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의 표정이 굳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로 반승제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반승제에게로 향했다.곁에는 반승혜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찡끗 눈을 깜빡였다.반승혜는 어려움에 처한 성혜인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늘 반승제도 오지 않았다면 상황 수습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서씨 집안의 서수연은 교내에서도 풍운아인 편이다. 일개 디자이너에 불과한 성혜인이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만큼, 반승혜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공기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총장은 또다시 성혜인에게 따지려 들었다.“모두 방문 등록을 해야 한다면, 지금 전시회를 관람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겠죠? 오직 저를 위해서 만든 규정은 아닐 테니까요. 제가 뭐라고.”반승제의 시선이 총장에게 향했다. 총장은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성혜인을 밀어붙이고자 뱉은 규정인데 반승제가 등장할 줄이야.여기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면 제원대학은 가장 큰 규모의 투자자에게 망신만 당하게 될 것이다.총장이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서수연이 나섰다. 최대한 예의를 갖춘 듯한 표정이었지만 반승제와 일면식이 있는 듯한 뉘앙스는 감출 수 없었다.“승제 오빠. 이번 일은 총장님 잘못이 아니야. 이 여자가 내 5500만 원 짜리 팔찌를 훔쳐 놓고 인정을 안 한다니까. 이번 일은 경찰이 처리하면 좋을 듯해.”“안 훔쳤다고 말했는데.”“너 말고 또 누가 있어!”성혜인의 미간이 좁아졌다.“소매치기 범인이 나라는 네 말을 왜 무조건 믿어야 해? 서씨 집안 사람이라서?”“뭐?!”말문이 턱 막혀버린 서수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이 도둑년이!’상황을 지켜만 보던 신이한은 슬슬 상황을 수습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반승제까지 온 마당에 성과를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혜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니까.신이한이 큼큼 목을 가다듬자,
긴장한 듯한 윤희선의 손가락이 파르르 흔들렸다. 조금 전, 서수연이 화장실에서 괴로워하는 윤희선을 직원실로 데려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서수연은 신이한을 봤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마침 정운테크의 지형오도 봤다는 말 역시 나오면서 성혜인을 언급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어깨를 부딪친 이야기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윤희선은 성혜인이 죽을 만큼 싫었다. 때마침, 그녀의 눈에 서수연이 팔에 차고 있는 팔찌가 들어오더니 아이디어가 번뜩였다.그녀는 급히 팔찌를 숨겼다. 서수연이 자신의 팔찌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윤희선은 능청맞게 말을 던졌다.“방금 누군가와 부딪칠 때 훔쳐 간 거 아니니?”그렇게 성혜인이 떠오른 서수연이 곧바로 성혜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이 순간, 서수연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성혜인이 더 미워졌다. 성혜인이 훔친 게 아니라면 여기서 얼굴 붉힐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때마침 윤희선이 소리치자, 그런 서수연도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맞아요. 안 돼요! 저 여자가 훔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그리고 CCTV 사각지대라 찍혔을 리도 없어요! 일부러 시간 끌고 있는 거라니까요!”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건 경호원이었다. 경호원은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했다.총장은 반승제에게 말을 걸었다.“대표님. 대표님 생각은…”반승제의 시선이 순간 냉랭해졌다. 총장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강단이 없어서야, 원.“심 비서가 가봐요.”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총장은 차마 시간을 더 끌 수 없었다. 그는 경비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모셔다드려라.”성혜인은 줏대 없는 총장의 태도가 웃겼다. 하지만 자신의 모교인 제원대학을 비웃을 수는 없었다.총장은 다른 사람을 제치고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지만, 그래도 기회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그가 총장의
서수연의 굴복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일이었다.서수연은 말을 마치며 성혜인을 노려봤다.“그냥 됐어요. 나도 서씨 집안 물 먹일 생각 없어요.”성혜인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서수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왜 웃는 거야?’성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선을 서수연에게 돌렸다.“날 그렇게 몰아세우더니,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넓은 아량으로 일을 키우지 않겠다는 뉘앙스까지 느껴지네. 서씨 집안이라고 해서 무조건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는 없잖아?”화가 치밀어 오른 서수연은 두통이 생길 지경에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호흡까지 가빠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윤희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자기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하지만 윤희선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여자, 불륜녀야. 재학 당시 투자자를 꼬시다가 와이프에게 들키는 바람에 물감을 온몸에 뒤집어 쓴 적이 있었어. 수연이 너는 서씨 집안 사람이잖아. 저런 불륜녀에게 고개 숙일 필요가 없어.”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윤희선은 마냥 철없는 서수연처럼 이용당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최대한 고개를 밑으로 떨구며 주위의 시선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서수연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 윤희선의 말에 오히려 눈을 번뜩였다.“너도 제원대학 학생이었구나? 심지어 불륜녀였어? 뻔뻔한 년. 어떻게 다시 올 생각을 해?”성혜인은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시선은 윤희선을 향했다.윤희선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지만 입꼬리는 위를 향했다.서수연의 뒤에 숨는다면 팔찌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누가 불륜녀래?”“당연히 학과장님이지. 올해 교수에서 학과장으로 승진하셨으니 널 가르친 적도 있겠지. 이제야 네가 누군지 알아본 거고.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런 더러운 짓을 했어?”서수연은 총장에게로 시선을 돌
반승혜는 안타까웠다. 그림에 박학다식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에 휘말렸을 줄이야...마음이 무거워진 그녀의 눈빛에서 실망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반승제를 슬쩍 살폈다. 자신의 디자이너가 불륜녀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하지만 반승제는 차분하다 못해 직원이 준비해 두었던 차를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이곳에서 일어난 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술렁이기 시작했다.“예쁘다 싶었는데, 불륜녀였다니. 어쩐지 드세더라.”“어느 집 가정을 망친 거지? 보아하니 학생 때부터 불륜녀였던 것 같은데.”“몸에 밴 거지. 얼굴이 참 아깝게 됐어.”“완전 뻔뻔하지 않아? 다 까발려졌는데도 어쩜 저렇게 침착할 수 있지?”사람들의 시선이 또다시 성혜인을 향했다. 성혜인은 말없이 서 있었지만, 따가운 평가에 미간이 좁아졌다.“학과장님, 서수연 씨.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모르는 거 아니죠?”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말했다.“학과장님. 기회 드릴게요.”‘녹음 듣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윤희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몇 년 전에 네가 신기섭을 꼬시는 바람에 정처가 학교까지 와 물감 뿌리고 난리 쳤던 사건을 다 잊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게다가 난 이제 학과장이라고!”...“대표님이 네 안부를 종종 묻더라고.”“일개 디자이너에 지나지 않는 네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대표님이 알면 어떻게 될까? 과연 널 찾아올까? 그때 널 갖지 못해 아주 아쉬웠을 텐데, 널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교수, 아니 학과장이라는 사람이 학생에게 이런 발언을 했었다니. 과연 무슨 속셈일까?성혜인은 녹음을 끄며 입을 열었다.“말씀해 보세요. 제가 누구의 불륜녀라고요? 학과장님의 옛사랑, 신기섭이요? 어쩌죠. 녹음에서 들은 것처럼 두 사람이 저를 어떻게든 끌어내려고 표절이니 뭐니, 겁박하셨잖아요. 저는 졸업장도 못 받을 뻔했고요. 대회에 참가했던 작품도 거절당했어요. 대단하시네요, 학과장님. 신기섭의 침대
성혜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잔이 반승제의 것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잠시 후, 부총장이 급히 나와 총장 대신 내빈들을 접대하기 시작했다.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부총장은 특별히 반승제 앞에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학교 측에서 투자자분들 한 분 한 분께 인사드리고, 경찰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반승제의 미간이 깊게 팼다. 총장보다 훨씬 나은 태도였다.부총장의 시선이 성혜인에게로 옮겨졌다. 목소리에서도 반가움이 느껴졌다.“페니. 오랜만이야.”성혜인이 디자이너로 전향할 때, 부총장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부총장이 아니었다면 총장과 학과장의 압박에 견디지 못해 졸업장도 손에 쥐지 못했을 것이다.“교수님. 잘 지내셨죠?”부총장은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페니라는 디자이너명도 내가 지어준 거였잖니. 반승제 대표님의 담당 디자이너가 ‘페니’라는 소리에 잘못 들은 줄 알았지 뭐니. 오늘 여기서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구나.”몇 년 전, 부총장이 성혜인을 돕기는 했지만 힘이 부족해 학위를 지켜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윤희선은 미술 아카데미의 학과장으로 발이 아주 넓은 사람이다. 성혜인이 계속 미술의 길을 걸었다면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당시에 부총장은 성혜인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었었다. 계속 이 길을 가게 되면 분명 가로막히게 될 테니까.성혜인은 단 한 마디로 대답했다.‘깨뜨려야 세울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가로막힌다면 깨부수고 가면 된다.부총장은 지금의 성혜인을 보고 감정이 일렁였다. 역시 가장 좋게 보았던 학생다웠다.하지만 여기서 한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던 부총장은 전시회를 보고 있는 손님들에게 다가갔다.그가 떠나고, 반승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꼬집었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의심이 됐다.자기와 알고 지내던 페니가 학교에 오자마자 총장과 학과장을 바꿔버린다?서수연처럼 콧대 높은 여자를 경찰서에 보내버린다?꼬집은 볼에서 얼얼함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다. 진짜다
우산을 쓰고 가는데도 얼마 가지 못해 바짓단이 전부 젖어버렸다.그때, 성혜인 옆으로 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경적을 울렸다.신이한일 거라 생각한 성혜인은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옆을 쳐다봤다.창문이 살짝 내려가고, 차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반승혜였다.“지금 운전하면 차 많이 막힐 거예요. 어서 타요.”성혜인은 차를 세워 뒀던 방향을 쳐다봤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비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차에 몸을 실었다.빗물과 습기가 차단된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성혜인은 당연히 반승혜를 데리러 온 반씨 가문의 차라고 생각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반승제의 운전기사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창문에 기댄 반승제는 파일을 손에 쥔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어색한 이 자리에 반승혜가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반승혜의 얼굴은 흥분한 듯 옅게 붉어져 있었다.“페니 씨, 지금 학생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알아요? 서수연 걔가 그렇게 떵떵거리면서 다녔는데, 경찰서에 잡혀가다니! 서씨 집안에서도 지금 서수연 빼낸다고 혼비백산이겠죠?”“총장이랑 학과장도 그래요. 그렇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뒤에서는 사기 행각이나 벌이고 있다니. 소름 돋아 정말!”반승혜는 반승제를 슬쩍 툭툭 밀었다. 반승제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오빠. 서수연이 분명 자기 오빠한테 가서 일러바칠 텐데, 이것 때문에 페니 씨 괴롭히면 안 돼. 알겠지?”성혜인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랫동안 지지고 볶으면서 마냥 순진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을 지켜주려는 반승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반승제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심한 한 마디를 툭 뱉었다.“응.”반승혜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확 좁아졌다. 집에 도착하고 난 후, 운전기사가 건넨 우산을 잡으며 당부하듯 말했다.“페니 씨는 오빠가 데려다주는 걸로 해. 나 그림 그리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땅을 적시는 바깥과 달리 조용한 차 안에 성혜인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반승제의 손가락이 순간 허공에서 멈춰 섰다.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성혜인에게는 그저 가벼운 칭찬이었을 뿐,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자 눈을 감았다. 그때, 차가 순간 덜컹거렸다.그녀의 머리가 의도치 않게 반승제의 어깨에 안착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쏟아지는 빗물에 도로가 미끄러워져 차가 훨씬 막혔다.그렇게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도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내내 눈을 감고 얕은 잠을 청했다.요즘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 피로함이 어깨를 짓누르는 데다 빗소리까지 울려 퍼지니 잠들기 딱 좋았다. 성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고 말았다.앞좌석에 앉아있던 심인우는 뒷좌석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사이드미러로 교통법을 위반한 차가 불쑥 나타났다.그대로 반승제가 타고 있던 차와 부딪혔고, 차체가 앞으로 강하게 휘청이고 말았다.성혜인은 순식간에 한쪽 창문으로 쏠렸지만, 반승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그의 힘에 성혜인은 그대로 반승제의 팔을 따라 움직였다.깊은 잠이 들었던 성혜인은 마치 독특한 촉감의 ‘베개’를 밴 기분이었다. 게다가 온기까지 느껴지니 무의식적으로 그 ‘베개’를 껴안으면서 편한 자세로 바꾸었고, 이내 다시 잠에 들었다.반승제는 그녀의 팔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성혜인이 품에 안기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때마침 한곳으로 몰렸다.그곳은 바로, 남자에게 가장 부추겨서는 안 될 곳.동공이 커진 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기다란 머리카락이 옆으로 흩어지면서 부드럽고 작은 얼굴의 옆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다.어둑한 차 안으로 비친 옅은 불빛이 마침 성혜인의 얼굴을 비췄다. 주위가 조용하기까지 하니 그녀의 가녀린 모습에 심장 소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강아지 짖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새하얀 털 뭉치가 성혜인의 주변을 신나게 돌았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겨울아. 요즘 내가 잘 못 와봤지? 말 잘 듣고 있었어?”앞치마를 두른 유경아가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온화하고 꾸밈없는 여성이다.“사모님 안 계시는 동안 얼마나 말썽을 부리던지. 어제는 연못에서 물고기도 잡았다니까요. 물고기를 전부 물어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잡아서 삶아줬어요.”성혜인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겨울이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었다.“식탐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독일의 목양견인 겨울이는 6살 정도 되었는데, 지금까지 줄곧 성혜인과 함께였다.성혜인의 아파트에서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반태승이 이 별장을 선물해 주어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겨울이를 대신 돌봐 주고 있다. 성혜인은 평일에 올 수 있는 날이 극히 드물었다.성혜인은 겨울이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캐리어를 끌고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유경아는 그녀의 모습에 다소 놀란 듯했다.“사모님. 드디어 여기서 살기로 결정하신 거예요?”“아파트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여기서 며칠 묵으려고요.”유경아의 놀란 눈이 더 커졌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여자 혼자 밖에 사는 건 원래 위험하잖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사는 건 어때요? 회장님께서도 제게 사모님을 잘 돌보라고 하셨었는데, 3년 동안 이곳에 통 안 오시니 제가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기가 얼마나 난감한데요.”“새로운 집을 찾을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성혜인은 한 손으로 겨울이를 놀아주면서 빙긋 웃었다.바닥에서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 겨울이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한편.반승혜는 성혜인이 떠나고 난 후 곧바로 반태승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승제야. 이미 수속 끝났다.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반승제는 손으로 미간을 주물렀다.“알겠어요. 몸조심하시고요, 할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