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가든에서 반승제를 기다릴 때, 성혜인은 바깥의 풍경을 보며 멍을 때렸다.초인종이 울리자 그녀는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이미 샤워를 마친 그녀는 반승제의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있는걸 발견했다. 그도 금방 샤워를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지난번 곧 떠난다는 서민규의 말을 반승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장소를 로즈가든으로 정했다.다른 뜻은 없었고, 반승제는 그저 이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시트는 바꿨어?”그는 성혜인의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나는 다른 사람이 잔 데서는 안 자.”“바꿨어요.”“소독은 했어?”성혜인은 그가 참 까탈스럽다고 생각했다.“네.”반승제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그녀를 안았다.공주님 안기가 아니라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두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하는 자세로 말이다.조금 전의 수많은 질문 때문에 성혜인은 그가 당연히 침실로 향하는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반승제는 그녀를 안고 부엌으로 향했다.부엌에는 네모반듯한 식탁이 있었는데 평소 그 위는 주로 반찬들을 놓은 곳이었다.그곳에 누운 성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불 꺼요.”다른 곳이면 몰라도 성혜인에게 부엌은 매우 부끄러운 곳이었다. 비록 그녀는 이곳에서 전등을 사용한 적이 몇 번밖에 없긴 했지만, 부엌의 전등 빛은 매우 밝았다.저녁이라 바깥이 어둑어둑해지는 반면 부엌이 너무 환하면, 밖에서도 다 비치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반승제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귀를 깨물며 물었다.“스위치는 어디 있어?”성혜인은 숨을 한번 몰아쉬며 대답했다.“문 앞에요.”그러자 그는 몸을 돌려 곧장 문 앞으로 걸어가 불을 껐다.그때, 성혜인이 또 한마디 덧붙였다.“거실 불도 꺼요.”어차피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진 게 아니라, 불을 꺼도 볼 수는 있었다.그래서 반승제는 그녀의 말에 따라 거실의 불도 껐다.불이 꺼지는 순간, 성혜인은 부끄러운 감정이 많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제야 그녀는 한숨을 돌렸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값
성혜인은 힘이 빠진 나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그녀는 그가 정장 바지만 입은 채 손에 셔츠를 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셔츠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의 등에는 온통 그녀의 손자국들로 가득했다.바깥은 어느새 날이 밝아지는 중이었다. 반승제는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더니 뭐라 한마디 건넸다.회의하러 간다는 것인지 무엇인지 사실 그녀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성혜인은 그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다시 들어올 때 말끔한 차림을 하고 온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심인우가 그에게 보내준 모양이었다.반승제가 집 아래에 차를 타러 갔을 때 심인우는 이미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간을 꿈틀거리며 심인우에게 지시를 내렸다.“여성용 하이힐 몇 켤레 골라줘요. 230mm 사이즈 정도로요.”심인우는 한 번도 이런 물건을 골라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여자친구도 없었으니 말이다.또 하이힐은 커튼 힐, 콘 힐, 스트랩 힐 등등 종류도 아주 다양했다.차를 몰아 BH그룹으로 향하고,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그는 사진 몇 장을 골라 반승제에게 물었다.“대표님, 대충 어떤 스타일을 원하십니까?”그제야 반승제는 하이힐에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왜냐하면 그도 여태껏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어젯밤 그녀가 신은 하이힐이 자신에게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준 일이 생각나자, 반승제는 망설임 없이 앞이 뾰족한 스트랩 힐을 골랐다.“이런 거로 해요.”심인우는 그를 묵묵히 쳐다보며 대표님이 어딘가 답답한 면이 있다고 느꼈다.그러다 가볍게 기침을 하며 물었다.“몇 켤레 준비할까요?”“일단 두 켤레요. 이런 은색 힐로 준비해줘요. 끈은 되도록 부드러운 게 좋아요. 힐 바닥도 단단해야 하고 색은 꼭 밝아야 해요. 블랙은 이런 거로 부탁해요, 깔끔하고 정교한 게 피부가 더 하얗게 돋보일 수 있겠어요.”듣고 있던 심인우는 얼굴이 다 빨개졌다.‘참 많이도 알고 계시네.’심인우는 물론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애써 감추려는
현재 반태승도 그가 또 한 여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하룻밤 동안 무릎을 꿇려 벌하는 거로 마무리했다.처음 반승제가 바람피운 걸 알았을 때는 집안의 법대로 엄중히 벌했기에, 무릎을 꿇리는 건 그와 비길 바 없이 가벼운 벌이었다.그 말인 반태승의 경계가 아주 느슨해졌다는 것을 설명한다. 단지 결정적 계기 하나가 부족할 뿐. 반승제는 그 계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윤씨 집안.윤단미는 밤새도록 미친 듯이 굴었다.사람은 극한으로 분노했을 때 거의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목이 쉬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엄서향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줄곧 초조하게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서 있었다.“단미야, 무슨 일 있는 거면 다 같이 상의하면 돼.”윤단미의 입술은 어느새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너무나도 굴욕적이었다. 이전에 당한 굴욕들을 모두 더해봐도, 성혜인이 페니라는걸 알았을 때 느낀 굴욕보다는 덜했다.자신이 늘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내내 성혜인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던 것이었다.밤새운 탓에 윤단미의 눈은 퉁퉁 부었다. 그녀는 그 진실만 떠오르면 몸이 부르르 떨려 참을 수가 없었다.엄서향은 집사에서 예비 열쇠를 갖고 오게 해 문을 열었다.“너 요 며칠 한 번도 할머님 찾아뵈러 가서 얘기 안 나눴어. 할머님은 너를 가장 지지하는 분이야. 절대 게을리해서는 안돼.”윤씨 집안 모든 사람은 그녀가 반씨 집안에 시집가기를 바라고 있다.윤단미는 눈이 시뻘게져서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더는 기회가 없어요.”‘영원히 기회는 없을 거야. 승제도 곧 알게 될 테니까.’엄서향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단미야, 침착해. 승제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든 너에게는 항상 기회가 있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목표를 이뤄내고 말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야. 그 반재인도 너를 계속 쫓아다닌다고 하지 않았니?”‘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
이런 분위기는 매우 매혹적이다.분명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 심장박동이 빨라진 것이었지만, 이건 반승제에 대한 설렘으로 오해되기 쉬웠다.성혜인은 눈을 꼭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자신이 조립한 총을 잡고 바로 마지막 차를 적중시켰다.고속도로에서 비틀거리던 차는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물었다.“사격술이 정확한데? 몇 년이나 배웠어?”성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일 년이요.”‘일 년 배운 게 이 정도라고?’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번 살펴보았다. 성혜인의 손은 부드럽고 하얀 게 아무런 굳은살도 박여있지 않았다.정말 그녀가 말한 것처럼 일 년밖에 배우지 않은 모양이었다.오랜 기간 총을 사용한 사람들은 손에 한 층의 얇은 굳은살이 박이기 마련이었으니까 말이다.반승제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뭐라 말하려는데, 앞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이윽고 차가 심하게 꺾여 불바다를 가로질렀다.“심 비서, 무슨 일이예요?”손이 식은땀으로 젖은 심인우는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대표님, 뒤에서만 저희를 쫓는 게 아니었어요. 앞에도 사람이 있습니다.”반승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탄 차 옆에는 어느새 다른 몇 대의 차가 가까이 와 있었다.그는 성혜인을 품에 꼭 안고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통화를 마치자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걱정하지마, 괜찮아.”성혜인은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누구를 노리고 왔을지 생각하고 있었다.반승제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분명히 많은 살해 협박을 당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녀 역시 방에 도둑이 든 이후로,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여자의 육감은 매우 정확하다.차가 또 한 번 심하게 덜컹거리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반승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반승제는 눈초리를 파르르 떨며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심인우는 반승제의 유일한 비서로서 각종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차량들의 추격에 그는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가시덤불에 긁혀 얼굴덜룩해진 그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미끄러져 내려오며 그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전부 반승제가 감당해냈다.성혜인은 재빨리 품에서 기어 나오며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대표님?”반승제는 잠깐 기절해 있었다. 두 사람이 부딪치며 생긴 충격을 고스란히 혼자 받아냈는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성혜인은 손이 다 떨려났지만, 또 뒤에 사람이 쫓아오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급히 그의 손을 잡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반승제가 너무 무거운 탓에 그녀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급한 마음에 눈물도 또르르 흘러내렸다.그때, 갑자기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울어?”성혜인이 급히 고개를 들자 그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울긴 왜 울어?”반승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성혜인은 그의 등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고, 누워있던 그 돌 위에도 피가 흥건한 걸 알아챌 수 있었다.마지막에 일어난 충돌이 다름 아닌 그 돌과 부딪친 것이었다.매서운 눈빛을 한 반승제는 마치 산 속의 늑대와도 같았다.“앞으로 가.”이번에 그들을 쫓아온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패의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상대방이 만반의 준비를 한듯싶었다.성혜인은 서둘러 그를 부축하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안 아파요?”그도 당연히 아팠다. 아파 죽을 만큼이나 말이다.그러나 남자에게는 체면이 있다. 특히나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 앞에서는 아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꽉 깨물고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성혜인은 반승제를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시에 심인우가 걱정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그녀는 평평하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에 그를 데려가 앉히고 등을 살펴보려고 했다.그러자 반승제가 성혜인의 손을 탁 하고 잡았다.“괜찮아, 살필 필요 없어.”“피 나요.”적어도 반승제가 정신을 차린 덕에 그녀는 마음이 많이 안정된 것 같았
성혜인은 흠칫 놀라 굳어버렸고 그는 손을 거뒀다. 다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는데 이런 날씨에 산은 보통 심한 안개가 낀다.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찾는 데에는 아마도 조금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성혜인은 불에 마른 장작을 더 넣었다. ‘이 근처에 마을이 있다고 해도 먼데 있는 곳이겠지? 아니면 주민들이 이곳에 와 일을 하며 마른 장작을 갖춰둘 필요는 없을 테니까.’그녀는 반승제의 이마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아직도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성혜인은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이미 마른 외투를 말아 그의 머리 아래에 대고 벽에 기대게 했다.그러고는 이미 마른 그의 셔츠를 벗겨냈다. 셔츠의 뒤는 이미 피범벅이 되어있었고 퉁퉁 부은 등에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성혜인은 감히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약재도 없고 물 안에는 세균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의 셔츠를 벗겨내 찢어 상처를 감았다.그녀는 또 그의 입술을 축이기 위해 절벽에 가서 샘물을 떠 왔다.반승제의 곁에 돌아오자 그는 인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듯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성혜인은 타닥거리는 불꽃을 보며 다리를 오므려 그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했다.마치 지난번 서천에 단둘이 남았을 때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때 밖에는 모래바람이, 지금은 큰비가.다른 점이라면, 현재 그는 정신을 잃고 강인한 반승제의 모습이 아니라 나약한 반승제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성혜인은 불에 장작을 더 넣었고, 그렇게 어느새 몇 시간 동안이나 이곳에 머무르게 됐다.바깥의 안개는 더욱 짙게 내려앉았고 이런 날씨라면 헬리콥터도 뜰 수 없었다.성혜인은 불씨가 꺼지지 않게 주의하며 그의 머리 아래에 작은 베개를 받쳐 똑바로 눕혔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됐는지,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성혜인은 옆에서 사람을 무는 동물이라도 나타날까 봐 무서워 감히 잠이 들지도 못했다.몸을 일으켜 불을 피우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가, 반승제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을 때, 제원 전체가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반씨 집안에서는 모든 사람을 총동원해 그를 찾아 나섰고, 서씨 집안의 서주혁도 자진으로 나섰다.그러나 밤새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수색에는 이렇다 할만한 진전이 없었다.김경자와 백연서는 윤단미에게서 반승제가 이번에 성혜인 때문에, 옆 도시의 경매회에 참가하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두 사람은 결코 참을 수 없어 곧바로 포레스트로 와 난리를 쳤다.“빌어먹을 년! 얼른 나오지 못해?!”성혜인의 침실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밖에서 백연서는 강하게 문을 두드렸다.“승제를 살려내지 못하게 된다면, 너도 똑같이 땅에 묻혀야 할 거야! 너희 성씨 집안 모두가 땅에 묻혀야 해!”이미 아들 한 명을 잃은 백연서는 다시는 반승제를 잃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라 울며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렸다.안 그래도 머리가 아팠던 성혜인은 그의 모욕적인 말에 관자놀이가 다 터질 것 같았다.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틀어막고 이불을 푹 덮어썼다.백연서는 한참 동안 욕을 해대더니 붉으락푸르락하며 거실로 돌아와 곁에 있는 보디가드에게 물었다.“성씨 집안 사람들에 대한 모든 자료 샅샅이 조사해왔어요?”보디가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혜인의 아버지, 어머니, 심지어 외삼촌과 외숙모의 자료까지 전부 건네줬다.임지연의 얼굴을 본 백연서는 눈동자가 움츠러들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이건 누구야?! 이건 누구야?!”놀란 보디가드는 서둘러 대답했다.“이분은 성휘 씨의 전처, 성혜인 씨의 생모, 임지연 씨입니다.”백연서는 찰나의 순간, 머리에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라 움츠러들었다.‘임지연, 임지연!’그녀는 온몸을 떨며 망설임 없이 반기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반기훈은 백연서의 남편이자 반승제의 아버지였다.“여보! 지금 당장 이리로 와서 나한테 똑똑히 설명해요! 그때 성혜인이랑 승제 결혼 막지 않은 게 설마 걔가 그 빌어먹을 년 딸이라는 거 알고 그런 거예요? 와
이 여자는 그렇게 백연서의 기억 속에서 자그마치 30년 동안 살았다. 때문에 성혜인이 임지연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한편, 핸드폰 너머 반기훈은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보다시피 그는 진작 알고 있었다.백연서는 울면서 욕을 하다가, 결국 강인하게 눈물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너무해요, 너무해! 당신 딱 기다리고 있어요!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굴 거면, 당신도 편하게 지낼 생각 하지 말아요!”말을 끝마치고 백연서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친정집으로 향했다.김경자는 멀쩡하던 집안이 성혜인의 존재로 엉망이 되어버린 걸 보고 갑자기 탄식하기 시작했다.“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저게 바로 골칫거리야, 저 빌어먹을 년을 빨리 우리 집안에서 내쫓아야 해.”두 사람은 포레스트에서 몇 시간을 난리 치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를 떴다.그 시각 병원, 반태승은 반승제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왔다.반승제는 아직 수술실 안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있었다. 등이 계속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누구도 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지 못했다.반태승은 한번 기침을 하자 순간적으로 몇 살은 더 늙어진 것 같았다.서주혁은 자칫 반태승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며 그를 위로했다.“할아버지, 승제 괜찮을 겁니다. 먼저 돌아가서 쉬세요.”반태승은 이전 반승우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역시 이렇게 어찌할 바를 몰라 넋이 나가 있었다.그는 그런 쓰라린 고통을 다시 한번 겪고 싶지 않았다.세 시간이 흐르자, 수술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반승제가 실려 나왔다.반태승은 부축을 받으며 걸어갔다.“어떠니?”그러자 진세운이 마스크를 벗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등에 부상이 꽤 심해서 아마 며칠 내내 열이 날 것 같아요. 뇌진탕 후유증도 조금 더 관찰해봐야 합니다. 일단 지금은 중환자실에 가서 언제 열이 내리지는 지켜봐야 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분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