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가 너를 데리고 와서 세상을 보여주려고 하는데는 나도 이견이 없어. 하지만 말썽은 부리지 마!”“홀에 가서 혼자 알아서 자리 잡고 먹고 마시면 돼. 나랑 유아는 접대할 사람이 많으니 너를 상대할 시간 없어!”“그리고 게걸스럽게 먹지 말고 좀 자제해서 먹어. 사람들한테 비웃음 당하지 말고!”“그럼 내 체면 구겨지니까!”당지수가 당부하는 말을 듣고 하현은 웃으며 평온한 기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유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그는 여기 오는 것이 귀찮았을 것이다.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금 있으면 종 도련님도 오실 거야.”“만약 종 도련님을 보면 유아와 거리를 두는 것 명심해!”“종 도련님이 유아한테 첫눈에 반했거든. 그래서 네가 만약 유아와 너무 가까이 있으면 화가 나서 너를 다치게 할지도 몰라.”“종 도련님?”하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며 유아를 한 번 쳐다보았다. 유아는 귀엽게 혀를 내두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부, 화내지 마요. 종민우라는 종 도련님인데요. 대구 일류 가문의 도련님이에요.”“며칠 전에 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집요하게 저한테 투자하겠다고 했지만 저는 관심 없어요!”“그래서 오늘 밤 제 남자친구인 척을 해달라고 했던 거예요!”하현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 처제는 다 좋은데 너무 예쁘게 생겨서 어딜 가나 여기저기서 집적거린다. “참, 종민우씨 집안은 최정상 가문은 아니지만 심재욱과 관계가 아주 좋아요.”“심재욱은 심씨 집안 사람이고, 심가성의 막내 아들로 대구 여섯 세자 중의 한 명으로 알려져 있어요.”“형부, 겁 먹은 거 아니죠?”하현은 담담하게 설유아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툭 쳤다.유아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안 무서우면 안 무서운 거지 손찌검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하현의 동작을 보고 당지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하현을 보고 다른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또 설유아에게
홀 전체의 분위기는 고급스러운데다 또 약간 트렌디했다. 대구의 도련님, 세자, 이름난 규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교제 장소였다. 하현은 이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눈에 익은 스타들을 몇 번 더 구경하러 올라가는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접시를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굶었는데 푸짐한 식사가 차려져 있어 혼자 나가서 먹지 않아도 되었다. “너 왜 여기에 있어?”하현이 스테이크 세 점을 먹고 있을 때 약간 의아한 목소리가 하현 곁에서 울렸다. 하현이 고개를 돌리자 체크무늬 양복에 금테 안경을 쓰고 겉으로는 유순해 보이나 속은 검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위아래로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하현은 T자 뼈를 접시에 떨어뜨리고는 입을 닦으며 말했다. “누구세요?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임마, 너 귀머거리인 척 하는 거지?”“주씨네 가서 지낸 건 그렇다 쳐도 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생각도 못했어!”상대방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오오, 왕 도련님이구나!”하현은 상대가 누군지 떠올랐다. 왕동석. 하지만 그는 이 사람에 대한 인상이 별로 없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기억할 줄은 몰랐다. 이때 위아래로 왕동석을 훑어본 후 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무슨 일이냐고!?”왕동석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난번 하현 앞에서 체면을 구겼고 줄곧 복수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너 여기는 어떻게 왔어?”“여기가 너 같은 촌놈이 올 수 있는 곳이야?”“내가 여기에 온 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새우 한 마리를 가져 갔다. “이 벨라루스를 네가 열었어? 아니면 이 연회를 네가 주최한 거야? 네가 빌렸냐고?”“내가 보기에 너는 이런 고급스런 자리를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아. 이런 연회를 조직할 인맥이나 능력도 없어 보이고!”“다들 손님으로 여기에 왔으니
벨라루스 같은 고급 장소에서 많이 먹고 마시는 것은 이름난 규수와 귀부인들에게는 창피한 행동이었다. 이 놈은 어디서 튀어 나온 거야?배고파 죽은 귀신이 환생한 건가?얼마 지나지 않아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보기에 점잖아 보였지만 눈동자에는 사나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이런 사람은 분명 길에서 빈둥거리다가 막 깨끗이 씻고 나왔을 것이다. 그의 가슴에는 명찰이 달려 있었는데 홀 매니저 방승훈이라는 몇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방승훈은 곧장 성큼성큼 하현 앞으로 다가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접시를 식탁 위에 ‘탁’하고 치며 차갑게 말했다. “선생님, 초대장은요? 아니면 누가 데리고 왔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왜요? 연회에 참석하는 데 초대장이 필요해요?”“누군가가 꼭 데리고 와야 해요?”“이렇게 허름한 곳이 황궁인 줄 아나 보죠?”하현은 눈꺼풀을 치켜들고 아랑곳하지 않고 에그타르트 하나를 더 가지고 갔다. “나는 왜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요구하는 걸 못 봤을까요?”“나를 겨누는 거예요?”방승훈은 하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그의 평범한 옷차림을 보았을 때 눈동자에는 무시하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 벨라루스가 어떻게 하든 너는 이래라 저래라 할 게 못 돼.”“나는 지금 네가 우리 왕 아가씨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는 의심할 만한 이유가 생겼어.”방승훈이 보기에 하현 같은 사람은 그저 먹고 마시러 온 것이 분명했다. 하현이 웃었다. “왜 나를 이렇게 의심하는 거야?”방승훈은 담담한 기색으로 정의롭게 말했다. “여기는 고급스러운 곳이라 물 한 잔도 네가 입고 있는 옷보다는 비싸!”“게다가 너는 시골 촌놈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촌놈은 환영하지 않아!”“우리 벨라루스의 귀빈들의 안전을 위해, 우리 연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나는 반드시 너의 신분을 확인해야겠어.”“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례하게 굴어도 양해 해주길 바라!”하현은 웃었다.
만약 상대방이 관례에 따라 일상적이 일로 그런 거라면 하현도 일부러 상대방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분명히 왕동석에게 끌려가 손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하현이 어떻게 예의 있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배짱이 있냐고?”“임마, 너 손 좀 봐줘야겠구나. 난 이런 거 필요 없어.”“근데 다시 말하지만 너 구태여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방승훈은 어린 아이를 가르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아랫사람일 뿐이야. 상류사회의 테두리에는 들어올 수 없으니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지마. 알겠어?”“분수를 모르고 이 테두리에 들어오려고 하다니. 네 자신이 망신당하는 거 말고는 다른 좋은 점이 없어!”“내가 너한테 이렇게 말하는데 너 무슨 말인지 알겠어?”“네가 순순히 떠나겠다고 하면 내가 차비는 내줄게.”“나는 우리 벨라루스가 쥐 똥 하나 때문에 더럽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해가 가?”말을 마치고 방승훈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2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하현 앞에 ‘툭’ 내던졌다.“푸흡______”사방에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운이 좋네. 여기 와서 잘 먹고 잘 마시고 갈 때는 2만원이나 가져갈 수 있으니!”“방 매니저가 지금 손을 깨끗이 씻었으니 망정이지 예전 같았으면 이 놈의 손발을 다 부러뜨렸을 거야!”“아이고, 다들 화내지 마세요. 연회 시작 전에 어떤 사람이 우리 지루함을 달래줬으니 좋지 않아요?”“자, 다들 돈 좀 던져 줍시다!”말이 끝나자 주위에 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잔돈을 꺼내더니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봐, 공짜로 얻어 먹고도 아직도 뻐기는 거야? 돈이나 들고 썩 꺼져.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아!”방승훈은 냉담한 얼굴로 이 광경을 쳐다보았다.
몇 명의 거만한 경비원들이 험악한 얼굴로 다가와 하현을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했다. “죄송해요. 그 사람은 제가 데리고 들어왔어요!”바로 이때 당지수와 설유아가 때마침 화장을 고치고 밖으로 나왔다. 하현과 방승훈이 충돌한 것을 보고 급히 와서 해결했다. 설유아는 방승훈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방 매니저님, 제 친구 하현이라고 해요. 제가 왕 아가씨 생일 파티에 데리고 왔어요.”“성격이 워낙 충동적이라 다들 이해해 주세요!”설유아는 하현이 연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쫓겨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지수는 불쾌한 얼굴로 하현을 쳐다보았다. 설유아가 하현을 위해 좋게 말하는 것을 보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 매니저님, 제 체면 좀 세워 주세요!”“제가 매니저님께 꼭 사과 드리라고 할게요.”“하씨, 빨리 사과해!”“할 말 없는데.”하현은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돌렸다. “나는 방금 벌써 진심으로 사과했어. 방 매니저는 마음이 넓으니 분명 나를 용서해 줄 거야!”당지수는 하현 때문에 화가 나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데려왔기에 하현을 쫓아내면 유아도 같이 가버릴까 봐 걱정이 되어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방승훈에게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방승훈은 하현을 죽이고 싶었지만 당지수가 체면을 세워달라고 하니 세워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냉담한 기색으로 하현을 몇 번 쳐다보더니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분명 복수하려는 것이었다. 왕동석은 당지수와 설유아가 하현을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하지만 유아를 몇 번 쳐다보더니 그녀의 행동이 하현과 꽤 친밀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갑자기 냉소를 터트리며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종 도련님, 오고 계세요? 전에 마음에 들어 하셨던 계집애를 누가 데리고 있는데……”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잠시 동안은 별일이 없을 것이다. 하현은 계속해서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었다. 설유아는 그의 곁에서 음식을 같이
종민우가 보기에 하현 같은 외지 사람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불을 꺼뜨리고, 어떻게 밟고 싶든 그대로 밟을 수 있었다. 지금 직접 손을 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설유아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 “종 도련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당지수는 종민우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그의 몸에 기대어 품에 비집고 들어가고 싶어졌다. 이때 당지수는 싸움을 말리는 척을 했다. “하현 선생님은 설유아의 친구예요.”“오늘 밤 제가 설 아가씨를 초대하러 갔을 때 만약 하 선생님이 오지 않으면 그녀도 오지 않겠다고 했어요.”“그래서 제가 특별히 그를 초대한 거예요.”“종 도련님, 절대 화내지 마세요. 그리고 그를 쫓아내지도 마세요. 만에 하나라도 설 아가씨가 따라 가면 저는 붙잡을 수 없어요!”말을 마치고 당지수는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현, 신경 쓰지 마. 종 도련님은 항상 성격이 솔직하고 시원스러우셔. 게다가 의리가 강하고 형제를 대신해서 나서는 걸 좋아하셔!”“네가 설유아의 친구인 이상 그럼 우리의 친구이기도 하지!”“이번 일은 제가 맡을게요. 그냥 넘어가는 게 어때요?”설유아는 종민우를 한번 쳐다보고는 하현 곁으로 다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부, 이 사람은 제 영화 투자자 중 한 사람이에요. 그냥 그만 두세요.”“그리고 종씨 집안은 대구에서 힘이 대단해요. 내가 앞으로 연예계에서 지내려면 아마 많은 경우 종씨 집안의 체면을 세워줘야 할 때가 많을지도 몰라요.”“그래서……”“괜찮아!”하현은 유아의 말을 끊고 팔짱을 끼고 종민우를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대구 연예계에서 내가 너를 커버해 줄 테니 누구든 너를 귀찮게 하면 내가 밟아 죽여 줄게.”“이런 사람한테는 깍듯하게 대하지 않아도 돼.”하현의 말에 종민우의 눈동자에는 싸늘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하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촌놈, 너 뭐라 그랬어? 능력이 있으면 다시 한 번 말해 봐
“예전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부터는 그렇지 않을 거야.”하현은 이미 대성그룹을 대구 연예계에 전면적으로 진출시키기로 결정했다. 다름이 아닌 설유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처제가 연예계에 데뷔하려고 하는데 매일 이름도 모르는 길 고양이와 들개들이 와서 괴롭히면 얼마나 걱정되겠는가?이 생각에 하현은 앞에 있는 종민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남헌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두 가지 일이 있어. 첫째, 이제 본격적으로 대구 연예계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할 거야. 나는 단기간 내에 그룹이 대구 연예계의 제일가는 회사가 되는 걸 보고 싶어.”“둘째, 설유아라는 사람이 있는데 앞으로 연예계에서 지낼 때 내가 커버해 줄 거야. 누구든 그녀를 건드리면 죽여 버려!”말을 마치고 하현은 가볍게 전화를 끊었다. “뻐기기는! 너 계속 뻐겨봐!”종민우는 냉소를 연발했다. “촌뜨기, 너 대구 전체에서 연예계에 입문할 수 있는 자격은 우리 종씨 집안 외에 최정상 가문과 대성그룹밖에 없다는 거 모르지!”“네가 방금 전화한 사람이 최고 가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너 같은 꼴로 어느 최고 가문이 네 말을 들어 주겠어?”종민우는 무시하는 얼굴이었다. 대구 연예계 산업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연예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연경이나 항성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대구 연예계 산업은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최고 가문들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것이 종씨 집안이 대구 연예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하현이 이렇게 거드름을 피우며 누구를 대구 연예계에 데뷔 시키겠다고? 귀신을 속이지 그래?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최고 가문을 동원해야 해? 나는 조남헌한테 운영하라고 시킬 거야. 얼마나 큰 일이라고?”“아이고, 너 대성그룹의 조남헌 이름을 알아?”“근데 조남헌이 최근 왕 회장님과 사이가 틀어져서 이미 개처럼 맞게 될 거라는 걸 모르는
종민우는 냉소하며 앞으로 다가갔다. 왕동석도 차갑게 말했다. “종 도련님, 저는 진작에 이 촌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우리 같이 손을 봐줍시다!”당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종 도련님, 오늘 이 자리는 적절하지가 않아요. 벨라루스의 규정을 알고 계시잖아요. 만에 하나라도 여기서 손을 썼다간 우리는 모두 곤란해질 거예요.”당지수는 하현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일이 커져 자신이 연루될까 두려웠던 것이 틀림없다.“미스 당, 이 촌놈이 이렇게 날뛰는데 내가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이 일은 상관하지 마. 만약 벨라루스 사람이 책임을 물으면 그 책임은 내가 질게!”말을 하면서 종민우는 살기등등하게 앞으로 나갔다. “왕주아 아가씨가 왔어요!”바로 이때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살기가 등등했던 종민우도 이때 기세가 조금 꺾였다. 하현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입구에 키가 큰 요괴급 미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올해 샤넬 런웨이 룩을 입고 손목에는 파덱필립 시계를 차고 있었다. 거기다 캐주얼 한 구찌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그녀의 섬세한 얼굴 라인이 돋보였고 동시에 남다른 집안 내력이 엿보였다. 당지수도 미인인 셈이었지만 이 왕주아를 만나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설유아의 아름다움만이 그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설유아는 어쨌든 여대생이었다. 아름답긴 했지만 아직 어린 티가 났다. 하지만 왕주아는 달랐다. 그녀의 기질과 외모는 조금만 더 지나쳐도 질려 보이고 조금만 떨어져도 부족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적당히 아름다웠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지수는 이때 재빨리 종민우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왕 아가씨가 오셨어요. 일단 함부로 하지 마세요!”종민우는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왕주아를 꽤 꺼려했다. 왕주아의 아버지는 용문 대구 지회 부회장으로 최근 상석에 앉을 가능성이 아주
나박하는 고성양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깜짝 놀랐다.“진서기, 당신이 말한 그 사람... 중천 그룹만큼이나 유명한 장청 캐피털 로얄패밀리 고성양 말이야?”“오호! 뭘 좀 아는 모양이군!”진서기는 콧방귀를 뀌며 나박하를 쳐다보았다.“맞아. 바로 그 장청 캐피털이야.”“자산은 수조 원이 넘는 그룹이지. 그러니 현금 이천억 정도 조달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청 캐피탈이 중천 그룹과 마찬가지로 배후에 금정에서 가장 신비에 싸인 왕 씨 가문을 두고 있다는 거야!”“이제 내가 왜 이 거물을 소개하는지 알겠지?”나박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난 별로 아는 건 없지만 중천 그룹과 장청 캐피털의 배후에 금정의 유명한 가문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뭔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가문이라고 들었어. 5대 문벌인 금정 간 씨 가문이나 10대 가문인 금정 김 씨 가문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더군.”“들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예전에는 왕 씨 가문도 5대 문벌 중 하나로 꼽혔다고 해.”“그런데 그 가문은 너무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집단이라 승부조작을 많이 일삼아서 지금은 5대 문벌에 들지 못한다고 해.”“그렇다고 해도 금정에 있는 왕 씨 가문의 역량은 어마어마해.”“어쭈! 촌뜨기인 줄 알았더니 꽤나 식견이 깊은데?”임만아는 비아냥거리며 코웃음을 쳤다.“이왕 이렇게 고성양의 출신 배경도 알게 되었으니 잠시 후에 그가 오면 다들 영리하게 잘 행동해야 해. 그게 설은아를 돕는 길이야.”임민아의 말에 현장에 있던 남녀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장청 캐피털은 원래도 유명한 데다가 배후에 힘이 막강한 왕 씨 가문까지 있다니!역사와 전통이 깊은 금정에서 이 왕 씨 가문에 대적할 수 있는 세력은 정말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장청 캐피털과 고성양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왕 씨 가문을 배후에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이것이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였다.그래서 지금 많은 남자들
설은아의 말을 들은 진서기는 황급히 임민아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임만아, 너도 너무해. 어떻게 그런 말을 자꾸 함부로 할 수 있어?!”“여기 왔으니 됐어! 우리 다 친구잖아!”“자,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해. 우리 고성양이 언제 오시려나?”“어차피 우리가 오늘 여기 온 목적은 설은아가 고성양한테서 투자를 끌어내기 위한 거야.”하현은 살짝 어리둥절해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자신이 이미 설 씨 집안을 도와 오백억의 빚을 받아주었는데 설은아가 또 누군가에게서 투자를 받으려고 하다니?!나박하도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말했다.“설은아, 무슨 일이야?”“당신은 대구 정 씨 가문 아홉 번째 방주잖아?! 이번에 금정에 온 것도 더욱 그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시장을 넓혀 보려고 온 거고!”“그런데 돈이 잘 안 도는 거야?”“음. 문제가 좀 생겼어.”설은아는 입꼬리를 살짝 가라앉히며 멋쩍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그녀는 하현에게 이런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하현에게 알려지더라도 할 수 없었다.나박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설은아, 얼마나 부족한데 그래? 말해 봐!”“내 체면도 좀 세워 주면 안 되겠어?”임민아는 나박하를 보며 냉소를 흘렸다.“쓰레기 처리 회사가 이미 멈췄는데 어떻게 은아를 도와줄 수 있다는 거야?”나박하는 조금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 회사가 동결되긴 했지만 물려받은 것을 포함해서 아직 내 이름으로 된 집이 몇 채나 있어. 만약 필요하다면 그걸 팔면 돼!”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박하를 쳐다보았다.파산 직전에 자기 앞길도 막막할 텐데 이렇게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 의리는 꽤 있는 놈인가?조상의 집마저 팔려고 하다니?!설은아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나박하, 그 집은 당신 어머니가 당신한테 넘겨준 마지막 자산이잖아!”“그걸 판다고 해도 난 절대 그 돈 못 받아!”“이
나박하의 말에 설은아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나박하, 그런 농담 그만해.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오해? 누가 오해할 수 있겠어?”나박하는 껄껄 웃었다.“금정에서 우리 설 사장의 미모와 인품이 빼어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당신을 쫓아다니고 싶어 했던 일도 어제오늘 일이 아닌 걸 뭐!”“됐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옆에 있던 진서기가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내뱉었다.“은아는 이미 임자가 있어!”“이분이시지. 바로 소문난 그 데릴사위 하현. 설은아의 남편이야!”“곧 혼인신고한다고 들었어!”“그러니 당신들한텐 기회가 없다니까!”생각지도 못했던 진서기의 발언에 현장에 있던 남자들은 갑자기 된서리를 당한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나박하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고 눈동자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가득했다.이 볼품없는 남자가 설은아가 결혼했던 전설의 그 데릴사위라니!다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 같았다.“그런데 최 여사님이 아주 싫어한다던데 재결합이 과연 성사될 수 있을까?”진서기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오묘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말인즉슨 설은아 정도의 조건이라면 이 데릴사위를 당장 발로 걷어차야 한다는 거야.”“지나가는 아무 남자나 잡아도 이 데릴사위보다는 낫지 않겠어?”“진서기!”설은아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나무라듯 진서기를 노려보았다.모두가 좋은 친구 사이이고 진서기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 말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 무례했다.그러나 하현은 진서기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 하현입니다.”화려한 옷차림을 한 십여 명의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삐죽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심지어 몇 명의 여자들은 하현의 더러운 시선에 자신의 긴 다리가 눈에 들까 얼른 다리를 모았다.그러나 나박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오히려 자신의 명함을 꺼내 하현에게 공손히 건네
소항 회관 2층 888호 룸.하현 일행이 럭셔리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 있던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십여 명이 쳐다보았다.그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여자들의 목에는 커다란 보석이 달려 있었고 남자들의 손목에는 금빛이 도는 커다란 시계가 걸쳐 있었다.한 마디로 이 사람들한테서는 부귀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가 풍겼고 낯선 사람에 대한 경시가 몸에 짙게 베어 있는 것 같았다.설은아 일행이 들어서자 그들은 모두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사람들은 설은아를 보자마자 눈동자에 희미한 빛을 반짝였다.머리를 매끈하게 뒤로 빗어 넘긴 젊고 유능한 남자들의 눈동자엔 설은아를 향한 음흉한 기운이 가득했다.설은아 같은 미녀는 이곳 금정에서도 매우 드문 게 분명했다.“설은아, 서기, 민아! 당신들 다 같이 왔네?”그때 머리가 약간 벗겨진 남자가 싱긋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그의 용모는 잘생기지도 훤칠하지도 않았지만 온몸은 명품으로 뒤덮여 있었다.얼굴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고 손가락에 커다란 금반지도 여러 개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졸부임이 분명했다.“나박하, 옷차림이 어떻게 아직도 이래?! 이제 육지로 올라왔으면 물속에서 놀던 티는 벗어나야지!”“좀 신경 써주면 안 돼?”“우리 모임에 자꾸 이런 식으로 오면 우린 당신이 우리의 품위까지 떨어뜨린다고 생각할 거야!”임민아는 차가운 눈길로 비아냥거리며 얼굴 가득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이 틈을 타 설은아는 하현을 향해 말했다.“이 사람은 나박하야. 금정 토박이지. 원래는 그렇게 거물급은 아니었는데 쓰레기 분류 사업에 뛰어든 뒤로 수조원의 자산가가 되었어.”“모두들 그를 두고 쓰레기 왕이라고 칭하지.”“그런데 듣기로는 최근 금정 관청에서 자체적으로 이 사업을 처리하려고 해서 나박하의 사업이 자칫 도산할 수도 있다고 했어.”하현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임민아가 왜 그렇게 무시하는 투로 그를 대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만약
하현은 두 여자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며 그녀들에게 힐끔 시선을 떨어뜨린 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은아, 우린 들어가자.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진서기는 소항 회관으로 들어가려는 하현의 앞을 가로막으라는 듯 임민아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하현은 무심코 발을 떼려다가 줄곧 자신을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임민아가 갑자기 앞을 막자 흠칫 놀랐다.“나한테 무슨 볼 일 있어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하현, 더 이상 설은아한테 찝쩍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당신은 이미 설은아와 헤어졌어요. 그럼 깔끔하게 물러서요.”임민아는 차가운 말투로 내뱉었다.“사람은 눈치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설 씨 집안사람들은 당신을 전혀 반기지 않아요. 모르겠어요?”“이제 알았으면 썩 꺼져요! 어서!”“이곳은 우리 같은 상류층 사람들이 오는 곳이지 당신 같은 얼뜨기가 오는 곳이 아니에요!”하현은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와 설은아 사이의 일은 당신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지 않나요?”“설은아는 내 친구예요. 그러니 친구로서 당연히 이 정도는 할 수 있죠!”임민아는 턱을 치켜들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은아가 마음씨가 고와서 당신이 이러는 것도 가만히 놔두는 거예요!”“그렇지 않고서 당신같이 능력도 없고 돈도 없고 역량도 부족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은아와 함께 있을 수 있겠어요?”“은아는 타고난 미모에 붙임성까지 있는 사람이에요. 봉황이 노는 곳에 어찌 꿩이 알짱거릴 수 있겠냐구요?”“당신이 그럴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해요?”여기까지 말한 임민아는 콧대를 잔뜩 치켜세우며 위엄을 과시하려 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하현은 한쪽 입가를 살짝 말아올리며 냉소를 흘렸다.이윽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임민아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임민아 씨, 맞죠?”“당신은 스스로가 너무 잘난 줄 아는 사람이군요.”“내가 어떤 사람이든, 자격이 있든 없든 그건 당
”아니야.”하현은 설은아가 갑자기 간민효를 언급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엄도훈이 나한테 메시지를 보냈어.”“우리 쪽이 계약할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본 거야.”“그래서 회사 법무팀에 직접 물어보라고 연락한 거야.”하현의 설명을 들은 설은아는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아, 갑자기 생각났어. 엄도훈이 당신한테 이러는 걸 보니 간민효가 당신한테 엄청 많은 도움을 줬었나 봐, 그렇지?”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이런 조그만 일에 간민효를 들먹일 필요는 없어.”설은아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만약 무성이나, 혹은 남원이나, 대구였다면 그녀도 그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그러나 금정은 역사와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다른 곳과 비교할 곳이 아니었다.금정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하현이 이런 말을 하니 설은아는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는 억지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왜냐하면 하현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분명 금정에도 그의 포석을 두었음이 틀림없다.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이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인정하기 싫은 질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이런 생각에 사로잡히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슬기를 떠올렸고 왕주아를 떠올렸고, 동리아를 떠올렸다.그녀의 마음은 더욱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거렸다.질투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그들의 차는 그렇게 달리고 달려 으리으리한 소항 회관에 다다랐다.화려한 불빛이 눈앞에 일렁거렸고 많은 차들이 오갔다.곳곳에서 향기로운 바람이 퍼졌고 많은 미남미녀들이 드나들었다.차가 멈춘 후 하현은 설은아를 따라 걸어 나왔고 곧이어 마세라티가 멈추어 서는 것이 보였다.빼어난 몸매에 세련된 메이크업을 한 두 여자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두 여자는 설은아가 금정에서 안 지 얼마 안 된 비즈니스 파트너였다.한 사람은 진서기이고 다른 한
”그래, 맞아! 아들이 하는 말에 무슨 토를 달아?”최희정은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이 한 말을 완전히 뒤집을 모양이었는지 싸늘한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자네, 그렇게 능력이 많아?”“그렇게 은아랑 재결합하고 싶어?”“그럼, 좋아!”“자네가 우리 은아를 대구 정 씨 가문 수장으로 만들면!”“나도 두 사람의 재결합을 승낙할게!”“둘이 같이 살고 싶으면 살아도 돼. 그건 내가 허락해 줄 수 있어.”하현은 최희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나이에 비해 여전히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최희정이 표독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이렇게 계속하다간 양측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거란 걸 잘 알았다.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설은아의 모습을 보던 하현이 옅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대구 정 씨 가문 수장이요? 문제없죠!”“설은아를 그 자리에 올려놓겠습니다!”“그래! 알았네! 자네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두고 보겠어!”최희정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하현이 식탁에 않는 걸 더는 막지 않았다.식사 자리는 당연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어색하고 불편한 식사를 마친 뒤 이영산 부부가 떠나자 하현은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그때 발코니에 있는 설은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설은아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오늘 저녁 소항 회관에서 모임이라고?”“그래, 꼭 시간 내서 갈게.”“그런데 내가 말씀드린 그 일은 가닥이 좀 잡혔어?”하현은 이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후 내내 휴식을 취한 설은아는 저녁 6시가 되자 단장을 하고 차를 몰고 어딘가로 떠나려고 했다.차에 시동이 걸리자마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현이 불쑥 조수석 문을 열고 히죽히죽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여보, 어디 가게?”설은아는 원래 하현을 소항 회관에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지만 하현이 조수석에 올라타는 걸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 중요한 비즈니스 모임이 있어. 친구가
”그래요?”하현은 최희정에게는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이영산을 쳐다보았다.“우리 처남, 어서 밥이나 먹어!”이영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아예 하현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최희정은 하현이 자신의 양아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마음 같아서는 하현을 향해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다.그러나 문제는 하현이 내놓은 수표와 계약서가 모두 사실이어서 그녀로서도 뭐라고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가짜 처남! 당신은 신분도 가짜라서 한 마디 못하고 있는 거지?”“남자가 되어서 남아일언중천금이란 말도 몰라? 본인이 한 말도 수습하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당신은 여자한테 빌붙어 사는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못한 거 아냐?”하현이 이영산의 체면을 사정없이 깎아내렸다.그는 자신의 아내를 무시했던 이영산을 조금도 봐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지금 간이 너무 싱거워? 그렇다면 내가 좀 더 끓어줄까? 그러면 당신의 입맛에 맞게 될 텐데. 어때?”“자네, 그만해!”이때 최희정이 테이블을 세차게 내리치며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다.“아주 기고만장하군!”“오백억 돌려받고 계약 한 건 따낸 것뿐이잖아?”“뭐가 그렇게 기고만장할 게 있어?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고?”“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자네더러 능력 있다고 추켜세울 줄 알았어?”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어쨌든 장모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래서 난 돈을 받아왔구요.”“그러면 이제 저는 설은아와 재혼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호적등본은 어딨죠?”“제가 가져가도 되는 거죠?”하현의 말을 들은 최희정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눈앞의 하현이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절대로 두 사람의 재결합을 승낙할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허락하지 않으면 하현의 비아냥에 더욱 설 곳이 없어져 도저히 끝까지 버틸 수가 없었다.“설은아, 장모님이 별로 이의가 없으신 것 같으니
말을 마치며 최희정은 그릇을 꺼내 대문 앞에 세차게 던졌다.이어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서 사죄해!”“저기 가서 무릎을 꿇으란 말이야!”딸과의 재결합을 허락받기 위해 온 남자라면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왔을 것이다.그런데 엄도훈한테서 오백억을 받아왔다고?허튼소리도 정도껏이지!이를 본 설유아는 급기야 울상이 되어 말했다.“형부, 그냥 지금 엄마한테 사과하세요.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요...”“수표도 계약서도 진짜입니다. 거짓 하나 없는 사실이라구요!”하현은 설은아가 건네주는 물컵을 집어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그런데 제가 무슨 죄를 인정해야 합니까?”“허허! 하현! 쓴맛을 봐야 피눈물을 흘리며 단념할 모양이군!”하현이 완강한 자세를 보이자 이영산은 한껏 비웃으며 말했다.“저따위 가짜 계약서와 수표는 인터넷에 뒤져보면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어! 당신 같은 사람이 이걸 모른다고?”“만약에 저것이 가짜로 판명된다면!”“당장 이 집에서 나가! 절대 돌아올 생각하지 마!”설은아를 포함해 설 씨 집안의 모든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이영산은 하현이 철저히 없어져 주길 간절히 바랐다.하현이 끼어들어서 그의 수많은 계획들이 틀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러면서 그는 핸드폰으로 관련 사이트를 열어 계약서 번호를 입력해 조회하기 시작했다.최희정은 하현이 하루아침에 오백억이라는 거금을 받아왔다는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고 계속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조회는 왜 해 보는 거야?”“거두절미하고 당장 무릎 꿇어! 무릎 꿇기 싫으면 당장 꺼지라고!”말을 마치며 최희정은 경호원 몇 명을 부르려고 핸드폰을 들었다.“어?!”순간 이영산은 온몸에 전율이 올랐다.“이럴 리가 없는데? 이, 이게 어떻게 진짜일 수가 있어?”“믿을 수 없어!”당황한 이영산의 목소리에 최희정은 어리둥절해하며 이영산을 쳐다보았다.그러고 나서 이영산의 핸드폰을 잡아채듯 가져와 계약서와 대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