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듣기만 해도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짐승보다 못한 인간들...!’막내는 아직도 몸을 웅크린 채 눈물을 짜내고 있었다.“제가 아는 건 다 말했어요. 흑흑흑... 때리지 마세요. 아파요. 아프다고요.”경호원은 또 물었다.“그다음 바로 시체를 화장해 버린 거야?”“네, 네. 형은 베개로 얼굴을 막고, 사지는 저희가 함께 잡고, 목은 아빠가 졸랐어요. 어차피 목을 가리면 흔적이 보이지 않길래 그대로 화장해 버렸어요.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지금 아빠한테 돈 많은 여자랑 결혼하라고 부추기고 있어요. 그러면 여자의 집 두 채를 저랑 형이 하나씩 나눠 가질 수 있다고요.”만약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면 성혜인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은 증거가 모자랐기에 법적 책임을 따질 수는 없었다. 성훈 일가가 증거까지 싹 지워버렸니, 그들이 아무리 극악무도한 짓을 했다고 해도 처벌을 줄 수가 없었다.성혜인은 계속 이곳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이곳의 공기마저 더러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에 다시 올라탄 그녀는 속이 메슥거려서 토하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 함께 있던 장하리도 안색이 창백했다.이런 사건에는 오직 여자만 느낄 수 있는 잔인함과 절망감이 있었다. 장하리는 차에 올라타지 못하고 길가에서 구역질했다. 이토록 기상천외한 사건을 마주한 건 또 처음이기 때문이다.성혜인은 경호원에게 두 사람을 치워버리라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차는 포레스트로 향해 대문 앞에 멈춰 섰고 그녀는 어두운 안색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대표님, 이번 일은 어떻게 할까요? 진짜 배상금을 줘야 하는 건가요?”이번 일은 몇천만 원만 받아도 성훈의 승리였다.“일단 2억 원 정도를 주죠. 다른 건 내가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이튿날 아침, 성훈은 일찍이 SY그룹 앞으로 가서 돈을 요구했다. 그것도 뻔뻔한 태도를 일관하면서 말이다.“성혜인! 지금처럼 우리를 무시하고 돈을 내놓지 않는다면 회사에 전단지를 뿌릴 거야! 네 실체를 모든 사람이 알
반승제는 BH그룹의 사무실에서 심인우가 보고하는 이번 주의 일정을 듣고 있었다.“온 작가님의 대본은 촬영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3분의 1의 진도가 나갔습니다. 다른 대본의 투자 요청도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으니 확인하십시오.”심인우는 두터운 한 더미의 서류를 반승제의 앞에 내려놓았다. 반승제는 대충 펼쳐보다가 돌연 그에게 물었다.“지난번의 신발은 보내 줬어요?”‘받았으면 고맙다고 말이나 해야 할 거 아니야.’“네. 배달원한테 꼭 집까지 보내달라고 했지만 페니 씨가 집을 비운 관계로 경비실에 맡겨놨다고 합니다.”경비실에 맡겨놨다면 경비가 책임지고 전해줄 것이기에 택배를 못 받았을 리가 난무했다. 그래서 반승제는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생각했다.‘됐어, 어차피 열 번은 이미 끝났고 페니는 나랑 상관없는 여자야. 나도 아쉬울 건 없지.’...초저녁, 성혜인은 반씨 고택에서 보낸 물건을 받았다. 그 물건은 값비싼 크루즈 파티 초대장이었다.초대장을 전달하러 온 집사는 반태승의 뜻을 말로 전했다.“이 초대장은 회장님께서 혜인 씨가 좀 쉬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한 거예요. 이건 제원에서도 가장 화려한 크루즈인데 오늘 저녁 출발해서 제원 근처의 바다를 사흘 동안 떠다닐 거예요. 크루즈에 타는 사람 중 대부분이 유명한 사업가와 연예인이라 혜인 씨한테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회장님께서 말씀하셨어요.”성혜인은 어젯밤 반태승과 통화를 하다가 영화 투자에 관한 일을 언급했다. 영화 투자에 인맥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맥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회사 임원들은 요즘 인터넷 드라마에 투자를 시도하고 있었다. 짧은 한 달 동안 번 사람도 있고 손해 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인맥은 하루 이틀 만에 쌓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도 한참 모자랐다.지금과 같은 시점에서 성혜인은 선두 주자가 되어서 회사를 이끌어야만 했다. 그래서 반태승도 휴식을 핑계로 이번 기회를 마련했을 것이다.“할아버지한테 고맙다고 전
온시환은 쉴 새 없이 재잘댔다. 반대로 반승제는 포커페이스를 단 한 번도 푼 적이 없었다.반승제가 자기 말에 대꾸도 없는 것을 보고 온시환은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 크루즈 안으로 들어가려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반승제를 툭툭 쳤다.“저 사람 뒷모습 진짜 죽여주지 않아? 네가 좋아하던 디자이너 나부랭이보다 훨씬 나아.”성혜인의 뒷모습은 확실히 죽여줬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예쁜 곳이 없었다. 있어야 할 곳은 있고, 없어야 할 곳은 없는 것이 완벽한 몸매를 만들어 냈다. 더구나 가슴골에서 언뜻대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덕분에 더욱 시선을 끌었다.온시환은 성혜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반승제는 다르다. 그녀를 뒤에서 수도 없이 끌어안은 사람도, 목덜미에 다정하게 입 맞추던 사람도 반승제였기 때문에 절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온시환이 가까이 다가가 대시라도 하려는 순간 성혜인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페니 씨?”성혜인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인사했다.“안녕하세요.”반승제와 헤어지던 날, 성혜인은 몸 곳곳에 키스 마크를 달고 있었다. 가장 은밀한 곳도 놓치지 않고 말이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예전의 키스 마크는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온시환도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궁금한 듯 물었다.“페니 씨, 오늘은 누가 이렇게 꾸며줬어요?”‘오늘 파티에 참석한 남자들은 아주 그냥 다 페니 씨만 보고 있겠는데? 저 목걸이는 또 뭐야?! 진짜 한 평생 침대 위에 묶어두고 싶네!’성혜인은 당당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스타일리스트를 불러서 꾸민 거예요.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초대장에는 방 번호가 함께 적혀 있었다. 크루즈는 총 7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층마다 다양한 음식과 주류가 갖춰져 있었다. 넓은 로비에서는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도 있었다.성혜인은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반승제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같은 시각 성혜인은 3층에 있었다. 그녀는 3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느끼하게 생긴 중년 남자의 표적이 되어 한참 시달렸다. 남자의 손은 끝도 없이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고 한 두 번 피하는 것으로 쉽게 포기하지도 않았다.겨우 남자에게서 벗어나 소파로 가서 앉은 성혜인은 또 윤단미 등과 마주쳤다. 윤단미는 그냥 재수 없다고 여기고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일행들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 향한 탓에 도무지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윤단미의 일행 중에는 얼마 전 금방 신인상을 받은 여배우 차유하도 있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윤단미 덕분에 초대장을 받은 것 같았다. 이것도 물론 윤단미가 반승제의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차유하는 성혜인이 입은 드레스를 보고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저 드레스 얼마 전 패션쇼에 나왔던 그거 아니야? 전 세계에 하나 뿐인 드레스인 데다가 아직 팔기 시작하지도 않았다고 했는데?”차유하의 목소리에 여자들은 금세 시선을 돌렸다. 파티에서 드레스보다 중요한 화젯거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들은 패션쇼에 자주 다니기 때문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여자들은 성혜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모르는 얼굴인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자리에 자주 참석하는 연예인은 재벌을 꽤 알고 지냈기에 전 세계에 하나 뿐인 드레스를 입을 정도의 사람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저 드레스 짝퉁 아니야?”이런 자리에서 짝퉁 드레스를 입는다면 모두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그래서 차유하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윤단미에게 물었다.“단미야, 너 저 여자 알아?”윤단미는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아니.”최근 한 달 동안 윤단미는 반승제가 성혜인의 정체를 발견한 건 아닌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데이트 신청을 하는 대로 거절당해서 마음을 놓을 새가 없었다. 다행히 반승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며칠 사이에 5kg이나 빠진 윤단미는 성혜인을 보자마자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요즘 또 세한그
차유하의 태도는 아주 당당했다. 성혜인이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는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에 닿을 정도로 삿대질하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흥미진진해서 구경하고 있었다. 대부분 차유하와 이승주의 사이를 알고 있기에 가만히 있었다.성혜인은 지금의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 그녀가 진짜 짝퉁 드레스를 입었다고 해도 차유하와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성혜인의 웃음에 화가 치밀어 오른 차유하는 와인 잔의 와인을 그녀에게 던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그녀는 와인을 정통으로 맞았고 와인이 가슴팍에서 흘러내리는 꼴은 퍽 처참했다.차유하는 당당하게 눈썹을 튕기면서 말했다.“이런 짝퉁은 빨리 없애 버려야지!”성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반승제가 보였다. 그는 금방 2층에서 올라온 모양이었는데 성혜인을 도와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성혜인은 심호흡하더니 차유하의 뺨을 때렸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차유하는 손에 힘이 풀려 와인 잔을 놓쳐 버렸고 바닥에 떨어진 와인 잔은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차유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뺨을 부여잡았다. 만약 통증이 없었다면 분명 꿈인 줄 알았을 것이다.‘이 촌뜨기가 감히 나를 때려?!’“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응, 몰라. 그리고 내 드레스는 짝퉁이 아니야. 진짜와 가짜를 가릴 안목도 없는 주제에 목소리만 높으면 이기는 줄 아나 봐? 너 지금 판권을 침해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건 알아? 네 드레스에 새겨진 그림 내가 대학 때 미술대회에서 그린 그림이야. 단 한 번도 상업적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어. 근데 그림을 주인 몰래 드레스에 새겨서 팔고 있네. 넌 이게 어떤 그림인지도 모르고 몸에 걸쳤지?”성혜인은 덤덤한 말투로 말하면서 손가락을 만지작댔다.“참, 나는 화가 주영훈의 제자야. 내 기억으로는 이 그림이 대상을 받았던 것 같은데 아직도 기록이 있을걸? 만약 네가 이 브랜드 엠버서더라면 진짜 브랜드 값 떨어지는 짓을 한
성혜인은 반승제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신이한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반승제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양쪽으로 비켜서서 길을 내줬다. 반승제가 왜 갑자기 다가오는지 이해가 안 가는 얼굴이었다. 그는 제원에서도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여자들끼리의 신경전에 끼어들 일도 없었다.이때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윤단미를 향했다. 반승제가 당연히 그녀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주먹을 꽉 잡은 채로 숨죽이고 있었다. 전처럼 괜히 나서서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말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의 곁으로 가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성혜인은 순간 옷을 입지 않은 듯한 수치심이 들어서 미간을 찌푸렸다.“누구한테 전화하려고?”성혜인이 전화를 걸려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반승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의 묵묵부답에도 화를 내지 않고 이승주에게 시선을 돌렸다.이승주는 반승제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혹시 두 사람이 아직도 연락하면서 지내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그는 당연히 반승제를 건드릴 수 없었다. 시간이 1분만 더 있었더라면 성혜인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반승제를 앞두고는 손을 놓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반승제는 이승주를 힐끗 보더니 또 차유하에게 시선을 돌렸다.차유하는 반승제의 기에 눌려 말을 한마디도 못 했다. 주변의 분위기도 말하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그녀는 반승제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반승제가 나타난 순간 주변이 정적에 휩싸인 걸 보면 유명한 사람인 것이 뻔했다.“페니는 제 파트너이니, 바다에 던지려거든 저도 함께 던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이승주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아니에요, 반 대표님... 죄송합니다...”곁에서 숨죽이고 있던 차유하는 ‘반 대표님’이라는 말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윤단미가 반
반승제는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큰 풍파를 일으킬지도 모른 채 이승주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이승주 씨, 만약 페니를 바다에 던질 생각이 아니라면 제가 이만 데려가도 될까요?”이승주는 누군가에게 뺨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뒤에 서 있던 친구들도 어느새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이승주와 친구들은 반승제와 나이가 비슷했다. 하지만 일찍이 집안에서 그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교육받았는지라 어른을 대하듯이 했다.반씨 가문의 첫 후계자 반승우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반승제는 다르다. 그는 천성이 냉정했고 만약 진짜 화를 낸다면 누가 말려도 소용없을 것이다.이승주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그럼요. 저는 페니 씨랑 장난을 쳤을 뿐이에요.”‘장난’이라는 말에 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이승주가 이 정도로 비굴할 줄은 또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는 바로 떠나지 않고 차유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림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말이다.성혜인의 시선에 차유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얼굴에는 숨김없는 분노와 불만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이승주도 찍소리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가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다.“차유하 씨, 그 드레스 어느 브랜드인지 아직 알려주지 않았는데요.”“AN이에요.”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에 성혜인은 눈썹을 튕겼다. 이는 최근 국내에서 아주 유명한 브랜드였다. 레트로 열풍의 선두 주자로 수많은 드레스가 톱스타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유명한 브랜드가 남의 그림을 도용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알겠어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반승제를 바라봤다. 반승제도 마침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다음에는 그녀의 손을 꽉 잡더니 성큼성큼 어딘가로 끌고 갔다.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성혜인은 보는 눈이 없는 곳에 갈 때까지 참고 있다가 확 뿌리쳤다. 코너에서 손이 뿌리쳐지는 “짝” 소리와 함께 반승제는 우뚝 멈춰 섰다.“도와줘서 고
성혜인은 머리를 돌렸다. 네일아트를 하지 않은 깔끔한 손톱은 소파를 꽉 잡고 있었다. 서 있을 때는 발목까지 오던 드레스가 소파에 눕자 바닥에 끌리게 되었다.반승제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그냥 위에서부터 벗겨버리려고 할 때 휴게실 문이 열렸다. 성혜인은 후다닥 몸을 일으키더니 그를 밀치고 치맛자락 속에 숨겨버렸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그는 미처 반응도 하지 못했다.휴게실에 들어온 사람은 두 명의 톱스타였다. 그녀들은 웃고 떠들면서 오늘 밤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휴게실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별로 개의치 않고 머리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잔뜩 긴장한 성혜인은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그리고 경계적인 눈빛으로 거울 앞으로 가면서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그럼 사람들 말대로 윤단미 씨가 혼자 연기했던 걸까요?”“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반 대표님이 직접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얘기했다잖아요. 그 일이 일어난 다음에는 디자이너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대요.”“반 대표님 결혼하지 않았어요?”“네, 정략결혼이요.”두 사람은 메이크업을 수정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자신들이 얘기하는 ‘반 대표님’이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의 치마 속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꽉 누르고 있었다. 넓은 치맛자락은 그를 가리기에 충분했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수다에 진심인 두 사람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성혜인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이때 갑자기 반승제의 입술이 느껴지더니 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몸을 떨면서 소리를 참았다. 얘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소파와 불과 10m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소리를 내면 들킬 것이 뻔했다.성혜인은 소리를 참다못해 눈가가 다 빨개졌다. 하지만 반승제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한 평생 느껴본 것 중에서 가장 긴 7분이 지나고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