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가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발견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반승제인 것을 보고는 유난히도 깍듯한 태도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페니야, 나...”반승제는 원래 오늘 갑자기 쓰러지고 나서 또 기억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약속을 잊었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그에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먼저 말했다.“신경 쓰지 마세요, 대표님. 일이 바쁘셔서 약속을 잊은 건 이해합니다.”반승제는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노발대발 화를 내도 모자란 상황에 지나치게 담담한 성혜인을 보니, 자신이 그토록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그렇게 말문이 막힌 반승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다른 용건 없으시면 이만 끊을게요.”“잠깐... 페니야, 우리 지금이라도 만날까?”“아뇨, 저는 피곤해서요. 대표님도 일찍 쉬세요.”성혜인은 결국 반승제에게 만회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단호하게 끊긴 전화 속에서는 “뚜... 뚜...”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원래는 몇 시간 전에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서 반승제는 차갑게 식은 음식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반대로 전화를 끊은 성혜인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어떻게든 잠을 청하려고 했다.‘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애초에 대표님한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어.’이튿날 아침, 성혜인은 일어나자마자 안유결의 전화를 받았다. 촬영이 끝났으니 편집이 완성된 부분을 확인해 달라는 전화였다. 마침 다른 생각을 하지 않도록 일거리가 필요했던 그녀는 곧바로 회사로 출발했다.드라마는 5화까지 편집을 끝냈다. 훌륭한 편집 실력에 충분한 투자금이 더해지자 결과는 단연 상상 이상이었다.“방송 심의는 제가 이미 신청했어요. 심의가 끝나는 대로 방송하면 될 것 같아요.”그들은 방송 전에 홍보할 필요도 없었다. 홍보라면 도송애 측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말했다.
도송애는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 씨의 이번 수법은 저희 TJ엔터에 매우 치명적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심사를 맡긴 물건은 내 손안에 있어요. 그러니 심사는 절대 통과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앞으로 당신들의 S.M에서 찍을 모든 작품도 말이죠! 성혜인 씨, 이건 모두 성혜인 씨가 자초한 일이에요. 내가 당신 회사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똑똑히 지켜봐요!”영화사로서 모든 작품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S.M은 반드시 죽음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지금 막강한 권력으로 이렇게 저를 협박하시는 거, 만약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도 대표님한테도 안 좋은 거 아닌가요?”“흥! 이 빌어먹을 년, 어쩐지 진작부터 눈에 거슬린다 했어. 만약 네가 반 회장님을 빽으로 삼지 않았더라면, 지난번에 내가 직접 너를 죽였을 거야!”차오르는 분노에 도송애의 가슴은 잔뜩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생각만 해도 몹시 두려웠다. 하마터면 성혜인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다.‘TJ 엔터가 를 위해 얼마나 많은 홍보를 했는데, 때가 돼서 그게 모두 성혜인의 것이 된다면, 나는 화병이 나서 죽고 말 거야!’업계에서 여러 해 동안 지내온 도송애였지만, 그녀도 누군가에게 목숨줄을 쥐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성혜인 씨, 딱 기다려요, 내가 꼭 당신이 이 업계에서 계속 섞이지 못하게 할 거니까!”작품의 심의를 넘기지 못하게 하는 것은 S.M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었고, 도송애는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입꼬리를 차갑게 올렸다.성혜인은 끊긴 전화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녀의 앞에 서 있던 안유결도 이런 상황을 눈치챘는지, 덩달아 조급해하며 물었다.“사장님, 이제 어떡하죠?”오랫동안 준비한 것은 물론, 이미 이렇게 많은 돈과 정력을 투자했는데, 만약 정말 심사를 넘기지 못한다면 그건 도송애에게 촬영 아이디어를 제공한 격이 된다. 게다가 현재 앞 5회의 샘플은 모두 도송애의 손에 있기 때문에, 그녀는 충분히 그것을
그의 명령에 도우미들은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반승제와 페니의 사이가 틀어진 줄로만 알았다.침실로 들어선 반승제는 그곳에서 은은하고 익숙한 향기가 나는 것을 느꼈다.뒤이어 자신의 이불을 들추자 베개에는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 한 가닥이 놓여있었다.그러자 반승제는 이것이 페니의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손을 들어 얼굴을 비비며, 그녀와 함께했던 그동안의 기억을 회상하려고 했다.다행히 이제는 머리가 아프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어 성혜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회사 일로 지금 매우 바빴다.“네, 대표님.”“페니야, 오늘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아니요, 오늘은 시간이 없어요.”“그럼 내일은?”“내일도 시간이 없어요.”반승제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물었다.“뭐가 바쁜데?”“대표님, 저 진짜 바빠요. 그러니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하지만...”전화는 이미 끊겨버렸다.반승제의 가슴은 순간 분노로 가득 찼지만, 이내 그도 어쩔 수 없다고 느껴졌다.정월 초하루인 어젯밤 그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반승제는 성혜인이 아직도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손목을 만지다가 그 침향 묵주 팔찌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윽고 반승제는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물에 닿으면 안 되는 건데, 설마 샤워할 때 모르고 어디에 놓아둔 건가?’하지만 집안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팔찌는 어디에도 없었고, 심지어 도우미에게까지 물어보았지만 누구도 그 팔찌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할 수 없이 반승제는 다시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심 비서, 혹시 페니가 나한테 준 침향 묵주 팔찌 본 적 있어요?”“대표님께서 머리를 다쳐 퇴원하신 후로 못 본 것 같습니다.”‘혹시 병원에 떨어졌나?’이번에 반승제는 또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병원 측에서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그의 안색은 차갑게 변했다. 그것은 페니가 반승제에게 준 첫
TJ엔터가 손을 쓴 덕분에 이 일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인터넷에는 S.M에 대한 욕설이 유례없이 높았지만, S.M은 몇 시간 동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러자 네티즌들은 끊임없이 비꼬기 시작했다.“겁이 났을 거예요. TJ엔터를 상대로 사기를 치면서 자기들도 관심 좀 가져보려고 했는데, TJ엔터가 되레 이렇게 강하게 나오니까 말이에요.”“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죠.”“창피하지도 않은가? TJ엔터한테 밉보이면 앞으로 연예계에 계속 몸담을 수도 없을 텐데.”오후 4시, 시간이 되자 성혜인은 장하리에게 말했다.“SNS를 열어요. 그리고 도 대표한테 말하세요. 대본을 구입할 당시의 시간을 제시하라고.”그러자 성혜인을 기필코 죽이겠다고 결심한 도송애는 망설임 없이 이 몇 개의 대본 구입 시기를 올렸다.하지만 그녀가 이 대본들을 구입하기 며칠 전, 성혜인은 일찌감치 저작보호권을 신청했었다.도송애의 새로운 게시글은 또다시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고 네티즌들은 계속해서 TJ엔터를 응원하자, 성혜인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장하리에게 알렸다.“증거를 정리해서 우리 계정에 올려요. 논란은 이만하면 충분해요.”장하리는 감격에 겨워 서둘러 저작권 신청 시점, 또 도송애와 나눈 대화를 캡처해 올렸다.“도 대표님, 대본은 이미 저희가 샀어요. 게다가 모든 저작권 신청도 완료했고요. 그러니 TJ엔터에서는 촬영하실 수 없습니다.”“꺼져요. 대본은 우리 TJ엔터가 샀으니까.”“도 대표님, 이 대본은 우리가 먼저 산 겁니다. 혹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TJ엔터가 스스로 책임져야 하니, 그렇게 아세요.”“그까짓 거, 우리 TJ엔터에는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어요.”이는 당시 장하리와 도송애가 나눈 완전한 대화였는데, TJ엔터가 S.M이 대본을 먼저 구입한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 대본을 사용했다는 증거로 사용되기에 충분했다.욕설을 퍼붓던 네티즌들도 S.M이 제시한 증거에 잠시 주춤했다.명백히 S.M 쪽의 저작권 신청 시점이 TJ엔터의 구매 시점보다 앞선 데다
인터넷의 여론은 순식간에 반전되어 모두들 TJ엔터에게 해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이제 벙어리가 된 쪽은 TJ 엔터가 되었고, 홍보팀에서는 줄곧 도송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머리가 아파 난 도송애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빌어먹을 년!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야? 정말 나를 화나게 만든다면 앞으로 당신한테도 좋은 결과가 없을 거야. 회사도 갓 설립한 신생회사라면서, 우리 TJ엔터와 같은 큰 적을 둘 필요가 없을 텐데?!”“도 대표님, 제가 여기서 손을 떼도, 도 대표님한테 미움을 산 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완전히 밉보이는 게 뭐 어때서요? 별 차이 없지 않을까요?”담담하게 말을 마친 성혜인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고, 도송애는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동안 S.M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던 네티즌들이 이제는 TJ엔터에게 욕을 퍼붓고 있자, 도송애는 원망이 가득 찬 눈빛으로 외쳤다.“200억을 써도 좋으니 댓글 써줄 사람들을 더 사! 내가 반드시 그 빌어먹을 성혜인이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니까!”그녀는 이미 화가 잔뜩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TJ 엔터의 다른 고위 임원들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왜냐하면, 현재 이 일은 명백히 S.M 쪽이 유리한 위치에 서 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TJ 엔터가 이를 무시하고 죽어라 덤벼드는 것은, 대중들이 그들이 더욱더 외면하게 할 뿐이다.차라리 모든 것을 배윤수에게 떠넘기는 쪽이 나았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TJ 엔터의 태도가 너무 강경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TJ 엔터 역시 배윤수에게 속아서 이 대본들이 모두 그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다.“안 돼! 내가 그 년을 꼭 죽일 거야!”도송애는 계속 사람을 사라고 명령하자, 어쩔 수 없이 TJ 엔터는 200억을 더 투입했다.하지만 곧이어 박주완이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렸다.일찍이 자신의 계정을 개설한 박주완에게는 팔로워도 무려 십만 명이나 있었다.「당시 예진
설씨 가문의 작은 딸은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문제가 있었지만 다행히 집사람들이 그녀를 잘 보호해 주었다.그리고 그녀에게는 한결같이 자신을 편애해주는 두 오빠와 완벽한 가정이 있었다.성혜인은 시선을 아래로 푹 늘어뜨린 채 물었다.“우현 씨도 비록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많이 신경쓰이시죠?”회색 양복 차림의 설우현이 커피를 주문하려 하자, 성혜인이 그를 말리며 나섰다.“저녁에는 커피 마시지 마세요.”그러자 곧 설우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제 여동생이니 신경 쓰이는건 당연한거죠. 하지만 최근 몇년동안 애 성격이 점점 거만해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큰형과 어머니는 무조건 내버려 두고 있어요. 저는 그게 아주 잘못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심장도 안 좋으면서 동생이 몰래 놀러 나간 적이 있어요. 그때 한 연예인이랑 말싸움이 벌어졌는데 결국 동생은 심장 발작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쓰러졌었고, 그 후 여자 연예인은 거의 제명당하다 시피 됐죠.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요. 사실 그 여자 연예인은 잘못한 게 없어요. 제 여동생이 먼저 도발한거였든요.”설우현은 이 말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여동생을 총애하는 큰형과 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밑도 끝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이번에도 제가 주영훈 선생님을 모시고 가지 못하는 바람에 동생이 저한테 한바탕 화를 내더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해도 달래지지 않아서 결국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그의 말은 비록 여동생의 험담처럼 들리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동생에 대한 애착이 가득 담겨있었다.성혜인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이런 삶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이들의 고민은 모두 최상류층 사람들의 고민이었다.그렇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레모네이드를 마셨다.설우현은 시종일관 다른 이에게 나른한 느낌을 주었다. 그 순간, 그는 성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혹시 방금 제 여동생과 반 대표님에 대한 얘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건가요?”
사진을 본 순간, 반승제는 주저앉고 말았다.그는 곧바로 온시환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조금 전에 페니 씨가 먼저 떠났어. 그래서 나도 몰라.”“두 사람이 같이 갔어?”설우현이 바람기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의 전 여자친구들만 모아도 제원을 한 바퀴 빙 돌 수 있는 정도니 말이다.그는 순간 가슴속에 불덩이를 숨겨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페니가 그런 사람이랑 얽혔다고? 무슨 뜻이야, 이게? 내가 몇 번이고 나와서 만나자고 할 때는 바쁘다며 핑계 대더니, 설우현이랑 밥 먹으러 갔다고’반승제는 질투심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결국 다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이미 포레스트로 돌아간 성혜인은 빵을 먹고 침대에 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위가 여전히 아프고, 게다가 잠도 쏟아져 속히 침대에 눕고만 싶었다.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가 받지 않자, 반승제는 또 한 번 전화를 걸었다.‘아 진짜 귀찮아죽겠네. 자꾸 이랬다저랬다 말이나 바꾸고, 도대체 뭐 어쩌겠다는 거야?’“네, 대표님.”“페니, 나와, 할 말 있어.”성혜인이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새벽 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그리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고 나서도 저만큼 당당할 수 있는 건 오직 반승제뿐이었다.그녀는 차오르는 분노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이는 바득바득 갈다 못해 가려울 지경이었다.하지만 무슨 심정이었는지, 그녀는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고 차를 몰아 네이처 빌리지 입구로 갔다.그러나 반승제는 현재 온시환에게 끌려가 술을 마시고 있는 바람에 그곳에 없었다. 온시환은 아직도 성혜인을 바라보는 설우현의 눈빛을 과장되게 말하고 있었다.“내가 보낸 사진 봤어? 설우현의 그 눈빛은 마치 자기 애인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니까? 이건 100% 또 페니 씨가 널 두고 바람피우는 거야!”“꺼져!”온시환은 그가 믿지 않자 다시 사진을 꺼냈다.“한밤중에 남녀가
그러나 술집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반승제는 서주혁과 마주쳤다.서주혁은 손에 담배를 끼고 그가 떠나려는 것을 보며 말했다.“시환이가 너 회복했다고 하던데, 마침 승우 형에 관한 일로 너랑 얘기 나눌 게 있어.”그들에게 있어 반승우의 일은 언제나 최우선이이었다.반승제는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자동차 키를 서주혁에게 건넸다.“집에 가면서 얘기하자.”그는 술을 마셔 운전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운전의 임무는 자연히 서주혁의 몫이 되었다. 오늘 밤 술을 조금 많이 마신 탓에, 반승제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눈을 감았다.서주혁은 앞을 바라보며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모든 원고지를 스캔했지만, 그 시 한 구절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형이 아버지한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날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시셔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신대.”서주혁은 신호등을 기다리는 틈을 타, 계속해서 분석을 진행했다.“윤단미가 당시 제시한 노트의 출처는 이미 찾을 수 없어. 아무래도 누군가가 일부러 지운 것 같아. 하지만 그 위에 있는 승우 형 지문은 진짜야. 최근 내가 계속 사람을 시켜 제원에서 찾도록 했는데, 단지 밀입국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만 발견했을 뿐이야. 너희 아버지도 이미 알려주셨지? 도대체 누굴 노리고 온 건지...”반승제가 눈을 떴을 때 서주혁은 차를 한 별장 입구에 주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긴 네이처 빌리지가 아니었다.“승제야, 사실 내가 최근에 한 명을 생포했는데, 네 머리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서 굳이 말하지 않았어.”반승제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성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아.」성혜인은 네이처 빌리지에 들어가지 않았다. 시간이 이미 새벽 1시가 넘었기 때문에, 도우미들도 모두 잠들어 있을 테니 말이다. 네이처 빌리지에는 아무런 불빛도 없었고 오직 정원에만 빛이 있었다.불어오는 쌀쌀한 밤바람에 그녀는 오들오들 떨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한편, 서주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