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두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박예진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만났던 사람인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화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그녀는 박예진이 남긴 편지를 떠올렸다. 아마 박예진은 그 편지를 쓸 때부터 이미 각오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덜덜 떨었다.그녀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도 박예진이 지우려고 했던 녹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박예진의 시신을 앞두고는 도무지 재생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다시 거두던 순간 배윤수가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작가님...”배윤수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쉬었다.“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페니 씨는 오늘 예진 학생을 만나러 왔나요?”“네.”“예진 학생의 대본들은 페니 씨한테 있죠?”“네.”“예진 학생은 우리 전공의 수석이었어요. 그 대본들은 유물로 부모님께 드리고 싶네요. 이렇게라도 위로가 되고 싶어서요.”성혜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사람이 죽자마자 대본을 빼앗으려는 속셈이 더러웠기 때문이다. 원래도 그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했던 생각은 이 순간 더욱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그 대본들은 예진 씨가 저한테 준 거예요. 그 증명으로 손 편지도 있어요. 저한테 준 대본을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는 내용으로요.”배윤수는 박예진이 편지를 남겼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박예진이 자살한 탓에 배윤수는 앞으로 꽤 귀찮은 일에 휘말려야 했다. 그래도 그녀가 남긴 대본으로 돈 벌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예진이 부모님한테 말해서 받아오라고 해야겠군...’배윤수는 몰래 이를 악물며 성혜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혜인은 성주대학교를 떠난 다음에도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힘들게 기분을 진정시키고 녹음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녹음 속에는 짧은 몇 마디만 있었다. 그래도 박예진이 배윤수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
배윤수는 이런 학생들을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 그것도 다 모자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그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주완과 김애은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성혜인에게서 대본을 빼앗아 온다면 박예진은 제값을 끝내는 셈이었다. 그래서 배윤수는 후에 또다시 박주완에게 연락해 대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박예진의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박주완은 역시나 성혜인에게 연락했다. 그때 성혜인은 마침 배윤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박예진이 죽었다고 해도 녹음을 그대로 공개하는 것은 그녀에게 오점을 남길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페니 씨, 나는 예진이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예진이 대본이 그 쪽한테 있다고 들어서 연락했어요. 그건 예진이 유물이니 저희한테 돌려주시죠.”“죄송하지만 그건 예진 씨가 정당한 거래를 통해 저한테 준 물건이에요.”“얼마 받고 샀는데요?”“그건 저와 예진 씨의 일이고요.”“그게 무슨 뜻이죠? 난 예진이 아버지라니까요? 예진이 일이 곧 내 일이에요. 예진이 장례식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애 대본을 이용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당신 양심이 있기나 해요? 예진이는 내 유일한 딸이에요! 만약 대본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당장 법원에 고소장 올릴 줄 알아요!”박주완의 고함에 성혜인은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만약 그가 지금과 같은 기세로 배윤수를 대했다면 박예진이 죽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아버님, 예진 씨는 저한테 편지를 남겨줬어요. 예진 씨도 성인이니 그 편지가 법정에서 증거가 되어주겠네요. 그러니 고소를 원하시면 얼마든지 하세요. 다른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며칠 더 기다려 주시고요.”성혜인은 일단 배윤수의 실체부터 까발리려고 했다. 그러면 진실을 알고 난 박예진의 부모도 자연스레 포기하고 나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주완은 그새를 못 참고 인터넷 여론을 이용해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성주대학교는 아주 유명한 명문대였다. 그래서 성주대학교의 학생이 자살한 사건도 엄청난 화제
반승제가 거절한 다음 성혜인의 기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박주완이 한 시간마다 새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한 덕에 점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모든 사람이 일제히 성혜인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배윤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에는 박예진의 대본을 어떻게 팔아야 할지 생각까지 끝냈다.배윤수에게는 정기적으로 거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도송애였다. 어차피 대본을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한발 먼저 도송애에게 연락했다.도송애는 이미 배윤수와 두어 번 협력한 적 있었다. 지난번 투자한 두 개의 대본은 무려 투자금의 30배나 벌어들였다. 그래서 그녀는 연락받자마자 자세히 묻지도 않고 통 크게 허락했다.“이렇게 먼저 연락해 주셔서 고마워요. 작가님의 대본이라면 더 물을 것도 없죠. 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60억 원은 대본에, 200억 원은 촬영에 투자할게요.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배윤수는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로 가득 찼다.성혜인이 지금껏 기사를 내리지 못한 것을 보고 배윤수는 그녀가 무조건 권력 없는 하찮은 사람일 것으로 단정 지었다. 제원에 돈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권력까지 있는 사람은 적었기 때문이다.배윤수는 피식 웃으면서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박주완이 대본을 가져오고 떼돈 벌 때만 기다리면서 말이다.저녁 식사 시간, 설우현이 건 전화가 배윤수의 핸드폰을 울렸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위선의 가면을 쓰고 공손하게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 우현 씨.”같은 시각, 설우현은 클럽에 있었다. 그는 우연히 친구가 인터넷 기사를 얘기하는 것을 듣고 배윤수에게 전화를 걸었다.“제가 얼마 전 페니 씨한테 대본을 추천해달라고 했잖아요. 혹시 페니 씨와 만나던 사람이 투신자살했다는 그 학생인가요?”“네,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 학생이 페니 씨한테 대본을 준 모양인데, 지금 학생의 부모님이 대본을 내놓으라고 아주 난
배윤수의 속은 이미 희열로 가득 찼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심지어 실망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박주완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교수님, 혹시 대본이 별로인가요?”배윤수는 박예진의 영정사진을 힐끗 봤다. 속으로는 박예진 일가의 멍청함을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장례식에서 대본 얘기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 예진이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늘은 일단 장례식에 집중해요. 이 대본은 제가 알아서 투자자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그다음 일은 보장할 수 없어요. 그래도 예진이가 남긴 소중한 물건이니 최선은 다할게요.”박주완은 한숨을 쉬었다. 김애은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정말 고마워요, 교수님. 우리 예진이가 그렇게 속을 썩였는데도 계속 도와주시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배윤수는 박주완의 어깨를 툭툭 쳤다.장례식에 온 조문객은 별로 없었다. 내성적인 박예진에게는 애초에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식도 단출한 편이었다.잠깐 쉬러 밖으로 나온 박주완과 김애은은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성혜인과 마주쳤다. 안 그래도 기분이 언짢았던 박주완은 그녀를 보자마자 완전히 폭발해 버리고 말했다. 그래서 한쪽에 놓여 있던 빗자루를 쳐들고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도둑년! 살인자! 네가 우리 예진이를 죽였어! 근데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꺼져! 꺼지라고!”김애은은 뒤에서 박주완을 잡고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도 증오가 가득하기는 마찬가지였다.성혜인은 빗자루를 확 잡아 던지고 고집스러운 부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배윤수가 박예진을 죽인 범인이라면, 두 사람은 공범인데도 말이다.성혜인은 결국 녹음을 꺼내 들었다. 원래는 박예진의 명성을 위해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이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았다.“이건 예진 씨가 저한테 준 녹음이에요. 저는 원래 이 녹음으로 예진 씨를
성혜인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슬픔도 후회도 전부 두 사람 몫이었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김애은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하지만 박예진이 죽은 다음 우는 것은 하나도 소용없었다.김애은은 박주완을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10년이나 늙은 것 같았다.박주완은 김애은의 도움을 받으며 찬물로 씻은 다음에야 그나마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틀 후, 두 사람은 드디어 약간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성혜인의 말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페니라는 여자가 우리한테 거짓말했을 수도 있지.”“맞아요, 예진이 우리를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하하.”두 사람의 대화는 아주 무미건조했다. 어떻게든 박예진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얼마 후 배윤수가 전화를 걸어 3개의 대본 전부 선택받지 못했다는 소식을 알렸다.“속상하신 건 알겠지만 죄송하게 됐습니다.”박주완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배윤수의 목소리를 듣자 녹음 속의 목소리가 떠올라 열불이 솟구쳤기 때문이다.하지만 상대는 배윤수였다. 박주완이 죽어도 이기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들은 녹음도 절대 공개할 수 없었다. 그러면 박예진의 이름은 끝없이 불명예스럽게 거론되고 말 것이다.박주완은 이미 녹음을 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만약 녹음이 공개된다면 박예진이 먼저 배윤수를 꼬셨다고 말할 사람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렇듯 여자에게 불공평했다.두 사람은 박예진이 죽은 다음에도 거론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혼자 피임약을 사 먹었던 모습을 떠올리면 화가 나서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배윤수가 그토록 짐승보다 못할 선생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그렇다면 예진의 대본을 저희에게 돌려주세요, 교수님.”마지막 대본을 얻은 배윤수는 더 이상 연기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일을 귀찮게 만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계속했다.“대본은 투자자한테 있어요.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잠깐 열렸었다. 그러자 남자들은 칼을 꺼내 들며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커플을 향해 외쳤다.“나가!”엘리베이터는 19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19층부터는 호텔이기 때문에 성혜인을 마음껏 농락할 수 있었다.이 남자들은 당연히 배윤수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성혜인의 나체를 담은 영상을 찍기 위해서 말이다. 표적이 이토록 예쁜 여자일 줄은 몰랐던 남자들은 호텔에 도착하기 전의 엘리베이터에서 벌써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남자들의 키는 전부 180cm를 넘었다. 더구나 몸매도 근육질이라 웬만한 남자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성혜인은 거울로 된 엘리베이터 벽 앞에서 자신의 절망스러운 표정을 묵묵히 바라봤다. 바지는 이미 반쯤 풀렸고 남자들은 주절주절 음담패설을 내뱉었다.“제기랄, 생긴 것 봐라. 이런 얼굴에 성병은 없나 몰라.”“성병에 걸려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야. 이 얼굴을 돈 받으며 쓸 수 있는 거잖아.”“수다는 그만 떨고 바지부터 벗겨.”겨울옷은 벗기기 그다지 쉽지 않았다. 성혜인은 그 틈을 타서 남자의 턱을 힘껏 깨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손에 힘을 실어 그녀의 뺨을 때렸다.성혜인은 남자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 속에는 입속이 찢어지면서 흐른 피도 있었다.“너 죽고 싶어?!”남자는 성혜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벽으로 확 밀쳤다.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반승제의 모습이 드러났다.반승제를 발견한 남자들은 인상을 쓰면서 언성을 높였다.“뭘 봐!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반승제의 시선은 남자들이 아닌 성혜인에게 향했다. 그녀의 이마에는 핏자국이 있었고 바지는 이미 반쯤 벗겨진 상태였다.처음으로 느껴보는 미칠 것 같은 분노에 반승제는 성혜인을 잡고 있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의 머리통을 잡고 벽으로 쾅 밀치자, 약간의 흔들림과 함께 남자의 이가 우수수 떨어졌다.성혜인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반승제는 이미 남자의 머리를 차서 쓰러뜨렸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의 기세는 악마 못지
반승제는 성혜인을 풀어주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꼭대기 층이요.”성혜인은 겨우 대답했다. 그러자 반승제는 난폭한 동작으로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들였다.꼭대기 층에 도착한 다음 반승제는 반쯤 열린 출입문과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손잡이를 보고 침묵에 잠겼다. 혹시 몰라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성혜인을 소파에 앉히고 난 반승제는 모든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현관으로 가서 바닥에 떨어진 문손잡이를 들어 올렸다. 이는 누가 봐도 강제적으로 열고 들어온 흔적이었다.반승제는 신발장을 끌어다가 문을 단단히 막은 다음에야 몸을 돌려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신발은 어느새 떨어졌는지 하얀 양말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양말도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의 곁에 앉아 양말을 벗겼다. 그러자 아직도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그녀는 몸을 더욱 웅크리며 뒤로 피했다. 반승제는 그녀의 양말을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물었다.“집에 약상자 있어?”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서랍장을 가리켰다. 반승제는 서랍장에서 약상자를 찾아와 필요한 약을 꺼내고 유통기한이 지나지는 않았는지부터 검사했다. 그리고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손가락에 연고를 짜냈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머리카락을 귓등으로 넘겨주고는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밀려온 쌉쌀한 한약 냄새에 그녀는 마치 급소라도 공격당한 것처럼 또다시 넋이 나가버렸다. 얼굴을 살살 어루만지는 반승제의 손가락에 그녀는 아프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했다.차분하게 약을 다 바르고 난 반승제는 또다시 성혜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그리고 시선을 한껏 숙인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누가 이랬어?”“배윤수 작가요.”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번은 녹음의 존재를 알게 된 배윤수가 저지른 일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앞으로는 일을 벌이기
짧게 씻고 나온 반승제는 얇은 샤워 타올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제대로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뚝 떨어져 조각 같은 근육을 타고 흘러내렸다.잠시 후 반승제는 성혜인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그녀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도 머리를 돌려 반승제를 바라봤다가 그 뜨거운 눈빛에 데기라도 한 듯 몸을 흠칫 떨었다.기억을 잃은 반승제는 전보다 훨씬 야만적이었다.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성혜인은 그런 그를 미워한 적도, 증오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돌고 돌아 문뜩 머리를 돌려보면 그는 항상 이렇듯 곁을 지키고 있었다.“페니야, 나랑 사귀자.”반승제는 덤덤하게 말하더니 성혜인의 목을 잡고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그녀의 앞에서 처음으로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네가 이런 일을 당하는 꼴 더는 보기 싫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네 마음을 나한테 주면, 나도 내 마음을 너한테 줄 수 있어.”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승제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입술에 짧게 뽀뽀했다.“네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지원해 줄게. 네가 원하는 것만 얻고 나를 차버려도 상관없어. 대신 나랑 만나고 있을 때는 절대 배신하지 마.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줄 테니까.”반승제는 성혜인의 입술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순간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용모의 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것을 누가 과연 거절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성혜인은 곧 반승제가 클럽의 프리이빗 룸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문밖에 서 있었던 그녀는 모든 과정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 반승제에게도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반승제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오늘 구해주신 건 고맙지만 고백은 거절할게요.”‘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가는 마음고생할게 뻔해. 아직 내 마음을 외면할 수 있을 때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