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장석호 곁의 의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일단 PW사로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려주세요. 시간이 되면 자연히 답을 드릴 테니까요.”장석호는 피식 웃었다. 눈빛에는 성혜인에 대한 멸시로 가득했다. 그녀가 PW사의 행적을 모르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PW사는 합법과 불법 사이의 접점에서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회사이니 말이다.더구나 이번 일은 계약까지 끝냈기 때문에 따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성혜인의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분위기가 더욱 눈에 띄어 일은 잠깐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그러면 혜인 씨를 봐서라도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혜인 씨, 시간 있을 때 같이 식사나 하지. 회사 일은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하하.”장석호는 헤벌쭉 웃으며 불룩 나온 술배를 두드렸다.“또 봐, 혜인 씨.”장석호가 나가자마자 이사회의 임원들이 왁자지껄 토론하기 시작했다.“네 아버지는 어디로 갔어?”“사장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아직도 처리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성휘에 대한 적의로 가득한 말들에 성혜인은 홧김에 퍽 소리를 내며 서류를 테이블로 향해 던졌다. 말소리는 줄어들었지만, 임원들의 표정은 더욱 살벌해졌다.‘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젊은이 주제에 우리 앞에서 뭐 하는 거야?!’임원들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전에 성혜인은 원래 성휘의 것이었던 사장석에 앉았다.“변 이사님과 진 이사님이 지난해 산 새집에,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 이사님의 개인 사정에 왜 회삿돈이 들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지난해 저희가 토지에 4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왜 마지막에 제 아버지가 모르는 선에서 금액이 훨씬 줄었는지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위기로 이어진 PW사와의 계약은 또 누가 지지한 것이죠?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본인들이 친 사고에 사장을 욕하는 건 무슨 경우죠?”성혜인은 덤덤한 말투와 반대되는 예리한 눈빛으로 임원들은 쓱 훑어보며 말했다. 대부분 임원이 그녀와 눈을
성혜인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러다 차 창문을 내린 채 얼굴을 내민 장석호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이제 연기를 할 생각도 없는지 당당하게 카드를 내밀면서 말했다.“20억 원으로 너와의 100번을 살게. 너도 원한다면 내 차에 타.”장석호의 얼굴은 크다 못해 창문을 꽉 채울 지경이었다. 그런 얼굴로 저질스러운 말을 내뱉으니 듣는 사람은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태도로 건들건들 말을 이었다.“신기섭한테서 네 얘기는 익히 들었다. 똘망똘망하니 예쁘다고 하길래 사진을 본 적 있는데 실물이 훨씬 예쁜 줄은 몰랐구나. 그때는 아직 처녀였겠지만 이제는 아니지? 그래도 너한테 처녀의 값을 쳐줬으니 고마운 줄 알아. 20억 원은 잠자리의 값이고 따로 별장도 사주마. SY그룹이 곧 파산할 마당에, 만약 나를 거절한다면 길바닥에 나앉을 길밖에 더 있겠니, 자기야.”정석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식용유를 잔뜩 처바른 치즈보다도 느끼했다. 대부분 중년층 꼰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자신이 카드 한 장만 내밀면 여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처럼 말이다.상업계에서 여자의 지위가 남자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유명 기업의 대표가 젊고 예쁜 여자를 노리개 취급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개나 소나 콧대가 하늘을 찌르게 되고 말았다.성혜인은 표정 없는 얼굴로 카드를 받아 들더니 그대로 장석호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이 돈은 직접 쓰세요. SY그룹이 PW사보다 먼저 파산할 일은 없으니까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자신의 차로 돌아가서 훌쩍 떠나버렸다.성혜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뺨이 저릿저릿했던 장석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또 처음이었다.‘망할! 저거 아주 제대로 미친 년이네!’장석호는 운전석의 의자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대... 대표님?”“흥, 내 앞에서 얌전히 무릎 꿇도록 대가를 치
성휘는 창백한 안색으로 서류를 내려놓고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손 떨림이 너무 심한 관계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성혜인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힘이 풀린 성휘는 결국 지팡이를 한쪽에 내버려 두고 천천히 앉았다. 그의 눈가에는 며칠 사이에 주름이 잔뜩 늘었다. 하얗게 번진 머리카락을 성혜인은 도무지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다.“혜인아, 우리 집안 진짜로 망할 것 같구나.”성휘는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흠칫 떨었다.“미안하다. 너한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했어.”성휘는 회사를 팔고 부동산을 팔아야만 겨우 빚을 갚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에게 남겨줄 자산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성혜인은 천천히 성휘를 향해 걸어갔다. 겨울이는 얌전히 성휘의 곁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 가서 앉자 성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한평생 고생한 결과가 이럴 줄은 몰랐구나.”“아빠...”성혜인은 머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시간 있을 때 엄마를 보러 가세요. 못 본 지도 한참 됐잖아요.”성휘는 말없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죽상이 되었다.“내일 바로 가보마.”성휘의 건강 상태로 차를 몇 시간 동안 타고 서천까지 내려간다면 아마 그 길로 저세상 가게 될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가 1년 시한부 신세로 회사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에 성혜인은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성휘는 한참 침묵해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SY그룹이 파산한 다음 절대 반승제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 회장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상 이혼이 성사될 리도 없을 거다. 만약 이혼한다면 너 혼자 돈도 모자라서 괴롭힘을 받지는 않을지 걱정이구나.”성휘는 자신이 머지않아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다. 성혜인
반승제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성혜인의 뺨을 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BH그룹으로 향했다.시간은 어느덧 저녁 7시가 되었지만 BH그룹의 건물은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가장 위층의 대표 사무실로 가니 심인우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성혜인이 찾아올 줄 몰랐던 듯 놀라 눈을 크게 떴다.“안녕하세요, 저 대표님을 뵈러 왔어요.”“대표님은 해외 미팅이 있어서 방금 회의실에 가셨어요. 아마 두 시간 정도는 걸릴 거예요.”반승제를 기다리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던 성혜인은 덤덤하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도 자신이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거래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성혜인이 아직 어린 시절 임지연은 줄곧 그녀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경제와 정신적으로 독립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성혜인은 이제야 임지연이 어떤 뜻이었는지 크게 와 닿았다. 보다시피 그녀는 서천에 사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도 한참 달랐고 머리도 특별히 똑똑했다.여러 가지 추억을 생각하다 보니 두 시간은 어느덧 훌쩍 지나갔다. 어느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성혜인은 몸을 일으켜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반승제를 바라봤다. 그는 정장 재킷을 벗어 팔이 걸치고 느긋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테이블 앞으로 가서 앉은 반승제는 넓은 대리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는 시계를 풀어 한쪽으로 내던지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머리를 들었다. 사무실 조명 아래에서 그의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칼은 유난히도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어찌 됐든 한결같이 아름답고 위대한 얼굴이었다.“대표님...”성혜인은 작은 목소리로 반승제를 불렀다. 그러자 반승제는 그녀가 찾아온 목적을 이미 알아낸 듯 입 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지금은 가격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지?”반승제는 지난번 밀려난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듯 짓궂게 말했
“아직도 이렇게 서툰 걸 보니 남편이 영 별로인가 봐.”반승제는 가슴이 주체 되지 않고 떨렸다. 그래서인지 목소리도 약간 걸걸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성혜인은 애당초 말할 정신도 없었다. 더구나 심인우 등 사람들이이 갑자기 들어올까 봐, 혹은 건물 건너편의 사람이 창문을 통해 보게 될까 봐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곧 기절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새벽 다섯 시, 그는 정장 재킷을 성혜인에게 걸쳐 주고 자신의 차로 안아 올렸다.아무리 영엄한 존재가 과거의 반승제에게 미래 그가 사무실에서 여자와 관계를 가질 것이라고 얘기해도 그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워커 홀릭인 그는 사무실을 신성한 곳으로 여겼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 품속의 여자와 저녁 내내 함께 있었다는 생각에 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힘이 완전히 빠져 버린 성혜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반승제는 그녀를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이제는 욕실로 데려가서 씻겨 주려고 했는데 끝없이 울리는 그녀의 핸드폰이 신경에 거슬렸다.반승제는 미간을 구기며 성혜인의 핸드폰에 뜬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바라봤다. 수락 버튼을 누르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장석호다. 네 남편 서민규가 내 손에 있어. 또다시 내 연락을 무시한다면 이 자식을 바로 죽여 버릴 줄 알아!”반승제는 어두운 안색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맡긴 성혜인을 힐끗 바라봤다. 살짝 올라간 입 꼬리는 서늘하기만 했다.‘어쩐지 갑자기 순해졌다 했더니... 남편이 납치당한 거였어?’순간 분노에 이성이 침식당한 반승제는 성혜인의 다리를 잡고 확 끌어당기더니 움직임을 계속했다. 사랑의 감정이라고는 추호도 볼 수 없는 거친 움직임이었다.성혜인은 비몽사몽 눈을 떴다. 목은 이미 쉬어 버렸고 말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대... 대표님...”에너지가 고갈된 성혜인은 도무지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녀의 뜻을 알기나 하는지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또 두 시간
어젯밤의 기억이 갑자기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성혜인의 모습도 테이블 위에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던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답장을 포기한 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애초에 반승제가 답장하지 않을 줄 알았던 성혜인은 셔츠 단추를 전부 잠갔다. 하지만 가장 위에 있는 단추까지 잠그고 나서도 목에 난 흔적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이지 반승제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존재감이었다.성혜인은 이제야 핸드폰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핸드폰의 잠금 화면에는 같은 번호로 온 부재중 통화와 문자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반승제가 받아서 연결되었던 통화 명세는 물론 이미 삭제되고 없었다.성혜인은 서민규가 납치되었다는 문자를 보자마자 바로 장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는 일단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다.“어제는 또 누구의 침대에서 나뒹구느라 전화를 못 받았어? 지금 당장 찾아오지 않는다면 네 남편은 내 손에 맞아 죽을 줄 알아.”장석호는 또 핸드폰을 서민규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기절하기 직전인 그는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장석호는 사정없이 그의 뺨을 후려갈기며 말했다.“말해! 얼른 살려 달라고 말하라고!”성혜인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어젯밤 사무실에서 끝낼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호텔에서 계속하며 완전히 쉬어 버린 듯했다. 그것도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성혜인의 입술은 너무 힘껏 깨문 탓에 선명한 이빨 자국과 함께 약간 찢어져 있었다. 처음보다도 훨씬 거친 반승제 때문에 이번에는 입술에도 상처가 나고 말았다.서민규가 한참이 지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장석호가 핸드폰을 들고 다시 말했다.“만약 한 시간 안에 오지 않는다면 이 녀석 손가락을 잘라서 보내 주마!”전화를 끊고 난 성혜인은 부랴부랴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침 청소하러 온 호텔 직원과 마주쳤다.호텔 직원은 잠깐 놀란 듯하더니 성혜인과 잔뜩 어지럽혀진 침대를 번갈아 쳐다
장석호는 서민규와 함께 있었고, PW사의 다른 직원들은 병원에 있었다. 성휘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계속 귀찮게 군다면 성휘는 아마 두 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둘 수도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며 성혜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원래 열 번을 천천히 채우면서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했던 반승제는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이 가슴이 답답하기 시작했다. 아프다기보다는 짜증나는 답답함이었다.반승제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장석호 대표의 자료를 경찰서에 넘겨요. 그리고 내일 아침 9시 전에 PW사의 조사 소식을 보여줘요.”반승제를 빠르게 용건만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성혜인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반승제가 자료를 직접 경찰서에 넘기라고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사까지 해결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반승제는 뜨거운 시선을 따라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성혜인은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괜찮아요.”반승제는 아직도 두 사람이 함께 산장에 있을 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성혜인이 싫다고 했을 때 바로 멈췄었다.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기억 상실이라도 한 것처럼 잊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신사답지 못한 건 전부 서민규 때문이었다. 성혜인이 그를 위해 자신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신사다워야 할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저녁 8시, 호텔에서 기다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침에 나오며 약을 바른 찢어진 그곳은 갑자기 찌릿찌릿하기 시작했다. 반승제와 첫날밤을 보낸 후에 산 약을 이렇게 다시 쓰게 될 줄은 또 몰랐다.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성혜인에게는 거절할 자격 따위가 없었다. 몸은 점점 경직 되고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흥건하다고 한들 그녀는 가만히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성혜인은 결국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를 끄덕였다.“알겠어요.”“다른 용건은?”반
중년 여자는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손님은 어떤 스타일을 입어도 다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우리나라 여성분들은 과하게 보수적이어서 문제라니까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것저것 다 입어 봐요. 이쪽에 있는 도구는 필요하지 않아요?”성혜인은 중년 여자가 내민 두 가지 스타일의 속옷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가방 안에 밀어 넣고는 부랴부랴 결제를 끝냈다. 그리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푹 숙인 채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탔다. 속옷이 들어 있는 가방을 조수석으로 내던진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심장은 주체가 되지 않고 미치도록 뛰고 있었다.그녀는 그 길로 호텔에 돌아가서는 반승제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한 저녁 8시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지만 미리 샤워를 하는 등 준비가 필요했다. 샤워하고 나가서는 마구잡이로 가방에 넣었던 속옷을 꺼냈다.처음에는 그래도 청순한 스타일이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아서 꺼내 봤는데... 속옷과 마주한 순간 손에 힘의 풀려서 그대로 놓쳐버리고 말았다. 뜨거운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져서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거의 반시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겨우 속옷을 걸쳤다.하얀 속옷은 그녀의 뽀얀 피부와 완전히 어울렸다. 더구나 독특한 디자인 덕에 원래도 좋았던 몸매를 더욱 눈에 띄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곧바로 외투를 걸쳐 입었다. 시침이 8시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반씨 저택에 있었다. 반태승이 갑자기 호출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반태승에게 회사의 근황을 보고 했다. 하지만 반태승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혜인이랑은 요즘 잘 지내고 있니? 증손주는 언제 보여줄 셈이야?”반승제는 이제야 자신에게 부인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만약 반태승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깔끔하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가 그를 귀찮게 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