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만 해도 성혜인은 반태승이 말한 첫째라는 사람이 반승제의 사촌 형인 줄 알았다. 친형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 알았다. 백연서의 두 아들이 전부 후계자 후보에 올랐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반승제는 형이 죽은 후 반강제적으로 후계자가 되었고 반태승은 결혼과 가정으로 그를 국내에 묶어 두려고 했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의 예상과 달리 바로 해외로 가 버렸고 상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남들은 반승제가 일 밖에 모르는 냉혈인 인줄 안다. 진정한 반승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이는 아마 절대 없을 것이다.성혜인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직 두 번째인데 벌써부터 반승제와 이런 거래를 한 것이 후회 되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을 이미 벌인 이상 반승제가 침대에서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 더구나 병원까지 간 적 있으면서 또 겁 없이 찾아온 자신을 탓해야지.성혜인이 침묵에 잠긴 것을 보고 반승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정장을 입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 전혀 다른 고귀한 사람으로 변신해서 그녀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아직 여덟 번 남았어. 연락 잘 받아.”평범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위협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문을 열자 심인우는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페니 씨,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두 사람은 반승제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렇게 윤단미가 매복하고 있는 호텔 1층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갈 수 있었다.성혜인은 차에 올라탄 다음에도 약간 어리벙벙했다. 반승제가 했던 모든 말이 그녀의 피부를 뚫고 세포에 각인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로즈가든에 도착한 성혜인은 차에서 내려 심인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집으로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반승제의 체력은 진짜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둘째 날부터 벌써 근육통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하필이면 이때 강민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수락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 나 한 5분 있으면 너희 집 도착이
혜인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붉은 흔적들이 하나 또 하나 곳곳에 이어져 있어서, 키스 상대가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우물쭈물했다.민지는 ‘요놈 잡았다’라는 표정으로 혜인을 바라보았다.“저번에 그 사람이야? 또 만났어?”어쩔 수 없었던 혜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민지는 그녀를 확 끌어당겨 자기 옆에 앉혔다.“도대체 누구야? 네가 저번에 그 사람 엄청나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나 안 믿었거든. 왜냐하면 우리 예준 씨보다 엄청난 사람을 난 여태 본 적이 없어서... 근데 오늘 네 꼴을 보니 믿어지네. 그 사람 평생 여자 한번 못 만나봤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진짜 대단하네, 성혜인. 어떻게 그런 사람을 다 만났대 그래?”민지의 마음 한구석에서 부러움이 몰려왔다.“도대체 누군데! 나한테만 알려줄 수 없어?”혜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민지는 혜인이 말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은, 아무리 떼를 쓰고 달래봐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심통이 난 민지는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 그럴 수 있지. 괜찮은 남자 만났는데 절친한테 공유도 안 해주고 말이야. 어휴, 나는 너한테 줄 선물도 사 왔는데, 헛일했네.”민지의 이런 태도를 보자 당황한 혜인이 그녀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민지야, 이번 일은 진짜 미안해.”진심으로 혜인을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민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다시 밝아졌다.“이왕 이렇게 된 거, 너한테 가게 하나 추천해줄게. 그 가게 소품이 완전 일품이야.”혜인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그때, 곁에 있던 가방이 그녀가 건드려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안에 있던 채 입어보지 못한 검은 속옷이 밖으로 나왔다.눈치 빠른 혜인은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소파 밑으로 차 넣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개 코였던 민지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바로 집어 들었다. 그제야 옷을 자세히 본 민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와, 성혜인, 너 나 몰래 이렇게 놀고 있었냐!”
혜인의 바보 같은 모습을 또다시 보게 된 민지는 화가 나다 못 해 눈이 반쯤 돌아버릴 지경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남자를 얻은 너의 운이 너무 부러웠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오히려 너 같은 미인과의 잠자리를 얻은 그 남자의 운이 부럽다, 부러워! 어떻게 첫 경험을 준 것도 모자라, 피임약까지 사 먹을 생각을 해? 도대체 너한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게 맞는지 잘 좀 생각해보라고!”민지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혜인의 몸에 난 흔적은, 그 남자가 얼마나 그녀를 ‘아꼈는’지 잘 알 수 있었다.공적인 일에서는 냉정하고 이성적이지만 사적인 일, 침대 위에서는 한없이 수줍고 겁이 많은 그런 여자. 혜인이 같은 여자는 남자들이 이상형과 다름없을 것이다.민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이렇게 하자, 내가 아는 연예인 한 명이 있거든? 팬도 수백만 명에 엄청나게 잘생겼어. 그 사람을 네 잠자리 파트너로 만들어 줄게, 어때? 그 사람 몸이 너무 좋아서 지난주에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었어. 우리 쥬얼리 엠버서더이기도 하고. 이 정도 남자는 돼야 네가 손해를 안 보지.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연락처 알아볼게, 오늘 밤에 한 번 만나봐.”민지네와 같은 진정한 재벌 집의 사람들은 절대 연예인을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하지 않는다.연예인들은 미디어가 만들어 낸 데이터 뭉치와 같은 존재이므로 진정한 재벌에게 그들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민지는 비록 몹시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문란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그녀가 진짜로 어딘가 전화를 걸려고 하자, 혜인이 다급히 손을 뻗어 말렸다.“됐어. 나도 더는 못 견뎌.”그녀의 입에서 못 견디겠다는 말이 나오자 민지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하지만 혜인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뻗었던 손을 거뒀다.그러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뜬금없이 물었다.“남자의 정력을 줄일 방법 같은 건 없어?”민지는 몇 초 동안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이내 뒤로 자빠지며 웃었다.어처구니없는 물
한숨을 돌린 혜인은 그제야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어떻게 됐든 간에,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그때 성휘가 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얘기했다.“혜인아...”그는 나머지 말을 더 뱉지 못했다.너무 놀란 나머지 눈앞이 새까매졌기 때문이다.“아빠, 괜찮아요. 편히 쉬고만 계세요.”성휘는 입을 벌리니 입안이 온통 쓴맛으로 가득 찬 듯했다.1분 정도 지나 괜찮아지자 그가 다시 물었다.“반승제냐?”“네.”침묵이 얼마간 흘렀다. 성휘는 혜인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는 것 같았던 승제가, SY그룹의 사업을 가로막아 파산에까지 이르게 한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절벽 끝에서 SY그룹을 도와주리라 전혀 생각지 못했다.“좋아, 알겠다. 내 직접 반씨 가문에 가서 회장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겠구나.”그러자 혜인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아빠, 이제 이런 쓸데없는 일 하지 마세요. 승제 씨가 우리 사업을 가로막은 건 바로 아빠가 할아버지랑 너무 자주 연락했기 때문이에요. 할아버지는 결혼으로 승제 씨를 묶어놓으려고 했는데 아빠도 봐서 아시죠? 그 사람 바로 3년 동안 해외로 나가 있는 거. 승제 씨는 남한테 간섭받는 걸 극도로 싫어해요. SY그룹이 살아남으려면, 단지 그 사람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면 돼요.”성휘는 눈물을 닦았다. 아직 SY그룹을 지켜냈다는 놀라움과 충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딸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져 왔다.“알겠어, 혜인아. 아빠가 계속하는 말 알지? 네가 회사를 이어받아야 한다.”혜인이와 같은 실내 디자이너들은 원래 늘 많은 고객을 상대하고 인테리어 시장을 잘 파악해야 했는데 이미 그녀는 관련 분야의 기초적인 실습은 끝마친 상태였다.비록 정신을 잃었었어도 성휘는 단 한 번도 회사를 자신의 딸에게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바꾼 적이 없다.성한이 아무리 그의 환심을 샀다 해도, 그는 늘 그들이 가지고 있는 SY그룹의 지분만을 고려할 뿐이었다.성휘의 말을 들은 혜인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참 우스운 일이었다. 당시 스승님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묻지도 않았고, 자신 역시 주영훈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그도 그럴 것이 주영훈의 미술품은 매우 이름이 나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고 카메라를 싫어하다 보니, 그의 실물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어느 한번은 한 미술작품이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의 화풍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해 물어보니, 다름 아닌 주영훈의 작품이었다. 자신이 주영훈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이로 인해 단 한 번도 사교계 모임에 참석한 적 없는 그에게 사교계 인사들은 허풍에 찌든 위선적인 사람에 불과했다.“페니야, 너에게 내 작품을 보냈다.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한번 봐 보아라. 정말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말이야. 이 작품을 경매에 내놓으라고 나한테 얼마나 오래 물어봤는지 몰라. 내가 애매모호하게 대답해놨으니 네가 원하면 난 바로 너에게 줄 생각이다.”혜인에 대한 주영훈의 제자 사랑이 넘쳐나 보였다.혜인을 제자로 삼은 처음 몇 해 동안, 그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는데 특히 서천에 있을 당시에, 거의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때문에 그 해, 혜인의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그러고 나서 얼마 안 지나 더는 가르쳐 줄 게 없다고 생각한 주영훈은 그 길로 다시 영감을 찾기 위해 세계 방방곡곡으로 떠났다.혜인은 그림을 확인해보았다.그의 작품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른 수준이었는데, 매 작품 속의 풍경이 도화지를 뚫고 나올 듯하였다.“스승님, 또 새로운 영감을 얻으신 거예요? 붓 터치가 더욱 노련해지신 게 꼭 다른 경지에 도달하신 것 같아요.”주영훈은 혜인을 제자로서 매우 아꼈는데 그녀가 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듣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경매 건은 이미 거절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사람을 시켜 너에게 그림을 보내마. 승제 할머니께서도 곧 생신이지 않냐? 감히 장담하건대 네가 이 그림을 가져다드리면 틀림없이 너
“내가 네 파트너가 되어줄게!”그녀가 무척 기쁜 말투로 말했다.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더니 손에 들려있던 커피를 내려놓았다.“단미야, 나는 경매에 가려는 게 아니야.”그 말뜻은 파트너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단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고 뻘쭘해진 단미는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나 알았어. 해외에서의 프로젝트 건에 무슨 차질이 생긴 거지? 네가 직접 가봐야 하는 거야?”승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에 놓인 컴퓨터를 켰다.그러고는 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내일, 나랑 해외로 좀 나가줘야겠어.」메시지가 도착했던 그 시각, 혜인은 서민규를 보러 병원에 와있었다. 민규가 기를 쓰고 퇴원하겠다 하는 바람에 그녀가 민규를 도와 퇴원 절차를 밟고 그를 데려다 주려 했다.“진짜 병원에 더 안 있어도 돼요?”이번에 민규가 사고를 당한 건 그가 혜인이의 일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다행히 전부 가벼운 외상이라 괜찮아요, 페니 씨. 승진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저번에 반 대표님 커프스도 잃어버리고... 이 대표님께서 분명히 저를 안 좋게 보실 거예요. 그러니 얼른 가서 더 잘해 보여야죠.”서민규는 잔뜩 부은 얼굴을 하고서 카드를 반납했다.“여기는 나머지 3000만 원예요.”“괜찮아요. 민규 씨가 갖고 있으세요.”서민규는 약간 주저했지만, 확실히 돈이 부족하기도 했고 돈이 좋았기 때문에 이내 받아들였다.‘이 돈만 있으면 내 생활도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고 많은 여자도 사귈 수 있을 거야.’혜인은 묵묵히 앞만 보며 운전했고 얼마 안 지나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서민규의 집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있었는데, 그 일대의 불빛들은 시내보다 훨씬 어두웠다.혜인은 집 앞에서 그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꼬마가 지팡이를 짚고 기다리는 것을 발견했다.민규가 차에서 내리자 꼬마는 지팡이를 짚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에 이르러 그의 몰골을 자세히 본 아이는 갑자기 소리 내 엉엉 울었다.
유독 남녀 사이의 일에 관해서 눈이 어두웠던 혜인은 승제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했다.“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승제는 아무 말 없이 숨이 막히는 것을 막기 위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뚜뚜...”갑작스레 통화 종료 소리가 울려 혜인은 매우 당황스러웠다.‘내가 무슨 말을 잘못 했나? 정말 성질머리하고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늦은 밤.승제가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방바닥은 이미 소독을 마친 상태였지만, 그가 청소하는 사람에게 직접 침대는 거두지 말라고 얘기해둔 덕에 침대는 낮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예전 같았으면 침대 위도 전부 소독해달라고 부탁하던 승제였는데 말이다.정장을 아무 데나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어지러운 침대를 보자 승제의 머릿속에 문득 어젯밤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베개에 늘어진 까만 머리카락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선명히 대비되었다.두 번을 한 것도 모자라 그는 혜인을 창문 앞으로 데려가 한 번 더 시도했다.창문턱에 걸쳐 밤 풍경을 훤히 들여다본 혜인은 놀라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으로는 연신 “대표님.”을 외치면서...이 창문은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로 되었기 때문에 밖에서 누군가 망원경을 갖고 본다 해도 절대 알아볼 수 없었다.하지만 승제는 그 사실을 혜인에게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긴장해 하는 모습이 즐거웠기 때문이다.짜릿하게 스릴있는 기분이었다.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욕실로 들어갔는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면대에 그녀를 품에 가둬두고 키스하던 장면이 또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혜인은 그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욕실 거울에는 그녀의 불그스름한 얼굴빛이 비쳤다.승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곧바로 찬물 샤워를 했다.‘사람 미치게 만드네, 그 여자.’샤워를 마치고 승제는 잠옷을 걸쳤다. 잠옷이 실크소재라 그의 완벽한 몸매가 더욱 두드러지었다.그는 수건을 들어 젖은 머리를 마구 털었다
그의 손길은 거침없었다.놀란 혜인이 급히 일어나려는데 승제가 다시 눌러 앉혔다.그녀는 가녀린 손가락으로 승제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아직 축축한 걸 보니 샤워를 마치고 나서 채 말리지도 않고 바로 나온 모양이었다.혜인이 역시 금방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이었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거의 마른 상태였다. 어깨 뒤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들 사이로 손바닥만 하게 작은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그제야 그녀는 승제가 왜 경비실에 그렇게 말하라 부탁했는지 알 것 같았다.승제는 혜인이 결혼한 몸인 줄 알기 때문에 이 집에도 분명 서민규와 같이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까 분명 통화에서 서민규의 목소리도 들었으니까 말이다.그 때문에 승제는 거짓말로 일부러 혜인을 지하주차장으로 유인해 말 그대로 서민규 몰래 은밀하게 사랑을 즐기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때의 시간은 그다지 늦은 시간이 아닌 고작 밤 9시밖에 되지 않아서 언제든지 이웃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불안했던 혜인이 그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는데, 승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미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는 격렬한 키스를 퍼부어댔다.키스가 너무 격렬해서 숨이 쉬어지지 않아 혜인이 버둥거리던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다급히 가서 확인하려 했다.필연인지 우연인지,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서민규였다.민규는 이선의 분부를 받았다. 이선 역시 지난번 민규가 승제의 커프스를 잃어버렸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혜인과 그가 서로 괜찮은 관계인 것을 알고 민규에게 혜인이와 식사 약속을 잡으라 말했다. 다 같이 혜인을 달래주려고 말이다.사실 이선은 이렇게 하면 혜인이가 반승제네 디자이너이니 자연히 그의 앞에서 BK사에 대한 좋은 얘기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사회생활은 늘 눈치가 빨라야 하는 법이다.많이 긴장했던 혜인은 벨 소리가 울리자 전화를 받아 이 상황을 잠시 멈추고 싶었다.그러나 더욱 큰 손이 그녀보다 빨리 핸드폰을 잡았고 그대로 꺼버렸다.고요했던 차 안은 두 남녀의 거침 숨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