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북소리처럼 울렸다.기분은 마치 죽음을 앞둔 물고기가 된 듯 했다.옷장 속에 가둬져서 반승제와 키스하게 될 줄은 또 몰랐기 때문이다.반승제는 한참 후에야 몸을 일으켜 그윽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승제에게 삼켜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성혜인이 정신 차리기도 전에 반승제가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다. 속옷의 부재를 잘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배고프지? 나가서 아침 먹자.”성혜인은 시름을 놓고 반승제를 따라 나갔다. 조금 전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을 때는 끼니도 거른 채 또 침대로 향하게 될 줄 알았다. 만약 그녀의 상상대로 되었다면 오늘 내로 침대에서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었다.그녀는 반승제를 제외한 다른 남자와 만나 본 적 없었다. 그래서 반승제의 정력이 과연 정장인지 판단할 기준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윤단미가 죽지 않고 오래 버티기를 바랄 뿐이었다.거실로 나간 성혜인은 윤단미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지 걱정 되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녀가 식사를 끝내기 바쁘게 그렇게 두려워하던 초인종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다행히도 이번에 찾아온 사람은 윤단미가 아닌 쇼핑백을 들고 있는 심인우였다. 쇼핑백 속에는 속옷을 포함한 한 세트의 여자 옷이 있었다.성혜인은 쇼핑백을 건네받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침실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옷을 입고 나갔을 때는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대표님, 저 다 됐어요.”반승제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 이틀 동안 자신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서 편히 쉬어.”성혜인은 반승제의 입에서 나온 ‘쉬어’라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 물어보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서민규였다.그녀는 반승제도 함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수락 버튼을 누르자마자 일부러 반말로 말을 걸었다.“민규 씨, 무슨
그때까지만 해도 성혜인은 반태승이 말한 첫째라는 사람이 반승제의 사촌 형인 줄 알았다. 친형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 알았다. 백연서의 두 아들이 전부 후계자 후보에 올랐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반승제는 형이 죽은 후 반강제적으로 후계자가 되었고 반태승은 결혼과 가정으로 그를 국내에 묶어 두려고 했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의 예상과 달리 바로 해외로 가 버렸고 상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남들은 반승제가 일 밖에 모르는 냉혈인 인줄 안다. 진정한 반승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이는 아마 절대 없을 것이다.성혜인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직 두 번째인데 벌써부터 반승제와 이런 거래를 한 것이 후회 되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을 이미 벌인 이상 반승제가 침대에서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 더구나 병원까지 간 적 있으면서 또 겁 없이 찾아온 자신을 탓해야지.성혜인이 침묵에 잠긴 것을 보고 반승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정장을 입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 전혀 다른 고귀한 사람으로 변신해서 그녀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아직 여덟 번 남았어. 연락 잘 받아.”평범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위협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문을 열자 심인우는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페니 씨,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두 사람은 반승제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렇게 윤단미가 매복하고 있는 호텔 1층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갈 수 있었다.성혜인은 차에 올라탄 다음에도 약간 어리벙벙했다. 반승제가 했던 모든 말이 그녀의 피부를 뚫고 세포에 각인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로즈가든에 도착한 성혜인은 차에서 내려 심인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집으로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반승제의 체력은 진짜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둘째 날부터 벌써 근육통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하필이면 이때 강민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수락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 나 한 5분 있으면 너희 집 도착이
혜인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붉은 흔적들이 하나 또 하나 곳곳에 이어져 있어서, 키스 상대가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우물쭈물했다.민지는 ‘요놈 잡았다’라는 표정으로 혜인을 바라보았다.“저번에 그 사람이야? 또 만났어?”어쩔 수 없었던 혜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민지는 그녀를 확 끌어당겨 자기 옆에 앉혔다.“도대체 누구야? 네가 저번에 그 사람 엄청나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나 안 믿었거든. 왜냐하면 우리 예준 씨보다 엄청난 사람을 난 여태 본 적이 없어서... 근데 오늘 네 꼴을 보니 믿어지네. 그 사람 평생 여자 한번 못 만나봤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진짜 대단하네, 성혜인. 어떻게 그런 사람을 다 만났대 그래?”민지의 마음 한구석에서 부러움이 몰려왔다.“도대체 누군데! 나한테만 알려줄 수 없어?”혜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민지는 혜인이 말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은, 아무리 떼를 쓰고 달래봐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심통이 난 민지는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 그럴 수 있지. 괜찮은 남자 만났는데 절친한테 공유도 안 해주고 말이야. 어휴, 나는 너한테 줄 선물도 사 왔는데, 헛일했네.”민지의 이런 태도를 보자 당황한 혜인이 그녀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민지야, 이번 일은 진짜 미안해.”진심으로 혜인을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민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다시 밝아졌다.“이왕 이렇게 된 거, 너한테 가게 하나 추천해줄게. 그 가게 소품이 완전 일품이야.”혜인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그때, 곁에 있던 가방이 그녀가 건드려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안에 있던 채 입어보지 못한 검은 속옷이 밖으로 나왔다.눈치 빠른 혜인은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소파 밑으로 차 넣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개 코였던 민지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바로 집어 들었다. 그제야 옷을 자세히 본 민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와, 성혜인, 너 나 몰래 이렇게 놀고 있었냐!”
혜인의 바보 같은 모습을 또다시 보게 된 민지는 화가 나다 못 해 눈이 반쯤 돌아버릴 지경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남자를 얻은 너의 운이 너무 부러웠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오히려 너 같은 미인과의 잠자리를 얻은 그 남자의 운이 부럽다, 부러워! 어떻게 첫 경험을 준 것도 모자라, 피임약까지 사 먹을 생각을 해? 도대체 너한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게 맞는지 잘 좀 생각해보라고!”민지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혜인의 몸에 난 흔적은, 그 남자가 얼마나 그녀를 ‘아꼈는’지 잘 알 수 있었다.공적인 일에서는 냉정하고 이성적이지만 사적인 일, 침대 위에서는 한없이 수줍고 겁이 많은 그런 여자. 혜인이 같은 여자는 남자들이 이상형과 다름없을 것이다.민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이렇게 하자, 내가 아는 연예인 한 명이 있거든? 팬도 수백만 명에 엄청나게 잘생겼어. 그 사람을 네 잠자리 파트너로 만들어 줄게, 어때? 그 사람 몸이 너무 좋아서 지난주에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었어. 우리 쥬얼리 엠버서더이기도 하고. 이 정도 남자는 돼야 네가 손해를 안 보지.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연락처 알아볼게, 오늘 밤에 한 번 만나봐.”민지네와 같은 진정한 재벌 집의 사람들은 절대 연예인을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하지 않는다.연예인들은 미디어가 만들어 낸 데이터 뭉치와 같은 존재이므로 진정한 재벌에게 그들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민지는 비록 몹시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문란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그녀가 진짜로 어딘가 전화를 걸려고 하자, 혜인이 다급히 손을 뻗어 말렸다.“됐어. 나도 더는 못 견뎌.”그녀의 입에서 못 견디겠다는 말이 나오자 민지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하지만 혜인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뻗었던 손을 거뒀다.그러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뜬금없이 물었다.“남자의 정력을 줄일 방법 같은 건 없어?”민지는 몇 초 동안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이내 뒤로 자빠지며 웃었다.어처구니없는 물
한숨을 돌린 혜인은 그제야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어떻게 됐든 간에,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그때 성휘가 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얘기했다.“혜인아...”그는 나머지 말을 더 뱉지 못했다.너무 놀란 나머지 눈앞이 새까매졌기 때문이다.“아빠, 괜찮아요. 편히 쉬고만 계세요.”성휘는 입을 벌리니 입안이 온통 쓴맛으로 가득 찬 듯했다.1분 정도 지나 괜찮아지자 그가 다시 물었다.“반승제냐?”“네.”침묵이 얼마간 흘렀다. 성휘는 혜인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는 것 같았던 승제가, SY그룹의 사업을 가로막아 파산에까지 이르게 한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절벽 끝에서 SY그룹을 도와주리라 전혀 생각지 못했다.“좋아, 알겠다. 내 직접 반씨 가문에 가서 회장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겠구나.”그러자 혜인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아빠, 이제 이런 쓸데없는 일 하지 마세요. 승제 씨가 우리 사업을 가로막은 건 바로 아빠가 할아버지랑 너무 자주 연락했기 때문이에요. 할아버지는 결혼으로 승제 씨를 묶어놓으려고 했는데 아빠도 봐서 아시죠? 그 사람 바로 3년 동안 해외로 나가 있는 거. 승제 씨는 남한테 간섭받는 걸 극도로 싫어해요. SY그룹이 살아남으려면, 단지 그 사람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면 돼요.”성휘는 눈물을 닦았다. 아직 SY그룹을 지켜냈다는 놀라움과 충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딸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져 왔다.“알겠어, 혜인아. 아빠가 계속하는 말 알지? 네가 회사를 이어받아야 한다.”혜인이와 같은 실내 디자이너들은 원래 늘 많은 고객을 상대하고 인테리어 시장을 잘 파악해야 했는데 이미 그녀는 관련 분야의 기초적인 실습은 끝마친 상태였다.비록 정신을 잃었었어도 성휘는 단 한 번도 회사를 자신의 딸에게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바꾼 적이 없다.성한이 아무리 그의 환심을 샀다 해도, 그는 늘 그들이 가지고 있는 SY그룹의 지분만을 고려할 뿐이었다.성휘의 말을 들은 혜인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참 우스운 일이었다. 당시 스승님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묻지도 않았고, 자신 역시 주영훈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그도 그럴 것이 주영훈의 미술품은 매우 이름이 나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고 카메라를 싫어하다 보니, 그의 실물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어느 한번은 한 미술작품이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의 화풍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해 물어보니, 다름 아닌 주영훈의 작품이었다. 자신이 주영훈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이로 인해 단 한 번도 사교계 모임에 참석한 적 없는 그에게 사교계 인사들은 허풍에 찌든 위선적인 사람에 불과했다.“페니야, 너에게 내 작품을 보냈다.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한번 봐 보아라. 정말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말이야. 이 작품을 경매에 내놓으라고 나한테 얼마나 오래 물어봤는지 몰라. 내가 애매모호하게 대답해놨으니 네가 원하면 난 바로 너에게 줄 생각이다.”혜인에 대한 주영훈의 제자 사랑이 넘쳐나 보였다.혜인을 제자로 삼은 처음 몇 해 동안, 그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는데 특히 서천에 있을 당시에, 거의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때문에 그 해, 혜인의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그러고 나서 얼마 안 지나 더는 가르쳐 줄 게 없다고 생각한 주영훈은 그 길로 다시 영감을 찾기 위해 세계 방방곡곡으로 떠났다.혜인은 그림을 확인해보았다.그의 작품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른 수준이었는데, 매 작품 속의 풍경이 도화지를 뚫고 나올 듯하였다.“스승님, 또 새로운 영감을 얻으신 거예요? 붓 터치가 더욱 노련해지신 게 꼭 다른 경지에 도달하신 것 같아요.”주영훈은 혜인을 제자로서 매우 아꼈는데 그녀가 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듣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경매 건은 이미 거절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사람을 시켜 너에게 그림을 보내마. 승제 할머니께서도 곧 생신이지 않냐? 감히 장담하건대 네가 이 그림을 가져다드리면 틀림없이 너
“내가 네 파트너가 되어줄게!”그녀가 무척 기쁜 말투로 말했다.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더니 손에 들려있던 커피를 내려놓았다.“단미야, 나는 경매에 가려는 게 아니야.”그 말뜻은 파트너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단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고 뻘쭘해진 단미는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나 알았어. 해외에서의 프로젝트 건에 무슨 차질이 생긴 거지? 네가 직접 가봐야 하는 거야?”승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에 놓인 컴퓨터를 켰다.그러고는 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내일, 나랑 해외로 좀 나가줘야겠어.」메시지가 도착했던 그 시각, 혜인은 서민규를 보러 병원에 와있었다. 민규가 기를 쓰고 퇴원하겠다 하는 바람에 그녀가 민규를 도와 퇴원 절차를 밟고 그를 데려다 주려 했다.“진짜 병원에 더 안 있어도 돼요?”이번에 민규가 사고를 당한 건 그가 혜인이의 일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다행히 전부 가벼운 외상이라 괜찮아요, 페니 씨. 승진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저번에 반 대표님 커프스도 잃어버리고... 이 대표님께서 분명히 저를 안 좋게 보실 거예요. 그러니 얼른 가서 더 잘해 보여야죠.”서민규는 잔뜩 부은 얼굴을 하고서 카드를 반납했다.“여기는 나머지 3000만 원예요.”“괜찮아요. 민규 씨가 갖고 있으세요.”서민규는 약간 주저했지만, 확실히 돈이 부족하기도 했고 돈이 좋았기 때문에 이내 받아들였다.‘이 돈만 있으면 내 생활도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고 많은 여자도 사귈 수 있을 거야.’혜인은 묵묵히 앞만 보며 운전했고 얼마 안 지나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서민규의 집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있었는데, 그 일대의 불빛들은 시내보다 훨씬 어두웠다.혜인은 집 앞에서 그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꼬마가 지팡이를 짚고 기다리는 것을 발견했다.민규가 차에서 내리자 꼬마는 지팡이를 짚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에 이르러 그의 몰골을 자세히 본 아이는 갑자기 소리 내 엉엉 울었다.
유독 남녀 사이의 일에 관해서 눈이 어두웠던 혜인은 승제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했다.“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승제는 아무 말 없이 숨이 막히는 것을 막기 위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뚜뚜...”갑작스레 통화 종료 소리가 울려 혜인은 매우 당황스러웠다.‘내가 무슨 말을 잘못 했나? 정말 성질머리하고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늦은 밤.승제가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방바닥은 이미 소독을 마친 상태였지만, 그가 청소하는 사람에게 직접 침대는 거두지 말라고 얘기해둔 덕에 침대는 낮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예전 같았으면 침대 위도 전부 소독해달라고 부탁하던 승제였는데 말이다.정장을 아무 데나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어지러운 침대를 보자 승제의 머릿속에 문득 어젯밤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베개에 늘어진 까만 머리카락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선명히 대비되었다.두 번을 한 것도 모자라 그는 혜인을 창문 앞으로 데려가 한 번 더 시도했다.창문턱에 걸쳐 밤 풍경을 훤히 들여다본 혜인은 놀라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으로는 연신 “대표님.”을 외치면서...이 창문은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로 되었기 때문에 밖에서 누군가 망원경을 갖고 본다 해도 절대 알아볼 수 없었다.하지만 승제는 그 사실을 혜인에게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긴장해 하는 모습이 즐거웠기 때문이다.짜릿하게 스릴있는 기분이었다.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욕실로 들어갔는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면대에 그녀를 품에 가둬두고 키스하던 장면이 또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혜인은 그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욕실 거울에는 그녀의 불그스름한 얼굴빛이 비쳤다.승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곧바로 찬물 샤워를 했다.‘사람 미치게 만드네, 그 여자.’샤워를 마치고 승제는 잠옷을 걸쳤다. 잠옷이 실크소재라 그의 완벽한 몸매가 더욱 두드러지었다.그는 수건을 들어 젖은 머리를 마구 털었다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