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의 표정이 굳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로 반승제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반승제에게로 향했다.곁에는 반승혜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찡끗 눈을 깜빡였다.반승혜는 어려움에 처한 성혜인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늘 반승제도 오지 않았다면 상황 수습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서씨 집안의 서수연은 교내에서도 풍운아인 편이다. 일개 디자이너에 불과한 성혜인이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만큼, 반승혜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공기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총장은 또다시 성혜인에게 따지려 들었다.“모두 방문 등록을 해야 한다면, 지금 전시회를 관람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겠죠? 오직 저를 위해서 만든 규정은 아닐 테니까요. 제가 뭐라고.”반승제의 시선이 총장에게 향했다. 총장은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성혜인을 밀어붙이고자 뱉은 규정인데 반승제가 등장할 줄이야.여기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면 제원대학은 가장 큰 규모의 투자자에게 망신만 당하게 될 것이다.총장이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서수연이 나섰다. 최대한 예의를 갖춘 듯한 표정이었지만 반승제와 일면식이 있는 듯한 뉘앙스는 감출 수 없었다.“승제 오빠. 이번 일은 총장님 잘못이 아니야. 이 여자가 내 5500만 원 짜리 팔찌를 훔쳐 놓고 인정을 안 한다니까. 이번 일은 경찰이 처리하면 좋을 듯해.”“안 훔쳤다고 말했는데.”“너 말고 또 누가 있어!”성혜인의 미간이 좁아졌다.“소매치기 범인이 나라는 네 말을 왜 무조건 믿어야 해? 서씨 집안 사람이라서?”“뭐?!”말문이 턱 막혀버린 서수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이 도둑년이!’상황을 지켜만 보던 신이한은 슬슬 상황을 수습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반승제까지 온 마당에 성과를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혜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니까.신이한이 큼큼 목을 가다듬자,
긴장한 듯한 윤희선의 손가락이 파르르 흔들렸다. 조금 전, 서수연이 화장실에서 괴로워하는 윤희선을 직원실로 데려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서수연은 신이한을 봤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마침 정운테크의 지형오도 봤다는 말 역시 나오면서 성혜인을 언급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어깨를 부딪친 이야기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윤희선은 성혜인이 죽을 만큼 싫었다. 때마침, 그녀의 눈에 서수연이 팔에 차고 있는 팔찌가 들어오더니 아이디어가 번뜩였다.그녀는 급히 팔찌를 숨겼다. 서수연이 자신의 팔찌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윤희선은 능청맞게 말을 던졌다.“방금 누군가와 부딪칠 때 훔쳐 간 거 아니니?”그렇게 성혜인이 떠오른 서수연이 곧바로 성혜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이 순간, 서수연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성혜인이 더 미워졌다. 성혜인이 훔친 게 아니라면 여기서 얼굴 붉힐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때마침 윤희선이 소리치자, 그런 서수연도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맞아요. 안 돼요! 저 여자가 훔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그리고 CCTV 사각지대라 찍혔을 리도 없어요! 일부러 시간 끌고 있는 거라니까요!”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건 경호원이었다. 경호원은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했다.총장은 반승제에게 말을 걸었다.“대표님. 대표님 생각은…”반승제의 시선이 순간 냉랭해졌다. 총장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강단이 없어서야, 원.“심 비서가 가봐요.”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총장은 차마 시간을 더 끌 수 없었다. 그는 경비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모셔다드려라.”성혜인은 줏대 없는 총장의 태도가 웃겼다. 하지만 자신의 모교인 제원대학을 비웃을 수는 없었다.총장은 다른 사람을 제치고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지만, 그래도 기회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그가 총장의
서수연의 굴복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일이었다.서수연은 말을 마치며 성혜인을 노려봤다.“그냥 됐어요. 나도 서씨 집안 물 먹일 생각 없어요.”성혜인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서수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왜 웃는 거야?’성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선을 서수연에게 돌렸다.“날 그렇게 몰아세우더니,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넓은 아량으로 일을 키우지 않겠다는 뉘앙스까지 느껴지네. 서씨 집안이라고 해서 무조건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는 없잖아?”화가 치밀어 오른 서수연은 두통이 생길 지경에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호흡까지 가빠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윤희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자기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하지만 윤희선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여자, 불륜녀야. 재학 당시 투자자를 꼬시다가 와이프에게 들키는 바람에 물감을 온몸에 뒤집어 쓴 적이 있었어. 수연이 너는 서씨 집안 사람이잖아. 저런 불륜녀에게 고개 숙일 필요가 없어.”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윤희선은 마냥 철없는 서수연처럼 이용당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최대한 고개를 밑으로 떨구며 주위의 시선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서수연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 윤희선의 말에 오히려 눈을 번뜩였다.“너도 제원대학 학생이었구나? 심지어 불륜녀였어? 뻔뻔한 년. 어떻게 다시 올 생각을 해?”성혜인은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시선은 윤희선을 향했다.윤희선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지만 입꼬리는 위를 향했다.서수연의 뒤에 숨는다면 팔찌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누가 불륜녀래?”“당연히 학과장님이지. 올해 교수에서 학과장으로 승진하셨으니 널 가르친 적도 있겠지. 이제야 네가 누군지 알아본 거고.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런 더러운 짓을 했어?”서수연은 총장에게로 시선을 돌
반승혜는 안타까웠다. 그림에 박학다식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에 휘말렸을 줄이야...마음이 무거워진 그녀의 눈빛에서 실망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반승제를 슬쩍 살폈다. 자신의 디자이너가 불륜녀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하지만 반승제는 차분하다 못해 직원이 준비해 두었던 차를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이곳에서 일어난 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술렁이기 시작했다.“예쁘다 싶었는데, 불륜녀였다니. 어쩐지 드세더라.”“어느 집 가정을 망친 거지? 보아하니 학생 때부터 불륜녀였던 것 같은데.”“몸에 밴 거지. 얼굴이 참 아깝게 됐어.”“완전 뻔뻔하지 않아? 다 까발려졌는데도 어쩜 저렇게 침착할 수 있지?”사람들의 시선이 또다시 성혜인을 향했다. 성혜인은 말없이 서 있었지만, 따가운 평가에 미간이 좁아졌다.“학과장님, 서수연 씨.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모르는 거 아니죠?”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말했다.“학과장님. 기회 드릴게요.”‘녹음 듣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윤희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몇 년 전에 네가 신기섭을 꼬시는 바람에 정처가 학교까지 와 물감 뿌리고 난리 쳤던 사건을 다 잊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게다가 난 이제 학과장이라고!”...“대표님이 네 안부를 종종 묻더라고.”“일개 디자이너에 지나지 않는 네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대표님이 알면 어떻게 될까? 과연 널 찾아올까? 그때 널 갖지 못해 아주 아쉬웠을 텐데, 널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교수, 아니 학과장이라는 사람이 학생에게 이런 발언을 했었다니. 과연 무슨 속셈일까?성혜인은 녹음을 끄며 입을 열었다.“말씀해 보세요. 제가 누구의 불륜녀라고요? 학과장님의 옛사랑, 신기섭이요? 어쩌죠. 녹음에서 들은 것처럼 두 사람이 저를 어떻게든 끌어내려고 표절이니 뭐니, 겁박하셨잖아요. 저는 졸업장도 못 받을 뻔했고요. 대회에 참가했던 작품도 거절당했어요. 대단하시네요, 학과장님. 신기섭의 침대
성혜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잔이 반승제의 것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잠시 후, 부총장이 급히 나와 총장 대신 내빈들을 접대하기 시작했다.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부총장은 특별히 반승제 앞에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학교 측에서 투자자분들 한 분 한 분께 인사드리고, 경찰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반승제의 미간이 깊게 팼다. 총장보다 훨씬 나은 태도였다.부총장의 시선이 성혜인에게로 옮겨졌다. 목소리에서도 반가움이 느껴졌다.“페니. 오랜만이야.”성혜인이 디자이너로 전향할 때, 부총장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부총장이 아니었다면 총장과 학과장의 압박에 견디지 못해 졸업장도 손에 쥐지 못했을 것이다.“교수님. 잘 지내셨죠?”부총장은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페니라는 디자이너명도 내가 지어준 거였잖니. 반승제 대표님의 담당 디자이너가 ‘페니’라는 소리에 잘못 들은 줄 알았지 뭐니. 오늘 여기서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구나.”몇 년 전, 부총장이 성혜인을 돕기는 했지만 힘이 부족해 학위를 지켜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윤희선은 미술 아카데미의 학과장으로 발이 아주 넓은 사람이다. 성혜인이 계속 미술의 길을 걸었다면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당시에 부총장은 성혜인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었었다. 계속 이 길을 가게 되면 분명 가로막히게 될 테니까.성혜인은 단 한 마디로 대답했다.‘깨뜨려야 세울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가로막힌다면 깨부수고 가면 된다.부총장은 지금의 성혜인을 보고 감정이 일렁였다. 역시 가장 좋게 보았던 학생다웠다.하지만 여기서 한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던 부총장은 전시회를 보고 있는 손님들에게 다가갔다.그가 떠나고, 반승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꼬집었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의심이 됐다.자기와 알고 지내던 페니가 학교에 오자마자 총장과 학과장을 바꿔버린다?서수연처럼 콧대 높은 여자를 경찰서에 보내버린다?꼬집은 볼에서 얼얼함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다. 진짜다
우산을 쓰고 가는데도 얼마 가지 못해 바짓단이 전부 젖어버렸다.그때, 성혜인 옆으로 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경적을 울렸다.신이한일 거라 생각한 성혜인은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옆을 쳐다봤다.창문이 살짝 내려가고, 차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반승혜였다.“지금 운전하면 차 많이 막힐 거예요. 어서 타요.”성혜인은 차를 세워 뒀던 방향을 쳐다봤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비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차에 몸을 실었다.빗물과 습기가 차단된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성혜인은 당연히 반승혜를 데리러 온 반씨 가문의 차라고 생각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반승제의 운전기사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창문에 기댄 반승제는 파일을 손에 쥔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어색한 이 자리에 반승혜가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반승혜의 얼굴은 흥분한 듯 옅게 붉어져 있었다.“페니 씨, 지금 학생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알아요? 서수연 걔가 그렇게 떵떵거리면서 다녔는데, 경찰서에 잡혀가다니! 서씨 집안에서도 지금 서수연 빼낸다고 혼비백산이겠죠?”“총장이랑 학과장도 그래요. 그렇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뒤에서는 사기 행각이나 벌이고 있다니. 소름 돋아 정말!”반승혜는 반승제를 슬쩍 툭툭 밀었다. 반승제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오빠. 서수연이 분명 자기 오빠한테 가서 일러바칠 텐데, 이것 때문에 페니 씨 괴롭히면 안 돼. 알겠지?”성혜인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랫동안 지지고 볶으면서 마냥 순진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을 지켜주려는 반승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반승제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심한 한 마디를 툭 뱉었다.“응.”반승혜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확 좁아졌다. 집에 도착하고 난 후, 운전기사가 건넨 우산을 잡으며 당부하듯 말했다.“페니 씨는 오빠가 데려다주는 걸로 해. 나 그림 그리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땅을 적시는 바깥과 달리 조용한 차 안에 성혜인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반승제의 손가락이 순간 허공에서 멈춰 섰다.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성혜인에게는 그저 가벼운 칭찬이었을 뿐,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자 눈을 감았다. 그때, 차가 순간 덜컹거렸다.그녀의 머리가 의도치 않게 반승제의 어깨에 안착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쏟아지는 빗물에 도로가 미끄러워져 차가 훨씬 막혔다.그렇게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도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내내 눈을 감고 얕은 잠을 청했다.요즘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 피로함이 어깨를 짓누르는 데다 빗소리까지 울려 퍼지니 잠들기 딱 좋았다. 성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고 말았다.앞좌석에 앉아있던 심인우는 뒷좌석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사이드미러로 교통법을 위반한 차가 불쑥 나타났다.그대로 반승제가 타고 있던 차와 부딪혔고, 차체가 앞으로 강하게 휘청이고 말았다.성혜인은 순식간에 한쪽 창문으로 쏠렸지만, 반승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그의 힘에 성혜인은 그대로 반승제의 팔을 따라 움직였다.깊은 잠이 들었던 성혜인은 마치 독특한 촉감의 ‘베개’를 밴 기분이었다. 게다가 온기까지 느껴지니 무의식적으로 그 ‘베개’를 껴안으면서 편한 자세로 바꾸었고, 이내 다시 잠에 들었다.반승제는 그녀의 팔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성혜인이 품에 안기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때마침 한곳으로 몰렸다.그곳은 바로, 남자에게 가장 부추겨서는 안 될 곳.동공이 커진 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기다란 머리카락이 옆으로 흩어지면서 부드럽고 작은 얼굴의 옆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다.어둑한 차 안으로 비친 옅은 불빛이 마침 성혜인의 얼굴을 비췄다. 주위가 조용하기까지 하니 그녀의 가녀린 모습에 심장 소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강아지 짖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새하얀 털 뭉치가 성혜인의 주변을 신나게 돌았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겨울아. 요즘 내가 잘 못 와봤지? 말 잘 듣고 있었어?”앞치마를 두른 유경아가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온화하고 꾸밈없는 여성이다.“사모님 안 계시는 동안 얼마나 말썽을 부리던지. 어제는 연못에서 물고기도 잡았다니까요. 물고기를 전부 물어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잡아서 삶아줬어요.”성혜인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겨울이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었다.“식탐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독일의 목양견인 겨울이는 6살 정도 되었는데, 지금까지 줄곧 성혜인과 함께였다.성혜인의 아파트에서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반태승이 이 별장을 선물해 주어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겨울이를 대신 돌봐 주고 있다. 성혜인은 평일에 올 수 있는 날이 극히 드물었다.성혜인은 겨울이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캐리어를 끌고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유경아는 그녀의 모습에 다소 놀란 듯했다.“사모님. 드디어 여기서 살기로 결정하신 거예요?”“아파트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여기서 며칠 묵으려고요.”유경아의 놀란 눈이 더 커졌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여자 혼자 밖에 사는 건 원래 위험하잖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사는 건 어때요? 회장님께서도 제게 사모님을 잘 돌보라고 하셨었는데, 3년 동안 이곳에 통 안 오시니 제가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기가 얼마나 난감한데요.”“새로운 집을 찾을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성혜인은 한 손으로 겨울이를 놀아주면서 빙긋 웃었다.바닥에서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 겨울이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한편.반승혜는 성혜인이 떠나고 난 후 곧바로 반태승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승제야. 이미 수속 끝났다.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반승제는 손으로 미간을 주물렀다.“알겠어요. 몸조심하시고요,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