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연은 그녀가 본 가장 강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시종일관 임지연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으며 그녀가 한 모든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성혜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전 모릅니다.”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그녀의 수갑을 풀고 다시 그녀의 두 손을 함께 묶었다.“임지연 씨의 묘지로 향합시다. 아마 그 물건이 묘에 같이 묻혀있을지도 몰라요.”성혜인의 마음은 경계심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그녀가 결박된 채 밖으로 나갈 때, 하늘에서는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이건 분명히 반 대표님일 거야!’그녀의 순간 발걸음을 늦추고는, 곁눈질로 주위의 모든 것을 살피며 탈출할 기회를 찾았다.성혜인은 그 남자가 자신을 임지연의 묘지로 데려가려 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외삼촌 집이 이미 이 모양으로 변한 걸 보면, 엄마 묘지도 분명히 한바탕 살펴본 뒤겠지. 그러니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거야. 이 남자가 이렇게 말하는 건 그저 내 경계심을 늦추려는 수작인 거고. 정확히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알려줄 수 없겠지.’“성혜인 씨, 나를 임지연 씨의 묘지로 데려가 주세요.”남자는 차가운 말투로 다시 한번 반복해 말했다.“잔머리 굴릴 생각 하지 말아요. 그 수갑 안에 소형 폭탄이 있으니까. 아마 강제로 뜯어내려 하면 성혜인 씨의 두 손은 모두 형체가 사라질 겁니다.”원래 이 비탈길에서 목숨을 걸고 구르려던 성혜인은 수갑 속에 폭탄이 숨어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보다시피 남자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게 분명했다.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 있는 헬리콥터 몇 대를 쳐다보더니, 차갑게 입꼬리를 씩 올리며 성혜인을 끌어당겼다.“성혜인 씨, 당신이 나에게 잘 협조해주기만 한다면 절대 해치지 않을 겁니다.”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차로 돌아갔다. 곧이어 성혜인은 남자가 서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하늘에서의 헬리콥터의 움직임은 제한되어 있다. 이곳은 고층건물이 많았기 때문에 헬리콥터에 탄 사람들은 망원경으로, 그것도 건물의 표면만
성혜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선두에 선 남자에게 말했다.“우리 게임이나 합시다.”남자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으로 여겼다. 상황이 이 정도인데 그녀가 게임을 언급하니 말이다.하지만 성혜인은 그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건물 전체가 당신들에 의해 통제되었는데, 내가 뭐 공중에서 사라지기라도 하겠어요? 그 물건이 당신들한테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나에게도 매우 중요한 겁니다. 당신들이 하찮은 사람들을 죽여도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게임이나 하죠. 내가 게임에서 지면 엄마가 숨긴 물건의 위치를 알려줄게요.”남자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시 총구를 그녀의 미간에 겨눴다.“내가 당신을 믿을 것 같아?”그러나 성혜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침착하게 쳐다볼 뿐이었다.“당신에게 선택지는 나를 믿는 것밖에는 없을 거예요.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그 물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우리가 뭘 찾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총구는 미간에 더 가까워졌고, 그녀는 한 글자라도 틀리면 쓰러지게 될 것이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오줌을 지렸겠지만, 성혜인은 여전히 침착함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당신들이 찾고 있는 게 혹시 해파리 같은, 도장 아닌가요?”그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했지만, 남자의 손등에 새겨진 해파리 문신을 보고 문득 예전 집에서 실제로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것은 해파리와 비슷한 도장이었는데, 모양이 너무나 특이해서 떠오른 것이었다.하지만 그 물건은 집에서 책상을 받치는 데 쓰였었다.한번은 임지연이 그 물건을 들고 자세히 보다가 성혜인에게 물었었다.“혜인아, 이거 예뻐?”“엄마, 이상해요. 이상하게 생겼어요.”그러자 임지연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혜인아, 이 물건의 생김새를 꼭 기억해.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거든. 하지만 엄마는 혜인이가 이걸 쓸 일이 영원히 없었으면 좋겠어. 너는 엄마의 딸이야. 나중에 괴롭힘이라도 당하게 되면 쓸모가 있을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바로 몸을 일으켜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반승혜는 훌쩍거리며 입구에 서서 한편으로는 눈물을 닦고, 한편으로는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이제 겨우 5분이 지났고, 게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복도로 걸어간 성혜인은 한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여전히 총을 들려 있었다.뒤이어 그녀는 외투를 벗고 단추를 몇 개 풀기 시작했다.그러자 남자는 성혜인의 이런 행동에 눈을 반짝였다.성혜인이 그에게 손가락을 까딱하자 남자는 금세 담배를 버리고 발걸음을 옮겨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심지어 그는 걸으면서 자신의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이윽고 성혜인이 화장실로 들어서자 남자도 같이 따라 들어갔다.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성혜인을 옆 칸막이 문으로 밀쳤다. 그렇게 그는 공교롭게도 반승혜를 등지고 서 있게 되었다.그러나 반승혜는 남자의 허리춤에 있는 총을 보고 겁에 질려 자신의 입을 꽉 가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한편 남자는 알지 못할 영어를 퍼부으며 이미 성혜인의 단추를 급하게 풀고 자신의 입을 그녀의 목에 갖다 대고 있었다.이 상황에 성혜인은 그저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반승혜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손을 쓰라고 암시했다.하지만 반승혜는 막대기를 든 채 울기만 했다.‘이러다가는 꼼짝없이 당하게 되겠군.’그녀는 남자를 밀쳐내고는 직접 막대기를 움켜쥐어 손을 쓰려고 했다.하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남자는 곧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성혜인의 목을 조르며 유창한 영어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남자에게 목이 졸린 성혜인의 얼굴은 빠르게 창백해져 갔다. 그 순간 남자는 여전히 반승혜를 등지고 있었다. 반승혜가 한 대라도 휘두르면 남자는 반드시 기절할 것이었다.성혜인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버티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승혜 씨! 때려요!”몇 번의 기회를 연달아 만들었지만, 반승혜는 계속 멍청하게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곧이어 성혜인은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을 느꼈다. 목
성혜인은 다시 장전한 총을 들고 다른 층으로 향했다.게임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모두 무전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그녀의 위치를 서로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그녀는 가능한 한 시간을 많이 끌어야 했다. 그래야만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올 기회가 생길 테니 말이다.그녀는 17층으로 직행했는데, 그곳은 인질범들이 이미 싹 훑어보았는지 아무도 없었다.주위의 CCTV를 피해 다니던 성혜인은 뜻밖에도 그 주변에서 열 수 있는 창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조심스럽게 이 위에 있는 몇 명의 순찰 요원들을 피했다.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방을 수색해보려 하는 그때, 성혜인은 두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여기다! 17층! 저년을 잡아!”그들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듣고 성혜인은 서둘러 다른 쪽으로 달렸으나 곧이어 뒤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총알은 그녀의 발 주변에 꽂혔을 뿐, 직접적인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이런 순간에도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침착을 유지하며 이 층에 있는 캐비닛 위로 몸을 숨겼다.캐비닛은 매우 높기 때문에 일부러 고개를 들어 검사하지 않으면 그녀의 위치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그녀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두 인질범이 그쪽으로 뛰어왔다.성혜인은 냉정한 눈빛으로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다음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향해 총을 조준했고, 두 개의 총알은 두 사람의 머리에 그대로 명중했다.인질범들은 모두 쓰러져 죽을 때까지 그녀가 이 자리에 숨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성혜인은 총을 내려놓고 손바닥의 땀을 닦았다.‘이제 더 이곳에 있는 건 무리야’그러고는 캐비닛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방금 그 두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그녀의 위치를 알렸기 때문에 인질범들은 틀림없이 계속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 또한 계속 위층으로 올라가는 건 곧 죽음의 골목을 향해 가는 거나 다름없었다.그녀는 총을
주변 사람들은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그는 경찰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위에서는 반태승의 전화를 받기까지 했다.그래서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안위는 현장의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중요했다.“대표님, 현장은 저들이 가면 됩니다. 대표님 안윅가 더 중요해요.”하지만 반승제는 듣는체도 하지 않았고 이미 정장을 벗어던진 뒤였다.사람들은 그를 말리지 못해, 모두 약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이윽고 반승제는 손에 총을 들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저한테 만약 일이 생기면 그건 여러분들과 상관 없는 일이니, 안심하세요.”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았고 모두들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방금 15층에 사람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과연 어떨까? 여전히 사람이 없을까?그들은 감히 내기를 할 수 없었다. 단지 새로운 소식이 없는 틈을 타서 서둘러 파이프를 타고 15층으로 올라가는 수밖에.14층까지 창문이 모두 잠겨 있어 안에 있는 인질범들이 바깥의 상황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파이프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다.모두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소식을 접하면 그들이 돌파할 곳을 알려주기에 편리했다.맨손으로 파이프를 오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아무런 조치도 없이 심지어 십여 층 높이까지 올라가는건 더욱이 말이다.그러나 부대에 몸 담은 적 있던 반승제에게 이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그가 자신의 정장을 벗자, 진부한 사업가의 면모가 순간적으로 야성적이게 변했다.뒤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힘찬 표범처럼 파이프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성혜인은 여전히 15층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건넨 소식이 잘못됐을까 봐 줄곧 이 층을 순찰하고 있었다.간간히 위층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었지만, 15층에는 확실히 사람이 없었다.그녀는 CCTV실에서 복면을 쓴 수수께끼 같은 남자가 그 무리를 맹목적으로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한편, 아래층에는 20명의 인질범들이
반승제도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를 위로하듯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괜찮아.”그는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을 만지는 것처럼 성혜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성혜인의 이마는 온통 새파랗게 멍이 들어있었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었다.반승제는 가볍게 자신의 옷자락으로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 입을 맞췄다.“괜찮아.”성혜인의 코가 갑자기 시큰거렸다. 그녀는 반승제가, 그것도 이렇게 빨리 오리라 생각지 못했다.‘분명 파이프 타고 올라온 거겠지?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잖아.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까? 목숨까지 걸면서...’하지만 곧 그녀는 반승혜가 떠올랐다. 반승혜도 이곳에 있었고 두 사람의 관계도 아주 좋았으니 말이다.그렇게 순식간에 떠올랐던 감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그리고 그녀는 다시 냉정해졌다.반승제는 미처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성혜인을 끌고 이 방의 문 뒤에 섰다.“지금 올라오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곳 인질범들을 조용히 정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성혜인은 그의 가슴에 등을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반승제는 왼손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코끝에서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으며 약간 마음이 들떠 있었다.그러나 성혜인은 시선은 여전히 밖에 고정되어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에게 말했다.“CCTV 실로 가요. CCTV 실은 10층에 있어요.”CCTV 실을 장악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그러자 반승제는 그녀를 덥석 잡더니 대답했다.“내가 갈게, 너는 여기에 있어.”현재 15층의 적들이 이미 깨끗이 소탕되었으므로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그러나 성혜인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품에 묻혀 울고 있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어느새 밖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반승제는 그 자리에서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비로소 성큼성큼 쫓아가 그녀를 끌어당겼다.“너 화났어?”‘내가 어제 늦게 온 것 때문에 자기가 이곳에 잡혀 와서?’“아니요.”“페니야, 나는...”말이 끝나기도
인질범들은 반응할 겨를도 없이 모두 쓰러져 버렸다.반승제 옆에 서 있던 성혜인은 그 장면을 보고 속이 메스꺼울 뿐이었다.그녀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범죄 영화들은 모두 픽션일 뿐이라고 생각하던 성혜인은 그제야 이 세상이 왜 이렇게 고요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모두 이 치안을 지키는 사람들이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는 덕분이었던 것이다.반승제는 그 경찰들을 향해 말했다.“1층 로비에 아직 십여 명이 남아있습니다.”말이 끝나자마자 성혜인은 손등에 문신이 있는 남자를 확인하려고 했다.그러나 한 걸음 다가서자마자 반승제가 그녀를 끌어당겼다.“조심해!”엘리베이터 안 있던 남자가 마지막 숨을 고르며 총을 쏜 것이다.성혜인은 반승제에 의해 바닥에 쓰러졌고, 그 총알은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가면서 옅은 핏자국을 남겼다.만약 조금만 더 빗나간다면, 총알이 스친 곳은 그의 뺨이 아닌 머리였을 것이다.성혜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가 새하얘졌다.경찰은 십여 발을 더 쏴서 남자를 확인 사살한 후, 모두 반승제의 주변으로 몰려갔다.“대표님, 괜찮으세요?”“대표님...”그러나 오히려 반승제는 성혜인을 보며 물었다.“괜찮아?”성혜인의 머릿속은 여전히 멍했다. 만약 반승제가 그녀를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그 총알은 그녀의 가슴에 명중했을 거다.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성혜인과 반대로 반승제는 하마터면 머리를 맞을 뻔했다.그녀는 입을 떡 벌린 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러자 반승제도 놀랐는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성혜인은 손끝을 떨며 그에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그의 목숨이 그녀의 목숨보다 더 값어치가 있는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그러나 성혜인은 자신이 정말 그렇게 물으면, 뒤이어 그가 다시 그런 침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대표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그녀는 반승제에게 안긴 채, 그가 경찰들에게 뭐라 말하는 것을 보았다.그러자 몇 명의
”엉엉…엉엉…흑흑…”반승혜는 그치지 않고 계속 울다가, 피바다 속에 드러누워 있는 남자를 보더니 더더욱 기절할 뻔하였다.성혜인은 그런 그녀를 보며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신을 보는 눈빛에서 짙은 원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하고 싶어 입을 열었으나, 결국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그녀는 얼른 겉옷을 벗어 반승제한테 건네주며 그한테 몇 마디 해명이라도 하려 했지만, 그는 겉옷을 건네받자마자 그것으로 반승혜를 꼭꼭 감싸고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반승혜는 그 자리에 선 채, 문득 이번 일이 반씨 집안사람들 심장에 못을 박는 사건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과 반승제 사이에 갑자기 은하수 하나가 생겨난 것처럼 그와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방안의 냄새는 정말 끔찍했다. 반승혜는 분명 그 남자한테 한바탕 괴롭힘을 당한 게 틀림없다. 그것도 40분 이상은 괴롭혔을 것이다. 층 내의 다른 납치범들은 전부 처리되었지만, 그 남자는 줄곧 이 방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발견되지 못했다.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반승제의 뒤를 따라 1층 로비에 이르렀다. 건물 대문은 열려있었고, 경찰들이 한창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상황 조치를 하고 있었다.반승제는 반승혜를 구급차에 태우고 의사한테 전신 검사를 하라고 당부했다.성폭행을 당했는데 혹시 그 남자한테 어떤 더러운 질병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몇 마디 당부하는 중에 집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할아버지 전화였다. 아마 일이 너무 커져 윗분들이 다 알게 되고 할아버지마저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승제야, 너 아비가 사람을 적잖게 보냈는데, 괜찮으냐?”반승제는 상황을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반승혜는 어릴 적부터 온 집안의 총애를 받으며 거리낌 없이 자랐고 반승제를 매우 믿고 따랐다. 비록 반승제가 반승혜의 아버지와 오빠와는 모순이 있지만,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사촌오빠인 반승제였다. 할아버지도 이 손녀를 매우 아끼는데, 이제 이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