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바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가 핑 돌아서 금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먹었던 음식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김경자와 백연서가 태어나서 처음 차린 지각한 생일상에 약을 탔을 줄은 물론 전혀 예상치 못했다.심장이 찔린 듯이 아팠던 반승제는 옷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겨우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저는 윤단미를 좋아하지 않아요. 결혼도 절대 안 할 거예요. 그리고 형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반승제가 말을 끝까지 하기도 전에 김경자가 말머리를 잘랐다.“거짓말하지 말거라. 내가 아직도 모를 것 같더냐? 승우는 절대 살아있을 리가 없어. 이 세상에서 가장 승우가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인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그러니 이만 포기하고 단미한테 도움받아.”반승제는 눈앞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윤단미와 함께하는 미래가 마치 환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는 있는 힘껏 가까이 다가온 윤단미를 쳐내면서 외쳤다.“꺼져!”윤단미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김경자는 눈을 부릅뜨면서 반승제의 멱살을 잡았다.“지금 이게 무슨 뜻이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니? 네 놈 자식은 나를 할머니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구나!”반승제는 김경자도 쳐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그녀의 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저는 할머니를 할머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저를 단 한 번도 손자라고 생각한 적 없죠? 그러니까 승우 형의 그림자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겠죠. 저도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반승제는 김경자와 더 이상 얘기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표정도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단호하게 몸을 돌리며 이만 떠나려고 했다.“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반승제의 말에 흥분한 김경자는 조용히 의자를 쳐들고 그의 뒤통수를 향해 내리쳤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
“닥쳐!”반기훈이 뿜어낸 위압감에 백연서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눈물만 줄줄 흘렸다.병원 복도의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다. 반기훈이 백연서에 대한 증오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이르렀고 그녀가 얼마나 서럽게 울든 악어의 눈물로 느껴졌다. 지금도 그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여보, 미안해요. 근데 난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백연서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만큼은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는 반기훈을 사랑했다. 한평생 사랑해 본 유일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하지만 반기훈은 백연서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꼴도 보기 싫은 듯 눈을 감으면서 싸늘하게 말했다.“울 거면 다른 곳에 가서 울어. 시끄러워 죽겠으니까.”백연서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수술실의 전등은 여전히 밝혀져 있었고 정적이 휩싸인 복도에는 부지런히 오가는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얼마 후 반태승이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지팡이를 탁 내리치면서 말했다.“아주 황당하기 짝이 없군! 짝이 없어!”반씨 가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반태승은 너무나도 황당했다. 웃어른이라는 사람이 이런 짓을 벌였으니, 내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랫사람을 엄히 다루던 그만 우스워진 셈이다....같은 시각, 성혜인은 도라희와의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했다. 하지만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쉽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성혜인은 핸드폰을 힐끗 봤다. 반승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반승제는 오늘 백연서와 식사하기 위해 반씨 저택으로 돌아간 모양이었기에 그녀는 애써 신경을 거두며 약속 장소인 카페 안에 들어가려고 했다.이때 심인우가 전화를 걸어온 것을 보고 그녀는 우뚝 멈춰 섰다.“페니 씨,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 수술을 받고 있다는데...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대표님 가족들과 식사하러 가신거 아니였나요?”성혜인은 자기 귀를 의심할지언정 심인우의 말을 단번에 믿지 못했다. 그러자 심인우는 잠깐 침묵하다가 자초지종
반태승은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반승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승혜야, 넌 먼저 돌아가거라. 그리고 승제는 휴식이 필요하니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말도록 일러두거라.”반승혜는 머리를 끄덕였다. 단순했던 그녀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백연서는 진작 경호원에게 끌려갔기에 병원에는 반태승, 반기훈, 그리고 성혜인만 남게 되었다.반태승은 이제야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진세운에게 물었다.“승제한테 어떤 후유증이 남을 것 같나?”진세운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답했다.“아직은 모릅니다. 그것도 승제가 깨어나야 알 수 있습니다.”반승제는 병실로 올라갔다. 과다 출혈로 인해 안색은 송장처럼 창백했다.반승제의 침대 곁으로 가서 멈춰 선 성혜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혜인아...”반태승은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병실 안에 들어섰다. 입을 열어 성혜인을 부르기는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세 사람은 오후가 될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반승제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반태승은 따듯한 수건으로 반승제의 이마에 맺힌 땀을 정성껏 닦아주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이런 아내를 못 알아본 그도 참 복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오후 네 시, 반승제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의사는 반승제를 검사하다 말고 반태승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무엇이든 먹지 않는다면 반승제가 깨어나기 전에 그가 먼저 쓰러질 것이라면서 말이다.반태승은 의사의 말을 듣기나 했는지 동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기만 했다. 다행히 반승제는 늦지 않게 깨어났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은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예리한 눈빛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극심한 두통 때문에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반태승은 빠르게 다가가 반승제에게 물었다.“승제야, 괜찮니?”두통이 심했던 반승제는 인상을 쓴 채로 반태승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겨우 짜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반태승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급기야 눈물을
그는 그저 담담하게 밥을 먹을 뿐이었다. 화장실에 갈 때, 반승제는 성혜인이 내민 손을 망설임 없이 뿌리치기도 했다.성혜인은 그의 앞에서 일부러 윤단미를 언급해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보름이 지난 후 오늘, 반승제는 드디어 퇴원할 수 있게 되었고 성혜인은 그를 도와 퇴원 절차를 밟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병실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은 뒤였다.보름 사이, 반승제의 안색은 매우 좋아졌다.옷 소매를 정리하고 있던 반승제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침향 묵주 팔찌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누가 선물한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성혜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이윽고 반승제는 그 팔찌를 빼며 물었다.“나 이거 언제부터 끼고 있던 거예요?”“보름 전부터요. 대표님께서 받은 생일선물입니다.”그러자 반승제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손끝으로 침향 묵주를 어루만졌다.곁에 서 있던 성혜인은 갑자기 처음 반승제와 마주쳤을 때도 그가 이렇게 차가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다만 나중이 되어서 그는 그녀의 몸매에 반했는지, 그녀와의 키스에 빠져들며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었다.좋아하는 몸 앞에서 반승제는 거칠고 무지막지했다.그러나 이제 그는 더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 기억도 잃어버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세우고 다시 냉정한 사람으로 돌아갔다.짧았던 그 시간은, 반승제의 단순한 일탈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살펴본 자료들을 정리해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그렇게 병원 아래 큰 쓰레기통을 지나갈 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침향 묵주 팔찌를 망설임 없이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앞으로 묵묵히 걸어갔다.침향 묵주 팔찌가 그의 손을 떠나 쓰레기통에 떨어질 때, 성혜인의 심장도 팔찌와 함께 그 속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그녀는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반승제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 고개를
방문을 나서던 성혜인은 마침 심인우와 마주쳤다.“페니 씨, 어디 가세요?”그는 이미 호텔에서 성혜인과 만나는 것이 익숙해졌다.성혜인은 빙긋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저 해고당했어요.”“...”“심 비서님, 의사가 그러는데 대표님 아직은 큰 자극 받으시면 안 된대요. 그러니 업무상 일도 천천히 전해주세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잠시 대표님한테 얘기하지 마시고요.”심인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녀를 위로했다.“대표님은 그저 머리를 다친 것 때문에 잠시 이러시는 겁니다.”성혜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면에서 솟구치는 난처함과 그 속에 조금 섞여 있는 억울함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었다.“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심인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포레스트에 돌아온 후, 성혜인은 소파에 앉아 멍을 때렸다. 손등은 여전히 빨갛게 된 채 말이다.피부가 얇았기 때문에 가볍게 때려도 빨갛게 되기 일쑤였다.보름 사이, 윤단미는 반태승에 의해 이미 감옥에 들어간 뒤였고 누구에게 사정해봐도 그녀를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김경자는 제원을 떠났다. 백연서는 애처롭게 반기훈에게 빌며 줄곧 이혼을 거부하고 버티는 중이었다. 이 난리에 백씨 집안사람들도 출동했지만, 사건이 확실히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는 걸 자신들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두 집안의 갈등은 여전히 식을 줄 몰랐다.하지만 이러한 일들에 반태승은 더 관여하지 않았고, 오직 반승제가 깨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에만 관심을 가졌다.현재 반승제는 비록 깨어나긴 했지만, 머리에 이상이 생겨 나중에 더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성혜인은 등을 뒤로 기대더니 다른 한 손으로 빨갛게 된 자신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눈가는 조금 촉촉해진 것 같았다.‘바보같은 놈.’그때, 밖에서 누군가 들어오더니 자료들을 그녀의 앞에 놓았다.“성혜인 씨, 이건 도라희, 안유결 이혼의 진실입니다. 도라희 씨가 불륜남과 집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안유결 씨가 그 장면을 목격했
성혜인은 입을 꾹 다문 채, 몸을 돌려 거실로 돌아갔다.그러더니 그녀는 고개를 돌려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 문이 제대로 잠기지 않아 틈새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그러나 거실의 불은 꺼져 깜깜한 상태였다. 다행히도 소파가 크고 에어컨이 있어 춥지 않았다.그녀는 쿠션을 머리 아래에 베고 누워, 그렇게 잠이 들었다.하지만 반승제는 머리가 너무 아파 쉽사리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심지어 현기증이 동반되는 것 같기도 했다.“페니 씨.”그가 부르자 성혜인은 순간 잠에서 벌떡 깨어났다. 침실 입구에 도착하자 그녀는 반승제가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진통제 있어요?”그녀가 방 안에 들어가 약상자를 살펴보았으나 진통제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약방에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비록 이 시간대에 문을 여는 약방은 극히 적었지만, 반승제가 이리 아파하는 것을 본 성혜인은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기로 했다.지금의 제원은 이미 겨울에 들어섰다. 그녀는 목도리를 꽁꽁 감싸고 호텔을 나선 후 근처 작은 길로 걸어갔다.다행스럽게도 그곳의 약방은 아직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성혜인이 두 통의 진통제를 구매하고 떠나려는데, 몇 명의 술 취한 남자들이 비틀대며 안으로 들어왔다.그래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몇 발자국 물러서며 그 사람들과 멀리하려 했다.하지만 남자들은 그녀의 이쁘장한 외모를 보고는 순간 눈빛을 반짝였다.이내 그중 두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다른 두 남자가 그녀의 뒤에 섰다.“이쁜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약을 사러 오다니, 혹시 피임약 사러 온 건 아니지?”시각은 어느새 새벽 2시가 다 되어가 확실히 늦은 시간이기는 했다.성혜인의 안색은 안 좋게 변하고 말았다. 그녀가 왼쪽으로 움직이면 남자들도 같이 왼쪽으로 움직여 누가 봐도 그녀를 쉽게 놓아주려는 생각은 없는 거로 보였다.그들은 음흉한 눈빛으로 성혜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이미 약도 샀는데, 우리랑 좀 더 놀까? 약 한 번 더 먹어도 되잖아.
성혜인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꼭 무언가에 의해 잡힌 것처럼 느껴져서 말이다.반승제는 호텔 방향으로 걸어갔고, 그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길을 가다 말고 반승제가 우뚝 멈춰서, 성혜인은 그의 등에 부딪히게 됐다.그가 화를 낼까 두려웠던 성혜인은 서둘러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방에 돌아와 그녀는 반승제에게 진통제를 건네주었다.“여기 진통제입니다.”하지만 반승제는 진통제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받지 않았다.“손에 난 상처부터 처리해요.”말을 끝마치고, 그는 곧바로 침실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성혜인은 거실 소파로 걸어가 약상자를 꺼낸 다음, 힘겹게 자신의 손바닥에 약을 발랐다.고생하며 사 온 진통제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둔 채 말이다.소독을 끝마치고 약을 바른 후, 그녀는 소파 한쪽에 기댔다.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성혜인은 얼마 안 지나 그렇게 잠이 들었다.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는데 다름 아닌 반승제가 싸우는 꿈이었다.꿈속에서 그는 아주 노련한 기술로 주먹을 날리고 있었고, 성혜인이 그를 말리려는데 귀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어려서부터 내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그 순간 성혜인은 꿈에서 깨고 말았다. 이마에는 온통 식은땀으로 가득 찼고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 뒤로 그녀는 다시 잠이 들 수 없었다. 반승제가 고백한 그 날 밤, 세상 어느 누가 좋아하는 여자를 이틀이나 가둬놓고 못살게 군 뒤 고백하는 남자가 있냐 속으로 생각하며 성혜인은 그저 반승제가 우습게 느껴졌다. 심지어 정신병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말이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반승제는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대해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부대 안에서 거친 사내들과 어울리며 배운 것은, 그가 말한 것처럼 “좋아하면 하는 것”일 테다.말이 너무 저속해 반승제와 어울리지는 않지만, 진실한
임경헌은 하마터면 컵에 머리를 맞을 뻔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물러갔다.난처했던 성혜인은 그 장면을 보고 놀라, 임경헌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이리 와봐요!”화가 난 반승제는 한껏 차가워진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성혜인도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했지만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세우며 쓴웃음을 지었다.“네? 대표님?”반승제는 그녀를 아래 우로 훑어보았다.‘생긴 건 확실히 괜찮지만, 내가 사무실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는 아닌데. 내 스타일이 아니야... 그러니 확실히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을 거야.’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피식 코웃음을 쳤다.“해고되셨습니다. 다시 돌아올 필요 없어요. 재무부에 가서 월급 타가세요.”그러더니 반승제는 이내 인사부에 전화를 걸었다.“새 비서 뽑아줘요.”그 말을 들은 인사부 직원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왜냐하면 온 회사 사람들이 반승제가 디자이너에게 빠져 그녀를 심인우를 대신할 비서로 고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비서를 바꾼다고?’그래서 그는 서둘러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 심 비서님은요?”반승제는 그제야 아침에 자신을 비서라고 칭하며 온 남자가 떠올랐다.당시 반승제는 어째서인지, 심인우가 들어오자마자 페니가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해고했다.그러나 이제 페니라는 사람은 완전히 반승제의 곁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그 사람더러 오라고 해요.”전화를 끊고, 그는 성혜인이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왜 아직도 안 가요?”그제야 정신을 차린 성혜인은 급히 몸을 돌렸다.하지만 걸음이 아주 느린 게, 마치 그가 다시 불러줬으면 하는 모양새였다.그렇게 성혜인은 BH그룹 건물 밖에 이르러서까지, 결국 아무런 부름도 받지 못했다.공교롭게도 그때, 성혜인은 심인우와 마주쳤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페니 씨, 대표님께서 저더러 다시 출근하라 하시네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