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북소리처럼 울렸다.기분은 마치 죽음을 앞둔 물고기가 된 듯 했다.옷장 속에 가둬져서 반승제와 키스하게 될 줄은 또 몰랐기 때문이다.반승제는 한참 후에야 몸을 일으켜 그윽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승제에게 삼켜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성혜인이 정신 차리기도 전에 반승제가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다. 속옷의 부재를 잘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배고프지? 나가서 아침 먹자.”성혜인은 시름을 놓고 반승제를 따라 나갔다. 조금 전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을 때는 끼니도 거른 채 또 침대로 향하게 될 줄 알았다. 만약 그녀의 상상대로 되었다면 오늘 내로 침대에서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었다.그녀는 반승제를 제외한 다른 남자와 만나 본 적 없었다. 그래서 반승제의 정력이 과연 정장인지 판단할 기준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윤단미가 죽지 않고 오래 버티기를 바랄 뿐이었다.거실로 나간 성혜인은 윤단미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지 걱정 되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녀가 식사를 끝내기 바쁘게 그렇게 두려워하던 초인종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다행히도 이번에 찾아온 사람은 윤단미가 아닌 쇼핑백을 들고 있는 심인우였다. 쇼핑백 속에는 속옷을 포함한 한 세트의 여자 옷이 있었다.성혜인은 쇼핑백을 건네받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침실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옷을 입고 나갔을 때는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대표님, 저 다 됐어요.”반승제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 이틀 동안 자신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서 편히 쉬어.”성혜인은 반승제의 입에서 나온 ‘쉬어’라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 물어보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서민규였다.그녀는 반승제도 함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수락 버튼을 누르자마자 일부러 반말로 말을 걸었다.“민규 씨, 무슨
그때까지만 해도 성혜인은 반태승이 말한 첫째라는 사람이 반승제의 사촌 형인 줄 알았다. 친형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 알았다. 백연서의 두 아들이 전부 후계자 후보에 올랐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반승제는 형이 죽은 후 반강제적으로 후계자가 되었고 반태승은 결혼과 가정으로 그를 국내에 묶어 두려고 했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의 예상과 달리 바로 해외로 가 버렸고 상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남들은 반승제가 일 밖에 모르는 냉혈인 인줄 안다. 진정한 반승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이는 아마 절대 없을 것이다.성혜인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직 두 번째인데 벌써부터 반승제와 이런 거래를 한 것이 후회 되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을 이미 벌인 이상 반승제가 침대에서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 더구나 병원까지 간 적 있으면서 또 겁 없이 찾아온 자신을 탓해야지.성혜인이 침묵에 잠긴 것을 보고 반승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정장을 입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 전혀 다른 고귀한 사람으로 변신해서 그녀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아직 여덟 번 남았어. 연락 잘 받아.”평범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위협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문을 열자 심인우는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페니 씨,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두 사람은 반승제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렇게 윤단미가 매복하고 있는 호텔 1층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갈 수 있었다.성혜인은 차에 올라탄 다음에도 약간 어리벙벙했다. 반승제가 했던 모든 말이 그녀의 피부를 뚫고 세포에 각인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로즈가든에 도착한 성혜인은 차에서 내려 심인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집으로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반승제의 체력은 진짜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둘째 날부터 벌써 근육통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하필이면 이때 강민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수락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 나 한 5분 있으면 너희 집 도착이
혜인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붉은 흔적들이 하나 또 하나 곳곳에 이어져 있어서, 키스 상대가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우물쭈물했다.민지는 ‘요놈 잡았다’라는 표정으로 혜인을 바라보았다.“저번에 그 사람이야? 또 만났어?”어쩔 수 없었던 혜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민지는 그녀를 확 끌어당겨 자기 옆에 앉혔다.“도대체 누구야? 네가 저번에 그 사람 엄청나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나 안 믿었거든. 왜냐하면 우리 예준 씨보다 엄청난 사람을 난 여태 본 적이 없어서... 근데 오늘 네 꼴을 보니 믿어지네. 그 사람 평생 여자 한번 못 만나봤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진짜 대단하네, 성혜인. 어떻게 그런 사람을 다 만났대 그래?”민지의 마음 한구석에서 부러움이 몰려왔다.“도대체 누군데! 나한테만 알려줄 수 없어?”혜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민지는 혜인이 말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은, 아무리 떼를 쓰고 달래봐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심통이 난 민지는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 그럴 수 있지. 괜찮은 남자 만났는데 절친한테 공유도 안 해주고 말이야. 어휴, 나는 너한테 줄 선물도 사 왔는데, 헛일했네.”민지의 이런 태도를 보자 당황한 혜인이 그녀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민지야, 이번 일은 진짜 미안해.”진심으로 혜인을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민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다시 밝아졌다.“이왕 이렇게 된 거, 너한테 가게 하나 추천해줄게. 그 가게 소품이 완전 일품이야.”혜인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그때, 곁에 있던 가방이 그녀가 건드려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안에 있던 채 입어보지 못한 검은 속옷이 밖으로 나왔다.눈치 빠른 혜인은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소파 밑으로 차 넣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개 코였던 민지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바로 집어 들었다. 그제야 옷을 자세히 본 민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와, 성혜인, 너 나 몰래 이렇게 놀고 있었냐!”
혜인의 바보 같은 모습을 또다시 보게 된 민지는 화가 나다 못 해 눈이 반쯤 돌아버릴 지경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남자를 얻은 너의 운이 너무 부러웠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오히려 너 같은 미인과의 잠자리를 얻은 그 남자의 운이 부럽다, 부러워! 어떻게 첫 경험을 준 것도 모자라, 피임약까지 사 먹을 생각을 해? 도대체 너한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게 맞는지 잘 좀 생각해보라고!”민지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혜인의 몸에 난 흔적은, 그 남자가 얼마나 그녀를 ‘아꼈는’지 잘 알 수 있었다.공적인 일에서는 냉정하고 이성적이지만 사적인 일, 침대 위에서는 한없이 수줍고 겁이 많은 그런 여자. 혜인이 같은 여자는 남자들이 이상형과 다름없을 것이다.민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이렇게 하자, 내가 아는 연예인 한 명이 있거든? 팬도 수백만 명에 엄청나게 잘생겼어. 그 사람을 네 잠자리 파트너로 만들어 줄게, 어때? 그 사람 몸이 너무 좋아서 지난주에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었어. 우리 쥬얼리 엠버서더이기도 하고. 이 정도 남자는 돼야 네가 손해를 안 보지.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연락처 알아볼게, 오늘 밤에 한 번 만나봐.”민지네와 같은 진정한 재벌 집의 사람들은 절대 연예인을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하지 않는다.연예인들은 미디어가 만들어 낸 데이터 뭉치와 같은 존재이므로 진정한 재벌에게 그들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민지는 비록 몹시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문란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그녀가 진짜로 어딘가 전화를 걸려고 하자, 혜인이 다급히 손을 뻗어 말렸다.“됐어. 나도 더는 못 견뎌.”그녀의 입에서 못 견디겠다는 말이 나오자 민지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하지만 혜인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뻗었던 손을 거뒀다.그러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뜬금없이 물었다.“남자의 정력을 줄일 방법 같은 건 없어?”민지는 몇 초 동안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이내 뒤로 자빠지며 웃었다.어처구니없는 물
한숨을 돌린 혜인은 그제야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어떻게 됐든 간에,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그때 성휘가 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얘기했다.“혜인아...”그는 나머지 말을 더 뱉지 못했다.너무 놀란 나머지 눈앞이 새까매졌기 때문이다.“아빠, 괜찮아요. 편히 쉬고만 계세요.”성휘는 입을 벌리니 입안이 온통 쓴맛으로 가득 찬 듯했다.1분 정도 지나 괜찮아지자 그가 다시 물었다.“반승제냐?”“네.”침묵이 얼마간 흘렀다. 성휘는 혜인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는 것 같았던 승제가, SY그룹의 사업을 가로막아 파산에까지 이르게 한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절벽 끝에서 SY그룹을 도와주리라 전혀 생각지 못했다.“좋아, 알겠다. 내 직접 반씨 가문에 가서 회장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겠구나.”그러자 혜인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아빠, 이제 이런 쓸데없는 일 하지 마세요. 승제 씨가 우리 사업을 가로막은 건 바로 아빠가 할아버지랑 너무 자주 연락했기 때문이에요. 할아버지는 결혼으로 승제 씨를 묶어놓으려고 했는데 아빠도 봐서 아시죠? 그 사람 바로 3년 동안 해외로 나가 있는 거. 승제 씨는 남한테 간섭받는 걸 극도로 싫어해요. SY그룹이 살아남으려면, 단지 그 사람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면 돼요.”성휘는 눈물을 닦았다. 아직 SY그룹을 지켜냈다는 놀라움과 충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딸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져 왔다.“알겠어, 혜인아. 아빠가 계속하는 말 알지? 네가 회사를 이어받아야 한다.”혜인이와 같은 실내 디자이너들은 원래 늘 많은 고객을 상대하고 인테리어 시장을 잘 파악해야 했는데 이미 그녀는 관련 분야의 기초적인 실습은 끝마친 상태였다.비록 정신을 잃었었어도 성휘는 단 한 번도 회사를 자신의 딸에게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바꾼 적이 없다.성한이 아무리 그의 환심을 샀다 해도, 그는 늘 그들이 가지고 있는 SY그룹의 지분만을 고려할 뿐이었다.성휘의 말을 들은 혜인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참 우스운 일이었다. 당시 스승님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묻지도 않았고, 자신 역시 주영훈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그도 그럴 것이 주영훈의 미술품은 매우 이름이 나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고 카메라를 싫어하다 보니, 그의 실물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어느 한번은 한 미술작품이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의 화풍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해 물어보니, 다름 아닌 주영훈의 작품이었다. 자신이 주영훈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이로 인해 단 한 번도 사교계 모임에 참석한 적 없는 그에게 사교계 인사들은 허풍에 찌든 위선적인 사람에 불과했다.“페니야, 너에게 내 작품을 보냈다.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한번 봐 보아라. 정말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말이야. 이 작품을 경매에 내놓으라고 나한테 얼마나 오래 물어봤는지 몰라. 내가 애매모호하게 대답해놨으니 네가 원하면 난 바로 너에게 줄 생각이다.”혜인에 대한 주영훈의 제자 사랑이 넘쳐나 보였다.혜인을 제자로 삼은 처음 몇 해 동안, 그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는데 특히 서천에 있을 당시에, 거의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때문에 그 해, 혜인의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그러고 나서 얼마 안 지나 더는 가르쳐 줄 게 없다고 생각한 주영훈은 그 길로 다시 영감을 찾기 위해 세계 방방곡곡으로 떠났다.혜인은 그림을 확인해보았다.그의 작품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른 수준이었는데, 매 작품 속의 풍경이 도화지를 뚫고 나올 듯하였다.“스승님, 또 새로운 영감을 얻으신 거예요? 붓 터치가 더욱 노련해지신 게 꼭 다른 경지에 도달하신 것 같아요.”주영훈은 혜인을 제자로서 매우 아꼈는데 그녀가 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듣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경매 건은 이미 거절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사람을 시켜 너에게 그림을 보내마. 승제 할머니께서도 곧 생신이지 않냐? 감히 장담하건대 네가 이 그림을 가져다드리면 틀림없이 너
“내가 네 파트너가 되어줄게!”그녀가 무척 기쁜 말투로 말했다.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더니 손에 들려있던 커피를 내려놓았다.“단미야, 나는 경매에 가려는 게 아니야.”그 말뜻은 파트너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단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고 뻘쭘해진 단미는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나 알았어. 해외에서의 프로젝트 건에 무슨 차질이 생긴 거지? 네가 직접 가봐야 하는 거야?”승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에 놓인 컴퓨터를 켰다.그러고는 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내일, 나랑 해외로 좀 나가줘야겠어.」메시지가 도착했던 그 시각, 혜인은 서민규를 보러 병원에 와있었다. 민규가 기를 쓰고 퇴원하겠다 하는 바람에 그녀가 민규를 도와 퇴원 절차를 밟고 그를 데려다 주려 했다.“진짜 병원에 더 안 있어도 돼요?”이번에 민규가 사고를 당한 건 그가 혜인이의 일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다행히 전부 가벼운 외상이라 괜찮아요, 페니 씨. 승진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저번에 반 대표님 커프스도 잃어버리고... 이 대표님께서 분명히 저를 안 좋게 보실 거예요. 그러니 얼른 가서 더 잘해 보여야죠.”서민규는 잔뜩 부은 얼굴을 하고서 카드를 반납했다.“여기는 나머지 3000만 원예요.”“괜찮아요. 민규 씨가 갖고 있으세요.”서민규는 약간 주저했지만, 확실히 돈이 부족하기도 했고 돈이 좋았기 때문에 이내 받아들였다.‘이 돈만 있으면 내 생활도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고 많은 여자도 사귈 수 있을 거야.’혜인은 묵묵히 앞만 보며 운전했고 얼마 안 지나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서민규의 집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있었는데, 그 일대의 불빛들은 시내보다 훨씬 어두웠다.혜인은 집 앞에서 그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꼬마가 지팡이를 짚고 기다리는 것을 발견했다.민규가 차에서 내리자 꼬마는 지팡이를 짚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에 이르러 그의 몰골을 자세히 본 아이는 갑자기 소리 내 엉엉 울었다.
유독 남녀 사이의 일에 관해서 눈이 어두웠던 혜인은 승제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했다.“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승제는 아무 말 없이 숨이 막히는 것을 막기 위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뚜뚜...”갑작스레 통화 종료 소리가 울려 혜인은 매우 당황스러웠다.‘내가 무슨 말을 잘못 했나? 정말 성질머리하고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늦은 밤.승제가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방바닥은 이미 소독을 마친 상태였지만, 그가 청소하는 사람에게 직접 침대는 거두지 말라고 얘기해둔 덕에 침대는 낮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예전 같았으면 침대 위도 전부 소독해달라고 부탁하던 승제였는데 말이다.정장을 아무 데나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어지러운 침대를 보자 승제의 머릿속에 문득 어젯밤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베개에 늘어진 까만 머리카락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선명히 대비되었다.두 번을 한 것도 모자라 그는 혜인을 창문 앞으로 데려가 한 번 더 시도했다.창문턱에 걸쳐 밤 풍경을 훤히 들여다본 혜인은 놀라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으로는 연신 “대표님.”을 외치면서...이 창문은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로 되었기 때문에 밖에서 누군가 망원경을 갖고 본다 해도 절대 알아볼 수 없었다.하지만 승제는 그 사실을 혜인에게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긴장해 하는 모습이 즐거웠기 때문이다.짜릿하게 스릴있는 기분이었다.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욕실로 들어갔는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면대에 그녀를 품에 가둬두고 키스하던 장면이 또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혜인은 그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욕실 거울에는 그녀의 불그스름한 얼굴빛이 비쳤다.승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곧바로 찬물 샤워를 했다.‘사람 미치게 만드네, 그 여자.’샤워를 마치고 승제는 잠옷을 걸쳤다. 잠옷이 실크소재라 그의 완벽한 몸매가 더욱 두드러지었다.그는 수건을 들어 젖은 머리를 마구 털었다
설연주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한밤중에 밖에서 나는 기척에 잠이 깼다.오번이 방으로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렸다.“최씨 가문 사람들이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더는 여기 머물 수 없어요.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요. 내일 아침 여덟 시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해요. 반년 동안 플로리아에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설연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마친 후 설우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우현 오빠, 일곱 시 경성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면 안 돼요? 제발요.]메시지 끝의 몇 글자에서 비굴함이 묻어났지만 그녀는 결국 그 메시지를 보냈다.설우현은 요즘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고 심지어 어젯밤은 잠을 한숨도 자지 않았다.설연주의 메시지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휴대폰을 옆에 던져두고 세면을 시작했다.세면을 마친 그는 수영복을 입고 30분 정도 수영을 했다.수영을 마치고 나오자 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도련님, 누군가가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설우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곧 일곱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설연주의 번호가 떠 있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전화가 다시 울렸다.전화를 받자마자 설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안 올 거예요?”설우현은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설연주는 휴대폰을 꽉 쥔 채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물었다.“어젯밤 언제 깼어요? 내가 약 넣은 거 알고 있었어요?”설우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설연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오빠, 이번에 떠나면 반년 동안 돌아오지 못해요. 그저 한 번만 보고 싶었어요.”오번은 이미 오래전에 그녀에게 혼자만의 감상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었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설우현은 그 아이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따라서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게다가 그 아이를 갖겠다고 고
설연주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대충 넘겨보려 했지만 설우현이 턱을 잡아들어올렸다.“정말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 생각해?”그녀는 몇 번이나 그의 한계를 시험하려 들었다.설연주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마치 죽이려면 죽여보라는 표정이었다.설우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 외투를 걸치던 중 설연주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그의 등 뒤에서 그를 안으며 애틋하게 말했다.“우현 오빠.”“여기 왜 돌아왔어? 최씨 가문 사람들이 널 찾고 있는 거 몰라? 일 년 전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아직도 그 일에 집착하고 있어.”두팔의 부모도 아직 그 문제를 놓지 않고 있는데 도대체 왜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보고 싶었어요.”설연주는 그를 안고 놓치기 싫다는 듯 꼭 붙잡고 있었다.설우현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는 손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 그 위에 얹으려 했지만 결국 멈추고 말았다.“놔.”“오빠.”설연주는 그가 이렇게 차갑게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서서히 그를 놓아주었다.설우현은 주저 없이 방 문을 열고 나가려 했고 설연주는 다급히 그를 붙잡으며 소리쳤다.“우현 씨!”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설연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오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다 됐어요? 이제 더는 못 버텨요. 최씨 가문 쪽에서 난리예요. 늦어도 아침 일곱 시까지는 빠져나와야 해요.”“다 끝났어요. 지금 내려갈게요.”오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설연주는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오번은 설우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말했다.“이번에 결혼식까지 망쳐놓고 아직도 설우현이 연주 씨를 좋게 봐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은 점점 미쳐가고 있어요.”설연주는 지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오번은 운전을 하며 말했다.“아기가 살아남지 못했
설우현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교회의 문이 벌컥 열리며 낯선 여자가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아기는 울고 있었고 두어 달 정도 되어 보였다.설우현이 이 무례한 방해자를 내보내라고 하려던 순간 중년 여성이 터뜨린 한마디에 모두가 술렁였다.“설우현 씨, 이 아이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때 연회에서 당신과 하룻밤을 보낸 사람은 사실 최서아 씨가 아니에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최서아를 바라보았다.최서아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스쳤고 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설우현은 이미 그 중년 여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최서아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우현 씨,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결혼을 취소하려는 거예요? 이러면 우리 최씨 가문과 설씨 가문 모두에게 큰 타격이에요. 진짜 이렇게 할 거예요?”설우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날 속였어?”최서아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 오래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당신을 곁에 둘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당신이 밖에서 아기를 데려와도 상관없어요. 같이 키우면 돼요. 난 진짜 당신을 좋아해요. 그런데 왜 항상 나를 보지 못하는 거예요?”최서아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하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러나 설우현은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아이를 살펴보았다.순박해 보이는 중년 여성은 아이를 그의 품에 건네며 말했다.“설우현 씨, 저는 그저 일을 부탁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할 일을 다 했으니 돌아가 보려 합니다.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그분이 분명히 아이의 아버지가 당신이라 했습니다.”설우현은 말없이 품에 안긴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어쩐지 이 아이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우선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았다.현장에 있던 하객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설씨 가문과 최씨 가문 사람들은 한데 모여 이번 일을 수습하기 시
설연주는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플로리아 국경 지역은 가난하고 혼란스러우며 인근 나라와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이곳은 빈곤하고 낙후하여 그녀와 같은 사람이 몸을 숨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오번이 이 지역을 잘 알고 있어 이곳에서 위험한 일을 겪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설연주의 머릿속에서는 설우현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평생 그가 그녀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설우현을 몰래 사랑하게 된 건 그녀의 잘못이라 생각했다.그녀의 마음이 그에게는 짐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오번의 말처럼 결국 자신만이 감동받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설연주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약을 입에 넣었다.“그냥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줘요. 나 진짜 설우현을 좋아하거든요.”그녀는 자포자기한 듯 속삭였다.“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됐어요. 왜 이렇게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 벌 받는 거겠죠. 예전에는 남자들을 그저 돈줄로만 여겼으니까. 하지만 설우현은 달라요.”오번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몸 상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연주 씨가 각오하고 있는 거라면 더 말릴 수는 없겠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해요.”설연주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설우현과 함께한 밤을 떠올렸다. 그는 침대에서 정말 대단했다.그가 그녀에게 남긴 흔적이 많았기에 임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로부터 일주일 후 설우현은 김현서가 피를 흘리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설우현은 줄곧 설연주가 약간의 잔꾀나 부릴 줄 아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독약을 구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설연주가 김현서를 처리한 건 과거에 김현서가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일까?설우현은 설연주의 과거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동안
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설연주는 나한테 없어. 원래 사람을 시켜서 멀리 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사라졌어.”이상하게도 설연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설연주와 얽힌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설우현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허튼수작을 부리는 여자일 뿐이었다.두팔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설연주를 찾아, 이 땅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두팔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설우현은 이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설기웅은 이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말했다.설우현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누구예요?”“최용호의 사촌 여동생이야. 한동안 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 넌 항상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약까지 구해왔더군.”설우현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여자는 얼굴이 낯익었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집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형,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아버지를 찾아갔어. 아버지는 너와 그 여자의 결혼을 고려하고 계셔.”설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 나더러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하지만 이내 설기웅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다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설우현이 가문을 위해 혼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면 최용호의 사촌 동생과 결혼해도 문제가 없었다.최용호는 설기웅의 친구였고 최씨 가문도 플로리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였다. 이 결혼은 양 가문에도 손색없는 혼사였다.설우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형,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는 특정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자신이 여자의 계략
설우현은 잠시 발걸음을 주춤했다.‘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뻔뻔해? 그래, 무릎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설연주는 두팔에게서 이미 잔혹한 고통을 겪은 뒤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우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설우현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그는 부하에게 설연주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설연주는 이번에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지난번처럼 고열이 계속되었다. 의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녀를 보내는 일을 미루고 오늘 밤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그도 병원에 머물며 그녀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설연주는 그가 떠나자마자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팔한테서 나왔어요?”오번은 원래 두팔을 따라다니며 설연주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떠난 뒤로 자신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약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당장 필요해요.”오번은 무슨 약인지 듣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연주 씨, 설마...”설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화 중임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네, 바로 그걸 원해요. 곧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설우현이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그 전에 딱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요?”오번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미쳤어요? 이 일이 들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이런 약 구할 수 있잖아요?”오번은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비밀 약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밤이 되어 설우현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흰색 정장을 입고 설기웅의 뒤를 따라 몇몇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는 중간에 2층에 올라가 친구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대신 술 한 잔을 마신 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평소 설연주는 다른 남자들에게 무척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유독 설우현에게만큼은 어딘가 진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그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설우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설연주가 더욱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설연주는 두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반면 두팔은 그녀의 이런 상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설연주를 탐하고 싶었고 지난번 사람을 시켜 길들였지만 그녀는 끝내 도망쳤다.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두팔은 설연주를 침대에 내리눌렀다.설연주의 얼굴에 잠시 공포가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게 변했다.두팔은 그녀의 겉옷을 벗겨내고 더 안쪽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설연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설연주는 반항할 마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심지어 마음속 깊이 설우현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후회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후회하거나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도 설연주의 머릿속엔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두팔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두팔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침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마침내 그가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려던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팔의 부하가 문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형님, 저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깜짝 놀란 설연주는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설우현이 서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두팔은 그를 알아보고 즉시 옷을 바로잡았다.“우현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 찾아
오번은 설우현의 선택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설연주를 정말로 혐오하는 듯했다. 결국 오번은 자기 힘으로 계속 설연주를 찾아야 했다.그러던 이틀 후 그에게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마침 그 의뢰는 두팔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팔이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오번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설연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음이 흔들렸다.“형님, 설연주를 계속 무릎 꿇리고 있을까요?”두팔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설우현의 사람들이 직접 설연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전에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당당하더니 이제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사흘 동안 계속 무릎 꿇리고 있어. 음식은 주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내버려둬.”오번은 통화 속 두팔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설연주가 두팔에게 넘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팔은 다시 한번 조건을 제시하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듣자 하니 해킹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우리 쪽으로 와볼 생각 없나? 충분한 보상은 보장하지.”오번은 고민 끝에 결국 두팔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그는 설연주를 만났다.설연주는 이미 이틀 밤낮을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등은 채찍 자국으로 가득했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그 끝은 두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설연주는 고개를 떨군 채 누구의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두팔은 갑자기 사슬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이윽고 두팔은 사슬을 조금씩 당기며 설연주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주야, 성씨를 바꿔가며 꼼수를 부렸지만 결국 설우현이 직접 널 내게 넘겨줬잖아. 기분이 좀 상했겠다?”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팔의 구두가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설연주는 손가락을 오그리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두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저번에 겨우 길들였더니 네가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도망갈 기회를 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