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인은 이 상황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반승제는 눈을 버젓이 뜨고 SY그룹이 파산으로 향하는 걸 보는 사람이라, 절대 PW사를 함부로 무너뜨리지 않았다.승제는 분명 현재 PW사가 SY그룹을 무너뜨리고, SY그룹이 2조나 되는 빚을 떠안는 걸 기꺼이 보고 싶어 할 것이다.이렇게 해야만이 그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아내가 다시는 그에게 돌아서지 않을 테니까.반태승이 아무리 성혜인을 좋아한다 한들, 과연 SY그룹에 2조나 되는 돈을 내어줄 수 있을까?BH그룹은 이미 두 번이나 되는 융자를 내어주었다.현재 SY그룹은 그야말로 사기를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그마치 2조나 되는 돈을 말이다. 이건 성씨 가문 사람들이 회사를 경영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이 상황에서 융자를 내주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다름없는 일이었다.반태승이 설령 그 돈을 내어준다 해도, 분명 성혜인과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길 것이다. 하물며, 반태승이 정말 그녀에게 잘해준다면, 그녀는 또 어떻게 반태승에게 밑천까지 다 내놓으라 요구할 수 있을까. 성혜인은 아주 똑똑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반승제에 대한 원한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승제는 두 사람이 이미 결혼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윤단미를 각종 장소에 데리고 다녀 혜인이 온갖 조롱을 받게 했다.3년 전 혜인을 두고 혼자 출국한 것 역시, 그녀를 더욱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현재 SY그룹이 2조의 빚을 떠안게 된 배후에도, 역시 그가 관련되어 있었다.그는 줄곧 성씨 가문 사람들을 모질게 대했다.혜인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입술을 뜯었다.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승제가 손가락으로 혜인을 콕 찔렀다.하지만 어느새 혜인은 이한을 향해 웃고 있었다.“신 대표님, PW사가 이렇게 많은 회사를 망쳐놓은 건 확실히 까다롭게 됐지만, 반 대표님 쪽에 있는 정보는 저쪽에서 힘들게 조사한 게 맞으니 원하는 사람에게 줘야죠. 그러니 이 얘기는 인제 그만 해요.”혜인의 실망하는 모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이한은 곧바로 이선에게 몇 마디 말을 걸며 분위기를 띄웠다.성혜인은 중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두 남자가 서로 총을 겨누고 얘기하는 데에 자신도 연루된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화장실에 가는 척했지만, 사실은 복도에 나가 바람을 쐬었다.서민규는 복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페니 씨, 이거 숙취 해소제인데 한 모금 마실래요?”혜인은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다. 마신 거라고는 아까 맞은 켠 룸에 있을 때 한 잔 마신 게 전부였다.머리가 흐려지는 것을 피하고자 그녀는 그의 손에 있던 숙취 해소제를 받아 들었다.서민규는 뭔가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더듬었다.“제가 승진할 수 있었던 건 전부 페니 씨 덕분이에요. 오늘도 그렇고요. 이거 정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숙취 해소제를 다 마신 혜인이 민규에게 자신이 요구한 일을 잘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그때,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게 곁눈으로 보였다.반승제였다.그는 담배를 피운다는 핑계로 룸에서 나온 것이었고, 손에 담뱃갑과 라이터를 쥔 채 혜인이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혜인은 재빨리 민규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그녀의 신호를 눈치챈 민규는 곧바로 그가 다른 여성들을 대할 때 하는 인사를 해 보였다.“자기야, 그래서 끝나고 나서는 어디 갈 거야?’민규가 이 말을 뱉을 때, 반승제는 마침 그 두 사람 앞까지 걸어왔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을 지나 발코니에 있는 흡연실로 향했다.민규는 말을 하면서도 간담이 서늘해 죽을 지경이었다.그는 당연히 혜인과 모종의 관계가 생성되기를 바랐다. 혜인이 만약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는 30년을 분투해야 할 시간을 절약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하지만 혜인에게는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신예준의 외모를 가졌다면 모를까.혜인은 민규가 여자를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심지어 반승제가 그
반씨 가문에서 그녀는 늘 거래를 위한 물건에 불과했다.반승제는 갑자기 멈추더니 조용히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네 그 쓸모없는 남편을 가져다 뭐 하려고.”혜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어떻게 자기 자신을 그렇게 욕할 수가 있지...”반승제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페니야, 생각 다 끝났어?”그의 말은 마치 함정 같았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하게 승제라는 늪에 빠지게 했다.혜인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동의한 줄 안 승제가 곧바로 그녀를 받쳐 들어 키스하며 이미 소독이 끝난 테이블 위에 눕혔다.승제의 입맞춤에 혜인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이윽고 목덜미에서 잔잔한 통증이 몰려왔다. 승제가 그녀에게 흔적을 남기는 중이었다.승제는 이런 일에 있어 강한 리드욕이 있었다.그때, 문밖에서 서민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페니 씨, 방금 다시 룸으로 돌아오는 걸 봤는데, 혹시 뭐 두고 갔어요?”머릿속에서 전기가 번쩍하더니 그녀는 단숨에 승제를 밀어냈다.테이블에서 내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직접 풀어 헤쳐진 단추를 다시 채웠다.승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이내 가볍게 웃었다.이 웃음에는 조롱의 의미가 섞여 있었다.혜인은 차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볼 수 없었고 마지막 단추까지 다 채우자마자 곧장 문을 향해 걸어갔다.그런 그녀를 승제가 끌어당겨, 귀 옆의 머리카락들을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너에게 더 생각할 시간을 줄게. 아, 내가 결벽이 조금 있어서 말이야, 생각할 동안에는 그 사람이 너를 건들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네.”혜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져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고는 몇 초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반 대표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지금 그 사실을 인정하면 승제는 완전히 지는 것이었다.“페니야, 나도 결혼한 몸이야. 이건 단지 어른들의 게임일 뿐이고.”얼굴이 창백해진 혜인의 눈초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정말로 굴욕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마치 그녀의 인생은 제멋대로 갖
그가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자 온시환은 눈썹을 추켜올렸다.“키스까지 했어?”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손에 든 카드를 보며 승제는 무심히 한 장을 내던졌다.“키스까지만 했나 보네, 더 깊게 하지는 못하고.”이한은 문화 충격을 받고 이내 감탄하기 시작했다.“정말 상상도 못 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네가 남편 있는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줄은!”승제는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꼭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마음대로 말하지 마.”“하지만 이게 현실인걸! 물론 페니 씨가 정말 남자를 홀릴만한 매력이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해, 근데 너 결벽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두 남자가 한 여자를 공유해? 페니 씨가 자기 남편하고 키스하고 돌아서서 너랑 바로 키스한다고 생각해봐, 꺼림칙 하지 않아?”그의 말에 승제는 확실히 뭔가 꺼림칙해졌지만, 겉으로는 매우 냉정한 척했다.“닥쳐!”온시환은 가볍게 웃었다.“인제 보니 별로 개의치 않는가 보다? 나는 그냥 일깨워주는 것뿐이야, 잠깐 노는 거에 그치면 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랑 이러는 거 보면 분명 다른 남자하고도 이렇게 놀 수 있을 거야.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도덕적이지 못하거든. 그러니 진심으로 그 사람에게 빠지지는 마.”승제는 손에 쥐고 있던 모든 카드를 시환에게 건네주고는 뒤로 기대어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그건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온시환은 속으로 생각했다.‘알고 있다면 기혼인 여자와 엮이지 말아야지.’하지만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역시 승제가 그저 잠시 페니에게 끌리는 것뿐이라 생각했고 “먹고 싶은 것”을 여러 번 먹게 되면 분명 질리게 될 거라 생각했다.‘그래, 이런 육체적인 쾌락은 승제가 페니 씨를 위해 이혼할 정도까지는 가지 못할 거야. 아직 윤단미도 있으니까.’자리에 앉아 있는 승제의 머릿속에는 온통 혜인을 들어 테이블에 눕히던 그 장면으로 가득했다.그날 밤과 같이, 당황한 그녀는 다리로 승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순식간에 몸이
어이가 없었던 도우미들은 차마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차를 내주었다.성훈은 오늘 자신의 두 아들을 다 데려왔는데 큰아들은 26살, 작은아들은 24살로 두 사람은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성훈의 월급은 집 대출금을 갚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아들들에게 결혼 자금을 마련해줄 조건이 되지 않았다.큰아들은 원래 여자친구가 있었으나, 남자 쪽 집에서 신혼집도 못 마련해준다는 소리를 듣고 이별 통보를 했다.그 누구도 22평 남짓한 좁은 집에서 그들 가족과 함께 사는 걸 원치 않았으며, 두 아들 모두 밖에 나가 살면 감당해야 할 집값이 만만치 않았기에 가족들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여섯 식구는 모두 성훈이 대출을 갚아야 하는 그 집에서 같이 생활했다.성훈의 아내는 전업주부로서 몇 년 동안 밖에 나가 일거리를 찾아본 적이 없었다.그 모습이 못마땅했던 성훈은 직장에서 욕을 먹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꼭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발길질해댔다.집 안에 있는 모두가 그 모습을 봤지만, 누구도 말리지 않아 성훈의 폭력은 습관적으로 행해졌다.여자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고 또 두 노인을 돌봐야 하니, 그녀는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하지만 모두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는 성훈이야말로 이 집안의 기둥이며 가장 고생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와 노인을 돌보는 아내는 오히려 가장 한가한 사람으로 여겨졌다.그 때문에 이 집안에서 그의 아내는 가족들의 화풀이 상대에 불과했다.라정옥은 기분이 나쁘면 그녀를 마구 욕했다.두 아들은 기분이 나쁘면 그녀에게 화풀이했다.성훈은 더욱 심하게, 그녀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질을 해댔다.오늘 성훈이 두 아들만 데려온 이유도 그에게 있어 두 아들의 존재는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미 늙고 못생긴 아내는 어디 내놓기가 부끄러웠다.화려한 별장은 그들의 눈이 부시게 했다.성훈은 반드시 이곳에 살리라 꿋꿋이 다짐했다.이곳에 살게 되면 성훈은 아내와 이혼할 예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별
라정옥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혜인의 얼굴에 대고 마구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곁에 있는 몇 명의 보디가드들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성훈은 그 시절 대학 졸업생이었다. 당시 꽤 높은 점수를 맞아 온 동네가 떠들썩해졌었다. 그는 집안의 유일한 대학생이었기에 늘 자신이 뭐라도 되는 양 굴었다.그래서 그는 어른의 행세를 한껏 뽐내며 혜인을 설득했다.“너 네 할머니한테 하는 말버릇이 그게 뭐냐? 역시 공부 못 한 애들은 이래서 안 돼,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잖아. 대학교도 못 나온 큰 형님과 형수님이 자식을 가르쳤으니 이 모양일 수밖에. 혜인아, 그래도 작은아버지 말을 들어야 한다. 나는 대학교를 나왔거든. 네 두 사촌 오빠들도 지방대, 전문대를 나왔지만 어쨌든 다들 대학교에 다녔다고 할 수 있지. 이런 사람들을 너희 집안 양자로 들인다는 건, 너희에게는 복이나 다름없어.”성훈은 성휘와 임지연 둘 다 대학교에 가지 않았으니 무턱대고 혜인 역시 문화가 없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는 혜인이 전국에서 우수한 학교를 나왔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혜인은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사촌오빠라 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들의 눈은 예외 없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들과 말을 나누기도 귀찮았다.“전부 이 집에서 썩 나가요. 두 번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성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집에서 정말 교육을 못 받았나 보구나! 큰 형님과 형수님이 너를 이렇게밖에 가르치지 않았니?”“쨍그랑!”혜인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쳐 깨지자 놀란 성훈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등을 뒤로 기댄 혜인의 카리스마는 모든 사람을 숨도 못 쉬게 할 정도로 강했다.“저희 아빠가 대학교에 못 갔다고요? 제가 듣기로 저희 아빠 수능 점수가 작은아버지보다 훨씬 높았던 걸로 아는데요. 집안에서 막내아들인 당신을 예뻐하는 탓에 저희 아빠는
“너 딱 기다려!”다섯 사람은 급히 짐을 챙기고 집을 떠났다.혜인은 소파에 앉아 도우미에게 모든 곳을 소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경비실에도 일렀다.“다음부터 다시는 저 사람들 집에 들이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일자리를 잃게 되실 겁니다.”경비원은 전에 소윤의 명령을 받은 적이 있어 그들을 순순히 들여 보내준 것이었다.하지만 현재, 성씨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묘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는데, 바로 이 집의 실세가 바뀔 것 같다는 것이었다.“알겠습니다, 아가씨.”혜인은 로즈가든에 돌아가 겨울이를 데려왔다. 로즈가든에는 마당이 없어서 겨울이가 지내기에 많이 불편했다.포레스트에는 반승제가 있어 갈 수가 없던 차에, 때마침 이곳 성씨 저택이 비어 겨울이는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별장 안팎은 전부 소독을 끝마쳤고 소윤의 물건 역시 모두 팔아버렸다.성한의 명의로 되어있던 집도 수십억에 팔 수 있었고 그 돈들은 전부 성휘에 통장에 돌아왔다.이 수십억의 돈들은 SY그룹이 진 2조 원의 빚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혜인은 승제가 제안했던 ‘거래’가 생각나자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다음날 점심, 반태승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혜인아, 얼마 전에 너희 아빠가 나에게 SY그룹에 대한 사정을 얼핏 얘기해줬는데, 최근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받지 않더구나. 아직 몸이 나아지질 않은 게냐?”그녀는 반태승에게 SY그룹의 일에 대해 감히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자그마치 2조나 되는 빚이었으니까 말이다.그 소식을 만약 반태승이 듣는다면 분명 금전적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만, 그녀 역시 반드시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예를 들면.“혜인아, 그럼 앞으로 평생 반승제와 잘 살아야 한다. 이혼은 절대 안 돼.”남의 손을 빌었으면 필시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반태승에게 2조를 요구하는 것은, 반승제와의 이혼 불가 협의서에 사인하는 것과 같았다. 이 역시 그녀에게 있어서는 사기와 같았다.반태승은 반씨 가문에서 혜인을 가장 잘
성혜인은 장석호 곁의 의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일단 PW사로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려주세요. 시간이 되면 자연히 답을 드릴 테니까요.”장석호는 피식 웃었다. 눈빛에는 성혜인에 대한 멸시로 가득했다. 그녀가 PW사의 행적을 모르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PW사는 합법과 불법 사이의 접점에서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회사이니 말이다.더구나 이번 일은 계약까지 끝냈기 때문에 따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성혜인의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분위기가 더욱 눈에 띄어 일은 잠깐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그러면 혜인 씨를 봐서라도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혜인 씨, 시간 있을 때 같이 식사나 하지. 회사 일은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하하.”장석호는 헤벌쭉 웃으며 불룩 나온 술배를 두드렸다.“또 봐, 혜인 씨.”장석호가 나가자마자 이사회의 임원들이 왁자지껄 토론하기 시작했다.“네 아버지는 어디로 갔어?”“사장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아직도 처리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성휘에 대한 적의로 가득한 말들에 성혜인은 홧김에 퍽 소리를 내며 서류를 테이블로 향해 던졌다. 말소리는 줄어들었지만, 임원들의 표정은 더욱 살벌해졌다.‘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젊은이 주제에 우리 앞에서 뭐 하는 거야?!’임원들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전에 성혜인은 원래 성휘의 것이었던 사장석에 앉았다.“변 이사님과 진 이사님이 지난해 산 새집에,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 이사님의 개인 사정에 왜 회삿돈이 들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지난해 저희가 토지에 4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왜 마지막에 제 아버지가 모르는 선에서 금액이 훨씬 줄었는지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위기로 이어진 PW사와의 계약은 또 누가 지지한 것이죠?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본인들이 친 사고에 사장을 욕하는 건 무슨 경우죠?”성혜인은 덤덤한 말투와 반대되는 예리한 눈빛으로 임원들은 쓱 훑어보며 말했다. 대부분 임원이 그녀와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