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이한은 곧바로 이선에게 몇 마디 말을 걸며 분위기를 띄웠다.성혜인은 중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두 남자가 서로 총을 겨누고 얘기하는 데에 자신도 연루된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화장실에 가는 척했지만, 사실은 복도에 나가 바람을 쐬었다.서민규는 복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페니 씨, 이거 숙취 해소제인데 한 모금 마실래요?”혜인은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다. 마신 거라고는 아까 맞은 켠 룸에 있을 때 한 잔 마신 게 전부였다.머리가 흐려지는 것을 피하고자 그녀는 그의 손에 있던 숙취 해소제를 받아 들었다.서민규는 뭔가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더듬었다.“제가 승진할 수 있었던 건 전부 페니 씨 덕분이에요. 오늘도 그렇고요. 이거 정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숙취 해소제를 다 마신 혜인이 민규에게 자신이 요구한 일을 잘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그때,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게 곁눈으로 보였다.반승제였다.그는 담배를 피운다는 핑계로 룸에서 나온 것이었고, 손에 담뱃갑과 라이터를 쥔 채 혜인이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혜인은 재빨리 민규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그녀의 신호를 눈치챈 민규는 곧바로 그가 다른 여성들을 대할 때 하는 인사를 해 보였다.“자기야, 그래서 끝나고 나서는 어디 갈 거야?’민규가 이 말을 뱉을 때, 반승제는 마침 그 두 사람 앞까지 걸어왔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을 지나 발코니에 있는 흡연실로 향했다.민규는 말을 하면서도 간담이 서늘해 죽을 지경이었다.그는 당연히 혜인과 모종의 관계가 생성되기를 바랐다. 혜인이 만약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는 30년을 분투해야 할 시간을 절약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하지만 혜인에게는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신예준의 외모를 가졌다면 모를까.혜인은 민규가 여자를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심지어 반승제가 그
반씨 가문에서 그녀는 늘 거래를 위한 물건에 불과했다.반승제는 갑자기 멈추더니 조용히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네 그 쓸모없는 남편을 가져다 뭐 하려고.”혜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어떻게 자기 자신을 그렇게 욕할 수가 있지...”반승제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페니야, 생각 다 끝났어?”그의 말은 마치 함정 같았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하게 승제라는 늪에 빠지게 했다.혜인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동의한 줄 안 승제가 곧바로 그녀를 받쳐 들어 키스하며 이미 소독이 끝난 테이블 위에 눕혔다.승제의 입맞춤에 혜인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이윽고 목덜미에서 잔잔한 통증이 몰려왔다. 승제가 그녀에게 흔적을 남기는 중이었다.승제는 이런 일에 있어 강한 리드욕이 있었다.그때, 문밖에서 서민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페니 씨, 방금 다시 룸으로 돌아오는 걸 봤는데, 혹시 뭐 두고 갔어요?”머릿속에서 전기가 번쩍하더니 그녀는 단숨에 승제를 밀어냈다.테이블에서 내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직접 풀어 헤쳐진 단추를 다시 채웠다.승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이내 가볍게 웃었다.이 웃음에는 조롱의 의미가 섞여 있었다.혜인은 차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볼 수 없었고 마지막 단추까지 다 채우자마자 곧장 문을 향해 걸어갔다.그런 그녀를 승제가 끌어당겨, 귀 옆의 머리카락들을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너에게 더 생각할 시간을 줄게. 아, 내가 결벽이 조금 있어서 말이야, 생각할 동안에는 그 사람이 너를 건들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네.”혜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져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고는 몇 초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반 대표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지금 그 사실을 인정하면 승제는 완전히 지는 것이었다.“페니야, 나도 결혼한 몸이야. 이건 단지 어른들의 게임일 뿐이고.”얼굴이 창백해진 혜인의 눈초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정말로 굴욕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마치 그녀의 인생은 제멋대로 갖
그가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자 온시환은 눈썹을 추켜올렸다.“키스까지 했어?”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손에 든 카드를 보며 승제는 무심히 한 장을 내던졌다.“키스까지만 했나 보네, 더 깊게 하지는 못하고.”이한은 문화 충격을 받고 이내 감탄하기 시작했다.“정말 상상도 못 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네가 남편 있는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줄은!”승제는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꼭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마음대로 말하지 마.”“하지만 이게 현실인걸! 물론 페니 씨가 정말 남자를 홀릴만한 매력이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해, 근데 너 결벽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두 남자가 한 여자를 공유해? 페니 씨가 자기 남편하고 키스하고 돌아서서 너랑 바로 키스한다고 생각해봐, 꺼림칙 하지 않아?”그의 말에 승제는 확실히 뭔가 꺼림칙해졌지만, 겉으로는 매우 냉정한 척했다.“닥쳐!”온시환은 가볍게 웃었다.“인제 보니 별로 개의치 않는가 보다? 나는 그냥 일깨워주는 것뿐이야, 잠깐 노는 거에 그치면 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랑 이러는 거 보면 분명 다른 남자하고도 이렇게 놀 수 있을 거야.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도덕적이지 못하거든. 그러니 진심으로 그 사람에게 빠지지는 마.”승제는 손에 쥐고 있던 모든 카드를 시환에게 건네주고는 뒤로 기대어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그건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온시환은 속으로 생각했다.‘알고 있다면 기혼인 여자와 엮이지 말아야지.’하지만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역시 승제가 그저 잠시 페니에게 끌리는 것뿐이라 생각했고 “먹고 싶은 것”을 여러 번 먹게 되면 분명 질리게 될 거라 생각했다.‘그래, 이런 육체적인 쾌락은 승제가 페니 씨를 위해 이혼할 정도까지는 가지 못할 거야. 아직 윤단미도 있으니까.’자리에 앉아 있는 승제의 머릿속에는 온통 혜인을 들어 테이블에 눕히던 그 장면으로 가득했다.그날 밤과 같이, 당황한 그녀는 다리로 승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순식간에 몸이
어이가 없었던 도우미들은 차마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차를 내주었다.성훈은 오늘 자신의 두 아들을 다 데려왔는데 큰아들은 26살, 작은아들은 24살로 두 사람은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성훈의 월급은 집 대출금을 갚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아들들에게 결혼 자금을 마련해줄 조건이 되지 않았다.큰아들은 원래 여자친구가 있었으나, 남자 쪽 집에서 신혼집도 못 마련해준다는 소리를 듣고 이별 통보를 했다.그 누구도 22평 남짓한 좁은 집에서 그들 가족과 함께 사는 걸 원치 않았으며, 두 아들 모두 밖에 나가 살면 감당해야 할 집값이 만만치 않았기에 가족들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여섯 식구는 모두 성훈이 대출을 갚아야 하는 그 집에서 같이 생활했다.성훈의 아내는 전업주부로서 몇 년 동안 밖에 나가 일거리를 찾아본 적이 없었다.그 모습이 못마땅했던 성훈은 직장에서 욕을 먹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꼭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발길질해댔다.집 안에 있는 모두가 그 모습을 봤지만, 누구도 말리지 않아 성훈의 폭력은 습관적으로 행해졌다.여자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고 또 두 노인을 돌봐야 하니, 그녀는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하지만 모두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는 성훈이야말로 이 집안의 기둥이며 가장 고생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와 노인을 돌보는 아내는 오히려 가장 한가한 사람으로 여겨졌다.그 때문에 이 집안에서 그의 아내는 가족들의 화풀이 상대에 불과했다.라정옥은 기분이 나쁘면 그녀를 마구 욕했다.두 아들은 기분이 나쁘면 그녀에게 화풀이했다.성훈은 더욱 심하게, 그녀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질을 해댔다.오늘 성훈이 두 아들만 데려온 이유도 그에게 있어 두 아들의 존재는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미 늙고 못생긴 아내는 어디 내놓기가 부끄러웠다.화려한 별장은 그들의 눈이 부시게 했다.성훈은 반드시 이곳에 살리라 꿋꿋이 다짐했다.이곳에 살게 되면 성훈은 아내와 이혼할 예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별
라정옥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혜인의 얼굴에 대고 마구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곁에 있는 몇 명의 보디가드들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성훈은 그 시절 대학 졸업생이었다. 당시 꽤 높은 점수를 맞아 온 동네가 떠들썩해졌었다. 그는 집안의 유일한 대학생이었기에 늘 자신이 뭐라도 되는 양 굴었다.그래서 그는 어른의 행세를 한껏 뽐내며 혜인을 설득했다.“너 네 할머니한테 하는 말버릇이 그게 뭐냐? 역시 공부 못 한 애들은 이래서 안 돼,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잖아. 대학교도 못 나온 큰 형님과 형수님이 자식을 가르쳤으니 이 모양일 수밖에. 혜인아, 그래도 작은아버지 말을 들어야 한다. 나는 대학교를 나왔거든. 네 두 사촌 오빠들도 지방대, 전문대를 나왔지만 어쨌든 다들 대학교에 다녔다고 할 수 있지. 이런 사람들을 너희 집안 양자로 들인다는 건, 너희에게는 복이나 다름없어.”성훈은 성휘와 임지연 둘 다 대학교에 가지 않았으니 무턱대고 혜인 역시 문화가 없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는 혜인이 전국에서 우수한 학교를 나왔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혜인은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사촌오빠라 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들의 눈은 예외 없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들과 말을 나누기도 귀찮았다.“전부 이 집에서 썩 나가요. 두 번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성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집에서 정말 교육을 못 받았나 보구나! 큰 형님과 형수님이 너를 이렇게밖에 가르치지 않았니?”“쨍그랑!”혜인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쳐 깨지자 놀란 성훈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등을 뒤로 기댄 혜인의 카리스마는 모든 사람을 숨도 못 쉬게 할 정도로 강했다.“저희 아빠가 대학교에 못 갔다고요? 제가 듣기로 저희 아빠 수능 점수가 작은아버지보다 훨씬 높았던 걸로 아는데요. 집안에서 막내아들인 당신을 예뻐하는 탓에 저희 아빠는
“너 딱 기다려!”다섯 사람은 급히 짐을 챙기고 집을 떠났다.혜인은 소파에 앉아 도우미에게 모든 곳을 소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경비실에도 일렀다.“다음부터 다시는 저 사람들 집에 들이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일자리를 잃게 되실 겁니다.”경비원은 전에 소윤의 명령을 받은 적이 있어 그들을 순순히 들여 보내준 것이었다.하지만 현재, 성씨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묘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는데, 바로 이 집의 실세가 바뀔 것 같다는 것이었다.“알겠습니다, 아가씨.”혜인은 로즈가든에 돌아가 겨울이를 데려왔다. 로즈가든에는 마당이 없어서 겨울이가 지내기에 많이 불편했다.포레스트에는 반승제가 있어 갈 수가 없던 차에, 때마침 이곳 성씨 저택이 비어 겨울이는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별장 안팎은 전부 소독을 끝마쳤고 소윤의 물건 역시 모두 팔아버렸다.성한의 명의로 되어있던 집도 수십억에 팔 수 있었고 그 돈들은 전부 성휘에 통장에 돌아왔다.이 수십억의 돈들은 SY그룹이 진 2조 원의 빚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혜인은 승제가 제안했던 ‘거래’가 생각나자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다음날 점심, 반태승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혜인아, 얼마 전에 너희 아빠가 나에게 SY그룹에 대한 사정을 얼핏 얘기해줬는데, 최근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받지 않더구나. 아직 몸이 나아지질 않은 게냐?”그녀는 반태승에게 SY그룹의 일에 대해 감히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자그마치 2조나 되는 빚이었으니까 말이다.그 소식을 만약 반태승이 듣는다면 분명 금전적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만, 그녀 역시 반드시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예를 들면.“혜인아, 그럼 앞으로 평생 반승제와 잘 살아야 한다. 이혼은 절대 안 돼.”남의 손을 빌었으면 필시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반태승에게 2조를 요구하는 것은, 반승제와의 이혼 불가 협의서에 사인하는 것과 같았다. 이 역시 그녀에게 있어서는 사기와 같았다.반태승은 반씨 가문에서 혜인을 가장 잘
성혜인은 장석호 곁의 의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일단 PW사로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려주세요. 시간이 되면 자연히 답을 드릴 테니까요.”장석호는 피식 웃었다. 눈빛에는 성혜인에 대한 멸시로 가득했다. 그녀가 PW사의 행적을 모르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PW사는 합법과 불법 사이의 접점에서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회사이니 말이다.더구나 이번 일은 계약까지 끝냈기 때문에 따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성혜인의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분위기가 더욱 눈에 띄어 일은 잠깐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그러면 혜인 씨를 봐서라도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혜인 씨, 시간 있을 때 같이 식사나 하지. 회사 일은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하하.”장석호는 헤벌쭉 웃으며 불룩 나온 술배를 두드렸다.“또 봐, 혜인 씨.”장석호가 나가자마자 이사회의 임원들이 왁자지껄 토론하기 시작했다.“네 아버지는 어디로 갔어?”“사장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아직도 처리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성휘에 대한 적의로 가득한 말들에 성혜인은 홧김에 퍽 소리를 내며 서류를 테이블로 향해 던졌다. 말소리는 줄어들었지만, 임원들의 표정은 더욱 살벌해졌다.‘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젊은이 주제에 우리 앞에서 뭐 하는 거야?!’임원들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전에 성혜인은 원래 성휘의 것이었던 사장석에 앉았다.“변 이사님과 진 이사님이 지난해 산 새집에,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 이사님의 개인 사정에 왜 회삿돈이 들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지난해 저희가 토지에 4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왜 마지막에 제 아버지가 모르는 선에서 금액이 훨씬 줄었는지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위기로 이어진 PW사와의 계약은 또 누가 지지한 것이죠?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본인들이 친 사고에 사장을 욕하는 건 무슨 경우죠?”성혜인은 덤덤한 말투와 반대되는 예리한 눈빛으로 임원들은 쓱 훑어보며 말했다. 대부분 임원이 그녀와 눈을
성혜인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러다 차 창문을 내린 채 얼굴을 내민 장석호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이제 연기를 할 생각도 없는지 당당하게 카드를 내밀면서 말했다.“20억 원으로 너와의 100번을 살게. 너도 원한다면 내 차에 타.”장석호의 얼굴은 크다 못해 창문을 꽉 채울 지경이었다. 그런 얼굴로 저질스러운 말을 내뱉으니 듣는 사람은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태도로 건들건들 말을 이었다.“신기섭한테서 네 얘기는 익히 들었다. 똘망똘망하니 예쁘다고 하길래 사진을 본 적 있는데 실물이 훨씬 예쁜 줄은 몰랐구나. 그때는 아직 처녀였겠지만 이제는 아니지? 그래도 너한테 처녀의 값을 쳐줬으니 고마운 줄 알아. 20억 원은 잠자리의 값이고 따로 별장도 사주마. SY그룹이 곧 파산할 마당에, 만약 나를 거절한다면 길바닥에 나앉을 길밖에 더 있겠니, 자기야.”정석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식용유를 잔뜩 처바른 치즈보다도 느끼했다. 대부분 중년층 꼰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자신이 카드 한 장만 내밀면 여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처럼 말이다.상업계에서 여자의 지위가 남자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유명 기업의 대표가 젊고 예쁜 여자를 노리개 취급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개나 소나 콧대가 하늘을 찌르게 되고 말았다.성혜인은 표정 없는 얼굴로 카드를 받아 들더니 그대로 장석호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이 돈은 직접 쓰세요. SY그룹이 PW사보다 먼저 파산할 일은 없으니까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자신의 차로 돌아가서 훌쩍 떠나버렸다.성혜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뺨이 저릿저릿했던 장석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또 처음이었다.‘망할! 저거 아주 제대로 미친 년이네!’장석호는 운전석의 의자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대... 대표님?”“흥, 내 앞에서 얌전히 무릎 꿇도록 대가를 치
설연주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한밤중에 밖에서 나는 기척에 잠이 깼다.오번이 방으로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렸다.“최씨 가문 사람들이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더는 여기 머물 수 없어요.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요. 내일 아침 여덟 시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해요. 반년 동안 플로리아에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설연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마친 후 설우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우현 오빠, 일곱 시 경성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면 안 돼요? 제발요.]메시지 끝의 몇 글자에서 비굴함이 묻어났지만 그녀는 결국 그 메시지를 보냈다.설우현은 요즘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고 심지어 어젯밤은 잠을 한숨도 자지 않았다.설연주의 메시지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휴대폰을 옆에 던져두고 세면을 시작했다.세면을 마친 그는 수영복을 입고 30분 정도 수영을 했다.수영을 마치고 나오자 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도련님, 누군가가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설우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곧 일곱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설연주의 번호가 떠 있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전화가 다시 울렸다.전화를 받자마자 설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안 올 거예요?”설우현은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설연주는 휴대폰을 꽉 쥔 채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물었다.“어젯밤 언제 깼어요? 내가 약 넣은 거 알고 있었어요?”설우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설연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오빠, 이번에 떠나면 반년 동안 돌아오지 못해요. 그저 한 번만 보고 싶었어요.”오번은 이미 오래전에 그녀에게 혼자만의 감상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었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설우현은 그 아이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따라서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게다가 그 아이를 갖겠다고 고
설연주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대충 넘겨보려 했지만 설우현이 턱을 잡아들어올렸다.“정말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 생각해?”그녀는 몇 번이나 그의 한계를 시험하려 들었다.설연주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마치 죽이려면 죽여보라는 표정이었다.설우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 외투를 걸치던 중 설연주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그의 등 뒤에서 그를 안으며 애틋하게 말했다.“우현 오빠.”“여기 왜 돌아왔어? 최씨 가문 사람들이 널 찾고 있는 거 몰라? 일 년 전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아직도 그 일에 집착하고 있어.”두팔의 부모도 아직 그 문제를 놓지 않고 있는데 도대체 왜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보고 싶었어요.”설연주는 그를 안고 놓치기 싫다는 듯 꼭 붙잡고 있었다.설우현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는 손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 그 위에 얹으려 했지만 결국 멈추고 말았다.“놔.”“오빠.”설연주는 그가 이렇게 차갑게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서서히 그를 놓아주었다.설우현은 주저 없이 방 문을 열고 나가려 했고 설연주는 다급히 그를 붙잡으며 소리쳤다.“우현 씨!”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설연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오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다 됐어요? 이제 더는 못 버텨요. 최씨 가문 쪽에서 난리예요. 늦어도 아침 일곱 시까지는 빠져나와야 해요.”“다 끝났어요. 지금 내려갈게요.”오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설연주는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오번은 설우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말했다.“이번에 결혼식까지 망쳐놓고 아직도 설우현이 연주 씨를 좋게 봐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은 점점 미쳐가고 있어요.”설연주는 지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오번은 운전을 하며 말했다.“아기가 살아남지 못했
설우현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교회의 문이 벌컥 열리며 낯선 여자가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아기는 울고 있었고 두어 달 정도 되어 보였다.설우현이 이 무례한 방해자를 내보내라고 하려던 순간 중년 여성이 터뜨린 한마디에 모두가 술렁였다.“설우현 씨, 이 아이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때 연회에서 당신과 하룻밤을 보낸 사람은 사실 최서아 씨가 아니에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최서아를 바라보았다.최서아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스쳤고 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설우현은 이미 그 중년 여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최서아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우현 씨,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결혼을 취소하려는 거예요? 이러면 우리 최씨 가문과 설씨 가문 모두에게 큰 타격이에요. 진짜 이렇게 할 거예요?”설우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날 속였어?”최서아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 오래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당신을 곁에 둘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당신이 밖에서 아기를 데려와도 상관없어요. 같이 키우면 돼요. 난 진짜 당신을 좋아해요. 그런데 왜 항상 나를 보지 못하는 거예요?”최서아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하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러나 설우현은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아이를 살펴보았다.순박해 보이는 중년 여성은 아이를 그의 품에 건네며 말했다.“설우현 씨, 저는 그저 일을 부탁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할 일을 다 했으니 돌아가 보려 합니다.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그분이 분명히 아이의 아버지가 당신이라 했습니다.”설우현은 말없이 품에 안긴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어쩐지 이 아이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우선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았다.현장에 있던 하객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설씨 가문과 최씨 가문 사람들은 한데 모여 이번 일을 수습하기 시
설연주는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플로리아 국경 지역은 가난하고 혼란스러우며 인근 나라와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이곳은 빈곤하고 낙후하여 그녀와 같은 사람이 몸을 숨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오번이 이 지역을 잘 알고 있어 이곳에서 위험한 일을 겪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설연주의 머릿속에서는 설우현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평생 그가 그녀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설우현을 몰래 사랑하게 된 건 그녀의 잘못이라 생각했다.그녀의 마음이 그에게는 짐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오번의 말처럼 결국 자신만이 감동받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설연주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약을 입에 넣었다.“그냥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줘요. 나 진짜 설우현을 좋아하거든요.”그녀는 자포자기한 듯 속삭였다.“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됐어요. 왜 이렇게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 벌 받는 거겠죠. 예전에는 남자들을 그저 돈줄로만 여겼으니까. 하지만 설우현은 달라요.”오번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몸 상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연주 씨가 각오하고 있는 거라면 더 말릴 수는 없겠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해요.”설연주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설우현과 함께한 밤을 떠올렸다. 그는 침대에서 정말 대단했다.그가 그녀에게 남긴 흔적이 많았기에 임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로부터 일주일 후 설우현은 김현서가 피를 흘리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설우현은 줄곧 설연주가 약간의 잔꾀나 부릴 줄 아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독약을 구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설연주가 김현서를 처리한 건 과거에 김현서가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일까?설우현은 설연주의 과거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동안
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설연주는 나한테 없어. 원래 사람을 시켜서 멀리 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사라졌어.”이상하게도 설연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설연주와 얽힌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설우현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허튼수작을 부리는 여자일 뿐이었다.두팔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설연주를 찾아, 이 땅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두팔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설우현은 이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설기웅은 이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말했다.설우현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누구예요?”“최용호의 사촌 여동생이야. 한동안 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 넌 항상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약까지 구해왔더군.”설우현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여자는 얼굴이 낯익었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집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형,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아버지를 찾아갔어. 아버지는 너와 그 여자의 결혼을 고려하고 계셔.”설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 나더러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하지만 이내 설기웅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다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설우현이 가문을 위해 혼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면 최용호의 사촌 동생과 결혼해도 문제가 없었다.최용호는 설기웅의 친구였고 최씨 가문도 플로리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였다. 이 결혼은 양 가문에도 손색없는 혼사였다.설우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형,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는 특정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자신이 여자의 계략
설우현은 잠시 발걸음을 주춤했다.‘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뻔뻔해? 그래, 무릎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설연주는 두팔에게서 이미 잔혹한 고통을 겪은 뒤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우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설우현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그는 부하에게 설연주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설연주는 이번에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지난번처럼 고열이 계속되었다. 의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녀를 보내는 일을 미루고 오늘 밤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그도 병원에 머물며 그녀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설연주는 그가 떠나자마자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팔한테서 나왔어요?”오번은 원래 두팔을 따라다니며 설연주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떠난 뒤로 자신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약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당장 필요해요.”오번은 무슨 약인지 듣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연주 씨, 설마...”설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화 중임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네, 바로 그걸 원해요. 곧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설우현이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그 전에 딱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요?”오번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미쳤어요? 이 일이 들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이런 약 구할 수 있잖아요?”오번은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비밀 약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밤이 되어 설우현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흰색 정장을 입고 설기웅의 뒤를 따라 몇몇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는 중간에 2층에 올라가 친구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대신 술 한 잔을 마신 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평소 설연주는 다른 남자들에게 무척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유독 설우현에게만큼은 어딘가 진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그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설우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설연주가 더욱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설연주는 두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반면 두팔은 그녀의 이런 상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설연주를 탐하고 싶었고 지난번 사람을 시켜 길들였지만 그녀는 끝내 도망쳤다.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두팔은 설연주를 침대에 내리눌렀다.설연주의 얼굴에 잠시 공포가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게 변했다.두팔은 그녀의 겉옷을 벗겨내고 더 안쪽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설연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설연주는 반항할 마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심지어 마음속 깊이 설우현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후회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후회하거나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도 설연주의 머릿속엔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두팔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두팔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침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마침내 그가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려던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팔의 부하가 문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형님, 저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깜짝 놀란 설연주는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설우현이 서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두팔은 그를 알아보고 즉시 옷을 바로잡았다.“우현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 찾아
오번은 설우현의 선택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설연주를 정말로 혐오하는 듯했다. 결국 오번은 자기 힘으로 계속 설연주를 찾아야 했다.그러던 이틀 후 그에게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마침 그 의뢰는 두팔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팔이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오번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설연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음이 흔들렸다.“형님, 설연주를 계속 무릎 꿇리고 있을까요?”두팔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설우현의 사람들이 직접 설연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전에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당당하더니 이제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사흘 동안 계속 무릎 꿇리고 있어. 음식은 주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내버려둬.”오번은 통화 속 두팔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설연주가 두팔에게 넘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팔은 다시 한번 조건을 제시하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듣자 하니 해킹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우리 쪽으로 와볼 생각 없나? 충분한 보상은 보장하지.”오번은 고민 끝에 결국 두팔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그는 설연주를 만났다.설연주는 이미 이틀 밤낮을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등은 채찍 자국으로 가득했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그 끝은 두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설연주는 고개를 떨군 채 누구의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두팔은 갑자기 사슬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이윽고 두팔은 사슬을 조금씩 당기며 설연주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주야, 성씨를 바꿔가며 꼼수를 부렸지만 결국 설우현이 직접 널 내게 넘겨줬잖아. 기분이 좀 상했겠다?”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팔의 구두가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설연주는 손가락을 오그리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두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저번에 겨우 길들였더니 네가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도망갈 기회를 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