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반승제는 네이처 빌리지에서 제공한 감시 카메라 동영상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지만, 클릭하고 열어 보니 그 속에 뭐가 담겨 있는지 알게 되었다.이때 하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겨울이는 지금 응급치료받고 있습니다. 아마 다시 깨어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순간 반승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라미연은요?”“대표님께서 쫓아내시라고 하셔서 이미 가셨습니다.”반승제는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인우가 오전에 두 사람의 휴대전화를 모두 준비해 놓았기에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성혜인의 가방은 소파에 놓여 있고 무음 모드라 들리지가 않았다.하물며 지금 라미연을 혼쭐내주고 있다.라미연이 임신한 몸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성혜인은 얼굴만 때리고 있다.성혜인이 전화를 받지 않자, 반승제는 문득 라미연을 찾으러 갔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반승제는 성혜인 편이다. 이런 일을 저지른 라미연은 맞아도 싼 인간임이 분명하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라미연이 품고 있는 아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그날 라미연이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고 성혜인이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 알게 되었다.라미연이 품고 있는 아이에 대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반승제의 태도에 화가 났던 것이다.반승제의 태도에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이는 성혜인에게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가장 큰 아픔이다.하여 어젯밤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지만 아이의 일이 문득문득 튀어나와 성혜인의 신경을 자극했다.자극이 올 때마다 성혜인의 반승제라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이는 실은 성혜인의 탓도 아니다. 반승제 스스로 저지른 일이기에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성혜인은 지금 한창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라 이성을 잃고 라미연에게 무언가를 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진정하고 나서 자기로 인해 한 아이가 죽게 되면 미친 듯이 괴로워할 것이다.반승제
반승제는 휠체어 밀고 천천히 다가가 라미연의 목을 조르고 있는 성혜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미 온몸을 힘을 다 들인 성혜인이라 남은 힘도 별로 없이 아주 쉽게 반승제에게 잡혔다.라미연은 실신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는데, 반승제가 나타남으로 하여 큰 힘을 얻게 되었다.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라미연은 반승제에게 애원했다.“반 대표님,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여자가 죽이려고 그래요. 제발 아이를 봐서라도 저 좀 살려주세요.”이런 상황에서 아이에 대해 말이 나오자, 그 말은 성혜인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 버렸다.반승제의 얼굴도 순간 어두워졌지만 라미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절 위해 나설 주실 줄 알았어요. 흑흑흑… 저 지금 뱃속에 대표님 아이 품고 있어요. 저 여자가 우리 아이 죽이려고 그랬어요. 흑흑흑… 저렇게 악독하고 촌스러운 여자는 처음이에요. 더러운 짐승이나 다름없는 여자예요. 죽어가는 그 짐승하고 똑같다고요! 반 대표님, 흑흑흑… 우리 아이 목숨은 그 짐승보다 몇 배나 더 귀하단 말이에요.”“닥쳐.”차갑기 그지없는 반승제의 말투 또한 비수가 되어 라미연의 가슴을 푹푹 찔렀다.만약 평소라면 라미연은 아마 반승제가 무척이나 두려웠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막 죽을 고비를 넘은 라미연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가능한 한 배 속에 아이를 많이 언급하고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지푸라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이에 반승제는 라미연의 입을 막으라고 지시를 내렸다.“우우우…”라미연은 순간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입안에는 피가 낭자했다. 반승제와 성혜인을 미친 듯이 노려보며 최대한으로 배를 드러냈다.이쯤 돼서 성헤인도 문득 정신을 차렸고 조금 전 라미연을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심지어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찰나 잊게 되었다.정신을 차리고 나니 괴로움이 미친 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지나친 통증으로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을 꺼내서 보여주고 싶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괴로워하는
반태승의 말에 반승제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뭐? 성혜인도 갔었다고?’하지만 반승제는 그런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이때 반태승의 일깨움으로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데, 술에 취해 정신이 해롱해롱할 때, 성혜인의 얼굴을 본 듯했다.그때는 단지 꿈이라고 여겼을 뿐이다.꿈을 꾸고 있는 것이기에 하고 싶었던 일을 했을 것이고 가차 없이 성혜인을 창가에 밀어붙이고 욕정을 풀어 헤쳤다.허리가 부러질 지경으로 성혜인과 사랑을 나눴으며 가능한 한 몸속으로 녹이고 싶었다.그러나 반승제는 지금껏 그 모든 것이 단지 지나친 그리움으로 인해 일어난 환각이라고 생각했었다.그때 그 기분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는데,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성혜인과 사랑을 나눌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한 것 같았다.“할아버지, 저…”반태승은 두터운 자료를 반승제에게 던졌다.“이미 조사했다. 그날 밤 라미연은 네이처 빌리지에서 나와 남자 웨이터를 만나러 갔었다. 지금 배 속에 아이도 아마 그날에 생겼을 것이다. 같은 날이지만 우리 반씨 가문의 아이는 절대 아니야. 만약 네가 잔 사람이 혜인이라면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나눌 때 어떤 기분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반승제는 순간 말 문이 막혔다. 그날 밤 자고 나서 상대가 중간에 떠나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래서 반승제는 모든 체면을 내려놓고 뒤에서 그 여자를 안으며 가지 말라고 애원했었다.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바람에 도통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그날 밤의 감시 카메라를 다시 돌려 보았는데, 성혜인이 떠나자마자 라미연이 온 것이 보였다.이제 막 사랑을 다 나눈 상태라 다른 여자한테 반응이 생길 수가 없었다.반승제가 좋아하는 것은 성혜인의 몸에서 나는 희미하고 어렴풋한 냄새이지 향수 냄새는 아니다.그 냄새는 보디로션 아니면 성혜인이 자주 쓰는 샴푸 냄새이다.그래서 다음날 라미연을 봤을 때, 놀라워 마지 못했으며 몸에 향수를 뿌린 여자를 뿌리치지 않을
너무 많은 걸 말한 것 같아 반태승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뭐가 뭐야! 말썽만 부리고 다니고 일만 망치고 다니는 녀석이라곤! 아무튼 네가 알아서 해! 그렇게 잠자리하고 나서 갑을 을로 착각하면서 라미연한테 다들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네가 어떻게 하고 다녔는지 똑똑히 봐봐!”“할아버지!”반승제는 순간 목소리를 높이며 화가 난 나머지 숨까지 고르게 쉬지 못하고 있다.“겨울이 전 주인이 누구라고요? 성혜인이 좋아했던 그 남자라고요? 맞습니까?”반태승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이 일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는 자태를 취했다.“그냥 내 생각이다.”“할아버지 생각이라고요?”이에 반승제는 우습기만 했고 숨까지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심지어 말을 뱉고 있는데 살짝 울먹이고 있다고 느껴졌다. 만약 반태승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너무 아이러니하다.알레르기를 참아가면서 겨울이를 동물 병원으로 데려갔었고 그로 인해 입원까지 했으니 말이다.게다가 성혜인과 말거리를 찾으려고 겨울이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으며 조금이 나마 자기한테 반응해주기를 바랬다.근데, 겨울이가 전에 그 남자가 남겨준 애완견이라면…겨울이가 있는 한 영영 그 남자를 잊지 못하는 말이 아닌가?반승제는 순간 라이벌이 남긴 강아지를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자신이 가소로웠다.가슴도 미어지는 것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반태승의 말은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순간 모든 사고를 정지시켜 버렸다.그러다가 갑자기 그날 병원에서 성혜인을 돌보면서 성혜인의 입에서 나온 낯선 이름이 떠올랐다.그때 성혜인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혹시 첫사랑은 아닌지 물은 적이 있다.성혜인은 겨울이의 전 주인이라고 대답했었다.하지만 첫사랑이라고 승인하지 않았는데, 인제 와 보니 승인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다만 머리를 써가며 에둘러 말했을 뻔이다.모든 진상이 드러나자 반승제의 눈빛은 순간 한없이 험산 해졌다.반태승은 이미 포레스트를 떠났고 지금 포레스트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반승제의 기분이
홀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 질 정도로 조용해졌으며, 반승제는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휠체어 손잡이를 꽉 쥔 채 손등에 힘줄까지 불끈 솟아올랐다.성혜인이 조금 전 뱉은 그 말은 살상력이 만렙에 달한다. 아직 라미연이 품고 있는 아이가 반승제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에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겨울이의 목숨이 반승제 아이의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했다.여기서 가리키는 반승제의 아이란 성혜인의 품었던 아이와 라미연이 품고 있는 아이를 가리킨다.반승제의 나쁜 속마음을 질책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반승제는 헛기침하며 낭패하기 그지없어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도 몰랐다.성혜인 앞에서 반승제는 강할 수도 있고 무례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하지만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나서 반승제는 모든 반항 능력을 잃은 것만 같았다.입을 꾹 다물고 입만 오므린 채 의사에게 묻고 있는 성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겨울이 어때요?”“희망이 있어 보입니다. 선생님께서 아직 응급 치료하고 있습니다.”남은 대화는 더 이상 반승제의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사람의 대뇌는 참 이상한 것만 같다. 분명 열심히 듣고 있으나, 그 소리가 시끄럽기만 하며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반승제는 심인우가 있는 쪽으로 바라보았다.그러자 심인우는 한걸음에 뒤로 다가와 묵묵히 휠체어를 밀었다.반승제는 본래 몸이 허약하고 스스로 휠체어를 조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가만히 잡고만 있을 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사실 성혜인도 마음이 좋지 않다.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리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심인우는 지금 반승제를 밀고 병원을 떠나고 있다.성혜인이 스스로 악한 여자라며 소심하기 짝이 없다며 생각하고 있다.반승제의 상태가 자기로 인해 나빠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막말을 하고 있을 때 반격했으니 말이다.입으로만 말하고 행동으로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픈 말을 퍼부었다.성혜인은 고개를 떨
심인우는 반승제를 밖으로 밀고 나오면서 감히 한 마디도 묻지 못했다.차 앞에 이르러서도 문을 열고 나서 포레스트로 갈 것인지 아니면 네이처 빌리지로 갈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개를 떨구고 있는 반승제의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아마 빛이 너무 어두워서 환자복에 떨어진 그 물방울은 자기의 착각이라고 심인우는 생각했다.“대표님, 네이처 빌리지로 모시면 되겠습니까?”“음.”차에서 눕혀진 사다리 같은 것이 펼쳐져 나왔는데, 이에 따라 휠체어는 그대로 차에 오를 수 있다.그러고 나서 심인우는 운전석으로 달려가 앉았다.병원을 떠났을 때, 반승제는 이미 모든 퇴원 절차를 마쳤고 의사한테 집에서 휴양하고 매일 시간 맞춰 의사 더러 집으로 방문하라고 했다.병원 측에서도 뭐라고 할 수 없었고 다만 의사의 지시에 맞게 엄격하게 움직이라고 당부했다.네이처 빌리지로 돌아와서 반승제가 심인우에게 말했다.“전에 혜인이가 무슨 이유로 차로 네이처 빌리지 대문을 들이박았는지 알아봐요.”심인우는 반승제의 성격대로라면 앞으로 성혜인과 다시는 보지 않고 지낼 줄 알았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반승제는 성혜인을 변함없이 관심하고 있다.심인우는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반승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온몸에 땀이 흥건하여 샤워할 필요도 있다.하지만 반승제는 남자든 여자든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며 그 누구든 자기 몸을 닦아주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하지만 성혜인은 예외이다.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절대 오지 않을 성혜인이다.하여 하는 수 없이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세안대에 지탱하여 천천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허약하기 그지없는 몸뚱어리라 순간 무력해지면서 머리까지 어지러웠다.의사는 머리에 입은 상처가 심각하다고 했었다.반승제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는데,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고 병세가 역력하다.한쪽에 있는 수건으로 몸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잠옷으로 갈아입었다.그러고 나서 다시 휠체어에 앉았고 때마침
“아니, 너 진짜 성혜인 때문에 돌았어?”반승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개도 뚝 떨구면서 꼭 쥐고 있던 주먹까지 풀어지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온시환은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했다.반승제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억울한 일이라고 대충 짐작했다.성혜인에게 맞서면 반승제는 하찮은 원한이라도 결코 갚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승제야,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X스하기 젤 좋아! 됐어?”전화는 그대로 끊기고 온시환은 끊어진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이 세상에서 고집이 가장 센 사람은 아마 반승제일 것이다.온시환은 휴대전화를 한쪽에 던지고 경찰서에 다시 전화해서 라미연을 도로 보내려고 했다.필경 이 일로 반승제와 성혜인 사이가 뒤틀어졌기 때문이다.하지만 아직 전화를 걸기 전에 문득 반승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반승제는 그저 성혜인에게 사과만 하라고 했고 라미연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혼자서 라미연 해결했나?’‘라미연 배 속의 아이에 대해서도 이미 사실을 알아냈나?’온시환은 재빨리 전화를 끊고 다음 날 S.M으로 직접 찾아가 성혜인에게 사과하려고 했다.한편, 반승제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웠다.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아팠다.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 데 콕 집어서 말하라고 하면 어디가 아픈지 말 할 수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가슴 쪽 상처를 억누를까 봐 함부로 뒤척이지도 못했다.심지어 만약 가능하다면 시간이 딱 그때 소로 길에서 멈췄으면 했다.그때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픈 소리도 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기대며 시간을 보냈었다.그 순간 생사마저도 한낱 보잘것없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였다.반승제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한참 지나서 눈을 다시 뜨고 옆에 있는 휴대전화를 쥐고서는 붉어진 눈시울로 타자하기 시작했다.먼저 이렇게 여섯 글자만 적었었다.「내가 잘못했어.」메
“간병인 부르세요. 그리고 혹시 열이 나는 건 아닌지 방으로 한 번 가 보세요. 심 비서님도 알다시피 이번에 좀 심각하게 다쳤잖아요. 근데 왜 벌써 퇴원하고 그러는 거예요.”“페니 씨, 대표님께서는 본래 병원에서 보름 정도 있으실 생각이었습니다. 라미연 씨가 겨울이를 다치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 퇴원 수속 밟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라미연이 품은 아이는 대표님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이미 똑똑히 알아냈습니다. 그날 밤 대표님은 라미연 씨에게 손을 댄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페니 씨가 네이처 빌리지에 왔고 대표님은 페니 씨를 보고… 페니 씨가 가고 나서 대표님은 그대로 잠에 들었습니다. 라미연 씨는 대표님도 속이고 우리도 속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한 남자 웨이터의 아이라고 합니다.”성혜인은 순간 입만 벙긋거리며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 어떤 반응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반승제가 라미연한테 손을 댄 적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 속으로 기쁘기는 했다.“그럼, 라미연 씨는요?”“겨울이한테 그런 짓까지 했는데, 대표님께서 처리하셨습니다.”이에 성혜인은 순간 배 속에 있었던 아이가 생각났다.‘라미연이 죽으면 그 아이는…”“페니 씨, 그 아이는 라미연 씨 자체의 감정 기복으로도 살아남을 수 없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심인우는 말을 마치고 나서 성혜인이 반승제를 잊고 있을까 봐 재빠르게 말머리를 돌렸다.“어젯밤 대표님 정말로 넋이 나간 것 같았습니다. 오늘은 그 누구도 보지 않으시려고 하는데, 페니 씨께서 대표님 보러 오시겠습니까?”설우현과 한 거래가 있기에 성혜인은 다소 난처했다.반승제와 거리를 둔다고 든든히 마음을 먹고 또다시 이처럼 마음이 약해진다면 서로에게 모두 좋지 않다.그렇다고 해서 반승제와 함께 하기로 한다면, 설우현과 한 거래에 대해서 할말을 잃게 된다.그럼, 정말로 사람으로서의 됨됨이를 잃게 된다.심인우는 성혜인이 망설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쐐기를 박았다.“대표님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