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렇게 서툰 걸 보니 남편이 영 별로인가 봐.”반승제는 가슴이 주체 되지 않고 떨렸다. 그래서인지 목소리도 약간 걸걸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성혜인은 애당초 말할 정신도 없었다. 더구나 심인우 등 사람들이이 갑자기 들어올까 봐, 혹은 건물 건너편의 사람이 창문을 통해 보게 될까 봐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곧 기절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새벽 다섯 시, 그는 정장 재킷을 성혜인에게 걸쳐 주고 자신의 차로 안아 올렸다.아무리 영엄한 존재가 과거의 반승제에게 미래 그가 사무실에서 여자와 관계를 가질 것이라고 얘기해도 그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워커 홀릭인 그는 사무실을 신성한 곳으로 여겼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 품속의 여자와 저녁 내내 함께 있었다는 생각에 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힘이 완전히 빠져 버린 성혜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반승제는 그녀를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이제는 욕실로 데려가서 씻겨 주려고 했는데 끝없이 울리는 그녀의 핸드폰이 신경에 거슬렸다.반승제는 미간을 구기며 성혜인의 핸드폰에 뜬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바라봤다. 수락 버튼을 누르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장석호다. 네 남편 서민규가 내 손에 있어. 또다시 내 연락을 무시한다면 이 자식을 바로 죽여 버릴 줄 알아!”반승제는 어두운 안색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맡긴 성혜인을 힐끗 바라봤다. 살짝 올라간 입 꼬리는 서늘하기만 했다.‘어쩐지 갑자기 순해졌다 했더니... 남편이 납치당한 거였어?’순간 분노에 이성이 침식당한 반승제는 성혜인의 다리를 잡고 확 끌어당기더니 움직임을 계속했다. 사랑의 감정이라고는 추호도 볼 수 없는 거친 움직임이었다.성혜인은 비몽사몽 눈을 떴다. 목은 이미 쉬어 버렸고 말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대... 대표님...”에너지가 고갈된 성혜인은 도무지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녀의 뜻을 알기나 하는지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또 두 시간
어젯밤의 기억이 갑자기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성혜인의 모습도 테이블 위에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던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답장을 포기한 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애초에 반승제가 답장하지 않을 줄 알았던 성혜인은 셔츠 단추를 전부 잠갔다. 하지만 가장 위에 있는 단추까지 잠그고 나서도 목에 난 흔적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이지 반승제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존재감이었다.성혜인은 이제야 핸드폰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핸드폰의 잠금 화면에는 같은 번호로 온 부재중 통화와 문자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반승제가 받아서 연결되었던 통화 명세는 물론 이미 삭제되고 없었다.성혜인은 서민규가 납치되었다는 문자를 보자마자 바로 장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는 일단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다.“어제는 또 누구의 침대에서 나뒹구느라 전화를 못 받았어? 지금 당장 찾아오지 않는다면 네 남편은 내 손에 맞아 죽을 줄 알아.”장석호는 또 핸드폰을 서민규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기절하기 직전인 그는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장석호는 사정없이 그의 뺨을 후려갈기며 말했다.“말해! 얼른 살려 달라고 말하라고!”성혜인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어젯밤 사무실에서 끝낼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호텔에서 계속하며 완전히 쉬어 버린 듯했다. 그것도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성혜인의 입술은 너무 힘껏 깨문 탓에 선명한 이빨 자국과 함께 약간 찢어져 있었다. 처음보다도 훨씬 거친 반승제 때문에 이번에는 입술에도 상처가 나고 말았다.서민규가 한참이 지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장석호가 핸드폰을 들고 다시 말했다.“만약 한 시간 안에 오지 않는다면 이 녀석 손가락을 잘라서 보내 주마!”전화를 끊고 난 성혜인은 부랴부랴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침 청소하러 온 호텔 직원과 마주쳤다.호텔 직원은 잠깐 놀란 듯하더니 성혜인과 잔뜩 어지럽혀진 침대를 번갈아 쳐다
장석호는 서민규와 함께 있었고, PW사의 다른 직원들은 병원에 있었다. 성휘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계속 귀찮게 군다면 성휘는 아마 두 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둘 수도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며 성혜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원래 열 번을 천천히 채우면서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했던 반승제는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이 가슴이 답답하기 시작했다. 아프다기보다는 짜증나는 답답함이었다.반승제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장석호 대표의 자료를 경찰서에 넘겨요. 그리고 내일 아침 9시 전에 PW사의 조사 소식을 보여줘요.”반승제를 빠르게 용건만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성혜인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반승제가 자료를 직접 경찰서에 넘기라고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사까지 해결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반승제는 뜨거운 시선을 따라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성혜인은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괜찮아요.”반승제는 아직도 두 사람이 함께 산장에 있을 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성혜인이 싫다고 했을 때 바로 멈췄었다.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기억 상실이라도 한 것처럼 잊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신사답지 못한 건 전부 서민규 때문이었다. 성혜인이 그를 위해 자신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신사다워야 할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저녁 8시, 호텔에서 기다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침에 나오며 약을 바른 찢어진 그곳은 갑자기 찌릿찌릿하기 시작했다. 반승제와 첫날밤을 보낸 후에 산 약을 이렇게 다시 쓰게 될 줄은 또 몰랐다.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성혜인에게는 거절할 자격 따위가 없었다. 몸은 점점 경직 되고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흥건하다고 한들 그녀는 가만히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성혜인은 결국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를 끄덕였다.“알겠어요.”“다른 용건은?”반
중년 여자는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손님은 어떤 스타일을 입어도 다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우리나라 여성분들은 과하게 보수적이어서 문제라니까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것저것 다 입어 봐요. 이쪽에 있는 도구는 필요하지 않아요?”성혜인은 중년 여자가 내민 두 가지 스타일의 속옷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가방 안에 밀어 넣고는 부랴부랴 결제를 끝냈다. 그리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푹 숙인 채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탔다. 속옷이 들어 있는 가방을 조수석으로 내던진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심장은 주체가 되지 않고 미치도록 뛰고 있었다.그녀는 그 길로 호텔에 돌아가서는 반승제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한 저녁 8시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지만 미리 샤워를 하는 등 준비가 필요했다. 샤워하고 나가서는 마구잡이로 가방에 넣었던 속옷을 꺼냈다.처음에는 그래도 청순한 스타일이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아서 꺼내 봤는데... 속옷과 마주한 순간 손에 힘의 풀려서 그대로 놓쳐버리고 말았다. 뜨거운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져서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거의 반시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겨우 속옷을 걸쳤다.하얀 속옷은 그녀의 뽀얀 피부와 완전히 어울렸다. 더구나 독특한 디자인 덕에 원래도 좋았던 몸매를 더욱 눈에 띄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곧바로 외투를 걸쳐 입었다. 시침이 8시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반씨 저택에 있었다. 반태승이 갑자기 호출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반태승에게 회사의 근황을 보고 했다. 하지만 반태승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혜인이랑은 요즘 잘 지내고 있니? 증손주는 언제 보여줄 셈이야?”반승제는 이제야 자신에게 부인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만약 반태승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깔끔하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가 그를 귀찮게 굴지
반태승은 이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예전 같으면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최소 반시간은 걸려야 대국 한 판을 끝냈다. 하지만 오늘 밤 반태승은 10분 만에 반승제에게 참패하고 말았다.“혹시 지금까지 일부러 나한테 져준 거니?”반태승은 놀라운 듯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는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한 판 더해!”반승제는 벽걸이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어느덧 7시 51분이 되었다.“이번으로 다섯 번째다. 바둑에 집중하지 않고 왜 자꾸 시계만 봐?”반태승은 눈치가 아주 빨랐다, 그래서 반승제가 집중을 못하는 것을 한 눈에 보아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10분 만에 대국을 끝낸 것을 보고서는 흐뭇함을 숨길 수 없었다.‘역시 내 손자다워. 혜인이랑도 아주 잘 어울리는군.’“그러고 보니 저택에 내가 혜인이랑 금방 만났을 때의 사진이 있다, 온 김이 같이 구경이나 하자꾸나. 병원에서 나를 간호할 때 찍은 사진인데, 애가 얼마나 참하던지.”반승제는 성혜인의 사진 따위를 볼 생각이 없었다. 이때 마침 협력사에서 전화가 오기에 그는 이를 핑계 삼아 몸을 일으켰다.“할아버지, 협력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오전의 회의 내용에 관해 토론해야 하니 이만 일어나 볼게요.”반태승은 한숨을 쉬었다. 반승제가 자꾸만 시계를 보던 것은 합작사와의 통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 열정을 혜인이한테 줬다면 아이를 낳고도 남았을 거다. 가봐, 일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집에 마누라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반승제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기 전에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8시.그는 합작사의 전화를 무시한 채 곧장 호텔로 향했다. 그러자 시간은 어느덧 8시 30분이 되었다.이때 심인우가 전화로 장석호의 체포 소식을 전했다. PW사의 행보도 전부 밝혀졌고 내일 아침이면 파산 뉴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반승제는 별 다른 말없이 짧게 대답하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심인우는 SY그
성혜인은 머리를 들어 간호사를 바라봤다. 그녀가 통화하는 사이에 신예준이 먼저 다가가서 말하고 있었다.“저희는 서민규 친구예요. 민규 어떻게 됐어요?”“지금으로서는 뇌진탕으로 판단되지만 진단을 위해서는 후속 검사가 필요해요. 그러니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신예준은 한쪽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그는 보호자보다는 환자에 가까워보였다.성혜인은 4000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 신예준에게 건네줬다.“예준 씨, 이건 민규 씨의 병원비에요. 혹시 모자라면 저한테 연락해요.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신예준은 수표를 힐끗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부자들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든 순간은 강민지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번 일은 민지한테 비밀로 해줘요. 민지가 알면 걱정할까 봐서요.”혹시라도 반승제가 열 받고 PW사에 대한 조사를 취하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던 성혜인은 신예준의 표정을 살펴볼 새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요, 민지한테는 말하지 않을게요. 오늘 죄송했어요. 서민규 씨한테는 다음에 직접 와서 사과할게요.”신예준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표를 받아 들었다.“네, 이 돈은 제가 잘 전해줄게요.”성혜인은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호텔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지 교통정체가 아주 심했다. 그래서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40분이나 소요하고 말았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한 시간밖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분일초가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온몸을 울릴 만큼 크게 뛰었다.마음이 너무 급했던 탓인지 하필이면 교통사고가 나서 성혜인은 운전대에 머리까지 박고 말았다. 혼란 속에서 상대방은 경찰에 신고하고 그녀도 함께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방 속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면서 말았다.“죄송하지만 제가 엄청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요. 배상은 통화로
지금의 성혜인은 서큐버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길쭉한 다리, 잘록한 허리, 그리고 우아하게 묶은 검은색 머리칼... 성혜인이여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조합이었다. 만약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면 구역질만 나왔을 것이다.화가 순식간에 가라앉은 반승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성혜인을 훑어보며 말했다.“가까이 와 봐.”낯선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던 성혜인은 잠깐 멈칫하다가 반승제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그의 무릎에 앉았다. 똑같은 바디워시의 향기가 한데 어울렸다.성혜인은 너무 긴장한 탓에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반승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의 무릎에 앉을 때도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앉았다. 그 모습이 귀엽기만 했던 반승제는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물었다.“이런 속옷 입어 본 적 있어?”반승제는 리본으로 묶은 매듭을 만졌다. 마치 잘 포장된 선물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숨결이 성혜인의 몸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다.“아... 아니요.”반승제는 미소를 지으며 성혜인의 뒤통수를 잡더니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두 개의 몸을 하나로 만들 것처럼 말이다.“네 남편도 참 무식해. 이런 물건을 함부로 쓰다니.”성혜인은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등에 부드러운 이불이 닿았다.반승제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특히 성혜인이 몽롱한 표정으로 힘겹게 키스를 받아 주는 것을 보고서는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인지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귀가에 들리는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불타는 밤이 지나가고... 반승제는 새벽 6시가 되어서야 성혜인을 놓아줬다.이틀 연속 시달린 성혜인은 끝나기 바쁘게 기절하듯 잠들었다. 발그레한 얼굴만 내민 채 이불속에 파묻힌 그녀와 다르게 반승제는 멀쩡하게 서서 샤워 가운을 걸쳤다. 느슨하게 묶은 매듭 사이로는 단단한 근육이 드러났다.이때 반승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온시
마음이 움직인 반승제는 키스하고 싶어져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성혜인이 얼굴을 돌린 탓에 입술은 볼에 닿아 버렸다.“저 아직 씻지도 않았어요.”보다시피 성혜인은 분위기를 깨는 분야의 고수가 틀림없었다.성혜인의 한 마디에 흥이 깨진 반승제는 경고의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제 풀에 찔린 그녀는 감히 반승제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성혜인은 그렇게 머리를 돌린 채로 한참 방황하다가 마지못해 물었다.“혹시 제가 입을 만한 옷이 있나요?”반승제는 성혜인이 어제도 열어봤었던 옷장 앞으로 가서 자신이 셔츠를 대충 집어 그녀에게 건네줬다“입어.”성혜인은 한숨 돌리며 주섬주섬 셔츠를 입었다. 반승제의 셔츠는 그녀에게 원피스처럼 길었다.어젯밤 너무 급하게 온 탓에 여벌의 속옷을 가져 오지 못했다. 그래서 셔츠 속에는 아무런 가림막도 없었다. 대부분 여자가 불편하게 여길 불안한 느낌에 성혜인은 하나 남은 섹시한 스타일의 속옷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금세 포기해 버렸다.“씻으러 가.”반승제는 성혜인의 귀에 짧게 키스하며 마치 애인처럼 다정하게 속삭였다. 반승제의 다정함에,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 느껴 보는 타인의 다정함에 그녀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더구나 몸이 또 속도 없이 반응해 버리는 것 같아서 황급히 욕실로 도망갔다.반승제의 시선은 시종일관 성혜인을 향해 있었다. 딱딱하기만 하던 자신의 셔츠가 이런 느낌을 낼 수 있을 줄은 또 몰랐다.욕실 안으로 들어간 성혜인은 어제 벗어 둔 옷이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주머니 안에 담아 매듭을 꼭 맸다. 이대로 집으로 가져가서 세탁할 예정이었다. 그 다음에야 그녀는 세수와 칫솔질을 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머리를 들자 돌연 거울 속에 나타난 반승제가 보였다.반승제는 성큼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녀를 품속에 가두고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머리를 돌려 키스를 퍼부었다.좁은 환경과 야릇한 분위기에 성혜인은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때 반승제의 손은 그녀의 다리를 타고
설연주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한밤중에 밖에서 나는 기척에 잠이 깼다.오번이 방으로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렸다.“최씨 가문 사람들이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더는 여기 머물 수 없어요.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요. 내일 아침 여덟 시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해요. 반년 동안 플로리아에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설연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마친 후 설우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우현 오빠, 일곱 시 경성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면 안 돼요? 제발요.]메시지 끝의 몇 글자에서 비굴함이 묻어났지만 그녀는 결국 그 메시지를 보냈다.설우현은 요즘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고 심지어 어젯밤은 잠을 한숨도 자지 않았다.설연주의 메시지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휴대폰을 옆에 던져두고 세면을 시작했다.세면을 마친 그는 수영복을 입고 30분 정도 수영을 했다.수영을 마치고 나오자 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도련님, 누군가가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설우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곧 일곱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설연주의 번호가 떠 있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전화가 다시 울렸다.전화를 받자마자 설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안 올 거예요?”설우현은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설연주는 휴대폰을 꽉 쥔 채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물었다.“어젯밤 언제 깼어요? 내가 약 넣은 거 알고 있었어요?”설우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설연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오빠, 이번에 떠나면 반년 동안 돌아오지 못해요. 그저 한 번만 보고 싶었어요.”오번은 이미 오래전에 그녀에게 혼자만의 감상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었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설우현은 그 아이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따라서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게다가 그 아이를 갖겠다고 고
설연주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대충 넘겨보려 했지만 설우현이 턱을 잡아들어올렸다.“정말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 생각해?”그녀는 몇 번이나 그의 한계를 시험하려 들었다.설연주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마치 죽이려면 죽여보라는 표정이었다.설우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 외투를 걸치던 중 설연주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그의 등 뒤에서 그를 안으며 애틋하게 말했다.“우현 오빠.”“여기 왜 돌아왔어? 최씨 가문 사람들이 널 찾고 있는 거 몰라? 일 년 전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아직도 그 일에 집착하고 있어.”두팔의 부모도 아직 그 문제를 놓지 않고 있는데 도대체 왜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보고 싶었어요.”설연주는 그를 안고 놓치기 싫다는 듯 꼭 붙잡고 있었다.설우현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는 손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 그 위에 얹으려 했지만 결국 멈추고 말았다.“놔.”“오빠.”설연주는 그가 이렇게 차갑게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서서히 그를 놓아주었다.설우현은 주저 없이 방 문을 열고 나가려 했고 설연주는 다급히 그를 붙잡으며 소리쳤다.“우현 씨!”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설연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오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다 됐어요? 이제 더는 못 버텨요. 최씨 가문 쪽에서 난리예요. 늦어도 아침 일곱 시까지는 빠져나와야 해요.”“다 끝났어요. 지금 내려갈게요.”오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설연주는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오번은 설우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말했다.“이번에 결혼식까지 망쳐놓고 아직도 설우현이 연주 씨를 좋게 봐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은 점점 미쳐가고 있어요.”설연주는 지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오번은 운전을 하며 말했다.“아기가 살아남지 못했
설우현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교회의 문이 벌컥 열리며 낯선 여자가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아기는 울고 있었고 두어 달 정도 되어 보였다.설우현이 이 무례한 방해자를 내보내라고 하려던 순간 중년 여성이 터뜨린 한마디에 모두가 술렁였다.“설우현 씨, 이 아이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때 연회에서 당신과 하룻밤을 보낸 사람은 사실 최서아 씨가 아니에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최서아를 바라보았다.최서아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스쳤고 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설우현은 이미 그 중년 여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최서아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우현 씨,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결혼을 취소하려는 거예요? 이러면 우리 최씨 가문과 설씨 가문 모두에게 큰 타격이에요. 진짜 이렇게 할 거예요?”설우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날 속였어?”최서아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 오래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당신을 곁에 둘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당신이 밖에서 아기를 데려와도 상관없어요. 같이 키우면 돼요. 난 진짜 당신을 좋아해요. 그런데 왜 항상 나를 보지 못하는 거예요?”최서아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하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러나 설우현은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아이를 살펴보았다.순박해 보이는 중년 여성은 아이를 그의 품에 건네며 말했다.“설우현 씨, 저는 그저 일을 부탁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할 일을 다 했으니 돌아가 보려 합니다.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그분이 분명히 아이의 아버지가 당신이라 했습니다.”설우현은 말없이 품에 안긴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어쩐지 이 아이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우선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았다.현장에 있던 하객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설씨 가문과 최씨 가문 사람들은 한데 모여 이번 일을 수습하기 시
설연주는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플로리아 국경 지역은 가난하고 혼란스러우며 인근 나라와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이곳은 빈곤하고 낙후하여 그녀와 같은 사람이 몸을 숨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오번이 이 지역을 잘 알고 있어 이곳에서 위험한 일을 겪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설연주의 머릿속에서는 설우현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평생 그가 그녀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설우현을 몰래 사랑하게 된 건 그녀의 잘못이라 생각했다.그녀의 마음이 그에게는 짐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오번의 말처럼 결국 자신만이 감동받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설연주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약을 입에 넣었다.“그냥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줘요. 나 진짜 설우현을 좋아하거든요.”그녀는 자포자기한 듯 속삭였다.“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됐어요. 왜 이렇게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 벌 받는 거겠죠. 예전에는 남자들을 그저 돈줄로만 여겼으니까. 하지만 설우현은 달라요.”오번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몸 상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연주 씨가 각오하고 있는 거라면 더 말릴 수는 없겠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해요.”설연주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설우현과 함께한 밤을 떠올렸다. 그는 침대에서 정말 대단했다.그가 그녀에게 남긴 흔적이 많았기에 임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로부터 일주일 후 설우현은 김현서가 피를 흘리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설우현은 줄곧 설연주가 약간의 잔꾀나 부릴 줄 아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독약을 구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설연주가 김현서를 처리한 건 과거에 김현서가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일까?설우현은 설연주의 과거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동안
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설연주는 나한테 없어. 원래 사람을 시켜서 멀리 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사라졌어.”이상하게도 설연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설연주와 얽힌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설우현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허튼수작을 부리는 여자일 뿐이었다.두팔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설연주를 찾아, 이 땅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두팔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설우현은 이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설기웅은 이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말했다.설우현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누구예요?”“최용호의 사촌 여동생이야. 한동안 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 넌 항상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약까지 구해왔더군.”설우현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여자는 얼굴이 낯익었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집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형,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아버지를 찾아갔어. 아버지는 너와 그 여자의 결혼을 고려하고 계셔.”설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 나더러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하지만 이내 설기웅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다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설우현이 가문을 위해 혼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면 최용호의 사촌 동생과 결혼해도 문제가 없었다.최용호는 설기웅의 친구였고 최씨 가문도 플로리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였다. 이 결혼은 양 가문에도 손색없는 혼사였다.설우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형,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는 특정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자신이 여자의 계략
설우현은 잠시 발걸음을 주춤했다.‘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뻔뻔해? 그래, 무릎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설연주는 두팔에게서 이미 잔혹한 고통을 겪은 뒤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우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설우현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그는 부하에게 설연주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설연주는 이번에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지난번처럼 고열이 계속되었다. 의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녀를 보내는 일을 미루고 오늘 밤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그도 병원에 머물며 그녀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설연주는 그가 떠나자마자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팔한테서 나왔어요?”오번은 원래 두팔을 따라다니며 설연주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떠난 뒤로 자신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약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당장 필요해요.”오번은 무슨 약인지 듣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연주 씨, 설마...”설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화 중임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네, 바로 그걸 원해요. 곧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설우현이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그 전에 딱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요?”오번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미쳤어요? 이 일이 들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이런 약 구할 수 있잖아요?”오번은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비밀 약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밤이 되어 설우현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흰색 정장을 입고 설기웅의 뒤를 따라 몇몇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는 중간에 2층에 올라가 친구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대신 술 한 잔을 마신 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평소 설연주는 다른 남자들에게 무척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유독 설우현에게만큼은 어딘가 진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그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설우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설연주가 더욱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설연주는 두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반면 두팔은 그녀의 이런 상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설연주를 탐하고 싶었고 지난번 사람을 시켜 길들였지만 그녀는 끝내 도망쳤다.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두팔은 설연주를 침대에 내리눌렀다.설연주의 얼굴에 잠시 공포가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게 변했다.두팔은 그녀의 겉옷을 벗겨내고 더 안쪽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설연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설연주는 반항할 마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심지어 마음속 깊이 설우현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후회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후회하거나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도 설연주의 머릿속엔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두팔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두팔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침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마침내 그가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려던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팔의 부하가 문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형님, 저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깜짝 놀란 설연주는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설우현이 서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두팔은 그를 알아보고 즉시 옷을 바로잡았다.“우현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 찾아
오번은 설우현의 선택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설연주를 정말로 혐오하는 듯했다. 결국 오번은 자기 힘으로 계속 설연주를 찾아야 했다.그러던 이틀 후 그에게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마침 그 의뢰는 두팔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팔이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오번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설연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음이 흔들렸다.“형님, 설연주를 계속 무릎 꿇리고 있을까요?”두팔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설우현의 사람들이 직접 설연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전에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당당하더니 이제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사흘 동안 계속 무릎 꿇리고 있어. 음식은 주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내버려둬.”오번은 통화 속 두팔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설연주가 두팔에게 넘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팔은 다시 한번 조건을 제시하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듣자 하니 해킹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우리 쪽으로 와볼 생각 없나? 충분한 보상은 보장하지.”오번은 고민 끝에 결국 두팔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그는 설연주를 만났다.설연주는 이미 이틀 밤낮을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등은 채찍 자국으로 가득했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그 끝은 두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설연주는 고개를 떨군 채 누구의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두팔은 갑자기 사슬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이윽고 두팔은 사슬을 조금씩 당기며 설연주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주야, 성씨를 바꿔가며 꼼수를 부렸지만 결국 설우현이 직접 널 내게 넘겨줬잖아. 기분이 좀 상했겠다?”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팔의 구두가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설연주는 손가락을 오그리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두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저번에 겨우 길들였더니 네가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도망갈 기회를 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