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이 이혼 얘기를 꺼내지 못했던 건 반태승 때문이었다. 반태승은 이 세상에 얼마 없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잘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반태승은 언제나 그녀를 믿어줬고 SY그룹의 1차 융자도 많이 도와줬다.1차 융자 다음에는 2차 융자가 있었다. 솔직히 만약 성혜인이 이때 이혼을 했다면 너무 목적 있는 여자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3개월이라는 시간을 둔 것은 모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성휘도 지금 같아서는 3개월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성혜인은 보여주기식의 결혼과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SY그룹으로 그에게 보답을 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제 떠날 때 속이 편할 것이다.성혜인은 손을 들어 미간을 눌렀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성휘의 친딸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성휘는 죽기 전에 친딸과 만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난번 서천에 갔을 때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성혜인의 능력으로 3개월 안에 24년 전의 일을 조사해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장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직접 입찰에 참가하겠다고 말하기 위한 전화였다....이튿날 아침.오늘 무조건 윤단미와 마주치게 될 것이기에 성혜인은 모자, 마스크, 선글라스는 물론이고 옷까지 잔뜩 껴입었다. 원래의 몸매를 가리기 위해서 말이다. 널찍한 외투는 아무도 그녀가 손을 다쳤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전부 가려버렸다.경매장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보였다. 이번 입찰 건은 기껏해야 몇천억 원짜리였기 때문에 원래 같으면 기자들의 시선을 끌 수 없었다. 오직 대기업이 참가해야만 기사로 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장하리와 함께 입장했다. 그리고 곧바로 장내에 앉아 있는 윤단미를 발견했다. 윤단미의 주변에는 세한그룹의 임원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번 입찰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반대로 SY그룹을 대표하는 성혜인은 장하리만 데리고 왔다. 임원진이 아직 완전히 결
반승제의 기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눈빛 또한 칼날같이 예리해졌다.윤단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 그리고 반승제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쯧쯧”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두 사람 부부 아니에요? 설마 지금껏 여보 소리 하나 못 들어본 건 아니죠?”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자를 더욱 아래로 누를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윤단미는 당연히 슬픈 표정일 것으로 여기고 말했다.“참, 그거 알아요? 저 임신했어요.”성혜인의 눈초리는 파르르 떨렸다. 곁에 있던 장하리는 놀란 듯 머리를 들어 윤단미의 배를 바라봤다. 그러자 윤단미는 자신만만하게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두 사람은 결혼하고 나서도 데이트 한번 한 적 없죠? 임신은 뭐 꿈도 못 꾸겠네요. 승제가 저한테 그러던데 당신만 보면 구역질이 난대요. 하루하루 이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까요?”윤단미의 말을 들은 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윤단미는 곧바로 정색하면서 물었다.“왜 웃어요?”‘설마 내 말을 안 믿는 거야?’윤단미는 어쩐지 비웃음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마침 폭언을 퍼부으려고 할 때 경매가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이때 성혜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한테서 들었어요. 지금껏 단 한 명의 여자만 만난 적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윤단미 씨였던가요? 만약 아니라면 배 속의 아이는 누구의 것일까요?”“이 미친...”윤단미는 욕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었기에 여기서 흥분하는 건 그녀의 명성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심호흡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당신 남편이 어떻게 저를 돕는지나 보고 있어요.”윤단미가 멀어진 다음 성혜인은 곁에 있던 장하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개자식...”언젠가 자신도 한 적 있는 말인 것 같았기 때문에 성혜인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장 비서는 남자친구 있어요?”“네, 7년째 만나고 있어
한편, 안에서는 윤단미의 보디가드가 그녀에게 귓속말을 전했다.“어제 부탁하신 페니 씨에 관한 자료, 사실 어젯밤 이미 다 알아봤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라 저희 쪽 사람들에게 다시 조사해달라 했는데 여전히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윤단미는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결과요?”보디가드는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페니 씨 진짜 이름이 성혜인입니다. 반 대표님 서류상의 그 아내 말입니다.”윤단미는 마치 벼락에 맞은 듯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했다.“그럴 리가요!”그녀의 소리가 너무 날카로워 순간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그러자 윤단미는 서둘러 목소리를 낮췄다. 얼굴을 창백해진 채로 말이다.“그럴 리가요, 같은 사람일 리 없어요. 다시 한번 조사해와요!”‘성혜인 그 여자는 뚱뚱하고 못생겼는데, 심지어 승제 본인조차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승제가 지금 페니한테 흔들리고 있고, 만약 성혜인이 진짜 페니라면, 승제가 지금 자기 아내를 좋아하는 거잖아?!’온몸은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마음도 시리기 그지없었다.“이미 저희 쪽 사람이 두 번이나 조사해봤습니다. 정말 아주 자세하게 모두 조사했는데 확실하다고 나왔어요. 저도 정말 믿기지 않지만, 결과가 이렇습니다.”보디가드는 곧바로 윤단미에게 자료를 건네 보였다.윤단미는 손가락마저 떨려 심지어 구토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성혜인의 자료에는 영어 이름 페니, 제원대학교의 학생, 주영훈의 제자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눈앞이 새까매진 윤단미는 하염없이 입으로 중얼거렸다.“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손에 있던 자료들을 전부 찢어버렸다.“아아아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윤단미는 미친 듯이 앞에 있는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RI그룹의 임원이 와 서둘러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말렸다.“윤단미 씨, 주변에 아직 기자들도 있습니다.”안색이 곧 어두워지더니, 윤단미는 보디가드의 보호 아래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로즈가든에서 반승제를 기다릴 때, 성혜인은 바깥의 풍경을 보며 멍을 때렸다.초인종이 울리자 그녀는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이미 샤워를 마친 그녀는 반승제의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있는걸 발견했다. 그도 금방 샤워를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지난번 곧 떠난다는 서민규의 말을 반승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장소를 로즈가든으로 정했다.다른 뜻은 없었고, 반승제는 그저 이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시트는 바꿨어?”그는 성혜인의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나는 다른 사람이 잔 데서는 안 자.”“바꿨어요.”“소독은 했어?”성혜인은 그가 참 까탈스럽다고 생각했다.“네.”반승제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그녀를 안았다.공주님 안기가 아니라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두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하는 자세로 말이다.조금 전의 수많은 질문 때문에 성혜인은 그가 당연히 침실로 향하는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반승제는 그녀를 안고 부엌으로 향했다.부엌에는 네모반듯한 식탁이 있었는데 평소 그 위는 주로 반찬들을 놓은 곳이었다.그곳에 누운 성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불 꺼요.”다른 곳이면 몰라도 성혜인에게 부엌은 매우 부끄러운 곳이었다. 비록 그녀는 이곳에서 전등을 사용한 적이 몇 번밖에 없긴 했지만, 부엌의 전등 빛은 매우 밝았다.저녁이라 바깥이 어둑어둑해지는 반면 부엌이 너무 환하면, 밖에서도 다 비치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반승제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귀를 깨물며 물었다.“스위치는 어디 있어?”성혜인은 숨을 한번 몰아쉬며 대답했다.“문 앞에요.”그러자 그는 몸을 돌려 곧장 문 앞으로 걸어가 불을 껐다.그때, 성혜인이 또 한마디 덧붙였다.“거실 불도 꺼요.”어차피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진 게 아니라, 불을 꺼도 볼 수는 있었다.그래서 반승제는 그녀의 말에 따라 거실의 불도 껐다.불이 꺼지는 순간, 성혜인은 부끄러운 감정이 많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제야 그녀는 한숨을 돌렸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값
성혜인은 힘이 빠진 나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그녀는 그가 정장 바지만 입은 채 손에 셔츠를 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셔츠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의 등에는 온통 그녀의 손자국들로 가득했다.바깥은 어느새 날이 밝아지는 중이었다. 반승제는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더니 뭐라 한마디 건넸다.회의하러 간다는 것인지 무엇인지 사실 그녀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성혜인은 그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다시 들어올 때 말끔한 차림을 하고 온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심인우가 그에게 보내준 모양이었다.반승제가 집 아래에 차를 타러 갔을 때 심인우는 이미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간을 꿈틀거리며 심인우에게 지시를 내렸다.“여성용 하이힐 몇 켤레 골라줘요. 230mm 사이즈 정도로요.”심인우는 한 번도 이런 물건을 골라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여자친구도 없었으니 말이다.또 하이힐은 커튼 힐, 콘 힐, 스트랩 힐 등등 종류도 아주 다양했다.차를 몰아 BH그룹으로 향하고,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그는 사진 몇 장을 골라 반승제에게 물었다.“대표님, 대충 어떤 스타일을 원하십니까?”그제야 반승제는 하이힐에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왜냐하면 그도 여태껏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어젯밤 그녀가 신은 하이힐이 자신에게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준 일이 생각나자, 반승제는 망설임 없이 앞이 뾰족한 스트랩 힐을 골랐다.“이런 거로 해요.”심인우는 그를 묵묵히 쳐다보며 대표님이 어딘가 답답한 면이 있다고 느꼈다.그러다 가볍게 기침을 하며 물었다.“몇 켤레 준비할까요?”“일단 두 켤레요. 이런 은색 힐로 준비해줘요. 끈은 되도록 부드러운 게 좋아요. 힐 바닥도 단단해야 하고 색은 꼭 밝아야 해요. 블랙은 이런 거로 부탁해요, 깔끔하고 정교한 게 피부가 더 하얗게 돋보일 수 있겠어요.”듣고 있던 심인우는 얼굴이 다 빨개졌다.‘참 많이도 알고 계시네.’심인우는 물론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애써 감추려는
현재 반태승도 그가 또 한 여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하룻밤 동안 무릎을 꿇려 벌하는 거로 마무리했다.처음 반승제가 바람피운 걸 알았을 때는 집안의 법대로 엄중히 벌했기에, 무릎을 꿇리는 건 그와 비길 바 없이 가벼운 벌이었다.그 말인 반태승의 경계가 아주 느슨해졌다는 것을 설명한다. 단지 결정적 계기 하나가 부족할 뿐. 반승제는 그 계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윤씨 집안.윤단미는 밤새도록 미친 듯이 굴었다.사람은 극한으로 분노했을 때 거의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목이 쉬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엄서향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줄곧 초조하게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서 있었다.“단미야, 무슨 일 있는 거면 다 같이 상의하면 돼.”윤단미의 입술은 어느새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너무나도 굴욕적이었다. 이전에 당한 굴욕들을 모두 더해봐도, 성혜인이 페니라는걸 알았을 때 느낀 굴욕보다는 덜했다.자신이 늘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내내 성혜인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던 것이었다.밤새운 탓에 윤단미의 눈은 퉁퉁 부었다. 그녀는 그 진실만 떠오르면 몸이 부르르 떨려 참을 수가 없었다.엄서향은 집사에서 예비 열쇠를 갖고 오게 해 문을 열었다.“너 요 며칠 한 번도 할머님 찾아뵈러 가서 얘기 안 나눴어. 할머님은 너를 가장 지지하는 분이야. 절대 게을리해서는 안돼.”윤씨 집안 모든 사람은 그녀가 반씨 집안에 시집가기를 바라고 있다.윤단미는 눈이 시뻘게져서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더는 기회가 없어요.”‘영원히 기회는 없을 거야. 승제도 곧 알게 될 테니까.’엄서향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단미야, 침착해. 승제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든 너에게는 항상 기회가 있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목표를 이뤄내고 말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야. 그 반재인도 너를 계속 쫓아다닌다고 하지 않았니?”‘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
이런 분위기는 매우 매혹적이다.분명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 심장박동이 빨라진 것이었지만, 이건 반승제에 대한 설렘으로 오해되기 쉬웠다.성혜인은 눈을 꼭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자신이 조립한 총을 잡고 바로 마지막 차를 적중시켰다.고속도로에서 비틀거리던 차는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물었다.“사격술이 정확한데? 몇 년이나 배웠어?”성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일 년이요.”‘일 년 배운 게 이 정도라고?’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번 살펴보았다. 성혜인의 손은 부드럽고 하얀 게 아무런 굳은살도 박여있지 않았다.정말 그녀가 말한 것처럼 일 년밖에 배우지 않은 모양이었다.오랜 기간 총을 사용한 사람들은 손에 한 층의 얇은 굳은살이 박이기 마련이었으니까 말이다.반승제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뭐라 말하려는데, 앞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이윽고 차가 심하게 꺾여 불바다를 가로질렀다.“심 비서, 무슨 일이예요?”손이 식은땀으로 젖은 심인우는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대표님, 뒤에서만 저희를 쫓는 게 아니었어요. 앞에도 사람이 있습니다.”반승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탄 차 옆에는 어느새 다른 몇 대의 차가 가까이 와 있었다.그는 성혜인을 품에 꼭 안고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통화를 마치자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걱정하지마, 괜찮아.”성혜인은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누구를 노리고 왔을지 생각하고 있었다.반승제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분명히 많은 살해 협박을 당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녀 역시 방에 도둑이 든 이후로,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여자의 육감은 매우 정확하다.차가 또 한 번 심하게 덜컹거리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반승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반승제는 눈초리를 파르르 떨며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심인우는 반승제의 유일한 비서로서 각종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차량들의 추격에 그는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가시덤불에 긁혀 얼굴덜룩해진 그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미끄러져 내려오며 그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전부 반승제가 감당해냈다.성혜인은 재빨리 품에서 기어 나오며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대표님?”반승제는 잠깐 기절해 있었다. 두 사람이 부딪치며 생긴 충격을 고스란히 혼자 받아냈는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성혜인은 손이 다 떨려났지만, 또 뒤에 사람이 쫓아오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급히 그의 손을 잡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반승제가 너무 무거운 탓에 그녀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급한 마음에 눈물도 또르르 흘러내렸다.그때, 갑자기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울어?”성혜인이 급히 고개를 들자 그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울긴 왜 울어?”반승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성혜인은 그의 등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고, 누워있던 그 돌 위에도 피가 흥건한 걸 알아챌 수 있었다.마지막에 일어난 충돌이 다름 아닌 그 돌과 부딪친 것이었다.매서운 눈빛을 한 반승제는 마치 산 속의 늑대와도 같았다.“앞으로 가.”이번에 그들을 쫓아온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패의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상대방이 만반의 준비를 한듯싶었다.성혜인은 서둘러 그를 부축하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안 아파요?”그도 당연히 아팠다. 아파 죽을 만큼이나 말이다.그러나 남자에게는 체면이 있다. 특히나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 앞에서는 아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꽉 깨물고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성혜인은 반승제를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시에 심인우가 걱정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그녀는 평평하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에 그를 데려가 앉히고 등을 살펴보려고 했다.그러자 반승제가 성혜인의 손을 탁 하고 잡았다.“괜찮아, 살필 필요 없어.”“피 나요.”적어도 반승제가 정신을 차린 덕에 그녀는 마음이 많이 안정된 것 같았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