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듣자마자 성혜인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뭐라고요?”도라희는 피식 웃는 한편 성혜인의 반응에 시름을 놓은 듯 한숨을 쉬었다.“난 충분히 참아줬어요. 당신이 이렇게까지 내 시간을 낭비할 줄은 몰랐죠. 당신만 아니었어도 당신 아버지가 이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성혜인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빛에 서린 악의는 더욱 선명해졌다. 성휘의 장례식 날 그녀가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유골함이 떠올라서 말이다.“아무튼 당신 아버지의 유골은 나한테 있어요. 장례식 직원이 빼돌려 줬거든요. 당신이 가져간 유골은 들개 몇 마리의 유골일 거예요. 다행히 때려잡은 만큼 무게가 딱 나왔죠. 누가 알았겠어요? 당신이 이렇게까지 고집스러울 줄은요. 이제는 나랑 얘기해 볼 마음이 좀 생겼나요?”도라희는 아주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그래도 성혜인은 빠르게 진정했다. 그녀의 함정에 빠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어디에서 얘기할까요?”도라희는 문자로 성혜인에게 주소를 보내줬다.“여기서 만나요. 유하는 식물인간이 돼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대요. 그러니 이쯤하고 넘어가 주죠. 당신은 성휘 씨의 친딸도 아니라면서요? 100억 원이나 받고 나면 돈도 벌고 좋죠, 뭐. 너무 답답하게 굴지 말자고요.”성혜인은 말없이 핸드폰을 꺼버렸다.도라희는 콧방귀를 뀌더니 자리로 돌아가 일을 계속했다. 마치 조금 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성혜인은 가만히 앉아서 숨을 돌렸다. 도라희가 돌아이일 줄은 알았지만 유골을 바꿀 생각을 할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드디어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 안에서는 식사 시간대 특유의 향긋한 밤 냄새가 났다. 문을 열고 거실을 통해 들어가자, 식탁 한가득 차려진 저녁 식사가 보였다.김경자와 백연서는 이미 자리에 앉아 반승제를 기다리고 있었다.“승제야, 아직 밥 안 먹었지? 얼른 와서 앉으렴.”반승제는 외투를 벗어 도우미에게 건네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백연서는 그가 끼고 있는 침향 팔찌를 보고 용
반승제는 바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가 핑 돌아서 금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먹었던 음식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김경자와 백연서가 태어나서 처음 차린 지각한 생일상에 약을 탔을 줄은 물론 전혀 예상치 못했다.심장이 찔린 듯이 아팠던 반승제는 옷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겨우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저는 윤단미를 좋아하지 않아요. 결혼도 절대 안 할 거예요. 그리고 형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반승제가 말을 끝까지 하기도 전에 김경자가 말머리를 잘랐다.“거짓말하지 말거라. 내가 아직도 모를 것 같더냐? 승우는 절대 살아있을 리가 없어. 이 세상에서 가장 승우가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인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그러니 이만 포기하고 단미한테 도움받아.”반승제는 눈앞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윤단미와 함께하는 미래가 마치 환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는 있는 힘껏 가까이 다가온 윤단미를 쳐내면서 외쳤다.“꺼져!”윤단미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김경자는 눈을 부릅뜨면서 반승제의 멱살을 잡았다.“지금 이게 무슨 뜻이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니? 네 놈 자식은 나를 할머니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구나!”반승제는 김경자도 쳐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그녀의 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저는 할머니를 할머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저를 단 한 번도 손자라고 생각한 적 없죠? 그러니까 승우 형의 그림자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겠죠. 저도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반승제는 김경자와 더 이상 얘기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표정도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단호하게 몸을 돌리며 이만 떠나려고 했다.“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반승제의 말에 흥분한 김경자는 조용히 의자를 쳐들고 그의 뒤통수를 향해 내리쳤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
“닥쳐!”반기훈이 뿜어낸 위압감에 백연서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눈물만 줄줄 흘렸다.병원 복도의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다. 반기훈이 백연서에 대한 증오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이르렀고 그녀가 얼마나 서럽게 울든 악어의 눈물로 느껴졌다. 지금도 그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여보, 미안해요. 근데 난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백연서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만큼은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는 반기훈을 사랑했다. 한평생 사랑해 본 유일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하지만 반기훈은 백연서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꼴도 보기 싫은 듯 눈을 감으면서 싸늘하게 말했다.“울 거면 다른 곳에 가서 울어. 시끄러워 죽겠으니까.”백연서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수술실의 전등은 여전히 밝혀져 있었고 정적이 휩싸인 복도에는 부지런히 오가는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얼마 후 반태승이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지팡이를 탁 내리치면서 말했다.“아주 황당하기 짝이 없군! 짝이 없어!”반씨 가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반태승은 너무나도 황당했다. 웃어른이라는 사람이 이런 짓을 벌였으니, 내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랫사람을 엄히 다루던 그만 우스워진 셈이다....같은 시각, 성혜인은 도라희와의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했다. 하지만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쉽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성혜인은 핸드폰을 힐끗 봤다. 반승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반승제는 오늘 백연서와 식사하기 위해 반씨 저택으로 돌아간 모양이었기에 그녀는 애써 신경을 거두며 약속 장소인 카페 안에 들어가려고 했다.이때 심인우가 전화를 걸어온 것을 보고 그녀는 우뚝 멈춰 섰다.“페니 씨,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 수술을 받고 있다는데...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대표님 가족들과 식사하러 가신거 아니였나요?”성혜인은 자기 귀를 의심할지언정 심인우의 말을 단번에 믿지 못했다. 그러자 심인우는 잠깐 침묵하다가 자초지종
반태승은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반승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승혜야, 넌 먼저 돌아가거라. 그리고 승제는 휴식이 필요하니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말도록 일러두거라.”반승혜는 머리를 끄덕였다. 단순했던 그녀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백연서는 진작 경호원에게 끌려갔기에 병원에는 반태승, 반기훈, 그리고 성혜인만 남게 되었다.반태승은 이제야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진세운에게 물었다.“승제한테 어떤 후유증이 남을 것 같나?”진세운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답했다.“아직은 모릅니다. 그것도 승제가 깨어나야 알 수 있습니다.”반승제는 병실로 올라갔다. 과다 출혈로 인해 안색은 송장처럼 창백했다.반승제의 침대 곁으로 가서 멈춰 선 성혜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혜인아...”반태승은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병실 안에 들어섰다. 입을 열어 성혜인을 부르기는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세 사람은 오후가 될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반승제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반태승은 따듯한 수건으로 반승제의 이마에 맺힌 땀을 정성껏 닦아주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이런 아내를 못 알아본 그도 참 복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오후 네 시, 반승제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의사는 반승제를 검사하다 말고 반태승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무엇이든 먹지 않는다면 반승제가 깨어나기 전에 그가 먼저 쓰러질 것이라면서 말이다.반태승은 의사의 말을 듣기나 했는지 동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기만 했다. 다행히 반승제는 늦지 않게 깨어났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은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예리한 눈빛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극심한 두통 때문에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반태승은 빠르게 다가가 반승제에게 물었다.“승제야, 괜찮니?”두통이 심했던 반승제는 인상을 쓴 채로 반태승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겨우 짜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반태승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급기야 눈물을
그는 그저 담담하게 밥을 먹을 뿐이었다. 화장실에 갈 때, 반승제는 성혜인이 내민 손을 망설임 없이 뿌리치기도 했다.성혜인은 그의 앞에서 일부러 윤단미를 언급해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보름이 지난 후 오늘, 반승제는 드디어 퇴원할 수 있게 되었고 성혜인은 그를 도와 퇴원 절차를 밟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병실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은 뒤였다.보름 사이, 반승제의 안색은 매우 좋아졌다.옷 소매를 정리하고 있던 반승제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침향 묵주 팔찌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누가 선물한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성혜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이윽고 반승제는 그 팔찌를 빼며 물었다.“나 이거 언제부터 끼고 있던 거예요?”“보름 전부터요. 대표님께서 받은 생일선물입니다.”그러자 반승제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손끝으로 침향 묵주를 어루만졌다.곁에 서 있던 성혜인은 갑자기 처음 반승제와 마주쳤을 때도 그가 이렇게 차가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다만 나중이 되어서 그는 그녀의 몸매에 반했는지, 그녀와의 키스에 빠져들며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었다.좋아하는 몸 앞에서 반승제는 거칠고 무지막지했다.그러나 이제 그는 더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 기억도 잃어버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세우고 다시 냉정한 사람으로 돌아갔다.짧았던 그 시간은, 반승제의 단순한 일탈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살펴본 자료들을 정리해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그렇게 병원 아래 큰 쓰레기통을 지나갈 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침향 묵주 팔찌를 망설임 없이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앞으로 묵묵히 걸어갔다.침향 묵주 팔찌가 그의 손을 떠나 쓰레기통에 떨어질 때, 성혜인의 심장도 팔찌와 함께 그 속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그녀는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반승제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 고개를
방문을 나서던 성혜인은 마침 심인우와 마주쳤다.“페니 씨, 어디 가세요?”그는 이미 호텔에서 성혜인과 만나는 것이 익숙해졌다.성혜인은 빙긋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저 해고당했어요.”“...”“심 비서님, 의사가 그러는데 대표님 아직은 큰 자극 받으시면 안 된대요. 그러니 업무상 일도 천천히 전해주세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잠시 대표님한테 얘기하지 마시고요.”심인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녀를 위로했다.“대표님은 그저 머리를 다친 것 때문에 잠시 이러시는 겁니다.”성혜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면에서 솟구치는 난처함과 그 속에 조금 섞여 있는 억울함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었다.“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심인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포레스트에 돌아온 후, 성혜인은 소파에 앉아 멍을 때렸다. 손등은 여전히 빨갛게 된 채 말이다.피부가 얇았기 때문에 가볍게 때려도 빨갛게 되기 일쑤였다.보름 사이, 윤단미는 반태승에 의해 이미 감옥에 들어간 뒤였고 누구에게 사정해봐도 그녀를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김경자는 제원을 떠났다. 백연서는 애처롭게 반기훈에게 빌며 줄곧 이혼을 거부하고 버티는 중이었다. 이 난리에 백씨 집안사람들도 출동했지만, 사건이 확실히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는 걸 자신들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두 집안의 갈등은 여전히 식을 줄 몰랐다.하지만 이러한 일들에 반태승은 더 관여하지 않았고, 오직 반승제가 깨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에만 관심을 가졌다.현재 반승제는 비록 깨어나긴 했지만, 머리에 이상이 생겨 나중에 더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성혜인은 등을 뒤로 기대더니 다른 한 손으로 빨갛게 된 자신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눈가는 조금 촉촉해진 것 같았다.‘바보같은 놈.’그때, 밖에서 누군가 들어오더니 자료들을 그녀의 앞에 놓았다.“성혜인 씨, 이건 도라희, 안유결 이혼의 진실입니다. 도라희 씨가 불륜남과 집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안유결 씨가 그 장면을 목격했
성혜인은 입을 꾹 다문 채, 몸을 돌려 거실로 돌아갔다.그러더니 그녀는 고개를 돌려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 문이 제대로 잠기지 않아 틈새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그러나 거실의 불은 꺼져 깜깜한 상태였다. 다행히도 소파가 크고 에어컨이 있어 춥지 않았다.그녀는 쿠션을 머리 아래에 베고 누워, 그렇게 잠이 들었다.하지만 반승제는 머리가 너무 아파 쉽사리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심지어 현기증이 동반되는 것 같기도 했다.“페니 씨.”그가 부르자 성혜인은 순간 잠에서 벌떡 깨어났다. 침실 입구에 도착하자 그녀는 반승제가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진통제 있어요?”그녀가 방 안에 들어가 약상자를 살펴보았으나 진통제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약방에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비록 이 시간대에 문을 여는 약방은 극히 적었지만, 반승제가 이리 아파하는 것을 본 성혜인은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기로 했다.지금의 제원은 이미 겨울에 들어섰다. 그녀는 목도리를 꽁꽁 감싸고 호텔을 나선 후 근처 작은 길로 걸어갔다.다행스럽게도 그곳의 약방은 아직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성혜인이 두 통의 진통제를 구매하고 떠나려는데, 몇 명의 술 취한 남자들이 비틀대며 안으로 들어왔다.그래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몇 발자국 물러서며 그 사람들과 멀리하려 했다.하지만 남자들은 그녀의 이쁘장한 외모를 보고는 순간 눈빛을 반짝였다.이내 그중 두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다른 두 남자가 그녀의 뒤에 섰다.“이쁜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약을 사러 오다니, 혹시 피임약 사러 온 건 아니지?”시각은 어느새 새벽 2시가 다 되어가 확실히 늦은 시간이기는 했다.성혜인의 안색은 안 좋게 변하고 말았다. 그녀가 왼쪽으로 움직이면 남자들도 같이 왼쪽으로 움직여 누가 봐도 그녀를 쉽게 놓아주려는 생각은 없는 거로 보였다.그들은 음흉한 눈빛으로 성혜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이미 약도 샀는데, 우리랑 좀 더 놀까? 약 한 번 더 먹어도 되잖아.
성혜인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꼭 무언가에 의해 잡힌 것처럼 느껴져서 말이다.반승제는 호텔 방향으로 걸어갔고, 그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길을 가다 말고 반승제가 우뚝 멈춰서, 성혜인은 그의 등에 부딪히게 됐다.그가 화를 낼까 두려웠던 성혜인은 서둘러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방에 돌아와 그녀는 반승제에게 진통제를 건네주었다.“여기 진통제입니다.”하지만 반승제는 진통제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받지 않았다.“손에 난 상처부터 처리해요.”말을 끝마치고, 그는 곧바로 침실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성혜인은 거실 소파로 걸어가 약상자를 꺼낸 다음, 힘겹게 자신의 손바닥에 약을 발랐다.고생하며 사 온 진통제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둔 채 말이다.소독을 끝마치고 약을 바른 후, 그녀는 소파 한쪽에 기댔다.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성혜인은 얼마 안 지나 그렇게 잠이 들었다.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는데 다름 아닌 반승제가 싸우는 꿈이었다.꿈속에서 그는 아주 노련한 기술로 주먹을 날리고 있었고, 성혜인이 그를 말리려는데 귀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어려서부터 내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그 순간 성혜인은 꿈에서 깨고 말았다. 이마에는 온통 식은땀으로 가득 찼고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 뒤로 그녀는 다시 잠이 들 수 없었다. 반승제가 고백한 그 날 밤, 세상 어느 누가 좋아하는 여자를 이틀이나 가둬놓고 못살게 군 뒤 고백하는 남자가 있냐 속으로 생각하며 성혜인은 그저 반승제가 우습게 느껴졌다. 심지어 정신병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말이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반승제는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대해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부대 안에서 거친 사내들과 어울리며 배운 것은, 그가 말한 것처럼 “좋아하면 하는 것”일 테다.말이 너무 저속해 반승제와 어울리지는 않지만, 진실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