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본 순간, 반승제는 주저앉고 말았다.그는 곧바로 온시환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조금 전에 페니 씨가 먼저 떠났어. 그래서 나도 몰라.”“두 사람이 같이 갔어?”설우현이 바람기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의 전 여자친구들만 모아도 제원을 한 바퀴 빙 돌 수 있는 정도니 말이다.그는 순간 가슴속에 불덩이를 숨겨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페니가 그런 사람이랑 얽혔다고? 무슨 뜻이야, 이게? 내가 몇 번이고 나와서 만나자고 할 때는 바쁘다며 핑계 대더니, 설우현이랑 밥 먹으러 갔다고’반승제는 질투심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결국 다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이미 포레스트로 돌아간 성혜인은 빵을 먹고 침대에 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위가 여전히 아프고, 게다가 잠도 쏟아져 속히 침대에 눕고만 싶었다.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가 받지 않자, 반승제는 또 한 번 전화를 걸었다.‘아 진짜 귀찮아죽겠네. 자꾸 이랬다저랬다 말이나 바꾸고, 도대체 뭐 어쩌겠다는 거야?’“네, 대표님.”“페니, 나와, 할 말 있어.”성혜인이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새벽 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그리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고 나서도 저만큼 당당할 수 있는 건 오직 반승제뿐이었다.그녀는 차오르는 분노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이는 바득바득 갈다 못해 가려울 지경이었다.하지만 무슨 심정이었는지, 그녀는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고 차를 몰아 네이처 빌리지 입구로 갔다.그러나 반승제는 현재 온시환에게 끌려가 술을 마시고 있는 바람에 그곳에 없었다. 온시환은 아직도 성혜인을 바라보는 설우현의 눈빛을 과장되게 말하고 있었다.“내가 보낸 사진 봤어? 설우현의 그 눈빛은 마치 자기 애인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니까? 이건 100% 또 페니 씨가 널 두고 바람피우는 거야!”“꺼져!”온시환은 그가 믿지 않자 다시 사진을 꺼냈다.“한밤중에 남녀가
그러나 술집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반승제는 서주혁과 마주쳤다.서주혁은 손에 담배를 끼고 그가 떠나려는 것을 보며 말했다.“시환이가 너 회복했다고 하던데, 마침 승우 형에 관한 일로 너랑 얘기 나눌 게 있어.”그들에게 있어 반승우의 일은 언제나 최우선이이었다.반승제는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자동차 키를 서주혁에게 건넸다.“집에 가면서 얘기하자.”그는 술을 마셔 운전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운전의 임무는 자연히 서주혁의 몫이 되었다. 오늘 밤 술을 조금 많이 마신 탓에, 반승제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눈을 감았다.서주혁은 앞을 바라보며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모든 원고지를 스캔했지만, 그 시 한 구절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형이 아버지한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날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시셔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신대.”서주혁은 신호등을 기다리는 틈을 타, 계속해서 분석을 진행했다.“윤단미가 당시 제시한 노트의 출처는 이미 찾을 수 없어. 아무래도 누군가가 일부러 지운 것 같아. 하지만 그 위에 있는 승우 형 지문은 진짜야. 최근 내가 계속 사람을 시켜 제원에서 찾도록 했는데, 단지 밀입국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만 발견했을 뿐이야. 너희 아버지도 이미 알려주셨지? 도대체 누굴 노리고 온 건지...”반승제가 눈을 떴을 때 서주혁은 차를 한 별장 입구에 주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긴 네이처 빌리지가 아니었다.“승제야, 사실 내가 최근에 한 명을 생포했는데, 네 머리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서 굳이 말하지 않았어.”반승제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성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아.」성혜인은 네이처 빌리지에 들어가지 않았다. 시간이 이미 새벽 1시가 넘었기 때문에, 도우미들도 모두 잠들어 있을 테니 말이다. 네이처 빌리지에는 아무런 불빛도 없었고 오직 정원에만 빛이 있었다.불어오는 쌀쌀한 밤바람에 그녀는 오들오들 떨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한편, 서주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성혜인은 두 손을 결박당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그저 창밖의 경물이 미친 듯이 뒤로 지나가는 것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이 길이 서천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녀가 조금 놀라 하는 것도 잠시, 곧이어 남자가 물었다.“성혜인 씨, 나는 그저 당신이 나를, 당신의 어머니가 살던 곳에 데려다줬으면 좋겠어요.”성혜인은 운전하는 남자의 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그건 싸움으로 단련된 손이었다. 그는 실력이 꽤 괜찮은 듯 보였고 팔에도 작은 문신이 언뜻 보였다.서천에 있는 어머니라면, 임지연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임지연을 노리고 온 것일까?하지만 임지연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떴는데 말이다.그 문신이 어쩐지 낯익어 곰곰이 생각하던 성혜인은 문득 한 사실을 떠올렸다.‘엄마 발바닥에도 이런 문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그러나 그 문신은 워낙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었던지라, 그녀도 어렸을 적 힐끗 본 게 다였다. 심지어 성혜인은 그것이 자신의 환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당시 서천은 매우 가난했고, 게다가 그녀의 집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형편이었는데, 어떻게 임지연에게 그런 문신을 새길만 한 돈이 있었겠는가.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때, 성혜인은 백미러를 통해 뒤에서 차가 뒤쫓아 오는 것을 발견했다.반승제의 차였다.“저희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습니다.”“성혜인 씨가 나에게 잘 협조만 해준다면, 절대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죠.”성혜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가 서천에 거의 도착할 때쯤, 시간은 이미 이튿날 새벽이 다 되어 있었다.이윽고 남자는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몇 대의 차들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그 차들은 순식간에 옆으로 넘어져 반승제의 길을 가로막았다.반승제는 잔뜩 어두워진 안색을 하고는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성혜인 씨, 저를 당신의 어머니가 자란 곳으로 데려다주세요.”성혜인의 그의 말에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외할머니, 외할아버
임지연은 그녀가 본 가장 강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시종일관 임지연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으며 그녀가 한 모든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성혜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전 모릅니다.”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그녀의 수갑을 풀고 다시 그녀의 두 손을 함께 묶었다.“임지연 씨의 묘지로 향합시다. 아마 그 물건이 묘에 같이 묻혀있을지도 몰라요.”성혜인의 마음은 경계심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그녀가 결박된 채 밖으로 나갈 때, 하늘에서는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이건 분명히 반 대표님일 거야!’그녀의 순간 발걸음을 늦추고는, 곁눈질로 주위의 모든 것을 살피며 탈출할 기회를 찾았다.성혜인은 그 남자가 자신을 임지연의 묘지로 데려가려 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외삼촌 집이 이미 이 모양으로 변한 걸 보면, 엄마 묘지도 분명히 한바탕 살펴본 뒤겠지. 그러니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거야. 이 남자가 이렇게 말하는 건 그저 내 경계심을 늦추려는 수작인 거고. 정확히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알려줄 수 없겠지.’“성혜인 씨, 나를 임지연 씨의 묘지로 데려가 주세요.”남자는 차가운 말투로 다시 한번 반복해 말했다.“잔머리 굴릴 생각 하지 말아요. 그 수갑 안에 소형 폭탄이 있으니까. 아마 강제로 뜯어내려 하면 성혜인 씨의 두 손은 모두 형체가 사라질 겁니다.”원래 이 비탈길에서 목숨을 걸고 구르려던 성혜인은 수갑 속에 폭탄이 숨어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보다시피 남자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게 분명했다.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 있는 헬리콥터 몇 대를 쳐다보더니, 차갑게 입꼬리를 씩 올리며 성혜인을 끌어당겼다.“성혜인 씨, 당신이 나에게 잘 협조해주기만 한다면 절대 해치지 않을 겁니다.”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차로 돌아갔다. 곧이어 성혜인은 남자가 서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하늘에서의 헬리콥터의 움직임은 제한되어 있다. 이곳은 고층건물이 많았기 때문에 헬리콥터에 탄 사람들은 망원경으로, 그것도 건물의 표면만
성혜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선두에 선 남자에게 말했다.“우리 게임이나 합시다.”남자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으로 여겼다. 상황이 이 정도인데 그녀가 게임을 언급하니 말이다.하지만 성혜인은 그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건물 전체가 당신들에 의해 통제되었는데, 내가 뭐 공중에서 사라지기라도 하겠어요? 그 물건이 당신들한테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나에게도 매우 중요한 겁니다. 당신들이 하찮은 사람들을 죽여도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게임이나 하죠. 내가 게임에서 지면 엄마가 숨긴 물건의 위치를 알려줄게요.”남자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시 총구를 그녀의 미간에 겨눴다.“내가 당신을 믿을 것 같아?”그러나 성혜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침착하게 쳐다볼 뿐이었다.“당신에게 선택지는 나를 믿는 것밖에는 없을 거예요.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그 물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우리가 뭘 찾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총구는 미간에 더 가까워졌고, 그녀는 한 글자라도 틀리면 쓰러지게 될 것이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오줌을 지렸겠지만, 성혜인은 여전히 침착함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당신들이 찾고 있는 게 혹시 해파리 같은, 도장 아닌가요?”그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했지만, 남자의 손등에 새겨진 해파리 문신을 보고 문득 예전 집에서 실제로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것은 해파리와 비슷한 도장이었는데, 모양이 너무나 특이해서 떠오른 것이었다.하지만 그 물건은 집에서 책상을 받치는 데 쓰였었다.한번은 임지연이 그 물건을 들고 자세히 보다가 성혜인에게 물었었다.“혜인아, 이거 예뻐?”“엄마, 이상해요. 이상하게 생겼어요.”그러자 임지연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혜인아, 이 물건의 생김새를 꼭 기억해.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거든. 하지만 엄마는 혜인이가 이걸 쓸 일이 영원히 없었으면 좋겠어. 너는 엄마의 딸이야. 나중에 괴롭힘이라도 당하게 되면 쓸모가 있을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바로 몸을 일으켜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반승혜는 훌쩍거리며 입구에 서서 한편으로는 눈물을 닦고, 한편으로는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이제 겨우 5분이 지났고, 게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복도로 걸어간 성혜인은 한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여전히 총을 들려 있었다.뒤이어 그녀는 외투를 벗고 단추를 몇 개 풀기 시작했다.그러자 남자는 성혜인의 이런 행동에 눈을 반짝였다.성혜인이 그에게 손가락을 까딱하자 남자는 금세 담배를 버리고 발걸음을 옮겨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심지어 그는 걸으면서 자신의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이윽고 성혜인이 화장실로 들어서자 남자도 같이 따라 들어갔다.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성혜인을 옆 칸막이 문으로 밀쳤다. 그렇게 그는 공교롭게도 반승혜를 등지고 서 있게 되었다.그러나 반승혜는 남자의 허리춤에 있는 총을 보고 겁에 질려 자신의 입을 꽉 가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한편 남자는 알지 못할 영어를 퍼부으며 이미 성혜인의 단추를 급하게 풀고 자신의 입을 그녀의 목에 갖다 대고 있었다.이 상황에 성혜인은 그저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반승혜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손을 쓰라고 암시했다.하지만 반승혜는 막대기를 든 채 울기만 했다.‘이러다가는 꼼짝없이 당하게 되겠군.’그녀는 남자를 밀쳐내고는 직접 막대기를 움켜쥐어 손을 쓰려고 했다.하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남자는 곧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성혜인의 목을 조르며 유창한 영어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남자에게 목이 졸린 성혜인의 얼굴은 빠르게 창백해져 갔다. 그 순간 남자는 여전히 반승혜를 등지고 있었다. 반승혜가 한 대라도 휘두르면 남자는 반드시 기절할 것이었다.성혜인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버티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승혜 씨! 때려요!”몇 번의 기회를 연달아 만들었지만, 반승혜는 계속 멍청하게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곧이어 성혜인은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을 느꼈다. 목
성혜인은 다시 장전한 총을 들고 다른 층으로 향했다.게임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모두 무전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그녀의 위치를 서로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그녀는 가능한 한 시간을 많이 끌어야 했다. 그래야만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올 기회가 생길 테니 말이다.그녀는 17층으로 직행했는데, 그곳은 인질범들이 이미 싹 훑어보았는지 아무도 없었다.주위의 CCTV를 피해 다니던 성혜인은 뜻밖에도 그 주변에서 열 수 있는 창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조심스럽게 이 위에 있는 몇 명의 순찰 요원들을 피했다.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방을 수색해보려 하는 그때, 성혜인은 두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여기다! 17층! 저년을 잡아!”그들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듣고 성혜인은 서둘러 다른 쪽으로 달렸으나 곧이어 뒤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총알은 그녀의 발 주변에 꽂혔을 뿐, 직접적인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이런 순간에도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침착을 유지하며 이 층에 있는 캐비닛 위로 몸을 숨겼다.캐비닛은 매우 높기 때문에 일부러 고개를 들어 검사하지 않으면 그녀의 위치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그녀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두 인질범이 그쪽으로 뛰어왔다.성혜인은 냉정한 눈빛으로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다음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향해 총을 조준했고, 두 개의 총알은 두 사람의 머리에 그대로 명중했다.인질범들은 모두 쓰러져 죽을 때까지 그녀가 이 자리에 숨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성혜인은 총을 내려놓고 손바닥의 땀을 닦았다.‘이제 더 이곳에 있는 건 무리야’그러고는 캐비닛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방금 그 두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그녀의 위치를 알렸기 때문에 인질범들은 틀림없이 계속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 또한 계속 위층으로 올라가는 건 곧 죽음의 골목을 향해 가는 거나 다름없었다.그녀는 총을
주변 사람들은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그는 경찰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위에서는 반태승의 전화를 받기까지 했다.그래서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안위는 현장의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중요했다.“대표님, 현장은 저들이 가면 됩니다. 대표님 안윅가 더 중요해요.”하지만 반승제는 듣는체도 하지 않았고 이미 정장을 벗어던진 뒤였다.사람들은 그를 말리지 못해, 모두 약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이윽고 반승제는 손에 총을 들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저한테 만약 일이 생기면 그건 여러분들과 상관 없는 일이니, 안심하세요.”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았고 모두들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방금 15층에 사람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과연 어떨까? 여전히 사람이 없을까?그들은 감히 내기를 할 수 없었다. 단지 새로운 소식이 없는 틈을 타서 서둘러 파이프를 타고 15층으로 올라가는 수밖에.14층까지 창문이 모두 잠겨 있어 안에 있는 인질범들이 바깥의 상황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파이프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다.모두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소식을 접하면 그들이 돌파할 곳을 알려주기에 편리했다.맨손으로 파이프를 오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아무런 조치도 없이 심지어 십여 층 높이까지 올라가는건 더욱이 말이다.그러나 부대에 몸 담은 적 있던 반승제에게 이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그가 자신의 정장을 벗자, 진부한 사업가의 면모가 순간적으로 야성적이게 변했다.뒤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힘찬 표범처럼 파이프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성혜인은 여전히 15층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건넨 소식이 잘못됐을까 봐 줄곧 이 층을 순찰하고 있었다.간간히 위층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었지만, 15층에는 확실히 사람이 없었다.그녀는 CCTV실에서 복면을 쓴 수수께끼 같은 남자가 그 무리를 맹목적으로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한편, 아래층에는 20명의 인질범들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