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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그림자
잿빛 그림자
작가: 월계

제1화

드디어 승진했다.

수년 동안 묵묵히 일만 해왔더니 오늘 마침내 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번거롭고 피곤한 일들은 이제 더 이상 내 몫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아내가 느끼던 가사 부담도 덜어줄 수 있게 된다.

업무 인수인계를 마치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혼자서 아들을 돌보고 있을 아내를 떠올리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일부러 꽃집에 들러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샀다. 승진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아기 침대 옆에 엎드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아들은 얌전하게 유모차에 앉아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꽃을 옆에 내려놓고 살며시 다가가 아내를 침실로 안아 가려는 순간, 아내 옆에 있던 휴대폰 화면이 갑자기 켜지면서 메시지 알림이 떴다.

나는 아내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수년 동안 서로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었기에 서로의 휴대폰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귀신이 홀린 듯 나는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청하야, 우리 아들 지금 뭐 하고 있어?]

그 메시지를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버렸다.

심지어 나는 내가 언제 보낸 메시지를 아내의 휴대폰이 늦게 받은 게 아닌가 의심까지 해봤다.

하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카톡 프로필 사진과 이름, 그리고 화면을 가득 채운 달콤한 대화 내용은 나의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산산조각냈다.

나는 대학 시절 심청하와 처음 만났다.

우리는 5년간 연애를 했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다.

나는 고아였지만 심청하는 나의 집안 배경이나 돈이 없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와 결혼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더욱 열심히 일해서 더 나은 삶을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나는 일에 치여 심청하에게 소홀했고 그렇게 우리는 첫 아이를 잃고 말았다.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두 번째 아이를 맞이했다.

장난꾸러기 아들 재민이었다.

아내가 힘들게 아이를 낳은 걸 알기에 나는 더 열심히 일에 매진했다.

모든 고된 일을 도맡아 했고 불평 한마디 없이 동료의 실수를 대신 덮어주기도 하고 상사의 술자리까지 대신하며 나섰다.

그리고 몇 번이나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술을 마시다 위출혈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그 덕에 거액의 보너스를 받기도 했었다.

오랜 술자리와 업무로 나의 몸매도 점점 변해갔다.

대학 시절 학우들이 나를 과탑 얼짱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거울을 보면 나는 중년의 느끼한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잠들어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나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아내의 휴대폰을 뒤적였다.

이건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내의 계정이었고 거기엔 단 한 명의 연락처만 저장되어 있었다.

저장된 이름은 ‘사랑하는 여보’였다.

허...사랑하는 여보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우리는 8년 넘게 함께 했지만, 그녀는 늘 나를 태성 오빠라고 불렀다.

아내가 ‘여보'라고 부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나는 그때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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