라고 불렀다.아내에 대한 사랑과 미안한 마음에 나는 술 접대 때문에 피를 토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때 받은 프로젝트 보너스 전액과 차를 사려고 모아둔 돈까지 모두 보태서 남동생의 혼수금을 마련했다.그 두 번을 제외하고 아내는 늘 차갑게 나를 태성오빠라고 불렀다.나는 늘 그녀가 부모의 남아선호 사상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동생만 신경 쓰는 환경에서 자라서 감정 표현에 서툴고 사랑을 내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 보니 그녀도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와 이 ‘사랑하는 여보’가 주고받는 대화는

  • 잿빛 그림자   제1화

    드디어 승진했다.수년 동안 묵묵히 일만 해왔더니 오늘 마침내 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번거롭고 피곤한 일들은 이제 더 이상 내 몫이 아니었다.이제는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아내가 느끼던 가사 부담도 덜어줄 수 있게 된다.업무 인수인계를 마치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혼자서 아들을 돌보고 있을 아내를 떠올리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일부러 꽃집에 들러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샀다. 승진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다.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아기 침대 옆에 엎드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아들은 얌전하게 유모차에 앉아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꽃을 옆에 내려놓고 살며시 다가가 아내를 침실로 안아 가려는 순간, 아내 옆에 있던 휴대폰 화면이 갑자기 켜지면서 메시지 알림이 떴다.나는 아내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수년 동안 서로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었기에 서로의 휴대폰을 본 적은 없었다.그런데 그 순간 귀신이 홀린 듯 나는 메시지를 열어보았다.[청하야, 우리 아들 지금 뭐 하고 있어?]그 메시지를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버렸다.심지어 나는 내가 언제 보낸 메시지를 아내의 휴대폰이 늦게 받은 게 아닌가 의심까지 해봤다.하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카톡 프로필 사진과 이름, 그리고 화면을 가득 채운 달콤한 대화 내용은 나의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산산조각냈다.나는 대학 시절 심청하와 처음 만났다.우리는 5년간 연애를 했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다.나는 고아였지만 심청하는 나의 집안 배경이나 돈이 없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와 결혼했다.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더욱 열심히 일해서 더 나은 삶을 주겠다고 다짐했다.그해, 나는 일에 치여 심청하에게 소홀했고 그렇게 우리는 첫 아이를 잃고 말았다.여자아이였다.그리고 3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두 번째 아이를 맞이했다.장난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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