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반태승의 상태가 정말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그의 곁에 가 어깨와 목을 마사지 해주었다.“할아버지, 제가 인터넷에서 마사지하는 법을 배웠거든요? 한번 그대로 해드릴게요, 뼈와 근육이 한껏 풀리는 기분이 드실 거예요.”반태승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성혜인의 이런 점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을 하든지 늘 대범하고 어떠한 다른 목적을 품지 않았다.반태승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래, 혜인아. 승제가 언젠가 너만큼 철이 들게 된다면 참 만족스러울 텐데 말이야.”반승제는 쭉 반태승의 곁에서 자라온지라, 그는 반승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열 몇 살 때 이미 큰 공을 세울 뻔했던 아이라 반승제는 심기가 드높고 독했다.성혜인은 반태승의 뒤에 서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또 가볍게 마사지를 시작했다.그때, 반태승이 한숨을 내쉬었다.“승제는 성격이 모났어. 말하기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단 자기가 심하게 압박을 받으면 무슨 일이든 해내고야 말지.”성혜인은 순간 손을 멈칫했다. 그녀는 그가 말하는 “무슨 일이든지 해내고야 말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반태승은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을 자상하게 쓰다듬었다.“다음에 또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거든, 잊지 말고 저번처럼 꼭 나에게 말하렴. 그 자식이 마음이 독해서 너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는지 모르겠구나.”“아니에요.”성혜인은 이곳에서 반태승과 두 시간 가까이 함께 있어 줬다. 금방 차를 타고 떠나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는 한눈에 택시에 앉아있는 강민지를 발견했다.강민지의 곁에는 신예준이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성혜인이 경적을 두 번 울리자 강민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성혜인을 발견하자 기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그녀는 앞을 가리키며 택시를 세웠다.두 대의 자동차는 전부 앞에 멈춰 섰고 강민지는 택시에서 내렸다.“혜인아.”성혜인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신예준을 한번 힐끗 바라보고는 물었다.“너 손은 왜 그래?”강민
차를 몰고 포레스트로 돌아간 그녀는 일주일 동안 이곳에서 휴식하기로 마음 먹었다.SY그룹에는 장하리가 있어 조금이라도 문제점이 보이면 그녀에게 바로 보고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온시환의 드라마에 투자하려면 아직 더 시간이 걸려야 하므로 그녀는 잠시 먼저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스카이웨어.온시환은 진세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가십을 늘어놓았다.“승제가 오늘밤은 안 온대.”진세운은 조금 의아했다. 분명 귀국 한 달 전에 미리 사람들에게 통지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일이 있다 해도 모두 내려놓고 와야 하는 게 맞았다.“왜?”온시환은 순간 흥미진진해져서는 말을 이어갔다.“너는 아마 해외에 있어서 몰랐을 거야. 최근 승제가 유부녀를 눈에 들여가지고, 넘버투 행세를 하고 있지 뭐냐. 근데 그 여자는 이혼할 생각이 없나 봐.”진세운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러고는 온시환을 아래 우로 훑어보았다.모두가 알다시피 온시환은 극작가였다. 그 때문에 그가 가장 잘하는 건 말에 MSG를 치는 것이었다.“반승제? 우리가 몇 년 동안 친구로 지낸 반승제?”조금 전 온시환이 폭로한 일은 그와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반승제와 전혀 매치되지 않았다.그러자 온시환은 입을 삐죽이며 곁에 있는 서주혁에게 말을 보태라고 손짓했다.곁에서 침묵을 지키며 앉아있던 서주혁은 그를 휙 째려보더니 적당히 하라는 눈치를 보냈다.하지만 온시환은 그러지 않았다.“그 여자는 승제 집 인테리어를 맡은 디자이너야. 페니라고, 확실히 예쁘게 생겼긴 했어. 근데 이 여자 쪽이 말이야, 승제 하나만 있는 게 아닌 것 같더라고. 신이한하고도 뭔가 있는 것 같고, 또 최근에는 한 남자 연예인한테 빠졌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게? 승제가 바로 300억을 주면서 원래 내 시나리오에 남자주인공 역할이었던 그 연예인을 자르는 거 있지? 역시, 큰일 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진세운은 손에 들려 있는 술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진짜야?”어불성설 그 자체라, 그는 정말 믿을 수 없었다.온
통화를 종료한 후, 그는 앞에 쌓인 서류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는 오늘 밤 그녀의 곁에 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견디기 힘들어졌다.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그는 이불에서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사면팔방에서 그 향기가 퍼져와 모공을 타고 몸속으로 번지는 것 같았다.반승제는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어 잠옷을 걸치고 일어나 창문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구석에 있는 창문은 열려있었고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는 손가락으로 담배를 쥐고 있었다. 어쩐지 불어오는 바람에도 그녀의 향기가 스며있는 것 같았다.성혜인을 창문 앞에 밀어붙였을 때 그녀는 놀란 나머지 그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 모습이 반승제를 더욱 끌어당겼다.반승제는 순식간에 눈빛을 바꿨다. 얇은 입술로 담배를 물고 있던 그는 어느새 씹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무언가라도 해야 몸 안에서 솟구치는 것을 잠재울 수 있는 듯 말이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성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자?」사실 반승제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SNS를 잘 올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가끔 누군가는 SNS를 올리고 그에게 '좋아요'를 눌러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는데, 이건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또 그가 직접 밤에 사람을 찾아가 문자를 나누는 일은 극히 드물었는데, 하물며 이성에게는 더욱 그러했다.그에게도 성혜인이 처음이었다.「남편이랑 뭐해?」성혜인이 답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승제는 한마디 더 보냈다.그녀는 원래 다시 잠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악몽을 꾸고 말았다.이번 꿈에서는 임지연이 아닌, 유산한 아이가 나왔다. 꿈에서 그녀는 병원 쓰레기통에 아기의 시체가 있는걸 발견했다. 심지어 이미 작디작은 손이 형성된 채로 죽은 시신을 말이다.그녀는 놀라 깨어났고 이마에는 온통 식은땀이 맺혀있었다.그러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성혜인은
그녀는 매우 빠르게 호흡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상하리만치 냉정했다.‘손에 문제라도 생기면, 정말 더는 살지 않을 거야...’“빵빵.”누군가 두 번 경적을 울렸다. 너무 아파 온몸을 떨고 있던 성혜인은 누군가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강민지였다.이윽고 강민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혜인아!”강민지는 놀라 반쯤 죽을 뻔했다. 성혜인이 두 손가락을 본 그녀는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고 아무런 욕조차 뱉지 못했다.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손은 생명과도 같다. 대체 누가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일까.“병원 가자! 내가 병원 데려다줄게! 진씨 집안 진세운이 돌아왔어. 의사야. 아주 대단한 외과 의사. 거기 가면 아마 방법이 있을 거야.”손가락이 벌써 이 정도로 휘어졌으니 완전히 회복하려면 반드시 가장 좋은 의사를 찾아가야만 했다.강민지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성혜인에게 그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의 손을 망가뜨린다는 건, 그녀의 반목숨을 망가뜨리는 거나 다름없었다.성혜인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축을 받아 차에 올라탈 때까지도 계속 침묵을 지켰다.이마에 맺힌 땀들은 줄줄 흘러내렸고 오른쪽 손에 있는 두 손가락은 여전히 괴이한 모습으로 휘어져 보는 강민지가 다 아파 날 지경이었다.강민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자기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씨 집안의 진세운은 어젯밤에 돌아왔는데, 그는 현재 국내에 있는 의사 중 가장 어리고, 가장 대단한 외과 의사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한편, 윤씨 저택에 있던 윤단미는 반재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단미야, 성공했어, 그 여자 두 손가락을 못 쓰게 됐어.”흥분한 윤단미는 얼굴이 벌게져 입꼬리를 씩 올렸다.“확실히 이제 못 쓰는 거야?”“손가락뼈가 다 으스러졌대. 내가 찾은 사람이 원래는 더 심하게 하려고 했는데, 자꾸 누가 그 여자한테 전화를 거는 바람에 두 손가락만 부러뜨렸대.
성혜인은 아파 온몸을 덜덜 떨었다. 강민지는 복도에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빨리 진세운쪽에 연락을 해달라고 빌고 있었다.그녀는 진세운과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면 그가 체면을 봐주지 않을 게 뻔했다. 이건 오직 그녀의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이미 그에게 전화를 걸어본 강민지의 아버지는 뜻밖의 소식을 그녀에게 전했다.“아마도 윤씨 집안의 윤단미도 다친 것 같구나. 그래서 먼저 그쪽에 가보고 일이 완료되면 우리 쪽으로 온다네.”강민지는 화가 나 반쯤 죽어버릴 것 같았다.“윤단미가 아무리 다쳤다고 한들 우리 혜인이보다 심하겠어요?! 빌어먹을 년, 딱 봐도 일부러 꾸민 거라고요!”그녀가 욕을 다 내뱉자 아버지의 꾸짖음이 시작됐다.“일찍이 말하지 않았니? 그 성질머리 좀 고쳐야 한다고. 온종일 밖에서 미쳐 날뛰더니 이젠 말하는 게 더더욱 거리낌이 없구나.”강민지의 눈에서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아빠, 혜인이 저 손으로 그림 그려야 해요, 예전처럼 돌리지 않으면 혜인이 재능이 망가져 버리는 거라고요.”“기다려봐, 진세운이 반드시 와야만 하는 거라면, 우리도 그가 윤씨 집안의 일을 끝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강민지는 이를 악물며 하는 수 없이 먼저 이 병원에 있는 의사에게 붕대를 감아달라고 했다.비록 하나병원의 의사들도 모두 좋은 의사들이긴 했지만, 일단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성혜인의 삶은 망가져 버릴 것이었다.그러나 그녀도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의사는 성혜인의 손가락을 검사해보기 시작했다.만약 보통사람이 이렇게 다쳤다면 일찍이 무서워 눈물을 터뜨렸을 테지만, 성혜인은 새까만 눈빛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하게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며 냉정하게 의사에게 물었다.“제 손이 원래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의사는 조금씩 조금씩 검사를 이어나갔다. 이 과정은 성혜인에게 있어 매운 고통스러웠다.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눈초리마저 땀에 젖어있었다.강민지는 옆에서 욕을 하며 나섰다.“이
윤단미는 조금 감동한 듯 반승제를 바라보며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자신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승제야, 그래도 네가 나를 아껴주는구나.”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진세운은 하는 수 없이 윤단미의 손가락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검사를 마치고 그가 떠나려는데 그녀가 또 다른 손을 꺼내 보였다.“진 선생님, 이쪽 손도 조금 불편한 것 같아요.”진세운이 아무리 둔하다 할지라도 이제는 윤단미가 그를 일부러 이곳에 남기려 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왜 날 남기려고 하지?’그는 무의식중에 반승제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러나 반승제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진세운은 어젯밤 반승제가 불륜남 노릇을 한다고 온시환에게 세뇌를 당했었다.하지만 반승제가 지금 이렇게 윤단미가 소란 피우는 것을 가만히 놔두는 걸 보면 그의 마음속에 아직도 그녀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진세운은 반승제가 불륜남 노릇을 한다는 말이 아마 온시환의 꾸민 이야기라고 여겼다.그는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다른 한쪽 손을 자세히 검사해보더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윤단미 씨, 저는 그럼 이제 가봐도 될까요?”앞뒤로 총 40분이라는 시간이 지체되었다. 윤단미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음식이 다 준비됐으니 진 선생님도 남아서 같이 식사하시죠.”진세운은 고개를 저으며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아니요, 제가 일이 있어서요.”어차피 시간은 많이 지체되었고, 윤단미도 이제는 더 다른 변명거리를 찾을 수 없어 그냥 떠나도록 내버려 뒀다.그 사이 진세운은 강씨 집안에서 오는 전화를 세 통이나 받았다. 모두 빨리 와서 봐달라는 것이었다.그는 윤씨 저택에서 떠나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한편, 성혜인의 이마는 온통 땀으로 젖어있었고 입술은 창백해졌다. 그러고는 몇 번이나 자신의 손이 확실히 나을 수 없는지 의사에게 물었다.의사는 만약 자신이 안 된다는 대답을 하게 되면 그녀가 반드시 무너지지는 않을까 하고 의심
성혜인은 병원에 3일 동안 머물렀다. 그녀는 줄곧 자신의 손가락을 주의하며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손가락이 회복하지 못할까 봐서이었다.강민지도 3일 내내 그녀의 곁에 같이 있어 주었다. 성혜인이 다른 건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손가락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걸 그녀도 일찍이 알아챘다.성혜인의 앞에서 반승제를 언급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3일째가 되던 날, 의사는 성혜인에게 이제 떠나도 되지만 손가락은 계속 잘 보살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요 며칠, 성혜인은 사실 반승제의 메시지를 받긴 했었지만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지금은 반승제도 더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퇴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예전에 같이 협력한 적 있었던 별장 주인의 초대를 받았다. 오늘 밤 술 시음회에 오지 않겠냐는 것이었다.그것은 그녀가 전에 꾸몄던 집에서 열리는 작은 내부 연회였다. 그래서 주인이 그녀를 초대한 것이었다.초대자는 정운테크의 지형오였는데 성혜인은 그를 제원대에 다닐 때 만난 적이 있었다.게다가 지형오는 그녀와 신이한에게 다리를 놔주기도 했었다. 신이한은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성혜인은 그와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사장님, 제가 손을 다쳐서요. 아마 그림은 못 그릴 것 같습니다.”“그림 그릴 필요 없어요. 어쨌든 페니 씨가 설계한 집이잖아요. 와서 한번 봐봐요.”성혜인은 거절하기 어려웠다.술 시음회는 일반 연회만큼 성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편한 옷차림을 하고 왔고 정원의 곳곳에는 포도주 선반이 있었으며 화원은 온통 향긋한 술 내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곳에 도착한 성혜인은 단번에 지형오를 발견했다. 정운테크는 주로 전자제품 방면의 연구와 가전제품을 팔았는데,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등등은 거의 국내의 3분의 1의 가전제품 시장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성혜인이 예전에 몇몇 집의 인테리어를 맡을 때 사용한 가전제품은 모두 정운테크의 것이었다. 이번의 네이처 빌리지도, 지형오는
두 책임자는 성혜인을 보자 순간 눈빛이 밝아졌다. 누구도 주영훈의 제자가 이렇게 젊고 예쁠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페니 씨, 안녕하세요. 우리 미술관은 페니 씨의 작품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할 겁니다.”“저희 미술관도요.”두 사람은 앞다투어 자신들의 명함을 건네며 다소 흥분한듯한 모습을 보였다.성혜인은 이전부터 줄곧 바쁜 일들을 모두 끝마치면 자신만의 화실을 열고 전시회를 진행할 생각을 해왔었다.그러나 현재 SY그룹의 일이 전부 끝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들의 제안에 혹하긴 했으나 잠시 에둘러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같이 협력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하물며 그녀의 손도 이 모양이라 짧은 시간 내에는 다시 붓을 들기 어려웠다.반승제의 시선은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 목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는걸 발견해서부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손은 왜 그래?”윤단미도 손을 다치긴 했지만 뼈가 살짝 어긋난 가벼운 부상이라 이틀 정도면 낫는 것이었다.성혜인은 깁스까지 하고 있어서 더욱 부상 정도가 심해 보였다.그녀는 반승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지형오를 바라보았다.지형오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두 전시회 책임자에게 성혜인을 소개해주었다.“페니 씨는 한 번도 먼저 주영훈 선생님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어요. 주영훈 선생님도 제자를 끔찍이 보호하시고요. 그러니 앞으로 페니 씨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이름 있는 지형오도 성혜인의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지, 심지어 주영훈이 그녀의 뒤를 봐준다고 하지, 두 책임자는 감히 그녀에게 미움을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누군가에게 미움을 사더라도 예술가에게는 미움을 사지 말라는 말이 있다.이런 예술가에게는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적지 않은 지지자들은 거의 소위 말하는 윗계급의 사람들이었다. 주영훈은 한국화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사들이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러니 그의 제자에게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