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서주혁의 말을 듣고 오지랖이 넓었다며 스스로 반성했다.네이처 빌리지에 하인도 한 두 명이 아닌데, 서주혁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아마 이미 물어본 이가 있었을 것이다.하여 성혜인은 서주혁의 말에 공명하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반승제가 말꼬리를 잡았다.“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여주인이 될 수 있어.”이는 분명 서주혁이 말 한 ”여주인은 아니잖아요”에 대한 반박이다.얼렁뚱땅 성혜인에게 자기 마음을 표현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하지만 성혜인은 침대 옆에 의자에 앉아 즉시 그의 말에 반박했다.“그건 모릅니다.”성혜인은 아직 회사 고위층들과 TJ 엔터 대항 방안에 대해 의논하고 있으므로 당분간 사랑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성혜인의 말을 듣고 반승제는 이를 완곡하게 거절하는 뜻으로 받아 드렸다. 그것도 서주혁이 버젓이 보고 있는 곳에서 말이다.반승제는 고개를 들어 보지 않아도 서주혁이 지금 고소해 할 뿐만 아니라 조롱하는 눈빛으로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눈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을 보면서 반승제는 숟가락을 들어 직접 죽을 저었다.그리고 씁쓸한 기분을 겨우 억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나도 그냥 장난한 거야. 정말로 널 좋아하기라도 하는 줄 알았어?”그 말에 성혜인은 한숨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럼, 먼저 포레스트로 돌아갈게요. 한 시간 뒤에 회의가 있어서요.”순간 반승제의 손가락은 멈칫거렸다. 아무리 뒤늦게 반응한다고 하더라도 성혜인이 일부러 냉담한 말을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일주일 동안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던 따뜻하고 애틋했던 분위기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그러든지 말든지.”성혜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입을 열어 거듭 당부했다.“격렬한 운동은 삼가는 게 좋을 거예요.”반승제는 지금 침대에서 내려와 가볍게 걸을 수밖에 없고 달리기와 같은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된다. 상처에 딱지가 앉는 속도가 매우 느리기 때문이다.그 말을 듣고 반승제는 입을 꿈틀거리며 아픈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성혜인은 겨울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불현듯 그날의 영상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린채 뚝뚝 떨어질 뻔했다.“멍!”“멍!”전에 겨울이는 기쁨이 벅차 있을 때 성혜인을 에워싸고 빙빙 돌았었다.하지만 지금은 기운이 별로 없어 겨우 버티며 몇 번 짓고는 주저앉고 말았다.“미안해, 겨울아, 다시는 네이처 빌리지에 두지 않을게.”성혜인은 겨울이를 꼭 안고 어루만져 주었다.그러자 겨울이는 성혜인의 손결에 편안했는지, 귀를 계속 팔랑거렸다.그렇게 2시간 동안 함께 있다가 차를 몰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겨울이에게 거듭 당부했다.“겨울아, 넌 아직 많이 아파. 좀 더 치료받아야 하니 아직은 데리고 갈 수 없어. 우리 겨울이 괜찮아지면, 그때 엄마가 다시 데리고 집을 갈게. 치료 잘 받고 있어.”겨울이는 주인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아쉽기는 했지만, 제자리에 서서 꼬리를 흔들며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다.귀여운 겨울이의 모습에 성혜인은 심쿵하여 그만 참지 못하고 사진 한 장을 찍어 스토리에 올렸다.「회복 중인 겨울이.」즉시 반승제가 “좋아요”를 눌렀다는 알림이 떴고 성혜인은 그가 시시각각 SNS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를 누르고 나서 반승제는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겨울이가 예쁘고 좋은 건 사실이지만, 성혜인의 첫사랑이 선물해 주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언짢았다.“심 비서.”반승제의 부름에 심인우는 다급하게 달려 들어왔다.“네, 사장님.”“애완동물 한 마리만 찾아오세요. 우람하고 위풍당당한 쪽으로요. 겨울이보다 예쁘고 당당했으면 좋겠어요.”이에 심인우는 어안이 벙벙했다. 애완동물을 두고도 상세를 다투려고 할지는 차마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심인우는 이제 막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고 했으나, 반승제가 고개를 떨구며 음침하게 눈빛을 번쩍거렸다.“됐습니다. 해외에서 보내달라고 하겠습니다.”지하 격투장에는 맹렬한 야생 동물도 많고 전문적으로 사육하는 애완동물도 많다.그들은 주인을 잘 지켜줄 뿐만 아니라 위풍당
그러나 똑똑한 겨울이가 “동종”이 나타남에 따라 초조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잇따라 들었다.성혜인은 고개를 숙여 덩치가 엄청 난 “개”를 보면서 반승제에게 물었다.“이름은 뭐예요?”반승제는 아직 미처 이름을 짓지 못했고 성혜인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뭐라고 부르고 싶은데?””그럼, 흰둥이라고 해요.”성혜인은 본래 애완견들 속에서 겨울이가 건장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흰둥이를 보자 겨울이는 새 발의 피라고 느껴졌다.지금 성혜인은 흰둥이를 마음에 들고 있긴 하지만, 겨울이의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일단 여기서 키워요. 겨울이 돌아오고 나면, 그때 두 강아지가 서로 맞는지 다시 봐요.”‘강아지?’반승제는 그 말에 멍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성혜인이 생각나는 대로 놔두려는 생각이다. 게다가 일반인들은 흰둥이가 지나치게 건장하다고만 생각할 것이지 늑대라고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성혜인은 일단 흰둥이의 목줄을 풀고 늑대 킹에게 있어서 치욕스럽기 그지없는 나비넥타이와 방울을 떼어 주었다.흰둥이는 땅에 앉아 고개를 바짝 들었는데, 성혜인의 가슴팍에 거의 이를 지경이다.지금껏 성혜인은 이렇게 큰 “개”를 본 적이 없다.여자라면 본래 예쁜 사물에 저항력이 없는 편이다. 하여 성혜인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흰둥이 사진을 찍어 스토리에 올렸다.「겨울이 친구 흰둥이.」올리자마자 “좋아요”가 잇따라 들어왔고 어떤 이들은 흰둥이가 늑대임을 알고 댓글까지 남겼다.「화이트 킹은 보기 드문 품종인데, 어디서 구했어요?」「순수한 화이트 킹 혈통으로 보이는데, 아마 성년 남자 10명 정도는 거뜬히 제압할 거 같은데요.」「보통 늑대보다 훨씬 커 보여요. 혹시 늑대 킹 아닌가요?」성혜인의 SNS에는 그 동안 합작해 왔던 상업 에이스들이라 모두 견문이 넓은 편이다.하지만 성혜인은 보통 댓글을 보지 않은 습관이 있기에, 올리고 나서는 흰둥이의 머리만 어루만졌다.흰둥이는 성혜인의 몸에서 다른 동물, 즉 겨울이의 기운을 느끼며
성혜인은 즉시 손에 들고 있던 주걱을 내려놓았다.그러고 나서 반승제의 손을 잡고 그가 들고 있던 칼도 옆에 내려놓았다.“화장실로 가요.”반승제는 눈을 절반쯤 가늘게 뜬 채로 1층 화장실에 밀려들어 갔다.들어가자마자 성혜인은 두 손으로 맑은 물을 적셔 그의 눈에 대고 뿌리기 시작했다.“몸 좀 숙여봐요. 아니면 옷 다 젖을지도 몰라요.”그 말에 반승제는 즉시 몸을 숙였으나 눈은 아직도 따끔거리며 아팠다.성혜인은 같은 동작으로 반승제의 눈을 여러 번이나 씻어 주었다.이제 거의 괜찮아진 것 같았을 때, 성혜인은 손에 핸드 워시를 발라 반승제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꼼꼼하게 씻겨 주었다.거품을 씻어 내고 또다시 핸드 워시를 손에 발라 다시 씻겨주고 나서야 손에 남아 있던 마늘 냄새를 완전히 없앨 수 있었다.모든 걸 마치고 성혜인은 옆에서 종지를 뽑아 손을 깨끗이 닦아주고는 한 손으로 반승제의 턱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어때요? 아직도 아파요?”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반승제의 눈 밑은 여전히 빨갛고 아직도 따끔거렸지만, 참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눈이 멀 거 같아.”그말에 성혜인은 다시 맑은 물로 몇 번 더 씻겨주었다.“많이 아프면, 병원에 갈 수밖에 없어요.””그 정도는 아니야. 소파에서 좀 쉬면 돼.”하여 성혜인은 그를 부축하여 소파로 갔고 상처에 무리가 갈까 봐 신신당부했다.“가만히 누워만 있어요. 잔치 국수는 먹을래요?”조금 전 반승제의 턱을 들어 올릴 때, 성혜인은 형언할 수 없는 그의 외모에 다시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지금까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으니 말이다.반승제는 쿠션을 머리 뒤에 대고 소파에 기대어 성혜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하필이면 이때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본래 받고 싶지 않았으나, 반씨 고택에서 걸려 온 전화라 수신 버튼을 눌렀다.이윽고 집사의 다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려왔다.“도련님, 회장님께서 저녁 6시에 외출하
처음에 반기범의 안색은 어두워졌으나, 곧 의미심장하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리고 노여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보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다들 보시다시피 성혜인하고 엮인 후로 눈에 뵈는 게 하나도 없는 녀석입니다. 승제손에 있는 지분이 아직은 적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 틈을 타서 반드시 반씨 가문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얼굴이 한껏 일그러진 반희월도 조금 전 반승제가 한 짓은 윗사람들을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고 여겨졌다.게다가 반태승이 실종된 일이 정말로 반승제와 관련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안는 암탉 잡아먹는 격이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이다.반기범은 지금 모든 이들의 눈빛을 하나씩 훑어보며 그들이 더 이상 반승제 편에 서지 않음을 확인했다.만약 반태승에게 문제라도 생긴다면 이들은 표결로 반승제를 반씨 가문 족보에서 내쫓을 수 있다.반기범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으나, 땅을 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일단은 아버지부터 무사하게 돌아오게끔 우리가 나서서 좀 말립시다. 몸도 편찮으신데, 자칫하면 큰일납니다.”다른 이들도 잇따라 의논하기 시작했다.“승제 말이야,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지 형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제 할아버지까지 죽이겠다는 거야 뭐야.”“처음부터 승제가 아니라 승우가 앉아야 할 자리야.”“반씨 가문에서 내쫓아요! 내쫓읍시다!”누군가가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는데, 이는 반기범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반기범과 반승현은 서로 눈을 마주하며 기뻐해 마지 못했다....한편, 반태승은 칠흑같이 어두운 방으로 오게 되었고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남자를 보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남자는 어둠에 에워싸여 있는 듯한 모습으로 시종 흐릿하기만 했다.반태승은 그가 받았던 전화를 기억하고 있다.“할아버지, 저 승우예요. 보고 싶어요.”반태승이 평생토록 후회하는 일이라고 하면, 그때 임무 수행하러 간다고 했던 반승우의 말에 승낙한 것이다.그 목소리는 반승우의 목소리와 좀 달랐지만, 이미 6년
경호원들이 반태승을 데리고 떠난 뒤, 방안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해졌다.그리고 이때 반승우의 목소리가 적막을 다시 깨뜨렸다.“그 자료 손에 넣는다고 해도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그래서 반승우 씨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잖아요. 내 말만 들으면 노인네 목숨은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물론 성혜인 목숨도 가만히 두겠습니다. 그때도 그 여자 때문에 일찌감치 몸을 빼려고 한 거 아닙니까?”반승우는 대답하지 않았고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반승우는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한숨마저도 어둠에 묻어버렸다....반승제 측의 사람들은 밤새 찾아다녔지만, 반태승의 종적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하여 반승제는 반태승이 스스로 그 사람들과 떠난 것이라며 추측했다.아니면 단 하나의 실마리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리가 없다.이때 집사로부터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도련님, 회장님 침실 쓰레기통에서 피 묻은 손수건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회장님 병세가 호전된 것이 아니라 더욱 악화한 거 같습니다.”반승제의 두 눈에는 날카로운 빛이 번쩍이고 말투는 대수롭지 않지만, 위엄이 가득 베어 있었다.“할아버지 병세에 대해서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그동안 의사한테 검사도 받았잖습니까?”“회장님께서 약도 꼬박꼬박 드셨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회장님의 병세에 대해서 말을 아끼셨습니다. 게다가 회장님께서 활기찬 모습만 보여주셔서, 우린 호전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반승제는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무르며 전화를 끊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도대체 누굴까? 몸도 편찮으신 분을 불러낸 사람이 누굴까?’그러던 찰나 문득 무언가가 번쩍이더니 즉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지난번에 우리 형 살아 있다고 한 거 사실이야?”“지문은 최근에 지문이었어. 세상에 똑같은 지문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할아버지 실종되셨는데, 우리 형이 불러서 나가신 거 아닐까?”반태승의 실종은 결코 반씨 가문 만의 일이 아니라 위에도 관련되어 있다.하여 서주혁은 순간 신중해지면서 눈
“아니.”반승제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는데, 이에 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역력했다.성혜인은 단 한 번도 반승제와 반승우의 상황에 대해 알아본 적이 없지만, 반승우는 반씨 가문에서 사랑을 받고 그와 반대로 반승제는 홀대를 당했다는 건 명확히 알고 있다.더 이상 이 화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성혜인은 편안하게 조수석에 기대었다.반씨 고택에 이르러서 성혜인은 반승제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향했다.두 사람은 그중 한 방문 앞에 섰는데, 밖에서 잠겨 있는 방이고 오랫동안 안으로 들어간 이가 없어 보였다.반승제는 집사에게 키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고 집사는 참지 못하고 당부의 말을 했다.“도련님, 안에 있는 물건들은 함부로 만지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사모님께서 그전까지만 해도 자주 들어가셨습니다.”여기서 사모님은 김경자를 가리키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김경자는 반승우를 편애하는 쪽이다.반승제는 키를 건네받아 문을 열었는데, 열자마자 텁텁한 먼지 냄새가 풍겨왔다.게다가 커튼도 닫은 상태라 어둡기 그지없다.성혜인도 방으로 들어서려고 했으나, 집사가 나서서 말렸다.“성혜인 씨, 죄송합니다만 이 방은 반씨 가문 극소수의 구성원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사모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그 말은 즉 반씨 가문 사람일지라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성이 다른 사람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뜻이다.성혜인은 전에 김경자의 태도가 떠올라 스스로 발걸음을 멈추었다.비록 김경자는 지금 제원을 떠났지만, 갑자기 문득 돌아올 수도 있으니, 불필요한 화를 끌어오고 싶지 않았다.반승제느 들어서자마자 커튼을 젖히고 그 중한 수납장 앞으로 걸어갔는데, 그 위에는 반승우에게 받은 선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모두 작은 선물들이라 일일이 검사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료와 관련된 단서는 없었다.시선을 아래로 옮기며 반승제는 반승우와 찍은 사진에 시선을 두었다.두 형제는 눈매가 좀 비슷한데, 반승우는 부드러운 스타일이고 그를 보게 되면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
성혜인은 반승제가 지금 전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내용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다.고개를 돌려 차창 밖의 햇살을 바라보면서 반태승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었다.그러나 반승제는 성혜인을 S.M으로 바래다주며 당부했다.“회사 일 잘 처리해. 반씨 가문은 한 동안 좀 바쁠 거 같아.”반승제가 말한 “바쁠 거 같아”는 반기범 그 무리 사람들을 가리킨다.성혜인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수심이 짙은 모습으로 성혜인은 회사 건물로 들어섰고 반승제는 반기범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받게 되었는데, BH 그룹으로 오라는 것이었다.반승제는 액셀을 밟았을 끝까지 밟아 곧 BH 그룹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위층으로 향했다.가장 위층의 분위기는 매우 이상했다. 반기범은 그 동안 각종 서류 처리를 하고 있었고 가장 위층의 직원들은 반승제를 못 본지 한참 되었었다.그들은 반승제를 보고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했으나, 조금 전 반기범을 포함한 한 무리의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간 것을 보고 오늘 BH그룹에 거센 바람이 일 거 같다며 감히 선뜻 나서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반승제는 차가운 모습으로 홀 가장 중앙에 섰다. 그러고 나서 음침하기 그지없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직원들 사이를 지나갔는데, 그 순간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그렇게 반승제는 회의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문을 여는 순간 가장 중간 자리에 앉은 반기범이 시선으로 들어왔는데, 그 자리는 줄곧 반승제가 앉던 자리였다.하지만 반기범은 인제 버젓이 그곳에 앉아 그를 두목으로 한 다른 임원들은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지금껏 쭉 반승제를 믿고 지지해 왔던 임원들은 그가 없는 시간 동안 억울함을 많이 당했는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구세주라도 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대표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자리에서 일어선 임원들은 3분의 2를 차지했고 나머지 3분의 1은 이미 반기범 진영으로 넘어간 것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