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성혜인을 풀어주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꼭대기 층이요.”성혜인은 겨우 대답했다. 그러자 반승제는 난폭한 동작으로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들였다.꼭대기 층에 도착한 다음 반승제는 반쯤 열린 출입문과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손잡이를 보고 침묵에 잠겼다. 혹시 몰라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성혜인을 소파에 앉히고 난 반승제는 모든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현관으로 가서 바닥에 떨어진 문손잡이를 들어 올렸다. 이는 누가 봐도 강제적으로 열고 들어온 흔적이었다.반승제는 신발장을 끌어다가 문을 단단히 막은 다음에야 몸을 돌려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신발은 어느새 떨어졌는지 하얀 양말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양말도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의 곁에 앉아 양말을 벗겼다. 그러자 아직도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그녀는 몸을 더욱 웅크리며 뒤로 피했다. 반승제는 그녀의 양말을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물었다.“집에 약상자 있어?”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서랍장을 가리켰다. 반승제는 서랍장에서 약상자를 찾아와 필요한 약을 꺼내고 유통기한이 지나지는 않았는지부터 검사했다. 그리고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손가락에 연고를 짜냈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머리카락을 귓등으로 넘겨주고는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밀려온 쌉쌀한 한약 냄새에 그녀는 마치 급소라도 공격당한 것처럼 또다시 넋이 나가버렸다. 얼굴을 살살 어루만지는 반승제의 손가락에 그녀는 아프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했다.차분하게 약을 다 바르고 난 반승제는 또다시 성혜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그리고 시선을 한껏 숙인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누가 이랬어?”“배윤수 작가요.”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번은 녹음의 존재를 알게 된 배윤수가 저지른 일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앞으로는 일을 벌이기
짧게 씻고 나온 반승제는 얇은 샤워 타올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제대로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뚝 떨어져 조각 같은 근육을 타고 흘러내렸다.잠시 후 반승제는 성혜인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그녀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도 머리를 돌려 반승제를 바라봤다가 그 뜨거운 눈빛에 데기라도 한 듯 몸을 흠칫 떨었다.기억을 잃은 반승제는 전보다 훨씬 야만적이었다.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성혜인은 그런 그를 미워한 적도, 증오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돌고 돌아 문뜩 머리를 돌려보면 그는 항상 이렇듯 곁을 지키고 있었다.“페니야, 나랑 사귀자.”반승제는 덤덤하게 말하더니 성혜인의 목을 잡고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그녀의 앞에서 처음으로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네가 이런 일을 당하는 꼴 더는 보기 싫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네 마음을 나한테 주면, 나도 내 마음을 너한테 줄 수 있어.”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승제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입술에 짧게 뽀뽀했다.“네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지원해 줄게. 네가 원하는 것만 얻고 나를 차버려도 상관없어. 대신 나랑 만나고 있을 때는 절대 배신하지 마.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줄 테니까.”반승제는 성혜인의 입술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순간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용모의 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것을 누가 과연 거절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성혜인은 곧 반승제가 클럽의 프리이빗 룸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문밖에 서 있었던 그녀는 모든 과정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 반승제에게도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반승제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오늘 구해주신 건 고맙지만 고백은 거절할게요.”‘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가는 마음고생할게 뻔해. 아직 내 마음을 외면할 수 있을 때 거리
얼마 후 반승제는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축 늘어진 성혜인을 안고 침실로 향해 걸어갔다. 성혜인은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다가 침대에 누웠다.반승제는 키스를 원하는 듯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성혜인은 단호하게 머리를 돌려버렸다. 어쩐지 더러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쾌감이 가시지 않은 몸은 여전히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반승제는 그녀의 곁에 누워 꼭 끌어안으면서 말했다.“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몸은 나보다도 즐기네.”성혜인은 아예 눈을 꼭 감은 채 못 들은 척했다. 반승제는 그녀가 가장 인정하기 싫은 비밀을 말해버렸기 때문이다.두 사람의 첫날밤, 술과 약에 취한 반승제는 어느 때보다도 거칠게 움직였다. 하지만 성혜인은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후에 강민지와 얘기했을 때도 그녀가 땡잡았다면서 장난치기도 했으니 말이다.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속마음을 들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 쓸 틈 없이 정복당하는 거친 방식을 좋아하는 은밀한 속마음을 말이다.지금도 반승제와 함께 보냈던 밤을 떠올리면 성혜인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첫 경험을 해본 뒤로 마치 길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유혹에는 사족을 쓸 수 없었다. 물론 이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 말하지 않을 비밀이었다.성혜인은 자기 생각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말했다가는 반승제의 비웃음을 살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탓에 특히 침대 위에서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인지 반승제의 강압적인 방식은 성혜인의 취향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물론 그녀가 강압적인 방식을 좋아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침대 한정이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반승제는 그녀를 꽉 끌어안으면서 물었다.“페니야, 좋아?”반승제는 성혜인의 위로 올라탔다. 하지만 급하게 다음 단계에 들어서지는 않았다.조명은 끈 침실은 아주 어두웠다. 창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기는 했지만 보일러를 빵빵하게 튼 덕분에 벗고 있어도
반승제는 화가 나서 손이 다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성혜인을 때려눕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그는 성혜인에게 손을 댈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나는 페니를 안 좋아했다고 하지 않았나?’반승제는 슬슬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반 시간 후 성혜인이 밖에서 반승제를 부르면서 말했다.“대표님, 와서 식사하세요.”성혜인의 말은 독 사과를 권하는 악독한 왕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반승제는 셔츠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피 묻은 신발과 외투는 진작 던져버리고 없었다.성혜인은 따끈따끈한 죽을 식탁에 올려놓으면서 반승제가 나온 것을 발견하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제가 죽 좀 끓여봤어요.”반승제는 어젯밤 저녁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 장시간 공복 후에는 죽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식탁 앞에 앉은 반승제는 자신의 앞에만 놓여 있는 그릇을 보고 성혜인에게 물었다.“넌 안 먹어?”“배가 안 고파서요.”성혜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조금 다르게 이해했다.반승제는 싸늘한 시선으로 성혜인을 노려봤다. 약간 붉어진 눈가와 어두운 눈동자는 금방이라고 그녀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성혜인이 자신의 앞에 앉은 것을 보고 반승제는 죽 한 숟가락 떠서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녀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받아먹으려고 했다.반승제는 놀란 표정으로 숟가락을 치웠다. 그런 그의 행동을 성혜인은 당연히 터무니없이 유치한 장난으로 여겼다.“안 드실 거예요?”‘안 먹을 거면 좀 빨리 가줬으면 좋겠는데...’“내가 이걸 먹었으면 좋겠어?”“제가 대표님을 위해 만든 거니까 물론 드시면 좋겠죠?”반승제는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넌 도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반승제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머리가 아팠던 성혜인은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빨리 식사를 끝내고 여기서 나가주셨으면 좋겠어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무심코 머리를 들었다.
반승제가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성혜인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없었다. 잠시 후 심인우가 가져온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회사가 아닌 병원으로 향했다. 심장도 머리도 불편해서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정밀 검사를 끝낸 의사는 검사 결과를 바라보면서 말했다.“대표님은 기억 상실에 두 번의 후유증이 한데 겹쳐서 절대 자극받으시면 안 됩니다. 혹시 어제 평소와 다른 자극을 받지는 않으셨나요? 지금과 같은 증상은 잠깐 쉬면서 진정하면 금방 나으실 겁니다.”반승제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는 야구 방망이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아파서 눈앞이 희미할 지경이었다.“특히 감정 기복이 생길 일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의사는 계속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반승제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혜인이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군지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었다.‘만약 내 손에 걸린다면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어젯밤 한껏 취한 모습으로 몸을 내줄 때는 언제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독약을 먹이지를 않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를 않나... 정말이지 침대 위에서 보여준 모습은 연기가 아닌지 의심이 가는 순간이었다.이런 생각에 머리가 점점 아팠던 반승제는 급기야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의사는 깜짝 놀라서 진정제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제를 투여하기도 전에 반승제는 이미 쓰러져 버렸다....같은 시각, 성혜인은 회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열어 자신이 익명으로 올린 글의 댓글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룻밤이 지났으면 더 많은 시선을 이끌었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이때 장하리가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말했다.“대표님, 배윤수 씨가 어젯밤 경찰에 체포됐대요. 학생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혐의로요. 더구나 박예진 씨의 사건과도 연관이 있다고 밝혀져서 지금 난리가 났어요. 대본을 빼앗기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서 자살했다면서요. 증거도 충분해서 배윤수 씨가 빠져나갈 리는 없을 것 같아요.”성혜인은 놀란 듯 눈을
여기까지 얘기했으니 대화 기록을 캡처로 남겨놓기에는 충분했다.성혜인은 장하리에게 멈추라 하더니, 앞으로는 TJ엔터와 연락하지 말 것을 분부했다.한편, TJ는 여전히 인터넷에서 를 홍보하고 있었고 그제야 성혜인은 철저히 마음을 비웠다.“안 감독님에게 전해요, 마음 놓고 촬영하시라고요. 빠른 시일 내에 작품을 완성해야 해요, 그것이 우리 회사의 첫발일 테니.”장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로 계약을 체결한 여자 연예인이 떠올랐는데, 그녀는 바로 여자주인공이었다.“사장님, 저는 이번에 정말 자신 있어요. 연예계에 이렇게 오래 있으셨으니, 안 감독님 안목은 매우 정확할 겁니다. 여자주인공도 비록 신인이기는 하지만 연기가 꽤 괜찮습니다. 감독님의 지도만 조금 더한다면, 이 드라마의 퀄리티는 절대 나쁘지 않을 거예요.”그렇게, 성혜인은 잠시나마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S.M의 발전은 비교적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었다.조금 늦은 시간, 퇴근하려던 성혜인에게 강민지가 많은 메시지를 보내왔다.「너 언제 서수연 건드렸어? 서수연이 지금 단톡방에서 너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서수연이랑 다니는 그 몇몇 명문가 딸들도 매일 네가 남자 꼬시고 다닌다고 소문 퍼뜨리면서 말이야.」「진짜 듣기 안 좋게 욕하고 있어. 서씨 집안이 무리 내에서 위치가 높다 보니까 이 일 조금 번거로울 것 같다.」서씨 집안의 지위는 제원의 재벌가 중 5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았다. 게다가 서수연에게는 서주혁이라는 오빠가 있어서, 원하는 일은 모두 이룰 수 있었다.성혜인은 서수연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틀림없이 신이한의 일 때문일 것이다.강민지는 아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혜인아, 너 그래도 서수연 조심하는 게 좋아. 요즘 서수연이 아주 미친개처럼 너를 찾고 있어서... 게다가 단톡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너에 대해 몰라서, 아무도 너를 위해 나서주지 않아.”그러나 성혜인은 이런 걸
성혜인이 오늘 밤 스카이웨어에 가는 데다가 홍규연의 집을 임대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자, 서수연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의기양양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수연아, 네가 이렇게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거야. 이한 씨도 그 여자한테 홀려서 정신이 나갔고, 윤단미도 모두 그 여자 때문에 초라해졌어. 지금 여기저기 다리 놓고 있는걸 보면 다음은 너희 우찬 오빠가 될지도 모르지. 우리 오늘 밤 내로 한꺼번에 해치우자. 다시는 이 무리 안에서 고개도 못 들게 말이야!”성혜인은 이 명문가 딸들의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약속한 시각이 밤 7시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 시간대에 출발해 먼저 룸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그 시각, 명문가 딸들도 떠날 준비를 했다.이 상황에 가장 기분이 좋은 건 바로 서수연이었다.서주혁은 한껏 흥분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보고 있던 신문을 한편에 내려놓았다.“어디 가게?”원래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의 서수연은 분명히 밥도 먹지 않고 미리 갈 생각인 것으로 보였다.“오빠, 나 밖에 일이 있어.”“신이한 적당히 좀 쫓아다녀.”“아이고, 알았어.”서수연은 차에 올라타 손에 들려있는 연고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것은 그녀가 직접 옛 스승님을 찾아가 만든 것이다. 그것은 얼굴에 바르기만 하면 금방 하나둘 발진이 생겨서 한 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게다가 잘 처리하지 못하면 얼굴에 울퉁불퉁한 자국이 남아 그 예쁜 얼굴도 망가지게 된다.‘페니의 얼굴만 아니면, 반드시 이한 씨도 더 매달리지 않을 거야. 이한 씨가 좋아하는 건 죄다 미녀들뿐이니까.’서수연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스카이웨어 건물 밖에서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만났다. 모두들 얼굴에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중에서도 단연 흥분한 사람은 바로 서수연과 홍규연이였다.“이따 들어가서 일단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바로 뺨부터 내리치도록 하자. 그렇게 우리 분이 모두 풀릴 때까지 친 다음, 다시 이 연고를 그 여자 얼굴에 바
성혜인은 핸드폰을 꺼내 서수연이 오줌을 싼 사진을 찍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수연은 울며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다른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도 조금 전과 같은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반쪽짜리 술병이 만약 정말 서수연의 눈을 찔렀다면, 그녀의 인생은 전부 망가지고 말았을 것이다.그녀들은 감히 숨도 못 쉬었다.그래도 홍규연이 바들바들 떨며 말을 꺼냈다.“나... 나는 JY부동산의 자식이야. 네가 나를 건든다면, 우리 아빠가 반드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 악마야...”홍규연은 급히 이 기회를 틈타 서수연을 일으켜 세웠다.서수연은 창피하기도, 두렵기도 하면서 제정신이 아닌 채 그저 울기만 했다.그러자 사람들은 서둘러 서수연을 데리고 의기소침해서 자리를 떴다.그녀들은 머리에 저마다 서로 다른 정도의 부상을 입었지만, 누구도 감히 성혜인 더 추궁할 엄두를 못 냈다. 그저 이 악마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게 상책일 뿐이었다.서수연은 집에 보내졌다. 집에서는 저녁 식사가 한창이었는데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문이 열리고 그들은 몇 명의 여자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서수연을 발견했다.서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힐끗 쳐다보았지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그러나 서씨 집안 다른 사람들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수연이 밖에 나간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얘 왜 이래, 바지는 왜 또 젖었고?”그곳에는 권위가 있는 어른들이 있었다. 그러자 이 명문가 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살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그녀들의 머리는 전부 헝클어져 엉망이 되어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밖에서 누군가와 다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서씨 집안 사람들 이들을 알고 있었다. 모두 각종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명문가 자식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매우 낭패스럽기 그지없었다.꼴이 가장 말이 아닌 건 바로 서수연이었다. 이윽고 서씨 집안 어른들은 코를 찌르는 오줌 냄새를 맡았다.서수연은 여전히 울고 있었는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