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의 기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눈빛 또한 칼날같이 예리해졌다.윤단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 그리고 반승제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쯧쯧”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두 사람 부부 아니에요? 설마 지금껏 여보 소리 하나 못 들어본 건 아니죠?”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자를 더욱 아래로 누를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윤단미는 당연히 슬픈 표정일 것으로 여기고 말했다.“참, 그거 알아요? 저 임신했어요.”성혜인의 눈초리는 파르르 떨렸다. 곁에 있던 장하리는 놀란 듯 머리를 들어 윤단미의 배를 바라봤다. 그러자 윤단미는 자신만만하게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두 사람은 결혼하고 나서도 데이트 한번 한 적 없죠? 임신은 뭐 꿈도 못 꾸겠네요. 승제가 저한테 그러던데 당신만 보면 구역질이 난대요. 하루하루 이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까요?”윤단미의 말을 들은 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윤단미는 곧바로 정색하면서 물었다.“왜 웃어요?”‘설마 내 말을 안 믿는 거야?’윤단미는 어쩐지 비웃음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마침 폭언을 퍼부으려고 할 때 경매가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이때 성혜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한테서 들었어요. 지금껏 단 한 명의 여자만 만난 적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윤단미 씨였던가요? 만약 아니라면 배 속의 아이는 누구의 것일까요?”“이 미친...”윤단미는 욕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었기에 여기서 흥분하는 건 그녀의 명성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심호흡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당신 남편이 어떻게 저를 돕는지나 보고 있어요.”윤단미가 멀어진 다음 성혜인은 곁에 있던 장하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개자식...”언젠가 자신도 한 적 있는 말인 것 같았기 때문에 성혜인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장 비서는 남자친구 있어요?”“네, 7년째 만나고 있어
한편, 안에서는 윤단미의 보디가드가 그녀에게 귓속말을 전했다.“어제 부탁하신 페니 씨에 관한 자료, 사실 어젯밤 이미 다 알아봤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라 저희 쪽 사람들에게 다시 조사해달라 했는데 여전히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윤단미는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결과요?”보디가드는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페니 씨 진짜 이름이 성혜인입니다. 반 대표님 서류상의 그 아내 말입니다.”윤단미는 마치 벼락에 맞은 듯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했다.“그럴 리가요!”그녀의 소리가 너무 날카로워 순간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그러자 윤단미는 서둘러 목소리를 낮췄다. 얼굴을 창백해진 채로 말이다.“그럴 리가요, 같은 사람일 리 없어요. 다시 한번 조사해와요!”‘성혜인 그 여자는 뚱뚱하고 못생겼는데, 심지어 승제 본인조차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승제가 지금 페니한테 흔들리고 있고, 만약 성혜인이 진짜 페니라면, 승제가 지금 자기 아내를 좋아하는 거잖아?!’온몸은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마음도 시리기 그지없었다.“이미 저희 쪽 사람이 두 번이나 조사해봤습니다. 정말 아주 자세하게 모두 조사했는데 확실하다고 나왔어요. 저도 정말 믿기지 않지만, 결과가 이렇습니다.”보디가드는 곧바로 윤단미에게 자료를 건네 보였다.윤단미는 손가락마저 떨려 심지어 구토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성혜인의 자료에는 영어 이름 페니, 제원대학교의 학생, 주영훈의 제자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눈앞이 새까매진 윤단미는 하염없이 입으로 중얼거렸다.“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손에 있던 자료들을 전부 찢어버렸다.“아아아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윤단미는 미친 듯이 앞에 있는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RI그룹의 임원이 와 서둘러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말렸다.“윤단미 씨, 주변에 아직 기자들도 있습니다.”안색이 곧 어두워지더니, 윤단미는 보디가드의 보호 아래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로즈가든에서 반승제를 기다릴 때, 성혜인은 바깥의 풍경을 보며 멍을 때렸다.초인종이 울리자 그녀는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이미 샤워를 마친 그녀는 반승제의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있는걸 발견했다. 그도 금방 샤워를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지난번 곧 떠난다는 서민규의 말을 반승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장소를 로즈가든으로 정했다.다른 뜻은 없었고, 반승제는 그저 이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시트는 바꿨어?”그는 성혜인의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나는 다른 사람이 잔 데서는 안 자.”“바꿨어요.”“소독은 했어?”성혜인은 그가 참 까탈스럽다고 생각했다.“네.”반승제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그녀를 안았다.공주님 안기가 아니라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두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하는 자세로 말이다.조금 전의 수많은 질문 때문에 성혜인은 그가 당연히 침실로 향하는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반승제는 그녀를 안고 부엌으로 향했다.부엌에는 네모반듯한 식탁이 있었는데 평소 그 위는 주로 반찬들을 놓은 곳이었다.그곳에 누운 성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불 꺼요.”다른 곳이면 몰라도 성혜인에게 부엌은 매우 부끄러운 곳이었다. 비록 그녀는 이곳에서 전등을 사용한 적이 몇 번밖에 없긴 했지만, 부엌의 전등 빛은 매우 밝았다.저녁이라 바깥이 어둑어둑해지는 반면 부엌이 너무 환하면, 밖에서도 다 비치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반승제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귀를 깨물며 물었다.“스위치는 어디 있어?”성혜인은 숨을 한번 몰아쉬며 대답했다.“문 앞에요.”그러자 그는 몸을 돌려 곧장 문 앞으로 걸어가 불을 껐다.그때, 성혜인이 또 한마디 덧붙였다.“거실 불도 꺼요.”어차피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진 게 아니라, 불을 꺼도 볼 수는 있었다.그래서 반승제는 그녀의 말에 따라 거실의 불도 껐다.불이 꺼지는 순간, 성혜인은 부끄러운 감정이 많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제야 그녀는 한숨을 돌렸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값
성혜인은 힘이 빠진 나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그녀는 그가 정장 바지만 입은 채 손에 셔츠를 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셔츠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의 등에는 온통 그녀의 손자국들로 가득했다.바깥은 어느새 날이 밝아지는 중이었다. 반승제는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더니 뭐라 한마디 건넸다.회의하러 간다는 것인지 무엇인지 사실 그녀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성혜인은 그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다시 들어올 때 말끔한 차림을 하고 온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심인우가 그에게 보내준 모양이었다.반승제가 집 아래에 차를 타러 갔을 때 심인우는 이미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간을 꿈틀거리며 심인우에게 지시를 내렸다.“여성용 하이힐 몇 켤레 골라줘요. 230mm 사이즈 정도로요.”심인우는 한 번도 이런 물건을 골라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여자친구도 없었으니 말이다.또 하이힐은 커튼 힐, 콘 힐, 스트랩 힐 등등 종류도 아주 다양했다.차를 몰아 BH그룹으로 향하고,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그는 사진 몇 장을 골라 반승제에게 물었다.“대표님, 대충 어떤 스타일을 원하십니까?”그제야 반승제는 하이힐에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왜냐하면 그도 여태껏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어젯밤 그녀가 신은 하이힐이 자신에게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준 일이 생각나자, 반승제는 망설임 없이 앞이 뾰족한 스트랩 힐을 골랐다.“이런 거로 해요.”심인우는 그를 묵묵히 쳐다보며 대표님이 어딘가 답답한 면이 있다고 느꼈다.그러다 가볍게 기침을 하며 물었다.“몇 켤레 준비할까요?”“일단 두 켤레요. 이런 은색 힐로 준비해줘요. 끈은 되도록 부드러운 게 좋아요. 힐 바닥도 단단해야 하고 색은 꼭 밝아야 해요. 블랙은 이런 거로 부탁해요, 깔끔하고 정교한 게 피부가 더 하얗게 돋보일 수 있겠어요.”듣고 있던 심인우는 얼굴이 다 빨개졌다.‘참 많이도 알고 계시네.’심인우는 물론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애써 감추려는
현재 반태승도 그가 또 한 여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하룻밤 동안 무릎을 꿇려 벌하는 거로 마무리했다.처음 반승제가 바람피운 걸 알았을 때는 집안의 법대로 엄중히 벌했기에, 무릎을 꿇리는 건 그와 비길 바 없이 가벼운 벌이었다.그 말인 반태승의 경계가 아주 느슨해졌다는 것을 설명한다. 단지 결정적 계기 하나가 부족할 뿐. 반승제는 그 계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윤씨 집안.윤단미는 밤새도록 미친 듯이 굴었다.사람은 극한으로 분노했을 때 거의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목이 쉬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엄서향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줄곧 초조하게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서 있었다.“단미야, 무슨 일 있는 거면 다 같이 상의하면 돼.”윤단미의 입술은 어느새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너무나도 굴욕적이었다. 이전에 당한 굴욕들을 모두 더해봐도, 성혜인이 페니라는걸 알았을 때 느낀 굴욕보다는 덜했다.자신이 늘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내내 성혜인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던 것이었다.밤새운 탓에 윤단미의 눈은 퉁퉁 부었다. 그녀는 그 진실만 떠오르면 몸이 부르르 떨려 참을 수가 없었다.엄서향은 집사에서 예비 열쇠를 갖고 오게 해 문을 열었다.“너 요 며칠 한 번도 할머님 찾아뵈러 가서 얘기 안 나눴어. 할머님은 너를 가장 지지하는 분이야. 절대 게을리해서는 안돼.”윤씨 집안 모든 사람은 그녀가 반씨 집안에 시집가기를 바라고 있다.윤단미는 눈이 시뻘게져서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더는 기회가 없어요.”‘영원히 기회는 없을 거야. 승제도 곧 알게 될 테니까.’엄서향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단미야, 침착해. 승제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든 너에게는 항상 기회가 있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목표를 이뤄내고 말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야. 그 반재인도 너를 계속 쫓아다닌다고 하지 않았니?”‘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
이런 분위기는 매우 매혹적이다.분명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 심장박동이 빨라진 것이었지만, 이건 반승제에 대한 설렘으로 오해되기 쉬웠다.성혜인은 눈을 꼭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자신이 조립한 총을 잡고 바로 마지막 차를 적중시켰다.고속도로에서 비틀거리던 차는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물었다.“사격술이 정확한데? 몇 년이나 배웠어?”성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일 년이요.”‘일 년 배운 게 이 정도라고?’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번 살펴보았다. 성혜인의 손은 부드럽고 하얀 게 아무런 굳은살도 박여있지 않았다.정말 그녀가 말한 것처럼 일 년밖에 배우지 않은 모양이었다.오랜 기간 총을 사용한 사람들은 손에 한 층의 얇은 굳은살이 박이기 마련이었으니까 말이다.반승제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뭐라 말하려는데, 앞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이윽고 차가 심하게 꺾여 불바다를 가로질렀다.“심 비서, 무슨 일이예요?”손이 식은땀으로 젖은 심인우는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대표님, 뒤에서만 저희를 쫓는 게 아니었어요. 앞에도 사람이 있습니다.”반승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탄 차 옆에는 어느새 다른 몇 대의 차가 가까이 와 있었다.그는 성혜인을 품에 꼭 안고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통화를 마치자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걱정하지마, 괜찮아.”성혜인은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누구를 노리고 왔을지 생각하고 있었다.반승제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분명히 많은 살해 협박을 당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녀 역시 방에 도둑이 든 이후로,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여자의 육감은 매우 정확하다.차가 또 한 번 심하게 덜컹거리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반승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반승제는 눈초리를 파르르 떨며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심인우는 반승제의 유일한 비서로서 각종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차량들의 추격에 그는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가시덤불에 긁혀 얼굴덜룩해진 그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미끄러져 내려오며 그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전부 반승제가 감당해냈다.성혜인은 재빨리 품에서 기어 나오며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대표님?”반승제는 잠깐 기절해 있었다. 두 사람이 부딪치며 생긴 충격을 고스란히 혼자 받아냈는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성혜인은 손이 다 떨려났지만, 또 뒤에 사람이 쫓아오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급히 그의 손을 잡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반승제가 너무 무거운 탓에 그녀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급한 마음에 눈물도 또르르 흘러내렸다.그때, 갑자기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울어?”성혜인이 급히 고개를 들자 그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울긴 왜 울어?”반승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성혜인은 그의 등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고, 누워있던 그 돌 위에도 피가 흥건한 걸 알아챌 수 있었다.마지막에 일어난 충돌이 다름 아닌 그 돌과 부딪친 것이었다.매서운 눈빛을 한 반승제는 마치 산 속의 늑대와도 같았다.“앞으로 가.”이번에 그들을 쫓아온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패의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상대방이 만반의 준비를 한듯싶었다.성혜인은 서둘러 그를 부축하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안 아파요?”그도 당연히 아팠다. 아파 죽을 만큼이나 말이다.그러나 남자에게는 체면이 있다. 특히나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 앞에서는 아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꽉 깨물고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성혜인은 반승제를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시에 심인우가 걱정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그녀는 평평하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에 그를 데려가 앉히고 등을 살펴보려고 했다.그러자 반승제가 성혜인의 손을 탁 하고 잡았다.“괜찮아, 살필 필요 없어.”“피 나요.”적어도 반승제가 정신을 차린 덕에 그녀는 마음이 많이 안정된 것 같았
성혜인은 흠칫 놀라 굳어버렸고 그는 손을 거뒀다. 다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는데 이런 날씨에 산은 보통 심한 안개가 낀다.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찾는 데에는 아마도 조금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성혜인은 불에 마른 장작을 더 넣었다. ‘이 근처에 마을이 있다고 해도 먼데 있는 곳이겠지? 아니면 주민들이 이곳에 와 일을 하며 마른 장작을 갖춰둘 필요는 없을 테니까.’그녀는 반승제의 이마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아직도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성혜인은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이미 마른 외투를 말아 그의 머리 아래에 대고 벽에 기대게 했다.그러고는 이미 마른 그의 셔츠를 벗겨냈다. 셔츠의 뒤는 이미 피범벅이 되어있었고 퉁퉁 부은 등에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성혜인은 감히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약재도 없고 물 안에는 세균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의 셔츠를 벗겨내 찢어 상처를 감았다.그녀는 또 그의 입술을 축이기 위해 절벽에 가서 샘물을 떠 왔다.반승제의 곁에 돌아오자 그는 인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듯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성혜인은 타닥거리는 불꽃을 보며 다리를 오므려 그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했다.마치 지난번 서천에 단둘이 남았을 때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때 밖에는 모래바람이, 지금은 큰비가.다른 점이라면, 현재 그는 정신을 잃고 강인한 반승제의 모습이 아니라 나약한 반승제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성혜인은 불에 장작을 더 넣었고, 그렇게 어느새 몇 시간 동안이나 이곳에 머무르게 됐다.바깥의 안개는 더욱 짙게 내려앉았고 이런 날씨라면 헬리콥터도 뜰 수 없었다.성혜인은 불씨가 꺼지지 않게 주의하며 그의 머리 아래에 작은 베개를 받쳐 똑바로 눕혔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됐는지,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성혜인은 옆에서 사람을 무는 동물이라도 나타날까 봐 무서워 감히 잠이 들지도 못했다.몸을 일으켜 불을 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