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한 듯한 윤희선의 손가락이 파르르 흔들렸다. 조금 전, 서수연이 화장실에서 괴로워하는 윤희선을 직원실로 데려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서수연은 신이한을 봤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마침 정운테크의 지형오도 봤다는 말 역시 나오면서 성혜인을 언급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어깨를 부딪친 이야기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윤희선은 성혜인이 죽을 만큼 싫었다. 때마침, 그녀의 눈에 서수연이 팔에 차고 있는 팔찌가 들어오더니 아이디어가 번뜩였다.그녀는 급히 팔찌를 숨겼다. 서수연이 자신의 팔찌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윤희선은 능청맞게 말을 던졌다.“방금 누군가와 부딪칠 때 훔쳐 간 거 아니니?”그렇게 성혜인이 떠오른 서수연이 곧바로 성혜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이 순간, 서수연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성혜인이 더 미워졌다. 성혜인이 훔친 게 아니라면 여기서 얼굴 붉힐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때마침 윤희선이 소리치자, 그런 서수연도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맞아요. 안 돼요! 저 여자가 훔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그리고 CCTV 사각지대라 찍혔을 리도 없어요! 일부러 시간 끌고 있는 거라니까요!”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건 경호원이었다. 경호원은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했다.총장은 반승제에게 말을 걸었다.“대표님. 대표님 생각은…”반승제의 시선이 순간 냉랭해졌다. 총장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강단이 없어서야, 원.“심 비서가 가봐요.”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총장은 차마 시간을 더 끌 수 없었다. 그는 경비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모셔다드려라.”성혜인은 줏대 없는 총장의 태도가 웃겼다. 하지만 자신의 모교인 제원대학을 비웃을 수는 없었다.총장은 다른 사람을 제치고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지만, 그래도 기회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그가 총장의
서수연의 굴복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일이었다.서수연은 말을 마치며 성혜인을 노려봤다.“그냥 됐어요. 나도 서씨 집안 물 먹일 생각 없어요.”성혜인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서수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왜 웃는 거야?’성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선을 서수연에게 돌렸다.“날 그렇게 몰아세우더니,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넓은 아량으로 일을 키우지 않겠다는 뉘앙스까지 느껴지네. 서씨 집안이라고 해서 무조건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는 없잖아?”화가 치밀어 오른 서수연은 두통이 생길 지경에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호흡까지 가빠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윤희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자기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하지만 윤희선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여자, 불륜녀야. 재학 당시 투자자를 꼬시다가 와이프에게 들키는 바람에 물감을 온몸에 뒤집어 쓴 적이 있었어. 수연이 너는 서씨 집안 사람이잖아. 저런 불륜녀에게 고개 숙일 필요가 없어.”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윤희선은 마냥 철없는 서수연처럼 이용당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최대한 고개를 밑으로 떨구며 주위의 시선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서수연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 윤희선의 말에 오히려 눈을 번뜩였다.“너도 제원대학 학생이었구나? 심지어 불륜녀였어? 뻔뻔한 년. 어떻게 다시 올 생각을 해?”성혜인은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시선은 윤희선을 향했다.윤희선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지만 입꼬리는 위를 향했다.서수연의 뒤에 숨는다면 팔찌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누가 불륜녀래?”“당연히 학과장님이지. 올해 교수에서 학과장으로 승진하셨으니 널 가르친 적도 있겠지. 이제야 네가 누군지 알아본 거고.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런 더러운 짓을 했어?”서수연은 총장에게로 시선을 돌
반승혜는 안타까웠다. 그림에 박학다식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에 휘말렸을 줄이야...마음이 무거워진 그녀의 눈빛에서 실망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반승제를 슬쩍 살폈다. 자신의 디자이너가 불륜녀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하지만 반승제는 차분하다 못해 직원이 준비해 두었던 차를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이곳에서 일어난 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술렁이기 시작했다.“예쁘다 싶었는데, 불륜녀였다니. 어쩐지 드세더라.”“어느 집 가정을 망친 거지? 보아하니 학생 때부터 불륜녀였던 것 같은데.”“몸에 밴 거지. 얼굴이 참 아깝게 됐어.”“완전 뻔뻔하지 않아? 다 까발려졌는데도 어쩜 저렇게 침착할 수 있지?”사람들의 시선이 또다시 성혜인을 향했다. 성혜인은 말없이 서 있었지만, 따가운 평가에 미간이 좁아졌다.“학과장님, 서수연 씨.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모르는 거 아니죠?”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말했다.“학과장님. 기회 드릴게요.”‘녹음 듣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윤희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몇 년 전에 네가 신기섭을 꼬시는 바람에 정처가 학교까지 와 물감 뿌리고 난리 쳤던 사건을 다 잊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게다가 난 이제 학과장이라고!”...“대표님이 네 안부를 종종 묻더라고.”“일개 디자이너에 지나지 않는 네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대표님이 알면 어떻게 될까? 과연 널 찾아올까? 그때 널 갖지 못해 아주 아쉬웠을 텐데, 널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교수, 아니 학과장이라는 사람이 학생에게 이런 발언을 했었다니. 과연 무슨 속셈일까?성혜인은 녹음을 끄며 입을 열었다.“말씀해 보세요. 제가 누구의 불륜녀라고요? 학과장님의 옛사랑, 신기섭이요? 어쩌죠. 녹음에서 들은 것처럼 두 사람이 저를 어떻게든 끌어내려고 표절이니 뭐니, 겁박하셨잖아요. 저는 졸업장도 못 받을 뻔했고요. 대회에 참가했던 작품도 거절당했어요. 대단하시네요, 학과장님. 신기섭의 침대
성혜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잔이 반승제의 것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잠시 후, 부총장이 급히 나와 총장 대신 내빈들을 접대하기 시작했다.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부총장은 특별히 반승제 앞에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학교 측에서 투자자분들 한 분 한 분께 인사드리고, 경찰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반승제의 미간이 깊게 팼다. 총장보다 훨씬 나은 태도였다.부총장의 시선이 성혜인에게로 옮겨졌다. 목소리에서도 반가움이 느껴졌다.“페니. 오랜만이야.”성혜인이 디자이너로 전향할 때, 부총장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부총장이 아니었다면 총장과 학과장의 압박에 견디지 못해 졸업장도 손에 쥐지 못했을 것이다.“교수님. 잘 지내셨죠?”부총장은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페니라는 디자이너명도 내가 지어준 거였잖니. 반승제 대표님의 담당 디자이너가 ‘페니’라는 소리에 잘못 들은 줄 알았지 뭐니. 오늘 여기서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구나.”몇 년 전, 부총장이 성혜인을 돕기는 했지만 힘이 부족해 학위를 지켜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윤희선은 미술 아카데미의 학과장으로 발이 아주 넓은 사람이다. 성혜인이 계속 미술의 길을 걸었다면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당시에 부총장은 성혜인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었었다. 계속 이 길을 가게 되면 분명 가로막히게 될 테니까.성혜인은 단 한 마디로 대답했다.‘깨뜨려야 세울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가로막힌다면 깨부수고 가면 된다.부총장은 지금의 성혜인을 보고 감정이 일렁였다. 역시 가장 좋게 보았던 학생다웠다.하지만 여기서 한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던 부총장은 전시회를 보고 있는 손님들에게 다가갔다.그가 떠나고, 반승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꼬집었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의심이 됐다.자기와 알고 지내던 페니가 학교에 오자마자 총장과 학과장을 바꿔버린다?서수연처럼 콧대 높은 여자를 경찰서에 보내버린다?꼬집은 볼에서 얼얼함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다. 진짜다
우산을 쓰고 가는데도 얼마 가지 못해 바짓단이 전부 젖어버렸다.그때, 성혜인 옆으로 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경적을 울렸다.신이한일 거라 생각한 성혜인은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옆을 쳐다봤다.창문이 살짝 내려가고, 차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반승혜였다.“지금 운전하면 차 많이 막힐 거예요. 어서 타요.”성혜인은 차를 세워 뒀던 방향을 쳐다봤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비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차에 몸을 실었다.빗물과 습기가 차단된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성혜인은 당연히 반승혜를 데리러 온 반씨 가문의 차라고 생각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반승제의 운전기사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창문에 기댄 반승제는 파일을 손에 쥔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어색한 이 자리에 반승혜가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반승혜의 얼굴은 흥분한 듯 옅게 붉어져 있었다.“페니 씨, 지금 학생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알아요? 서수연 걔가 그렇게 떵떵거리면서 다녔는데, 경찰서에 잡혀가다니! 서씨 집안에서도 지금 서수연 빼낸다고 혼비백산이겠죠?”“총장이랑 학과장도 그래요. 그렇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뒤에서는 사기 행각이나 벌이고 있다니. 소름 돋아 정말!”반승혜는 반승제를 슬쩍 툭툭 밀었다. 반승제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오빠. 서수연이 분명 자기 오빠한테 가서 일러바칠 텐데, 이것 때문에 페니 씨 괴롭히면 안 돼. 알겠지?”성혜인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랫동안 지지고 볶으면서 마냥 순진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을 지켜주려는 반승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반승제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심한 한 마디를 툭 뱉었다.“응.”반승혜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확 좁아졌다. 집에 도착하고 난 후, 운전기사가 건넨 우산을 잡으며 당부하듯 말했다.“페니 씨는 오빠가 데려다주는 걸로 해. 나 그림 그리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땅을 적시는 바깥과 달리 조용한 차 안에 성혜인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반승제의 손가락이 순간 허공에서 멈춰 섰다.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성혜인에게는 그저 가벼운 칭찬이었을 뿐,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자 눈을 감았다. 그때, 차가 순간 덜컹거렸다.그녀의 머리가 의도치 않게 반승제의 어깨에 안착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쏟아지는 빗물에 도로가 미끄러워져 차가 훨씬 막혔다.그렇게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도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내내 눈을 감고 얕은 잠을 청했다.요즘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 피로함이 어깨를 짓누르는 데다 빗소리까지 울려 퍼지니 잠들기 딱 좋았다. 성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고 말았다.앞좌석에 앉아있던 심인우는 뒷좌석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사이드미러로 교통법을 위반한 차가 불쑥 나타났다.그대로 반승제가 타고 있던 차와 부딪혔고, 차체가 앞으로 강하게 휘청이고 말았다.성혜인은 순식간에 한쪽 창문으로 쏠렸지만, 반승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그의 힘에 성혜인은 그대로 반승제의 팔을 따라 움직였다.깊은 잠이 들었던 성혜인은 마치 독특한 촉감의 ‘베개’를 밴 기분이었다. 게다가 온기까지 느껴지니 무의식적으로 그 ‘베개’를 껴안으면서 편한 자세로 바꾸었고, 이내 다시 잠에 들었다.반승제는 그녀의 팔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성혜인이 품에 안기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때마침 한곳으로 몰렸다.그곳은 바로, 남자에게 가장 부추겨서는 안 될 곳.동공이 커진 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기다란 머리카락이 옆으로 흩어지면서 부드럽고 작은 얼굴의 옆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다.어둑한 차 안으로 비친 옅은 불빛이 마침 성혜인의 얼굴을 비췄다. 주위가 조용하기까지 하니 그녀의 가녀린 모습에 심장 소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강아지 짖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새하얀 털 뭉치가 성혜인의 주변을 신나게 돌았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겨울아. 요즘 내가 잘 못 와봤지? 말 잘 듣고 있었어?”앞치마를 두른 유경아가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온화하고 꾸밈없는 여성이다.“사모님 안 계시는 동안 얼마나 말썽을 부리던지. 어제는 연못에서 물고기도 잡았다니까요. 물고기를 전부 물어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잡아서 삶아줬어요.”성혜인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겨울이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었다.“식탐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독일의 목양견인 겨울이는 6살 정도 되었는데, 지금까지 줄곧 성혜인과 함께였다.성혜인의 아파트에서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반태승이 이 별장을 선물해 주어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겨울이를 대신 돌봐 주고 있다. 성혜인은 평일에 올 수 있는 날이 극히 드물었다.성혜인은 겨울이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캐리어를 끌고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유경아는 그녀의 모습에 다소 놀란 듯했다.“사모님. 드디어 여기서 살기로 결정하신 거예요?”“아파트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여기서 며칠 묵으려고요.”유경아의 놀란 눈이 더 커졌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여자 혼자 밖에 사는 건 원래 위험하잖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사는 건 어때요? 회장님께서도 제게 사모님을 잘 돌보라고 하셨었는데, 3년 동안 이곳에 통 안 오시니 제가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기가 얼마나 난감한데요.”“새로운 집을 찾을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성혜인은 한 손으로 겨울이를 놀아주면서 빙긋 웃었다.바닥에서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 겨울이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한편.반승혜는 성혜인이 떠나고 난 후 곧바로 반태승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승제야. 이미 수속 끝났다.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반승제는 손으로 미간을 주물렀다.“알겠어요. 몸조심하시고요, 할
한지은은 영악한 여자다. 반승제가 제원에 돌아온 이후 줄곧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한 달에 몇 번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부잣집 부부가 이렇게까지 소원해진 상황이라면, 한지은이 BH그룹의 며느리와 마치 아는 사이처럼 거짓말을 하더라도 반승제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성혜인을 골탕 먹일 수만 있다면 이쯤이야.발걸음을 우뚝 멈춘 반승제의 미간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명목상의 ‘아내’라는 그 사람에 대한 반감이 더 생겨났다. BH그룹의 며느리라는 이유로 밖에서 콧대를 세우고 다닌다는 말 아닌가.“페니 씨가 힘들게 하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 대표님께 디자이너 변경 요청하세요. 예전에도 고객의 부인이 회사까지 찾아와 페니 씨 대신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하는 사건이 있었거든요.”한지은의 말에서 진심이 우러났다.반승제는 그저 무심히 그녀를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네.”그는 단답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계속 그의 뒤를 쫓아가기 난감해진 한지은은 표정이 굳어버렸다.‘뭐, 어쨌든 이간질은 성공이네.’반승제가 성혜인에게 불만을 갖게 된다면 작업실에서 성혜인을 대신할 자격이 되는 사람은 과연 누구겠는가?한지은은 마음이 울렁거렸다.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반승제 앞에서 얼굴만 몇 번 더 비추면...”이제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사라지는 반승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지은의 뺨이 붉어졌다.한편, 성혜인은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가 반승제의 귀에 들어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원반을 집어 하늘 높이 던졌다. 그러자 겨울이가 잽싸게 달려가 입으로 물어 성혜인에게 돌아와서는 그녀의 다리 곁을 맴돌았다.“보채기는.”성혜인은 겨울이의 머리를 툭 쓰다듬어 주고 다시 한번 원반을 던졌다.그때, 원반을 던진 방향에서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성혜인이 황급히 소리쳤다.“겨울아. 돌아와!”하지만 이미 질
말을 마치자마자 설우현은 설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설연주의 얼굴에는 마지막 남은 핏기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오빠... 오빠였구나. 깜짝 놀랐잖아요.”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오늘 밤의 일이 그녀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분명했다.설연주가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설강민은 그녀의 친오빠였다. 친오빠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조금 전 겉으로 강한 척했던 건 전부 꾸며낸 모습이었다.설우현의 마음 한구석이 약간 부드러워지며 그는 도우미에게 수면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약 먹고 자.”“역시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그 말에 설우현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그 말이 별로 칭찬처럼 들리진 않았다.화가 난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설연주는 수면제를 삼켰다.원래는 이런 약을 함부로 먹지 않았다. 너무 깊이 잠들면 혹시 누가 방에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침대에 몸을 기대었지만 곧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이건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설강민을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으면 이 공포심은 평생 그녀의 삶을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설연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화장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은 그녀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설연주는 오늘 밤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대신 되물었다.“김현서는 아직 정승후 옆에 있어?”“그래, 게다가 요즘 정승후는 김현서를 아주 애지중지하고 있어.”‘애지중지?’설연주는 피식 웃었다. 아마 김현서가 또 어떤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겠지.가끔 의아했다. 왜 이렇게 뻔하고 저급한 거짓말에 남자들이 넘어가는 걸까?하지만 곧 깨달았다. 아마 남자들도 김현서가 사람에 따라 다른 말을 한다는
설연주는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다가 설우현이 따라오지 않는 걸 깨닫고 뒤돌아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설우현은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설연주는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거짓말쟁이는 평소 말투도 거슬리더니 마음속에도 한 고집을 품고 있는 듯했다.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앞질렀다.설연주는 그가 왜 갑자기 성난 것처럼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기운조차 없었다.그녀는 거실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사실은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우현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잠시 멈춰 서 있던 그녀는 점점 온몸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오빠, 저 오늘 밤 어디서 자요?”이 집에 그녀가 머물 방이 없었기에 설우현이 준비해 주어야 했다.설우현은 사람을 시켜 객실을 정리해 그녀가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설연주는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고일까 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시울이 이미 살짝 붉어져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방 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앞에서 토하기 시작했다.밖에 있던 도우미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드렸다.“설연주 씨, 혹시 어디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집 안에 약상자가 있어요. 속이 불편하신가요?”설연주는 입가를 닦으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으며 볼은 전보다 핼쑥해 보였다.요즘 김현서와 설강민을 견제하느라 3킬로나 빠진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도우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그녀는 얼른 입을 헹구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방금 전 분명히 토하시는 소리가...”“아니에요.”그녀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 사람들은 모두 설우현의 사람들이었다.설연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설우현이 그녀를 싫
설우현이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강민은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데 설우현이 이 중요한 순간에 여기에 나타날 줄이야.설우현은 침대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설강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쟤는 네 여동생이야!”설강민은 주먹을 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그제야 설강민은 울먹이며 말했다.“난 이런 여동생 없다고요!”침대 주위에 둘러서 있던 남자들도 잠시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설우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다 꺼져! 당장!”남자들은 설강민이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설우현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침대 위에서 설연주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설우현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에 묶인 끈을 풀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피가 묻어 있는 끈을 보자 그의 손이 멈칫했다. 차마 그 끈을 풀 수가 없었다.“조금만 참아.”그때 설연주는 힘겹게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현 오빠, 진짜 와줄 줄은 몰랐어요. 순간 눈앞에 천사가 나타난 줄 알았어요.”설우현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그녀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그는 가위를 찾아 곧장 끈을 잘라냈다. 설연주의 손목은 이미 피가 나고 살이 벗겨져 끔찍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보이는 오래된 상처들까지 발견했다.설우현은 그 상처들이 무엇 때문에 생긴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설연주가 그동안 어떤 비밀을 숨겨왔는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설연주는 끈이 풀리자마자 피곤한 듯 침대에 몸을 기댔다.“저 좀 데려가 줘요. 너무 졸려요. 우현 오빠가 있는 곳이 저한테는 가장 안전한 곳이에요.”설우현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는 가슴께가 습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내려보니 설연주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깨진 인형처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설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여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안 가. 혼자 미쳐가든 말든 나 찾지 마. 밖에 너한테 매달리는 남자들 많잖아? 그쪽이나 찾아가.”설연주는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더욱 단단히 몸에 두르며 오늘 밤은 이렇게 버텨보려 했다.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비몽사몽인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설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얘야.”곁에 있던 남자가 물었다.“정말 괜찮겠어? 이 여자 네 동생이라며. 너희 아버지가 돌아오면 우리 가만두지 않을 텐데.”“괜찮아. 우리 아버지는 얘 인정하지도 않거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할게, 할게. 우리도 설씨 가문 여자는 처음이거든. 전에 뉴스에서 본 성혜인 얼굴, 하... 진짜 대박이던데.”설연주는 눈을 번쩍 뜨고 자신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상의를 벗은 채 야릇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연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문 앞에 서 있는 설강민을 바라봤다.‘설강민은 가출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지?’설강민은 담배를 피우며 그녀의 도움 요청에 일부러 못 본 척하며 말했다.“너희한테 주는 거야. 마음껏 즐겨.”남자들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설연주는 몸을 한쪽으로 굴렸으나 금세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설강민, 제정신이야? 아버지한테 혼나는 게 두렵지 않아?”설강민은 오히려 더 화를 내며 소리쳤다.“그래, 당연히 혼내겠지! 이제 너 때문에 아버지가 나까지 쫓아낼 지경이라고. 이런 아버지 나도 필요 없어. 설연주,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놓고 넌 무사할 줄 알았어?”설연주는 설강민이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자들을 집에 불러 그녀를 겁탈하라고 하다니.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심으로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이었
설연주는 내내 말없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 물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설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강민이 지나치게 시끄럽다면 이 딸은 가끔 너무 조용했다.“연주야, 올라가서 자.”설연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아버지. 너무 화내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설준석은 반평생을 살며 아들한테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아버지로서의 자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가슴이 살짝 저릿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돈이 부족하면 말해.”“괜찮아요. 지난번에 주신 4억 원도 아직 안 썼어요.”설준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애인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설연주는 넓디넓은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너무도 넓어 차갑게 느껴졌고 마치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은 언제나 혼자 남는 것이 당연했다.방으로 가서 쉬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특정한 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설연주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받아들었다.남성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밤 사람 보내서 널 데디러 갈 거야.”이 남자는 오성파의 두목이자 설연주가 기대고 있는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엮인 것을 후회했지만 그때는 정승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때 마주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설연주가 말없이 듣고만 있자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왜? 이제 설연주가 됐다고 나를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설연주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각인된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기다리던 남자는 짜증이 나는 듯 말을 이었다.“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알잖아? 예전에 울며 빌면서 영원히 내
설우현의 시선이 설연주에게 머물렀다.목을 감싸 쥔 설연주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설강민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두고 봐!”설우현은 동생을 대하는 설강민의 태도에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웃으며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오빠, 이제 돌아가세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설우현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우현은 설연주의 눈빛에서 어딘가 죽은 듯한 고요함을 느꼈다. 웃고 있는 그녀였지만 마치 생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 듯 언제까지 살아갈지 자신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차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우현은 창문을 내렸다.“너도 어쨌든 설씨 가문의 사람인데 아무한테나 함부로 당하고 있지 마.”설연주는 목을 감싸고 제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설우현은 차를 출발시키며 백미러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설연주는 조금 더 있다가 거실로 들어갔고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설강민이 때려 부순 모양이었다.설강민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차갑게 노려보았다.“설연주, 김현서한테 더 이상 덤비지 마. 아니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못 할 거야.”설연주는 그의 협박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설강민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계속할 생각이야? 김현서가 예전에 너를 괴롭힌 건 알지만 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네가 괜히 건드리지 않았으면 걔가 널 괴롭혔겠어? 분명히 말해두는데 김현서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알아서 잘 처신해.”설연주는 설강민의 손을 뿌리치더니 그를 올려다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설강민, 너 때문에 네 여동생이 죽어도 넌 아무렇지 않을까?”설강민은 무심하게 대답했다.“너 지금 멀쩡히 잘 살고 있잖아? 진짜 죽기라도 하면 내가 폭죽 터뜨리며 축하해 줄게.”설연
설우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연주의 눈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설우현은 역시나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정원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설연주는 그가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따라갔다. 두 사람만 남은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설우현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네가 원하는 게 설씨 가문의 지분이면 됐지. 굳이 이런 자리에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잖아.”설연주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끝으로 옆에 핀 꽃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설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오빠, 내가 설씨 가문의 돈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라면 믿겠어요?”설우현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며 그들을 가지고 놀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같은 자리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돌아가.”설우현이 냉정한 게 아니라 오랜만에 성혜인과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서 설연주 같은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더군다나 그녀가 있으면 분위기만 어색해질 게 뻔했다. 아버지가 대체 왜 설연주를 부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연주는 속눈썹을 살짝 내리고 앞에 있는 꽃을 만지작거리며 그저 조용히 있었다.설우현은 참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다.“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돌아가라고 했잖아.”“오빠, 혹시 혜인 언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언니가 나 때문에 기분 나빠할까 봐?”설연주가 자신의 의도를 꿰뚫자 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건 굳이 말로 안 해도 알 줄 알았는데.”그 말을 들은 설연주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성혜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오빠와 부모가 있으니 말이다.“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설연주는 미련 없이 돌아섰고 설우현은 또 무슨 속셈일지 몰라 잠시 더 지켜보다가 몇 분 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
류소영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하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성혜인은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설계도를 정리하며 말했다.“천 달러면 되겠네요. 그런데 오늘 설씨 가문에 가서 식사하지 않으세요? 우리 같이 갈까요?”설연주는 깜짝 놀라며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혜인 언니?”“맞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가자.”성혜인은 설연주를 도와 작은 판매대를 정리했다. 반면 류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두고 봐! 너희 가만두지 않을 거야!”설연주는 류소영의 말에 웃음만 나왔다. 그녀는 설씨 가문에서 존재감 없는 인물이지만 성혜인은 설의종의 친딸이다. 류소영이 성혜인을 상대로 어찌해 보겠다는 게 어이없을 따름이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성혜인은 겉모습은 부드러워 보여도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류소영이 괜히 건드렸다가 큰코다칠 게 뻔했다.설연주와 성혜인이 설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설우현이 설서율을 안고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어구구, 우리 서율이. 외삼촌이 안아 줄게요. 우리 아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반승제는 옆에서 인상을 잔뜩 쓰며 그 모습을 보았다.“안으려면 그냥 안든지, 그런 애정 표현은 좀 적당히 하시죠. 징그러우니까.”설우현은 뿌듯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반승제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서율이가 안아주지 않으니까 질투하는 거 다 보이거든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문가에 서 있는 설연주를 발견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쟤 불렀어?”설연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의 옆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오빠, 그 말 너무 섭섭하네요.”설우현은 한마디 더 하려다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는 설의종을 보고는 꾹 참았다. 설의종에게 또 벌받는 건 피하고 싶었다.설연주의 시선은 설서율에게로 향했다. 귀엽고 얌전한 아기는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인형 같았다. 설서율의 부모를 보니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생겼는지 쉽게 이해
성혜인은 설계도를 한 장 집어 들며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이 디자인에 저작권 있나요? 제가 사고 싶어요. 직접 디자인한 거죠?”갓 돌이 지난 쌍둥이를 데리고 성혜인은 플로리아로 부모님을 뵈러 왔다.이번에 반승제도 함께 동행했지만 설씨 가문에서 설서율과 반진율을 돌보고 있어서 함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설연주가 대답하려는 찰나 주변에서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이게 누구야? 우리 재주꾼 진연주 아니야?”설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김현서의 절친, 류소영이 눈에 들어왔다.류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옆에 있던 선반을 발로 툭 차며 거들먹거렸다.“너 여기서 매일 재주를 팔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이는 거야?”성혜인은 류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류소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성혜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얘가 전에 표절한 거 모르세요? 우리 학교에 소문이 다 퍼져서 아무도 얘 디자인 같은 건 안 사요. 학교 이미지에도 먹칠했으니 말 다 했죠.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데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제대로 된 디자이너 찾아보세요.”설연주는 이미 일어서서 류소영의 오만한 표정을 보며 손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렸다.류소영은 순간 당황했다. 예전에는 늘 김현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연주를 괴롭혀 왔기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설연주가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설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표절하지 않았어.”그러자 류소영이 냉소를 흘렸다.“표절도 모자라 교수님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었잖아. 학교에서 네가 한 짓을 다들 알고 있을걸? 정말 역겨워!”성혜인은 이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 소문 많던 설연주였다.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성혜인은 설연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꽤 잘 만든 작품이었다.“이거 당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