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시환은 얼른 옆에 있는 따뜻한 물을 받아 그의 입에 갖다 댔다.“무슨 아직도 다른 사람 걱정을 하고 있어. 네가 보름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도, 성혜인 씨는 너 보러 오지도 않았어.”반승제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입술은 바짝 마른 핏자국이 있는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으며, 보기만 해도 심한 탈수 상태였다.피부는 유난히 하얗고 살이 많이 빠졌으며 눈빛은 어두컴컴한 게... 그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어딘가 좀 쓸쓸해 보였다.“진짜?”그는 성혜인이 이렇게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진짜가 아니면? 네가 그 사람 마음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봐. 아니, 너도 완전히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반승제는 그 남자의 손톱도 따라갈 수 없다는 성혜인의 말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그는 확실히 잘 알고 있다. 다만 믿고 싶지 않을 뿐.반승제는 늘 성혜인이 냉정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냉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매번 그렇듯, 두 사람이 서로 포옹한 다음 순간에 그녀는 상처 주는 말을 할 수 있다.진퇴양난의 길에 빠져 생사를 같이하던 감동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반승제는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동자가 마치 깊은 안개에 가려진 듯, 혹은 진흙으로 가득 찬 연못과 같았다.온시환은 그가 이러는 것을 보고 등을 뒤로 기댔다.“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말했잖아. 왜 사랑을 믿기는 믿어.”하지만 이내 반승제가 화가 나 마음이 흔들릴까 봐 재빨리 한마디 고쳤다.“네가 나으면 마음대로 아무 여자나 다 만나도 돼. 요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네 소식을 묻는지 알아? 제원 사람도 있고 연예계 사람도 있어. 만약 예쁜 여자가 이상형이라면 내가 성혜인 씨보다 더 예쁜 여자 보내줄 수 있어. 그것도 하루에 한 명씩 바꿔도 된다고. 너 라미연이랑도 잤잖아, 엄청 좋지 않았어? 그치?”반승제는 피곤함을 느꼈다. 피
하지만 그가 일어나서 성혜인을 찾아가기도 전에 온시환이 옆에서 말했다.“내가 먹여줄까?”“꺼져.”반승제의 얼굴색은 마치 횡격막이 올라간 것 같이 매우 검었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일이 있어 이만 떠나야 했다.“그래, 내일 다시 보러 올게.”그가 떠나자 서주혁도 일어났다.“나는 저쪽 조사 진도가 어떤지 지켜봐야 해서, 너 먹여줄 사람 부를게.”“필요 없어.”반승제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하지만 서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옆 병실로 갔다.성혜인은 사실 오늘 아침에 퇴원할 수 있었지만, 무슨 마음에서인지 그녀는 줄곧 퇴원 수속을 밟지 않았다.그때, 서주혁이 그녀의 병실 문을 두드렸다.“승제 깨어나면, 혜인 씨가 가서 도우미 역할 좀 해줘요.”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성혜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발길을 돌려 떠났다.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반승제의 병실로 향했다.잠시 문 앞에서 망설이기는 했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반승제는 서주혁이 정말 간호사를 불러온 줄 알고 기분 나빠 했다. 그래서 더욱 얼굴을 찌푸린 채 숟가락을 다시 집어보려고 했다.“꺼져.”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병실 문이 누군가에 의해 열리며 성혜인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반승제의 꺼지라는 말에 성혜인은 정말 떠날까 말까 하며 망설이고 있었다.“여기 침대 옆으로 오라고, 뭘 넋 놓고 서 있어?”그녀가 있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손에 든 숟가락을 그릇에 툭 떨구며 능청을 부렸다.“힘이 없어.”성혜인은 자신이 그에게 빚진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 침대 옆으로 와 문을 닫았다.반승제는 마음속의 화가 많이 풀렸지만 여전히 불편함을 느꼈다.‘이제야 온 거야? 아주 내가 죽은 다음에 오지 그냥.’성혜인은 병상으로 가서 숟가락을 들고 죽을 몇 번 저은 다음 반찬을 얹어 그의 입에 넣었다.“반... 반승제 씨.”원래는 대표님이라 부르려고 했지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름
이에 관련된 법규라도 있어?성혜인은 다시 한번 반승제의 뻔뻔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가슴 쪽의 상처가 보여서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떨구고 묵묵히 다리에 묻은 물방울을 깨끗이 닦아 주었다.그러고 나서 옆에 있는 가운을 반승제에게 걸쳐주고 손이 가는 대로 매듭지었다.모든 걸 마치고 성혜인은 욕조의 물을 버리려고 허리를 굽혔다.허리를 굽히자마자 갑자기 반승제가 뒤에서 꼭 끌어안는 바람에 성혜인은 순간 흠칫거렸다.“왜 이렇게 무덤덤해?”아직 목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반승제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이때 성혜인의 손끝은 마침 물에 닿아 따뜻하기 그지없었다.“콸콸콸.”욕조의 마개가 열리자 물은 천천히 흘러 내려갔다.반승제는 비록 몸에 반응이 왔지만, 그럴 힘이 없었고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졸음이 밀려왔다.그런 반승제를 성혜인은 침대로 부축해 갔다. 반승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는 병색이 역력했다.밤도 깊고 인적도 드문 이 시간, 성혜인은 여전히 병상 옆에 앉아 반승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실은 한참 동안 반승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피부도 좋고 이목구비도 또렷한 것이 안색이 창백함에도 불구하고 미모는 여전했다.주위에 아무도 없고 복도의 불도 어두운 틈을 타서 성혜인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반승제의 얼굴을 살짝 건드렸다.성혜인이 무덤덤한 것이 아니라 반승제와 함께 하기로 일단 마음을 먹으면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아서다.성혜인은 마침내 온시환의 그 말뜻을 깨달았다.“그 정도의 용기도 없으면 반승제 보러 가지 마.”반승제와 함께 있기 전부터 성혜인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일단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기만 하면 이 방면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하지만 반승제에게 빌붙어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만약 지금처럼 언제나 반승제가 자기를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린다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담만 될 것이다.반승제에게는 그의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은 바로 반씨 가문이다.물론 성
물론 라미연도 이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한 방에 훅 들어가서 반승제의 마지노선을 건드리면 자기를 더욱 싫어하리라는 것도분명하다.하여 거실로 들어가고 나서 라미연은 딱 1층에서만 반승제를 내내 기다렸다.하지만 완쾌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으로 알고 있는 라미연은 요즘 반승제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렇게 다음 날까지 이곳에 머물다가 정원에 하얀색 강아지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라미연은 반승제에게 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줄 모르고 그가 키우는 애완견으로 착각했다.하인들이 겨울이에게 가장 좋은 고기를 먹이고 있을 때 라미연은 한걸음에 다가갔다.“내가 먹일게요. 반 대표님이 키우는 강아지예요? 너무 귀여워요. 근데 이름은 뭐예요?”하인들은 라미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대꾸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이에 라미연도 하인들이 사람을 무시한다고 여기며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허허, 두고 봐, 결혼하는 즉시 싹 다 잘라버릴 거야.’그때가 되면 친구들을 불러 자기를 사모님처럼 모시게 할 생각이다.이러한 생각을 품으며 라미연은 씩 웃더니 소고기를 들고 겨울이를 찾아갔다.도중에 두 하인이 하는 얘기를 라미연이 듣게 되었다.“아직 겨울이가 성혜인 씨 애완견이라는 거 모르고 있는 거 같아. 우리 대표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는데.”“개털 알레르기가 있으신 우리 대표님이 강아지를 키울 리가 있겠어.”“어떻게든 대표님께 빌붙어 살려고 하는 거 볼 때마다 짜증 나. 성혜인 씨보다 잘난 것도 하나도 없으면서.”순간 라미연의 얼굴은 더없이 험상 궂어졌다.그리고 반승제에게 개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도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잠깐, 개털 알레르기도 있으면서 성혜인 그 여자 애완견을 여기에 둔다고?”‘성혜인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나 라미연은 손에 들고 있던 고급 소고기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짐승 따위는 이런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러고 나서 라미연은 겨울이가 자는 곳으로 왔다
한편, 병원에서 성혜인은 오전 내내 반승제를 돌보고 있었다.의사에게 언제쯤 퇴원할 수 있는지 묻자 의사는 적어도 보름은 걸리며 환자의 회복 상태에 달렸다고 했다.퇴원에 관해 묻고 나서 성혜인은 점심밥을 들고 반승제 병실로 들어섰다.반승제의 손에는 핸드폰 한 대가 더 생겼는데, 아마 심인우가 준비해 준 것으로 보인다.반승제는 물론이고 자기 핸드폰도 새로 갖춰졌다.이제 막 핸드폰을 열었는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며 네이처 빌리지 하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마침 식사하려고 했던 반승제는 손에 힘도 별로 없어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라미연 씨께서 밤새 대표님을 기다렸습니다.”이에 반승제는 온몸이 굳어지더니 저도 모르게 성혜인의 눈치를 살폈다.그날 홧김에 라미연과 결혼하겠다고 한 말을 잊은 건 아니다.하지만 성혜인처럼 고집이 센 사람은 아마 믿었을지도 모른다.어젯밤 겨우 몰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었는데, 다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원점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당장 쫓아내! 누가 들인 거야? 당장 경호원한테 전화해서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똑똑히 말해.”“근데 라미연 씨께서 임신한 일로 자꾸 협박 아닌 협박을 해서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임신이라는 말이 나오자 반승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날 밤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이런 여자와 잠자리했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늘 그 방면에서 확고한 편이고 성혜인 앞에서만 와르르 무너지는 반승제이다.“쫓아내!”반승제는 주저없이 또박또박 말했다.이에 하인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성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겨울이 네이처 빌리지에 있어요?”성혜인은 의사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수색 구조 그날에 하얀색 강아지가 매우 적극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절대 도망쳐 나오지 못할 거 같아 성혜인은 겨울이를 풀어 주었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겨울이가 무척이나 걱정되는 성혜인이다.하인의 성혜인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대답했
서둘러 달려온 성혜인도 동물 병원에 도착했다.현장에는 여러 명의 하인이 서 있었고 겨울이는 이미 검사받으러 들어갔으며 검사 결과에 따라 지금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학대 당했습니다. 폭행자가 누군지 얼른 알아내세요.”급하게 달려온 성혜인은 이제 겨우 마음을 추슬렀는데, 의사의 말에 다시금 화가 용솟음치면서 제대로 폭발해 버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의사는 성혜인을 한 번 보고는 강아지 주인임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안경테를 위로 밀면서 다시 설명해주었다.“말 그대로입니다. 외부 충격으로 기절한 겁니다. 만약 폭행자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살려낸다고 해도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성혜인은 이를 악물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인들을 바라보았다.하인들도 의사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무릎까지 꿇었다.“아닙니다. 저희는 겨울이한테 그런 적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겨울이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시는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성혜인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감시 카메라 돌려보세요.”이에 하인들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시 카메라를 보러 갔다.성혜인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것만 같다. 의사한테서 겨울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들을 때도 미친 듯이 후회했다.겨울이 데리고 산책은 왜 갔는지, 네이처 빌리지 사람들이 겨울이를 잘 챙겨줄 거라고 왜 자신만만했는지, 모든 것이 자기 잘못만 같았다.어느새 눈물은 하염없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서도 성혜인은 울지 않았다.하지만 겨울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성혜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도 불끈 잡아당겼다.‘내가 어떻게든 알아내고 말 거야. 우리 겨울이 학대한 범인이 누군지 꼭 찾아낼 거야.’두 시간 동안 지나서 네이처 빌리지에서는 감시 카메라 동영상을 성혜인에게 보내주었고 동시에 반승제에게도 보내주었다.감시 카메라에 찍힌 동영상을 보면 라미연이 어떻
하지만 차는 네이처 빌리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포레스트에서 멈춰 섰다.라미연은 아직 이곳이 성혜인의 별장이라는 것을 모르고 반승제의 또 다른 별장으로 알고 있다.웃음이 만발한 얼굴로 설마 반승제가 시원하게 자기에게 별장 한 채를 선물해 주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전에 반승제에게서 20억을 받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10억을 더 받았었는데, 이는 일반인이 평생토록 노력해도 벌 수 없는 돈이다.그렇다면 지금 이 별장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아마 수천억은 되지 않을까?라미연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놀라워 마지 못한 채 거실까지 들어섰는데, 소파에 버젓이 앉아 있는 성혜인을 보고 눈썹을 들썩이며 욕설을 퍼부었다.“성혜인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성혜인은 지금 너무 차분하고 조용하다. 거리낌 할 정도로 너무 지나치게 조용하다.하지만 라미연은 배 속에 아이를 생각하며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아직 친자 확인도 하지 않았으니 모두가 반승제의 아이로 알고 있다.설마 반승제가 이미 이혼한 전처를 위해 자기 아이한테 손을 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성혜인 씨, 당장 이 집에서 나가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집은 반 대표님이 나한테 주는 선물이라고요. 이렇게 빌어 붙는다고 해도 반 대표님은 성혜인 씨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예요.”이 말을 듣고서도 성혜인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다만 라미연이 미련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 뿐이었다.가여울 정도로 미련한 사람은 처음으로 보는 것만 같았다.성혜인은 곁에 있는 경호원을 보고 덤덤하게 말했다.“잡아요.”이에 경호원들은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라미연의 두 손을 꽁꽁 묶었다. 그뿐만 아니라 두 다리까지 풀리지 않게끔 묶어 버렸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라미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저기요! 나 지금 반 대표님 아이 품고 있어요. 반 대표님이 퇴원하고 나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요. 무섭지도 않아요?”그러나 성혜인의 라미연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경호원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병원.반승제는 네이처 빌리지에서 제공한 감시 카메라 동영상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지만, 클릭하고 열어 보니 그 속에 뭐가 담겨 있는지 알게 되었다.이때 하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겨울이는 지금 응급치료받고 있습니다. 아마 다시 깨어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순간 반승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라미연은요?”“대표님께서 쫓아내시라고 하셔서 이미 가셨습니다.”반승제는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인우가 오전에 두 사람의 휴대전화를 모두 준비해 놓았기에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성혜인의 가방은 소파에 놓여 있고 무음 모드라 들리지가 않았다.하물며 지금 라미연을 혼쭐내주고 있다.라미연이 임신한 몸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성혜인은 얼굴만 때리고 있다.성혜인이 전화를 받지 않자, 반승제는 문득 라미연을 찾으러 갔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반승제는 성혜인 편이다. 이런 일을 저지른 라미연은 맞아도 싼 인간임이 분명하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라미연이 품고 있는 아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그날 라미연이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고 성혜인이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 알게 되었다.라미연이 품고 있는 아이에 대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반승제의 태도에 화가 났던 것이다.반승제의 태도에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이는 성혜인에게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가장 큰 아픔이다.하여 어젯밤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지만 아이의 일이 문득문득 튀어나와 성혜인의 신경을 자극했다.자극이 올 때마다 성혜인의 반승제라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이는 실은 성혜인의 탓도 아니다. 반승제 스스로 저지른 일이기에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성혜인은 지금 한창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라 이성을 잃고 라미연에게 무언가를 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진정하고 나서 자기로 인해 한 아이가 죽게 되면 미친 듯이 괴로워할 것이다.반승제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