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혜는 안타까웠다. 그림에 박학다식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에 휘말렸을 줄이야...마음이 무거워진 그녀의 눈빛에서 실망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반승제를 슬쩍 살폈다. 자신의 디자이너가 불륜녀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하지만 반승제는 차분하다 못해 직원이 준비해 두었던 차를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이곳에서 일어난 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술렁이기 시작했다.“예쁘다 싶었는데, 불륜녀였다니. 어쩐지 드세더라.”“어느 집 가정을 망친 거지? 보아하니 학생 때부터 불륜녀였던 것 같은데.”“몸에 밴 거지. 얼굴이 참 아깝게 됐어.”“완전 뻔뻔하지 않아? 다 까발려졌는데도 어쩜 저렇게 침착할 수 있지?”사람들의 시선이 또다시 성혜인을 향했다. 성혜인은 말없이 서 있었지만, 따가운 평가에 미간이 좁아졌다.“학과장님, 서수연 씨.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모르는 거 아니죠?”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말했다.“학과장님. 기회 드릴게요.”‘녹음 듣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윤희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몇 년 전에 네가 신기섭을 꼬시는 바람에 정처가 학교까지 와 물감 뿌리고 난리 쳤던 사건을 다 잊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게다가 난 이제 학과장이라고!”...“대표님이 네 안부를 종종 묻더라고.”“일개 디자이너에 지나지 않는 네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대표님이 알면 어떻게 될까? 과연 널 찾아올까? 그때 널 갖지 못해 아주 아쉬웠을 텐데, 널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교수, 아니 학과장이라는 사람이 학생에게 이런 발언을 했었다니. 과연 무슨 속셈일까?성혜인은 녹음을 끄며 입을 열었다.“말씀해 보세요. 제가 누구의 불륜녀라고요? 학과장님의 옛사랑, 신기섭이요? 어쩌죠. 녹음에서 들은 것처럼 두 사람이 저를 어떻게든 끌어내려고 표절이니 뭐니, 겁박하셨잖아요. 저는 졸업장도 못 받을 뻔했고요. 대회에 참가했던 작품도 거절당했어요. 대단하시네요, 학과장님. 신기섭의 침대
성혜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잔이 반승제의 것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잠시 후, 부총장이 급히 나와 총장 대신 내빈들을 접대하기 시작했다.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부총장은 특별히 반승제 앞에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학교 측에서 투자자분들 한 분 한 분께 인사드리고, 경찰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반승제의 미간이 깊게 팼다. 총장보다 훨씬 나은 태도였다.부총장의 시선이 성혜인에게로 옮겨졌다. 목소리에서도 반가움이 느껴졌다.“페니. 오랜만이야.”성혜인이 디자이너로 전향할 때, 부총장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부총장이 아니었다면 총장과 학과장의 압박에 견디지 못해 졸업장도 손에 쥐지 못했을 것이다.“교수님. 잘 지내셨죠?”부총장은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페니라는 디자이너명도 내가 지어준 거였잖니. 반승제 대표님의 담당 디자이너가 ‘페니’라는 소리에 잘못 들은 줄 알았지 뭐니. 오늘 여기서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구나.”몇 년 전, 부총장이 성혜인을 돕기는 했지만 힘이 부족해 학위를 지켜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윤희선은 미술 아카데미의 학과장으로 발이 아주 넓은 사람이다. 성혜인이 계속 미술의 길을 걸었다면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당시에 부총장은 성혜인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었었다. 계속 이 길을 가게 되면 분명 가로막히게 될 테니까.성혜인은 단 한 마디로 대답했다.‘깨뜨려야 세울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가로막힌다면 깨부수고 가면 된다.부총장은 지금의 성혜인을 보고 감정이 일렁였다. 역시 가장 좋게 보았던 학생다웠다.하지만 여기서 한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던 부총장은 전시회를 보고 있는 손님들에게 다가갔다.그가 떠나고, 반승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꼬집었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의심이 됐다.자기와 알고 지내던 페니가 학교에 오자마자 총장과 학과장을 바꿔버린다?서수연처럼 콧대 높은 여자를 경찰서에 보내버린다?꼬집은 볼에서 얼얼함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다. 진짜다
우산을 쓰고 가는데도 얼마 가지 못해 바짓단이 전부 젖어버렸다.그때, 성혜인 옆으로 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경적을 울렸다.신이한일 거라 생각한 성혜인은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옆을 쳐다봤다.창문이 살짝 내려가고, 차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반승혜였다.“지금 운전하면 차 많이 막힐 거예요. 어서 타요.”성혜인은 차를 세워 뒀던 방향을 쳐다봤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비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차에 몸을 실었다.빗물과 습기가 차단된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성혜인은 당연히 반승혜를 데리러 온 반씨 가문의 차라고 생각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반승제의 운전기사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창문에 기댄 반승제는 파일을 손에 쥔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어색한 이 자리에 반승혜가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반승혜의 얼굴은 흥분한 듯 옅게 붉어져 있었다.“페니 씨, 지금 학생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알아요? 서수연 걔가 그렇게 떵떵거리면서 다녔는데, 경찰서에 잡혀가다니! 서씨 집안에서도 지금 서수연 빼낸다고 혼비백산이겠죠?”“총장이랑 학과장도 그래요. 그렇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뒤에서는 사기 행각이나 벌이고 있다니. 소름 돋아 정말!”반승혜는 반승제를 슬쩍 툭툭 밀었다. 반승제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오빠. 서수연이 분명 자기 오빠한테 가서 일러바칠 텐데, 이것 때문에 페니 씨 괴롭히면 안 돼. 알겠지?”성혜인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랫동안 지지고 볶으면서 마냥 순진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을 지켜주려는 반승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반승제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심한 한 마디를 툭 뱉었다.“응.”반승혜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확 좁아졌다. 집에 도착하고 난 후, 운전기사가 건넨 우산을 잡으며 당부하듯 말했다.“페니 씨는 오빠가 데려다주는 걸로 해. 나 그림 그리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땅을 적시는 바깥과 달리 조용한 차 안에 성혜인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반승제의 손가락이 순간 허공에서 멈춰 섰다.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성혜인에게는 그저 가벼운 칭찬이었을 뿐,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자 눈을 감았다. 그때, 차가 순간 덜컹거렸다.그녀의 머리가 의도치 않게 반승제의 어깨에 안착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쏟아지는 빗물에 도로가 미끄러워져 차가 훨씬 막혔다.그렇게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도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내내 눈을 감고 얕은 잠을 청했다.요즘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 피로함이 어깨를 짓누르는 데다 빗소리까지 울려 퍼지니 잠들기 딱 좋았다. 성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고 말았다.앞좌석에 앉아있던 심인우는 뒷좌석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사이드미러로 교통법을 위반한 차가 불쑥 나타났다.그대로 반승제가 타고 있던 차와 부딪혔고, 차체가 앞으로 강하게 휘청이고 말았다.성혜인은 순식간에 한쪽 창문으로 쏠렸지만, 반승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그의 힘에 성혜인은 그대로 반승제의 팔을 따라 움직였다.깊은 잠이 들었던 성혜인은 마치 독특한 촉감의 ‘베개’를 밴 기분이었다. 게다가 온기까지 느껴지니 무의식적으로 그 ‘베개’를 껴안으면서 편한 자세로 바꾸었고, 이내 다시 잠에 들었다.반승제는 그녀의 팔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성혜인이 품에 안기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때마침 한곳으로 몰렸다.그곳은 바로, 남자에게 가장 부추겨서는 안 될 곳.동공이 커진 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기다란 머리카락이 옆으로 흩어지면서 부드럽고 작은 얼굴의 옆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다.어둑한 차 안으로 비친 옅은 불빛이 마침 성혜인의 얼굴을 비췄다. 주위가 조용하기까지 하니 그녀의 가녀린 모습에 심장 소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강아지 짖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새하얀 털 뭉치가 성혜인의 주변을 신나게 돌았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겨울아. 요즘 내가 잘 못 와봤지? 말 잘 듣고 있었어?”앞치마를 두른 유경아가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온화하고 꾸밈없는 여성이다.“사모님 안 계시는 동안 얼마나 말썽을 부리던지. 어제는 연못에서 물고기도 잡았다니까요. 물고기를 전부 물어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잡아서 삶아줬어요.”성혜인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겨울이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었다.“식탐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독일의 목양견인 겨울이는 6살 정도 되었는데, 지금까지 줄곧 성혜인과 함께였다.성혜인의 아파트에서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반태승이 이 별장을 선물해 주어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겨울이를 대신 돌봐 주고 있다. 성혜인은 평일에 올 수 있는 날이 극히 드물었다.성혜인은 겨울이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캐리어를 끌고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유경아는 그녀의 모습에 다소 놀란 듯했다.“사모님. 드디어 여기서 살기로 결정하신 거예요?”“아파트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여기서 며칠 묵으려고요.”유경아의 놀란 눈이 더 커졌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여자 혼자 밖에 사는 건 원래 위험하잖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사는 건 어때요? 회장님께서도 제게 사모님을 잘 돌보라고 하셨었는데, 3년 동안 이곳에 통 안 오시니 제가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기가 얼마나 난감한데요.”“새로운 집을 찾을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성혜인은 한 손으로 겨울이를 놀아주면서 빙긋 웃었다.바닥에서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 겨울이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한편.반승혜는 성혜인이 떠나고 난 후 곧바로 반태승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승제야. 이미 수속 끝났다.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반승제는 손으로 미간을 주물렀다.“알겠어요. 몸조심하시고요, 할
한지은은 영악한 여자다. 반승제가 제원에 돌아온 이후 줄곧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한 달에 몇 번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부잣집 부부가 이렇게까지 소원해진 상황이라면, 한지은이 BH그룹의 며느리와 마치 아는 사이처럼 거짓말을 하더라도 반승제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성혜인을 골탕 먹일 수만 있다면 이쯤이야.발걸음을 우뚝 멈춘 반승제의 미간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명목상의 ‘아내’라는 그 사람에 대한 반감이 더 생겨났다. BH그룹의 며느리라는 이유로 밖에서 콧대를 세우고 다닌다는 말 아닌가.“페니 씨가 힘들게 하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 대표님께 디자이너 변경 요청하세요. 예전에도 고객의 부인이 회사까지 찾아와 페니 씨 대신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하는 사건이 있었거든요.”한지은의 말에서 진심이 우러났다.반승제는 그저 무심히 그녀를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네.”그는 단답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계속 그의 뒤를 쫓아가기 난감해진 한지은은 표정이 굳어버렸다.‘뭐, 어쨌든 이간질은 성공이네.’반승제가 성혜인에게 불만을 갖게 된다면 작업실에서 성혜인을 대신할 자격이 되는 사람은 과연 누구겠는가?한지은은 마음이 울렁거렸다.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반승제 앞에서 얼굴만 몇 번 더 비추면...”이제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사라지는 반승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지은의 뺨이 붉어졌다.한편, 성혜인은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가 반승제의 귀에 들어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원반을 집어 하늘 높이 던졌다. 그러자 겨울이가 잽싸게 달려가 입으로 물어 성혜인에게 돌아와서는 그녀의 다리 곁을 맴돌았다.“보채기는.”성혜인은 겨울이의 머리를 툭 쓰다듬어 주고 다시 한번 원반을 던졌다.그때, 원반을 던진 방향에서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성혜인이 황급히 소리쳤다.“겨울아. 돌아와!”하지만 이미 질
성혜인은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불필요한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반승제와의 계약 기간 동안 반씨 집안에서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내며 종종 반태승에게 얼굴을 비추는 정도만 하고 싶었다. 반씨 가문의 다른 가족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하면서 말이다.게다가 반승제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백연서는 성혜인과 논쟁을 할 때마다 갈수록 더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백연서가 이것저것 따지더라도 성혜인은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백연서는 2층으로 향했다. 곧이어 안방에 있는 침대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구겼다.“승제가 들어오면 이 방은 승제가 사용하고 너는 게스트룸에 묵어야겠다. 승제랑 잘해볼 생각 마라. 회장님 병세가 호전되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 명심해.”온갖 트집을 다 잡고 나서야 백연서는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그녀가 눈에 밟혔는지 눈썹을 들썩였다.“듣고 있는 거니?”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어머님. 또 주의할 게 있을까요?”백연서는 또다시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얘랑 대화를 했다하면 말문이 막히네.’짜증을 풀 곳이 없자 트집을 잡으려던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백연서는 유경아에게 당부할 점을 읊었다. 특히 음식 측면에서 각별히 주의해달라는 말을 남겼다.유경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백연서가 떠나고, 유경아는 그제야 지친 얼굴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사모님. 겨울이를 정말 보내시게요?”“아주머니. 별장 뒤편에 큰 집 하나 비어 있지 않았나요? 승제 씨 오면 일단 겨울이를 그 안에 두는 게 좋겠어요. 겨울이는 너무 활발해서 친구에게 맡기면 피해만 주게 될 거예요.”겨울이를 좋아하던 유경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겨울이를 돌보면서 정이 많이 들었었다.“좋아요. 우선 겨울이 장난감을 그 방에 갖다 둬야겠어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연서의 잔소리에 이미 기분이 언짢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반승제와 한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새
성혜인은 자리에 우뚝 서 무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성휘의 마음이 저쪽으로 기운 게 아니라고 끝없이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그녀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줄곧 성휘는 성혜인에게 충분히 잘해줬으니까. 하지만 결국 소윤의 자녀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성혜인은 지금도 머리를 짜내며 계약금 합의를 보고 있는데, 성휘는 성한에게 몇십억짜리 별장을 호탕하게 사주겠다니. 성혜인은 이 상황이 웃겼다.성휘와 소윤은 금방 성혜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소윤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네가 왜 여기에 있니?”성혜인 역시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은 중개인과 함께라는 것을 알아차린 성휘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난감해졌다.“혜인아. 집 사려고?”성혜인의 마음속은 이미 ‘실망’이라는 단어로 지배되었다. 성혜인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일관했다.“네. 살던 집에 도둑이 들어서 보안이 좀 더 철저한 집으로 옮기려고요.”성휘는 입술을 망설이듯 우물거렸다. 몇 년 동안 홀로 밖에 나가 살고 있는 성혜인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그럼...”말을 채 다 꺼내기도 전에 소윤이 성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네 아빠 앞이라고 불쌍한 척하지 마. 회장님이 네게 몇백억짜리 신혼집을 선물했다는 소문 들었다. 정 지낼 곳이 없으면 그 집에 가면 되는 거 아니니? 하물며 반승제와 사이도 가까워질 수 있고 말이야. 너희는 부부잖니. 남편한테 잘하렴. 네 아빠도 훨씬 잘 지낼 테니까.”“이모.”소윤을 바라보는 성혜인은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제가 진짜 불쌍한 척을 하든 말든 이모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다른 남자의 아들에게는 몇십억이나 되는 별장도 사주는데, 친딸 집 장만해 주는 게 배 아플 일인가요? 게다가 아빠는 저한테 사준다는 말도 아직 안 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요?”성혜인의 말에 소윤은 귀가 벌겋게 날아올랐다.성휘는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한편으로 성혜인이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개인들도 앞에 있는 상황인데다 그래도 소윤이 어른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