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의 기억이 갑자기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성혜인의 모습도 테이블 위에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던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답장을 포기한 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애초에 반승제가 답장하지 않을 줄 알았던 성혜인은 셔츠 단추를 전부 잠갔다. 하지만 가장 위에 있는 단추까지 잠그고 나서도 목에 난 흔적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이지 반승제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존재감이었다.성혜인은 이제야 핸드폰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핸드폰의 잠금 화면에는 같은 번호로 온 부재중 통화와 문자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반승제가 받아서 연결되었던 통화 명세는 물론 이미 삭제되고 없었다.성혜인은 서민규가 납치되었다는 문자를 보자마자 바로 장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는 일단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다.“어제는 또 누구의 침대에서 나뒹구느라 전화를 못 받았어? 지금 당장 찾아오지 않는다면 네 남편은 내 손에 맞아 죽을 줄 알아.”장석호는 또 핸드폰을 서민규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기절하기 직전인 그는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장석호는 사정없이 그의 뺨을 후려갈기며 말했다.“말해! 얼른 살려 달라고 말하라고!”성혜인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어젯밤 사무실에서 끝낼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호텔에서 계속하며 완전히 쉬어 버린 듯했다. 그것도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성혜인의 입술은 너무 힘껏 깨문 탓에 선명한 이빨 자국과 함께 약간 찢어져 있었다. 처음보다도 훨씬 거친 반승제 때문에 이번에는 입술에도 상처가 나고 말았다.서민규가 한참이 지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장석호가 핸드폰을 들고 다시 말했다.“만약 한 시간 안에 오지 않는다면 이 녀석 손가락을 잘라서 보내 주마!”전화를 끊고 난 성혜인은 부랴부랴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침 청소하러 온 호텔 직원과 마주쳤다.호텔 직원은 잠깐 놀란 듯하더니 성혜인과 잔뜩 어지럽혀진 침대를 번갈아 쳐다
장석호는 서민규와 함께 있었고, PW사의 다른 직원들은 병원에 있었다. 성휘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계속 귀찮게 군다면 성휘는 아마 두 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둘 수도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며 성혜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원래 열 번을 천천히 채우면서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했던 반승제는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이 가슴이 답답하기 시작했다. 아프다기보다는 짜증나는 답답함이었다.반승제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장석호 대표의 자료를 경찰서에 넘겨요. 그리고 내일 아침 9시 전에 PW사의 조사 소식을 보여줘요.”반승제를 빠르게 용건만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성혜인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반승제가 자료를 직접 경찰서에 넘기라고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사까지 해결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반승제는 뜨거운 시선을 따라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성혜인은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괜찮아요.”반승제는 아직도 두 사람이 함께 산장에 있을 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성혜인이 싫다고 했을 때 바로 멈췄었다.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기억 상실이라도 한 것처럼 잊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신사답지 못한 건 전부 서민규 때문이었다. 성혜인이 그를 위해 자신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신사다워야 할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저녁 8시, 호텔에서 기다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침에 나오며 약을 바른 찢어진 그곳은 갑자기 찌릿찌릿하기 시작했다. 반승제와 첫날밤을 보낸 후에 산 약을 이렇게 다시 쓰게 될 줄은 또 몰랐다.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성혜인에게는 거절할 자격 따위가 없었다. 몸은 점점 경직 되고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흥건하다고 한들 그녀는 가만히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성혜인은 결국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를 끄덕였다.“알겠어요.”“다른 용건은?”반
중년 여자는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손님은 어떤 스타일을 입어도 다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우리나라 여성분들은 과하게 보수적이어서 문제라니까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것저것 다 입어 봐요. 이쪽에 있는 도구는 필요하지 않아요?”성혜인은 중년 여자가 내민 두 가지 스타일의 속옷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가방 안에 밀어 넣고는 부랴부랴 결제를 끝냈다. 그리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푹 숙인 채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탔다. 속옷이 들어 있는 가방을 조수석으로 내던진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심장은 주체가 되지 않고 미치도록 뛰고 있었다.그녀는 그 길로 호텔에 돌아가서는 반승제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한 저녁 8시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지만 미리 샤워를 하는 등 준비가 필요했다. 샤워하고 나가서는 마구잡이로 가방에 넣었던 속옷을 꺼냈다.처음에는 그래도 청순한 스타일이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아서 꺼내 봤는데... 속옷과 마주한 순간 손에 힘의 풀려서 그대로 놓쳐버리고 말았다. 뜨거운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져서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거의 반시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겨우 속옷을 걸쳤다.하얀 속옷은 그녀의 뽀얀 피부와 완전히 어울렸다. 더구나 독특한 디자인 덕에 원래도 좋았던 몸매를 더욱 눈에 띄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곧바로 외투를 걸쳐 입었다. 시침이 8시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반씨 저택에 있었다. 반태승이 갑자기 호출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반태승에게 회사의 근황을 보고 했다. 하지만 반태승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혜인이랑은 요즘 잘 지내고 있니? 증손주는 언제 보여줄 셈이야?”반승제는 이제야 자신에게 부인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만약 반태승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깔끔하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가 그를 귀찮게 굴지
반태승은 이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예전 같으면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최소 반시간은 걸려야 대국 한 판을 끝냈다. 하지만 오늘 밤 반태승은 10분 만에 반승제에게 참패하고 말았다.“혹시 지금까지 일부러 나한테 져준 거니?”반태승은 놀라운 듯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는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한 판 더해!”반승제는 벽걸이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어느덧 7시 51분이 되었다.“이번으로 다섯 번째다. 바둑에 집중하지 않고 왜 자꾸 시계만 봐?”반태승은 눈치가 아주 빨랐다, 그래서 반승제가 집중을 못하는 것을 한 눈에 보아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10분 만에 대국을 끝낸 것을 보고서는 흐뭇함을 숨길 수 없었다.‘역시 내 손자다워. 혜인이랑도 아주 잘 어울리는군.’“그러고 보니 저택에 내가 혜인이랑 금방 만났을 때의 사진이 있다, 온 김이 같이 구경이나 하자꾸나. 병원에서 나를 간호할 때 찍은 사진인데, 애가 얼마나 참하던지.”반승제는 성혜인의 사진 따위를 볼 생각이 없었다. 이때 마침 협력사에서 전화가 오기에 그는 이를 핑계 삼아 몸을 일으켰다.“할아버지, 협력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오전의 회의 내용에 관해 토론해야 하니 이만 일어나 볼게요.”반태승은 한숨을 쉬었다. 반승제가 자꾸만 시계를 보던 것은 합작사와의 통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 열정을 혜인이한테 줬다면 아이를 낳고도 남았을 거다. 가봐, 일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집에 마누라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반승제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기 전에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8시.그는 합작사의 전화를 무시한 채 곧장 호텔로 향했다. 그러자 시간은 어느덧 8시 30분이 되었다.이때 심인우가 전화로 장석호의 체포 소식을 전했다. PW사의 행보도 전부 밝혀졌고 내일 아침이면 파산 뉴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반승제는 별 다른 말없이 짧게 대답하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심인우는 SY그
성혜인은 머리를 들어 간호사를 바라봤다. 그녀가 통화하는 사이에 신예준이 먼저 다가가서 말하고 있었다.“저희는 서민규 친구예요. 민규 어떻게 됐어요?”“지금으로서는 뇌진탕으로 판단되지만 진단을 위해서는 후속 검사가 필요해요. 그러니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신예준은 한쪽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그는 보호자보다는 환자에 가까워보였다.성혜인은 4000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 신예준에게 건네줬다.“예준 씨, 이건 민규 씨의 병원비에요. 혹시 모자라면 저한테 연락해요.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신예준은 수표를 힐끗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부자들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든 순간은 강민지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번 일은 민지한테 비밀로 해줘요. 민지가 알면 걱정할까 봐서요.”혹시라도 반승제가 열 받고 PW사에 대한 조사를 취하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던 성혜인은 신예준의 표정을 살펴볼 새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요, 민지한테는 말하지 않을게요. 오늘 죄송했어요. 서민규 씨한테는 다음에 직접 와서 사과할게요.”신예준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표를 받아 들었다.“네, 이 돈은 제가 잘 전해줄게요.”성혜인은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호텔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지 교통정체가 아주 심했다. 그래서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40분이나 소요하고 말았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한 시간밖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분일초가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온몸을 울릴 만큼 크게 뛰었다.마음이 너무 급했던 탓인지 하필이면 교통사고가 나서 성혜인은 운전대에 머리까지 박고 말았다. 혼란 속에서 상대방은 경찰에 신고하고 그녀도 함께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방 속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면서 말았다.“죄송하지만 제가 엄청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요. 배상은 통화로
지금의 성혜인은 서큐버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길쭉한 다리, 잘록한 허리, 그리고 우아하게 묶은 검은색 머리칼... 성혜인이여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조합이었다. 만약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면 구역질만 나왔을 것이다.화가 순식간에 가라앉은 반승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성혜인을 훑어보며 말했다.“가까이 와 봐.”낯선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던 성혜인은 잠깐 멈칫하다가 반승제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그의 무릎에 앉았다. 똑같은 바디워시의 향기가 한데 어울렸다.성혜인은 너무 긴장한 탓에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반승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의 무릎에 앉을 때도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앉았다. 그 모습이 귀엽기만 했던 반승제는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물었다.“이런 속옷 입어 본 적 있어?”반승제는 리본으로 묶은 매듭을 만졌다. 마치 잘 포장된 선물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숨결이 성혜인의 몸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다.“아... 아니요.”반승제는 미소를 지으며 성혜인의 뒤통수를 잡더니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두 개의 몸을 하나로 만들 것처럼 말이다.“네 남편도 참 무식해. 이런 물건을 함부로 쓰다니.”성혜인은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등에 부드러운 이불이 닿았다.반승제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특히 성혜인이 몽롱한 표정으로 힘겹게 키스를 받아 주는 것을 보고서는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인지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귀가에 들리는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불타는 밤이 지나가고... 반승제는 새벽 6시가 되어서야 성혜인을 놓아줬다.이틀 연속 시달린 성혜인은 끝나기 바쁘게 기절하듯 잠들었다. 발그레한 얼굴만 내민 채 이불속에 파묻힌 그녀와 다르게 반승제는 멀쩡하게 서서 샤워 가운을 걸쳤다. 느슨하게 묶은 매듭 사이로는 단단한 근육이 드러났다.이때 반승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온시
마음이 움직인 반승제는 키스하고 싶어져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성혜인이 얼굴을 돌린 탓에 입술은 볼에 닿아 버렸다.“저 아직 씻지도 않았어요.”보다시피 성혜인은 분위기를 깨는 분야의 고수가 틀림없었다.성혜인의 한 마디에 흥이 깨진 반승제는 경고의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제 풀에 찔린 그녀는 감히 반승제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성혜인은 그렇게 머리를 돌린 채로 한참 방황하다가 마지못해 물었다.“혹시 제가 입을 만한 옷이 있나요?”반승제는 성혜인이 어제도 열어봤었던 옷장 앞으로 가서 자신이 셔츠를 대충 집어 그녀에게 건네줬다“입어.”성혜인은 한숨 돌리며 주섬주섬 셔츠를 입었다. 반승제의 셔츠는 그녀에게 원피스처럼 길었다.어젯밤 너무 급하게 온 탓에 여벌의 속옷을 가져 오지 못했다. 그래서 셔츠 속에는 아무런 가림막도 없었다. 대부분 여자가 불편하게 여길 불안한 느낌에 성혜인은 하나 남은 섹시한 스타일의 속옷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금세 포기해 버렸다.“씻으러 가.”반승제는 성혜인의 귀에 짧게 키스하며 마치 애인처럼 다정하게 속삭였다. 반승제의 다정함에,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 느껴 보는 타인의 다정함에 그녀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더구나 몸이 또 속도 없이 반응해 버리는 것 같아서 황급히 욕실로 도망갔다.반승제의 시선은 시종일관 성혜인을 향해 있었다. 딱딱하기만 하던 자신의 셔츠가 이런 느낌을 낼 수 있을 줄은 또 몰랐다.욕실 안으로 들어간 성혜인은 어제 벗어 둔 옷이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주머니 안에 담아 매듭을 꼭 맸다. 이대로 집으로 가져가서 세탁할 예정이었다. 그 다음에야 그녀는 세수와 칫솔질을 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머리를 들자 돌연 거울 속에 나타난 반승제가 보였다.반승제는 성큼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녀를 품속에 가두고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머리를 돌려 키스를 퍼부었다.좁은 환경과 야릇한 분위기에 성혜인은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때 반승제의 손은 그녀의 다리를 타고
반승제는 테이블 앞으로 가서 서류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주영훈 선생님의 그림이 최근 해외 경매에 나온다는 말이 있거든. 그래서 혹시 가려면 나도 같이 가겠다고 말하려고 왔어.”윤단미는 마치 마지못해 따라가 준다는 식으로 말하며 반승제의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들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나 아직 아무 것도 못 먹었어. 우리 같이 먹자.”반승제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차갑게 나가라는 말을 돌려서 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네가 선생님 그림을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해외까지 가서 배워온 거 알지? 그러고 보니 우리 선생님 꽤 자랑스럽게 여기던 제자가 있었는데 누군지 몰라. 들어보니 꽤 젊은 것 같더라고.”이렇게 말하던 윤단미는 곧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뭐, 보나마나 어디 가까운 친척이 아니겠어?”“윤단미, 나 지금 바빠.”반승제는 미간을 구기며 또다시 나가라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호텔 방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기분이 찝찝했던 윤단미는 이대로 나갈 수 없었다. 이건 여자로서의 직감이었다.“승제야, 오늘 아직 청소 안 했지?”윤단미는 성큼성큼 침실로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실 문을 열어보자 침대 위에 놓인 두 개의 베개가 보였다. 반승제의 습관대로라면 절대 베개를 두 개 놓고 혼자 잘 리가 없었다.윤단미는 불안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옷장을 향해 걸어갔다. 하필이면 그 속에 숨어 있던 성혜인은 점점 가까워지는 하이힐 소리를 들으며 숨을 꾹 참았다.‘이제는 피할 데도 없는데... 앞으로 윤단미 씨한테 죽도록 괴롭힘을 당하겠구나.’윤단미가 옷장 문을 열려는 순간 반승제가 방문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로 덤덤하게 말했다.“건드리지 마. 나 결벽증 있어.”반승제는 남이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다. 윤단미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침실 안으로 들어간 것을 후회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너한테 넥타이 선물을 하고 싶은데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