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휘는 창백한 안색으로 서류를 내려놓고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손 떨림이 너무 심한 관계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성혜인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힘이 풀린 성휘는 결국 지팡이를 한쪽에 내버려 두고 천천히 앉았다. 그의 눈가에는 며칠 사이에 주름이 잔뜩 늘었다. 하얗게 번진 머리카락을 성혜인은 도무지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다.“혜인아, 우리 집안 진짜로 망할 것 같구나.”성휘는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흠칫 떨었다.“미안하다. 너한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했어.”성휘는 회사를 팔고 부동산을 팔아야만 겨우 빚을 갚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에게 남겨줄 자산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성혜인은 천천히 성휘를 향해 걸어갔다. 겨울이는 얌전히 성휘의 곁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 가서 앉자 성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한평생 고생한 결과가 이럴 줄은 몰랐구나.”“아빠...”성혜인은 머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시간 있을 때 엄마를 보러 가세요. 못 본 지도 한참 됐잖아요.”성휘는 말없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죽상이 되었다.“내일 바로 가보마.”성휘의 건강 상태로 차를 몇 시간 동안 타고 서천까지 내려간다면 아마 그 길로 저세상 가게 될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가 1년 시한부 신세로 회사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에 성혜인은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성휘는 한참 침묵해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SY그룹이 파산한 다음 절대 반승제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 회장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상 이혼이 성사될 리도 없을 거다. 만약 이혼한다면 너 혼자 돈도 모자라서 괴롭힘을 받지는 않을지 걱정이구나.”성휘는 자신이 머지않아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다. 성혜인
반승제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성혜인의 뺨을 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BH그룹으로 향했다.시간은 어느덧 저녁 7시가 되었지만 BH그룹의 건물은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가장 위층의 대표 사무실로 가니 심인우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성혜인이 찾아올 줄 몰랐던 듯 놀라 눈을 크게 떴다.“안녕하세요, 저 대표님을 뵈러 왔어요.”“대표님은 해외 미팅이 있어서 방금 회의실에 가셨어요. 아마 두 시간 정도는 걸릴 거예요.”반승제를 기다리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던 성혜인은 덤덤하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도 자신이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거래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성혜인이 아직 어린 시절 임지연은 줄곧 그녀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경제와 정신적으로 독립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성혜인은 이제야 임지연이 어떤 뜻이었는지 크게 와 닿았다. 보다시피 그녀는 서천에 사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도 한참 달랐고 머리도 특별히 똑똑했다.여러 가지 추억을 생각하다 보니 두 시간은 어느덧 훌쩍 지나갔다. 어느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성혜인은 몸을 일으켜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반승제를 바라봤다. 그는 정장 재킷을 벗어 팔이 걸치고 느긋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테이블 앞으로 가서 앉은 반승제는 넓은 대리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는 시계를 풀어 한쪽으로 내던지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머리를 들었다. 사무실 조명 아래에서 그의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칼은 유난히도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어찌 됐든 한결같이 아름답고 위대한 얼굴이었다.“대표님...”성혜인은 작은 목소리로 반승제를 불렀다. 그러자 반승제는 그녀가 찾아온 목적을 이미 알아낸 듯 입 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지금은 가격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지?”반승제는 지난번 밀려난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듯 짓궂게 말했
“아직도 이렇게 서툰 걸 보니 남편이 영 별로인가 봐.”반승제는 가슴이 주체 되지 않고 떨렸다. 그래서인지 목소리도 약간 걸걸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성혜인은 애당초 말할 정신도 없었다. 더구나 심인우 등 사람들이이 갑자기 들어올까 봐, 혹은 건물 건너편의 사람이 창문을 통해 보게 될까 봐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곧 기절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새벽 다섯 시, 그는 정장 재킷을 성혜인에게 걸쳐 주고 자신의 차로 안아 올렸다.아무리 영엄한 존재가 과거의 반승제에게 미래 그가 사무실에서 여자와 관계를 가질 것이라고 얘기해도 그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워커 홀릭인 그는 사무실을 신성한 곳으로 여겼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 품속의 여자와 저녁 내내 함께 있었다는 생각에 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힘이 완전히 빠져 버린 성혜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반승제는 그녀를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이제는 욕실로 데려가서 씻겨 주려고 했는데 끝없이 울리는 그녀의 핸드폰이 신경에 거슬렸다.반승제는 미간을 구기며 성혜인의 핸드폰에 뜬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바라봤다. 수락 버튼을 누르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장석호다. 네 남편 서민규가 내 손에 있어. 또다시 내 연락을 무시한다면 이 자식을 바로 죽여 버릴 줄 알아!”반승제는 어두운 안색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맡긴 성혜인을 힐끗 바라봤다. 살짝 올라간 입 꼬리는 서늘하기만 했다.‘어쩐지 갑자기 순해졌다 했더니... 남편이 납치당한 거였어?’순간 분노에 이성이 침식당한 반승제는 성혜인의 다리를 잡고 확 끌어당기더니 움직임을 계속했다. 사랑의 감정이라고는 추호도 볼 수 없는 거친 움직임이었다.성혜인은 비몽사몽 눈을 떴다. 목은 이미 쉬어 버렸고 말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대... 대표님...”에너지가 고갈된 성혜인은 도무지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녀의 뜻을 알기나 하는지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또 두 시간
어젯밤의 기억이 갑자기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성혜인의 모습도 테이블 위에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던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답장을 포기한 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애초에 반승제가 답장하지 않을 줄 알았던 성혜인은 셔츠 단추를 전부 잠갔다. 하지만 가장 위에 있는 단추까지 잠그고 나서도 목에 난 흔적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이지 반승제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존재감이었다.성혜인은 이제야 핸드폰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핸드폰의 잠금 화면에는 같은 번호로 온 부재중 통화와 문자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반승제가 받아서 연결되었던 통화 명세는 물론 이미 삭제되고 없었다.성혜인은 서민규가 납치되었다는 문자를 보자마자 바로 장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는 일단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다.“어제는 또 누구의 침대에서 나뒹구느라 전화를 못 받았어? 지금 당장 찾아오지 않는다면 네 남편은 내 손에 맞아 죽을 줄 알아.”장석호는 또 핸드폰을 서민규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기절하기 직전인 그는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장석호는 사정없이 그의 뺨을 후려갈기며 말했다.“말해! 얼른 살려 달라고 말하라고!”성혜인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어젯밤 사무실에서 끝낼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호텔에서 계속하며 완전히 쉬어 버린 듯했다. 그것도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성혜인의 입술은 너무 힘껏 깨문 탓에 선명한 이빨 자국과 함께 약간 찢어져 있었다. 처음보다도 훨씬 거친 반승제 때문에 이번에는 입술에도 상처가 나고 말았다.서민규가 한참이 지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장석호가 핸드폰을 들고 다시 말했다.“만약 한 시간 안에 오지 않는다면 이 녀석 손가락을 잘라서 보내 주마!”전화를 끊고 난 성혜인은 부랴부랴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침 청소하러 온 호텔 직원과 마주쳤다.호텔 직원은 잠깐 놀란 듯하더니 성혜인과 잔뜩 어지럽혀진 침대를 번갈아 쳐다
장석호는 서민규와 함께 있었고, PW사의 다른 직원들은 병원에 있었다. 성휘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계속 귀찮게 군다면 성휘는 아마 두 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둘 수도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며 성혜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원래 열 번을 천천히 채우면서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했던 반승제는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이 가슴이 답답하기 시작했다. 아프다기보다는 짜증나는 답답함이었다.반승제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장석호 대표의 자료를 경찰서에 넘겨요. 그리고 내일 아침 9시 전에 PW사의 조사 소식을 보여줘요.”반승제를 빠르게 용건만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성혜인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반승제가 자료를 직접 경찰서에 넘기라고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사까지 해결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반승제는 뜨거운 시선을 따라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성혜인은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괜찮아요.”반승제는 아직도 두 사람이 함께 산장에 있을 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성혜인이 싫다고 했을 때 바로 멈췄었다.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기억 상실이라도 한 것처럼 잊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신사답지 못한 건 전부 서민규 때문이었다. 성혜인이 그를 위해 자신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신사다워야 할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저녁 8시, 호텔에서 기다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침에 나오며 약을 바른 찢어진 그곳은 갑자기 찌릿찌릿하기 시작했다. 반승제와 첫날밤을 보낸 후에 산 약을 이렇게 다시 쓰게 될 줄은 또 몰랐다.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성혜인에게는 거절할 자격 따위가 없었다. 몸은 점점 경직 되고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흥건하다고 한들 그녀는 가만히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성혜인은 결국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를 끄덕였다.“알겠어요.”“다른 용건은?”반
중년 여자는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손님은 어떤 스타일을 입어도 다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우리나라 여성분들은 과하게 보수적이어서 문제라니까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것저것 다 입어 봐요. 이쪽에 있는 도구는 필요하지 않아요?”성혜인은 중년 여자가 내민 두 가지 스타일의 속옷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가방 안에 밀어 넣고는 부랴부랴 결제를 끝냈다. 그리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푹 숙인 채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탔다. 속옷이 들어 있는 가방을 조수석으로 내던진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심장은 주체가 되지 않고 미치도록 뛰고 있었다.그녀는 그 길로 호텔에 돌아가서는 반승제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한 저녁 8시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지만 미리 샤워를 하는 등 준비가 필요했다. 샤워하고 나가서는 마구잡이로 가방에 넣었던 속옷을 꺼냈다.처음에는 그래도 청순한 스타일이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아서 꺼내 봤는데... 속옷과 마주한 순간 손에 힘의 풀려서 그대로 놓쳐버리고 말았다. 뜨거운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져서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거의 반시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겨우 속옷을 걸쳤다.하얀 속옷은 그녀의 뽀얀 피부와 완전히 어울렸다. 더구나 독특한 디자인 덕에 원래도 좋았던 몸매를 더욱 눈에 띄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곧바로 외투를 걸쳐 입었다. 시침이 8시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반씨 저택에 있었다. 반태승이 갑자기 호출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반태승에게 회사의 근황을 보고 했다. 하지만 반태승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혜인이랑은 요즘 잘 지내고 있니? 증손주는 언제 보여줄 셈이야?”반승제는 이제야 자신에게 부인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만약 반태승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깔끔하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가 그를 귀찮게 굴지
반태승은 이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예전 같으면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최소 반시간은 걸려야 대국 한 판을 끝냈다. 하지만 오늘 밤 반태승은 10분 만에 반승제에게 참패하고 말았다.“혹시 지금까지 일부러 나한테 져준 거니?”반태승은 놀라운 듯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는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한 판 더해!”반승제는 벽걸이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어느덧 7시 51분이 되었다.“이번으로 다섯 번째다. 바둑에 집중하지 않고 왜 자꾸 시계만 봐?”반태승은 눈치가 아주 빨랐다, 그래서 반승제가 집중을 못하는 것을 한 눈에 보아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10분 만에 대국을 끝낸 것을 보고서는 흐뭇함을 숨길 수 없었다.‘역시 내 손자다워. 혜인이랑도 아주 잘 어울리는군.’“그러고 보니 저택에 내가 혜인이랑 금방 만났을 때의 사진이 있다, 온 김이 같이 구경이나 하자꾸나. 병원에서 나를 간호할 때 찍은 사진인데, 애가 얼마나 참하던지.”반승제는 성혜인의 사진 따위를 볼 생각이 없었다. 이때 마침 협력사에서 전화가 오기에 그는 이를 핑계 삼아 몸을 일으켰다.“할아버지, 협력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오전의 회의 내용에 관해 토론해야 하니 이만 일어나 볼게요.”반태승은 한숨을 쉬었다. 반승제가 자꾸만 시계를 보던 것은 합작사와의 통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 열정을 혜인이한테 줬다면 아이를 낳고도 남았을 거다. 가봐, 일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집에 마누라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반승제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기 전에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8시.그는 합작사의 전화를 무시한 채 곧장 호텔로 향했다. 그러자 시간은 어느덧 8시 30분이 되었다.이때 심인우가 전화로 장석호의 체포 소식을 전했다. PW사의 행보도 전부 밝혀졌고 내일 아침이면 파산 뉴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반승제는 별 다른 말없이 짧게 대답하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심인우는 SY그
성혜인은 머리를 들어 간호사를 바라봤다. 그녀가 통화하는 사이에 신예준이 먼저 다가가서 말하고 있었다.“저희는 서민규 친구예요. 민규 어떻게 됐어요?”“지금으로서는 뇌진탕으로 판단되지만 진단을 위해서는 후속 검사가 필요해요. 그러니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신예준은 한쪽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그는 보호자보다는 환자에 가까워보였다.성혜인은 4000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 신예준에게 건네줬다.“예준 씨, 이건 민규 씨의 병원비에요. 혹시 모자라면 저한테 연락해요.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신예준은 수표를 힐끗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부자들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든 순간은 강민지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번 일은 민지한테 비밀로 해줘요. 민지가 알면 걱정할까 봐서요.”혹시라도 반승제가 열 받고 PW사에 대한 조사를 취하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던 성혜인은 신예준의 표정을 살펴볼 새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요, 민지한테는 말하지 않을게요. 오늘 죄송했어요. 서민규 씨한테는 다음에 직접 와서 사과할게요.”신예준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표를 받아 들었다.“네, 이 돈은 제가 잘 전해줄게요.”성혜인은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호텔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지 교통정체가 아주 심했다. 그래서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40분이나 소요하고 말았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한 시간밖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분일초가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온몸을 울릴 만큼 크게 뛰었다.마음이 너무 급했던 탓인지 하필이면 교통사고가 나서 성혜인은 운전대에 머리까지 박고 말았다. 혼란 속에서 상대방은 경찰에 신고하고 그녀도 함께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방 속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면서 말았다.“죄송하지만 제가 엄청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요. 배상은 통화로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