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과 온수빈은 영화관을 떠난 다음에도 영화 얘기를 계속했다.“페니 씨, 이번 영화의 매출액이 6000억 원을 넘길 것 같다고 하네요. 덕분에 저도 인기가 많아질 것 같아요. 저는 앞으로도 S.M을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온수빈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그러자 성혜인은 그의 차를 툭툭 치면서 대답했다.“돌아가서 편히 쉬어요. 제가 빠른 시일 내로 다른 일을 찾아줄게요.”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S.M은 당분간 온수빈의 인기로 먹고살게 생겼다.그래도 성혜인은 박예진이 보내준 몇 개의 대본에 의지해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대본도 있고 감독도 있으니, 흥행만 하면 S.M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남자주인공은 온수빈으로, 여자주인공은 신인 여배우로 쓸 생각이었다. 그것도 S.M과 계약한 신인 여배우 말이다. 그렇다면 온수빈의 인기로 신인도 키워볼 수 있었다.온수빈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S.M의 오너로서 성혜인은 사업가들이 자주 쓰는 수단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온수빈에게도 합당한 보수를 줄 것이다.성혜인은 온수빈이 떠나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차 문을 연 순간 뒤에서 남자 두 명이 나타나 그녀의 목을 잡았다.이곳은 유동 인구가 많은 백화점 앞이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어떻게든 소리를 질러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뒤통수를 가격당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40분 후.누군가가 성혜인에게 찬물을 뿌렸다. 그러자 그녀는 서서히 눈을 떠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도송애는 의자에 앉아 오만한 태도로 성혜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오랜만이에요, 페니 씨.”성혜인은 도송애가 도라희 때문에 자신을 납치했다고 생각했다. 명성이 나락으로 떨어진 도라희는 해외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도송애는 커다란 채찍을 들고 있었다. 괜히 수많은 남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적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묶인 성혜인은 곧 도살당할 소가 된 것만 같은 무기력감이 들었다.
성혜인은 눈썹을 튕기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못 믿겠으면 회장님께 연락해요. 번호는 제가 알고 있어요. 안 그래도 얼마 전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거든요. 참, 반승제 씨가 저를 왜 싫어하는지 알아요? 그건 제가 하루가 멀다 하게 회장님께 고자질해서예요.”성혜인의 태연한 모습에 도송애는 이미 반쯤 넘어갔다. 더구나 그녀는 권세에 굴복할 줄 아는 똘똘한 사람이었기에 표정도 전보다 훨씬 누그러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위협을 잊지 않았다.“만약 거짓말이 들통나면 지금보다 더 심한 대접을 받을 줄 알아요.”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목적은 이미 달성했기 때문이다. 도송애의 성격으로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함부로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도송애가 조사를 끝낼 때까지 숨을 돌릴 수 있었다.역시나 도송애는 경호원에게 성혜인을 가둬두라고 지시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반기태의 사람과 연락이 닿았다.금방 퇴원한 반기태는 성혜인이 도송애에게 잡혀 있다는 소식을 알고 곧바로 사람을 보내 풀어주라고 했다. 도송애는 반기태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회장에서 마주친 적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혜인이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여기고 부리나케 그녀를 풀어줬다.반승제의 위협에 단단히 겁먹은 반기태는 더는 성혜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 레스토랑에서 성혜인과 만나자마자 그녀를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주라고 했다.성혜인의 안색은 아주 창백했다. 잔머리를 굴려 도송애에게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반기태의 손에 잡히고 말았으니 말이다.“페니 양, 지난번의 오해에 관해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네.”반기태의 태도에 성혜인은 금방 그가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 40억이 적혀 있는 수표와 약병을 꺼내 성혜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이건 사람을 소리소문없이 죽일 수 있는 약이야. 승제는 평소 일이 많으니 언제 갑자기 심정지로 죽어도 이상할 건
성혜인은 반승제를 배신했다. 그러니 반승제도 성혜인을 없애버리는 것이 현명했다.저녁, 침대에 누운 반승제의 머릿속에는 또다시 물안개로 가득 찬 욕실이 떠올랐다. 떨림은 입술부터 가슴까지 점점 아래로 전해졌다.반승제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물안개 속의 사람을 보려고 집중하기는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든 반승제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한 여자와 부둥켜안은 채 좁은 차 안에 있었다.“남편 몰래 나랑 만나는 거, 재미있지 않아?”이 목소리는 분명히 반승제의 것이었다.새벽 3시, 반승제는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을 휘감은 흥분감 때문에 다시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심호흡하고 나서 한겨울에 찬물 샤워하러 욕실로 향했다.그리고 샤워가 끝난 다음에야 약간 살 것 같았다....이튿날 아침, 성혜인은 회사로 가서 안유결에게 대본을 보여줬다. 그의 마음에 드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비록 안유결을 천재 감독의 길로 이끈 것은 사극 드라마였지만, 그가 촬영한 스릴러 드라마도 마찬가지로 유명했다.대본을 보고 난 안유결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상기된 안색으로 말했다.“사장님, 이 대본들은 어디에서 구한 거예요?”“성주대의 학생한테서요. 실력이 대단하죠?”안유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본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S.M에 큰 기대가 없었던 그의 가슴이 이토록 다채로운 대본에 세차게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그러네요. 이런 대본이라면 얼마든지 촬영할 수 있어요. 부디 저한테 맡겨주세요!”안유결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한시름 놓았다.“온수빈 씨를 남자주인공으로 쓰는 건 어때요? 얼마 전 금방 상영한 영화 덕분에 홍보 효과가 있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여자주인공은 오디션으로 신인을 뽑았으면 해요.”“온수빈 씨의 연기력이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죠. 하지만 추리물 드라마는 투자금이 엄청 필요할 거예요.”“400억이면 될까요?”안유결은 손을 흠칫 떨었
성혜인은 두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박예진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만났던 사람인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화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그녀는 박예진이 남긴 편지를 떠올렸다. 아마 박예진은 그 편지를 쓸 때부터 이미 각오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덜덜 떨었다.그녀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도 박예진이 지우려고 했던 녹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박예진의 시신을 앞두고는 도무지 재생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다시 거두던 순간 배윤수가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작가님...”배윤수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쉬었다.“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페니 씨는 오늘 예진 학생을 만나러 왔나요?”“네.”“예진 학생의 대본들은 페니 씨한테 있죠?”“네.”“예진 학생은 우리 전공의 수석이었어요. 그 대본들은 유물로 부모님께 드리고 싶네요. 이렇게라도 위로가 되고 싶어서요.”성혜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사람이 죽자마자 대본을 빼앗으려는 속셈이 더러웠기 때문이다. 원래도 그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했던 생각은 이 순간 더욱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그 대본들은 예진 씨가 저한테 준 거예요. 그 증명으로 손 편지도 있어요. 저한테 준 대본을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는 내용으로요.”배윤수는 박예진이 편지를 남겼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박예진이 자살한 탓에 배윤수는 앞으로 꽤 귀찮은 일에 휘말려야 했다. 그래도 그녀가 남긴 대본으로 돈 벌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예진이 부모님한테 말해서 받아오라고 해야겠군...’배윤수는 몰래 이를 악물며 성혜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혜인은 성주대학교를 떠난 다음에도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힘들게 기분을 진정시키고 녹음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녹음 속에는 짧은 몇 마디만 있었다. 그래도 박예진이 배윤수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
배윤수는 이런 학생들을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 그것도 다 모자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그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주완과 김애은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성혜인에게서 대본을 빼앗아 온다면 박예진은 제값을 끝내는 셈이었다. 그래서 배윤수는 후에 또다시 박주완에게 연락해 대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박예진의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박주완은 역시나 성혜인에게 연락했다. 그때 성혜인은 마침 배윤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박예진이 죽었다고 해도 녹음을 그대로 공개하는 것은 그녀에게 오점을 남길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페니 씨, 나는 예진이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예진이 대본이 그 쪽한테 있다고 들어서 연락했어요. 그건 예진이 유물이니 저희한테 돌려주시죠.”“죄송하지만 그건 예진 씨가 정당한 거래를 통해 저한테 준 물건이에요.”“얼마 받고 샀는데요?”“그건 저와 예진 씨의 일이고요.”“그게 무슨 뜻이죠? 난 예진이 아버지라니까요? 예진이 일이 곧 내 일이에요. 예진이 장례식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애 대본을 이용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당신 양심이 있기나 해요? 예진이는 내 유일한 딸이에요! 만약 대본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당장 법원에 고소장 올릴 줄 알아요!”박주완의 고함에 성혜인은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만약 그가 지금과 같은 기세로 배윤수를 대했다면 박예진이 죽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아버님, 예진 씨는 저한테 편지를 남겨줬어요. 예진 씨도 성인이니 그 편지가 법정에서 증거가 되어주겠네요. 그러니 고소를 원하시면 얼마든지 하세요. 다른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며칠 더 기다려 주시고요.”성혜인은 일단 배윤수의 실체부터 까발리려고 했다. 그러면 진실을 알고 난 박예진의 부모도 자연스레 포기하고 나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주완은 그새를 못 참고 인터넷 여론을 이용해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성주대학교는 아주 유명한 명문대였다. 그래서 성주대학교의 학생이 자살한 사건도 엄청난 화제
반승제가 거절한 다음 성혜인의 기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박주완이 한 시간마다 새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한 덕에 점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모든 사람이 일제히 성혜인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배윤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에는 박예진의 대본을 어떻게 팔아야 할지 생각까지 끝냈다.배윤수에게는 정기적으로 거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도송애였다. 어차피 대본을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한발 먼저 도송애에게 연락했다.도송애는 이미 배윤수와 두어 번 협력한 적 있었다. 지난번 투자한 두 개의 대본은 무려 투자금의 30배나 벌어들였다. 그래서 그녀는 연락받자마자 자세히 묻지도 않고 통 크게 허락했다.“이렇게 먼저 연락해 주셔서 고마워요. 작가님의 대본이라면 더 물을 것도 없죠. 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60억 원은 대본에, 200억 원은 촬영에 투자할게요.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배윤수는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로 가득 찼다.성혜인이 지금껏 기사를 내리지 못한 것을 보고 배윤수는 그녀가 무조건 권력 없는 하찮은 사람일 것으로 단정 지었다. 제원에 돈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권력까지 있는 사람은 적었기 때문이다.배윤수는 피식 웃으면서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박주완이 대본을 가져오고 떼돈 벌 때만 기다리면서 말이다.저녁 식사 시간, 설우현이 건 전화가 배윤수의 핸드폰을 울렸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위선의 가면을 쓰고 공손하게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 우현 씨.”같은 시각, 설우현은 클럽에 있었다. 그는 우연히 친구가 인터넷 기사를 얘기하는 것을 듣고 배윤수에게 전화를 걸었다.“제가 얼마 전 페니 씨한테 대본을 추천해달라고 했잖아요. 혹시 페니 씨와 만나던 사람이 투신자살했다는 그 학생인가요?”“네,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 학생이 페니 씨한테 대본을 준 모양인데, 지금 학생의 부모님이 대본을 내놓으라고 아주 난
배윤수의 속은 이미 희열로 가득 찼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심지어 실망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박주완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교수님, 혹시 대본이 별로인가요?”배윤수는 박예진의 영정사진을 힐끗 봤다. 속으로는 박예진 일가의 멍청함을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장례식에서 대본 얘기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 예진이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늘은 일단 장례식에 집중해요. 이 대본은 제가 알아서 투자자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그다음 일은 보장할 수 없어요. 그래도 예진이가 남긴 소중한 물건이니 최선은 다할게요.”박주완은 한숨을 쉬었다. 김애은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정말 고마워요, 교수님. 우리 예진이가 그렇게 속을 썩였는데도 계속 도와주시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배윤수는 박주완의 어깨를 툭툭 쳤다.장례식에 온 조문객은 별로 없었다. 내성적인 박예진에게는 애초에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식도 단출한 편이었다.잠깐 쉬러 밖으로 나온 박주완과 김애은은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성혜인과 마주쳤다. 안 그래도 기분이 언짢았던 박주완은 그녀를 보자마자 완전히 폭발해 버리고 말했다. 그래서 한쪽에 놓여 있던 빗자루를 쳐들고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도둑년! 살인자! 네가 우리 예진이를 죽였어! 근데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꺼져! 꺼지라고!”김애은은 뒤에서 박주완을 잡고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도 증오가 가득하기는 마찬가지였다.성혜인은 빗자루를 확 잡아 던지고 고집스러운 부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배윤수가 박예진을 죽인 범인이라면, 두 사람은 공범인데도 말이다.성혜인은 결국 녹음을 꺼내 들었다. 원래는 박예진의 명성을 위해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이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았다.“이건 예진 씨가 저한테 준 녹음이에요. 저는 원래 이 녹음으로 예진 씨를
성혜인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슬픔도 후회도 전부 두 사람 몫이었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김애은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하지만 박예진이 죽은 다음 우는 것은 하나도 소용없었다.김애은은 박주완을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10년이나 늙은 것 같았다.박주완은 김애은의 도움을 받으며 찬물로 씻은 다음에야 그나마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틀 후, 두 사람은 드디어 약간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성혜인의 말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페니라는 여자가 우리한테 거짓말했을 수도 있지.”“맞아요, 예진이 우리를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하하.”두 사람의 대화는 아주 무미건조했다. 어떻게든 박예진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얼마 후 배윤수가 전화를 걸어 3개의 대본 전부 선택받지 못했다는 소식을 알렸다.“속상하신 건 알겠지만 죄송하게 됐습니다.”박주완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배윤수의 목소리를 듣자 녹음 속의 목소리가 떠올라 열불이 솟구쳤기 때문이다.하지만 상대는 배윤수였다. 박주완이 죽어도 이기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들은 녹음도 절대 공개할 수 없었다. 그러면 박예진의 이름은 끝없이 불명예스럽게 거론되고 말 것이다.박주완은 이미 녹음을 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만약 녹음이 공개된다면 박예진이 먼저 배윤수를 꼬셨다고 말할 사람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렇듯 여자에게 불공평했다.두 사람은 박예진이 죽은 다음에도 거론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혼자 피임약을 사 먹었던 모습을 떠올리면 화가 나서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배윤수가 그토록 짐승보다 못할 선생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그렇다면 예진의 대본을 저희에게 돌려주세요, 교수님.”마지막 대본을 얻은 배윤수는 더 이상 연기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일을 귀찮게 만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계속했다.“대본은 투자자한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