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성혜인은 계속 이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반승제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다시 한번 문질렀고 물로 손에 있는 거품을 깨끗이 헹구고는 옆에 있는 휴지를 뽑아 천천히 손을 닦았다.그 과정은 일분도 되지 않았지만 성혜인은 한 세기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반승제는 닦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침착한 척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내가 그렇게 무서워?”평소에 언변이 그토록 뛰어나더니 지금은 놀라서 몸서리를 치는 그녀의 모습에 반승제는 입을 열었다. 이런 대화를 시작했으니 성혜인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반 대표님은 저의 상사이고 고용주이니 당연히 무서운 존재죠.”반승제는 그녀의 귀 뒤에 가려지지 않은 흔적을 보았다. 아마 서둘러 오다 보니 아무도 그녀에게 귀띔을 주지 않은 모양이다.“남편과의 식사자리는 즐거웠어?”‘이런 모습을 남편이 목격했는데 이혼을 당하지 않았다고?’성혜인은 바로 머리를 굴렸다.“저녁에 겨울이한테 문제가 생겼고 마침 민규 씨도 바쁜 터라 약속을 취소했어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서 윤단미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리를 떴다.성혜인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왠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휴지를 뽑아 손을 닦으려고 하는데 반승제는 다시 돌아와 몸을 약간 기운 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은 우리 모두 잊었으면 좋겠어.”성혜인은 온몸이 굳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더할 나위 없이 서로에서 좋은 것이라고 눈빛에 쓰여있었다.그녀는 이제야 완전히 마음이 놓였고 그와 함께 지내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알고 있어요. 반 대표님은 윤단미 씨가 질투할까 봐 그러시는 거잖아요. 안심하세요, 저 입이 무거워요.”반승제는 바로 그녀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 그녀의 홀가분해하며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보았다. 시선이 조금씩 그녀를 스쳐 지나갔고 말투도 조금 쌀쌀해졌다.“눈치는 있네.”
계약을 맺었다고? 이혼할 거라고?!그녀가 이 조건을 얘기하기도 전에 반승제가 먼저 이 얘기를 언급했다.윤단미는 순간 달콤함으로 가득 차오르면서 마음이 들떴다.그녀의 손끝마저 떨려왔다. 만약 반승제가 이혼을 한다면 반 씨 집안의 며느리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 아닌가?“이혼... 하려면 얼마나 걸려?”반승제는 앞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늦어도 반년. 할아버지가 요즘 많이 안 좋으셔.”윤단미의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고양이를 만지며 애써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켰다.그러나 차가 윤단미 집 앞에 세워졌을 때,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래, 그럼 반년. 승제야, 네 말이 맞아. 우리는 아직 재결합하지 않았어. 그러나 나는 내가 아내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에게 알려줄 거야. 나는 너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그 여자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을 거야. 그때 우리가 헤어졌던 이유는 단순히 네가 결혼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우리 사이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그 문제를 내가 천천히 찾아내고 차차 해결할 거야. 만약 네가 어느 날 재결합에 동의한다면, 우리 그때 결혼하자.”마지막 그 한마디를 뱉어낼 때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였고 득의양양했다.그러나 반승제는 그냥 담담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재결합하면 그때 다시 얘기해.” “승제야, 미안해. 그때 내가 너무 제멋대로였어. 외국에 남아서 무슨 그림을 배운다고 고집부리고 너의 재결합도 거절했어. 앞으로 내가 먼저 너에게 애정표시도 할 거야.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말을 마치고 그녀는 차에서 내려 차창 밖에 서서 그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반승제는 그녀를 힐끗 보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들어가. 밖은 추워.”윤단미의 마음은 더욱 달콤함으로 차올랐고 한 걸음 걷고 세 걸음 돌아보며 집으로 들어갔다.반승제는 자동차에 앉아 있는데 온몸이 좀 불편했다.그는 여기에 머무르
“성혜인이 어디 갔어? 당장 내 앞에 나타나라고 해!”오늘 백연서는 정말 너무나 화가 났고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만약 반승제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성혜인이 어떤 대가를 치러도 변상해 낼 수 없다.유경아도 백연서가 조금 무서웠다. 때론 백연서는 억지를 부리며 성혜인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사모님 아직 밖에 계세요.” 백연서는 이 말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결혼한 여자가 아직도 밖에 있다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 뭘 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 지금 몇 시야?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는데! 하루 종일 뭐 하나 몰라. 승제가 집에 없는 3년 동안 그 사이 우리 반 씨 집안에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을지 누가 알아. 만약 정말 그랬으면 반드시 성 씨 집안 모든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유경아는 침을 삼켰고 정말 반 대표님이 알레르기가 돋은 걸 성혜인의 문제로 돌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반 대표님은 알레르기가 돋은 상태에서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왔기에 이건 포레스트 펜션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게 분명하다. “최근 사모님의 강아지는 이곳에 있지 않았어요.” 유경아는 성혜인을 지켜주기 위하여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백연서는 차갑게 웃었다.“네가 지금 누구 편을 들려고 하는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성혜인에게 잘 보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어차피 걔는 승제와 이혼할 거야. 지금 회장님의 몸이 좋지 않아서 우리가 걔를 불쌍히 여기고 이 집에서 좀 더 머물게끔 허락해 준 거야. 도우미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 수작 부리지 말고.” 백연서는 옆에 앉으며 얘기를 이어갔다.“성혜인한테 오라고 해. 오늘 저녁 반드시 걔를 만나야겠어. 승제는 그 강아지 때문에 알레르기가 돋은 게 확실하니 그 강아지는 버려야 돼.”유경아는 성혜인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겨울이도 좋아한다. 지금 백연서의 이런 말을 들으니 그녀도 조금 화가 났지만 백연서의 말이 맞다. 그녀는 도우미일 뿐 반 씨 집안일에 간섭할 권한이
반승제에게 제원의 다른 명문가 아가씨를 소개해 주려 하였는데 자신에게 분명히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있는 걸 알면서 윤단미와 함께 동물 병원에 갔다는 걸 보아하니 두 사람이 옛정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그런데 성혜인이 어떻게 승제가 윤단미와 함께 동물 병원에 간 사실을 알았지? 그 년 설마 승제를 스토킹 하는 거 아니겠지?’백연서는 미간을 찌푸렸고 바로 성혜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착각하지 마. 승제에게서 떨어져. 어차피 너희들은 이혼하게 되어 있어. 네가 어떤 수를 써도 승제는 너를 원하지 않을 것이니.」참으로 보기 거북한 문자이다. 성혜인은 이 문자를 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대표님에게서 멀리 떨어질 테니.」 백연서는 차갑게 웃었다. ‘꼭 그렇게 해. 그렇지 않으면 성 씨 집안, 가만히 두지 않을 테야.’ 또 한 시간이 흘렀고 겨울이가 드디어 마취에서 깼다. 의사는 성혜인에게 당부를 하였다.“이것은 상처에 바르는 약이에요. 하루에 꼭 세 번씩 발라야 돼요. 이제 날씨가 더워져서 감염 위험성이 있어요.”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네이처 빌리지 일도 처리하고 있고 김양훈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 겨울이를 돌 볼 정력이 없다. 그리고 지금 반승제가 포레스트 펜션에 있으니 겨울이를 데리고 갈 수도 없다. “페니 씨, 혹시 겨울이를 돌볼 시간이 없으시면 병원에 입원을 시켜도 돼요. 매일 돌봐주는 전담의사가 있어요. 다만 입원비가 좀 비싸요.” 성혜인은 한숨을 돌리고 바로 돈을 냈다. 떠나기 전 그녀는 겨울이를 보고 가려 하였고 겨울이도 주인이 온 걸 알고 일어나려 애썼다.성혜인은 그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겨울이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녀를 너무 오래 보지 못해 심심한 나머지 자갈을 삼킨 것 같다. 아주머니한테 얘기해서 정원의 자갈들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또 같은 문제가 생기면
“효원 씨.”성혜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보았다. “당신이 나에게 약을 보내 준 걸 생각해서 줄곧 당신에게 따지지 않았던 거였어요.”얼굴이 일그러진 최효원은 차갑게 웃었다.“능력 있으면 유현숙 앞에서 얘기하지 그래요. 페니 씨,남의 남자를 꼬셨으면 당신에게 뭐라고 하는 걸 감수해야죠. 입주자 그룹 채팅방에 들어 왔어야 하는데. 다른 입주자들이 당신을 뭐라고 하는지 볼 수 있게끔.”입주자 그룹 채팅방?성혜인은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현숙 같은 이상한 사람이 있으니 언젠가 이 일을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될 것이다. 이 사회는 여성에게 원래 가혹하여 아무도 기꺼이 그녀의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모두들 단지 재미있는 구경만 하고 싶을 뿐이다.누군가가 그녀를 '나쁜 년'이라고 욕할 때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도 있다.하지만 두 사람 세 사람이 따라서 같이 욕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믿게 된다.아마 이후 다른 입주자들도 그녀에게 시비를 걸 수도 있다. 이곳은 부자 동네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렇게 명성이 떨어지는 여자가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하면 레벨이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성혜인이 마주해야 할 사람은 유현숙뿐만 아니라 아파트 입주자들이다. 이 집에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인터넷에 매물을 올렸지만 아직까지 연락 오는 사람이 없어 성혜인도 심신이 피곤했다. 최효원은 성혜인이 고민에 빠진 걸 보고 자신의 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고 생각했다.“허허. 하긴 당신을 그 채팅방에 초대하는 사람이 없겠죠. 다들 당신이 자신의 남편에게 꼬리 칠 까봐 걱정이 될 테니.”성혜인은 가볍게 웃으면서 휴대폰을 꺼냈다.“맞는 말이에요. 어차피 평판도 별로인데 하나 정도 더 많아봐도 별 상관이 없을 텐데 지금 임 사장님한테 전화할까요? 마침 집 디자인을 의뢰하셨는데 오고 가고 하면서 눈이 맞을지도 모르잖아요.”최효원의 얼굴은 순간 화 나서 빨개졌고 온몸이 떨려왔다.“감히!”성혜인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못할 것 없지
반승제는 오늘도 미열이 좀 있지만 몸에 있는 두드러기는 이미 사라졌다.그의 얼굴색은 매우 차가웠고 그의 곁에 서 있는 최효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승제는 아무 말도 없이 앞으로 걸어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최효원은 조금 난처했지만 바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심인우는 반승제가 미열로 인해 볼이 조금 빨간 걸 보고는 황급히 물었다.“대표님, 아니면 돌아가서 좀 더 쉬세요.”반승제는 하룻밤 열이 났던 지라 지금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는 손을 들어 미간을 눌러보았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만약 이따 페니가 나에게 전화를 하면 가서 로즈가든의 일을 해결해.”이 회의는 오랫동안 지속될 예정이기에 심인우는 일단 참석하지 않고 밖에 남을 것이다. 반승제의 휴대폰은 사무실에 놓고 갈 예정이다. 이 회의는 해외인수에 관련된 회의라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챙겨 들어간다고 하여도 무음 상태로 설정하여야 한다. BH그룹의 업무는 줄곧 이러하다. 인수를 진행하고 있거나 인수 준비를 하고 있다.심인우도 대표님이 페니 씨 대하여 조금은 특별하다는 걸 눈치챘다.비록 아주 미세하지만 말이다.“네.”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휴대폰을 사무실에 놓고는 임원들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그러나 자리에 앉자 그의 머릿속에 지난번에 본 동영상이 떠올랐다. 동영상 속 여자가 분명히 욕설을 퍼부고 있는데 성혜인은 그에게 이웃이 인테리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눈에 웃음기가 어렸다.‘헛소리 하고 있네.’ ...성혜인은 바로 로즈가든에서 떠나지 않고 유현숙이 살고 있는 빌딩으로 향했다.그녀는 이미 1층에 있는 경비원에게 상황을 알아보았다.유현숙은 노래방을 차렸고 확실히 돈이 많은 여자이고 그녀의 남편은 오늘 집에 있다고 한다. 성혜인은 가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사람은 중년 남자였는데 조금 음흉한 외모였고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유현숙 씨의 남편인가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성혜인을 위
유현숙이 성혜인을 좀 못살게구나 기대했었는데 하루 만에 잡힐 줄은 생각지 못했다.최효원은 성혜인이 단톡방에 올린 글을 본 순간 가슴이 움찔했다. 노래방을 신고한 사람이 그녀라는 글을 올린 것이었다.‘이 여자가 어떻게 노래방의 일을 알지? 노래방에 불법 거래가 있었다고 해도 거기에 간 사람만 알 텐데.’최효원이 실눈을 뜨고 계속 생각했다.‘성혜인이 남자를 엄청 잘 꼬시던데. 설마 노래방 아가씨 출신은 아니겠지?’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마침 오늘 윤단미도 BH 그룹에 왔다. 반승제와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했으니 성의는 보여줘야 했다.윤단미를 본 최효원의 두 눈이 반짝였다.BH 그룹에 반승제를 찾아오는 여자들이 매일 수도 없이 많았다. 다들 연예인 아니면 인플루언서였는데 딱 봐도 반승제를 꾀기 위한 목적이었다. 프런트 직원이 여러 번이고 그녀들을 거절했다. 이젠 윤단미가 돌아왔으니 당연히 누가 반승제를 넘보는지 알아야 했다.그녀가 가까이 갔을 때 최효원은 한창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반 대표님의 디자이너가 한 노래방이랑 관계가 있는데 글쎄 그 노래방에서 불법 거래가 있었다지 뭐예요. 그 노래방 사장이 감옥에 갔대요.”“정말이에요? 페니 씨 평소에는 참 무관심해 보이던데.”최효원은 윤단미를 못 본 척하며 슬쩍 한마디 내던졌다.“사실 반 대표님이 페니 씨 방에서...”최효원은 하던 말을 멈추고 그제야 윤단미를 발견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인사했다.“아가씨.”윤단미는 최효원에 대한 인상이 별로 없었다. 어쨌거나 BH 그룹의 프런트 직원이 여러 명이고 게다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으니 말이다.‘방금 이 프런트 직원이 채 하지 못한 얘기가 뭘까?’윤단미가 그녀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저랑 꼭대기 층에 가요. 마침 직접 볶은 커피콩을 가져왔거든요. 꼭대기 층에 휴게실이 있는데 커피콩 갈 줄 알죠?”최효원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드디어 아가씨의 주의를 끌었어.”“네, 저 따라오세요, 아가씨.”두 사람
“알겠어요, 아주머니. 승제 회의 끝나면 함께 갈게요.”전화를 끊은 윤단미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그때 줄곧 밖에 서 있던 심인우는 그녀가 휴대 전화를 만지는 걸 보고도 말리지 않았다. 이변이 없는 한 미래의 사모님이 윤단미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표님도 개의치 않아 하시는데 비서인 그가 굳이 나서서 미움을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윤단미는 사무실에서 나온 후 곧장 휴게실로 향했다.최효원은 최선을 다해 커피콩을 갈고 있었다. 윤단미가 들어오자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 앞에 선 윤단미는 휴게실에 그녀와 단둘이 있는 걸 확인하고는 말을 꺼냈다.“아까 밑에서 하던 얘기 마저 해요. 승제랑 페니 씨가 뭐 어쨌다고요?”최효원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당황한 척 연기를 펼쳤다. 윤단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BH 그룹의 미래 사모님이 나라는 걸 알고 있겠죠? 내가 승제한테 한마디만 해도 그쪽은 일자리를 잃을 수 있어요.”최효원이 커피콩을 가는 기계를 재빨리 내려놓더니 불안한 얼굴로 자신의 옷을 꽉 잡았다.“아가씨, 제가 얘기할게요. 전부 다 얘기할 테니까 제발 자르지만 말아 주세요.”윤단미가 싸늘하게 웃었다.‘진작 이랬어야지.’“말해봐요. 승제랑 페니 씨가 뭘 어쨌다고요?”“어떻게 된 거냐면 저랑 페니 씨 방이 1층에 있는데 어느 하루는 반 대표님이 그 방에서 나오시더라고요. 게다가 늦은 시각에 나오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윤단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반승제는 함부로 여자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반승제는 그녀의 집도 간 적이 없었다. 매번 그녀를 바래다줄 때도 집 앞까지만 바래다주었다.반승제는 지금까지 줄곧 여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나한테 거짓말하면 그 대가가 뭔지 알아요?”최효원이 눈물을 왈칵 쏟을 것처럼 말했다.“아가씨, 절대 거짓말이 아니에요. 반 대표님이 페니 씨 방에서 나오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제가 지금 반 대표님의 사촌 동생이랑 연애 중이라 페니
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설연주는 나한테 없어. 원래 사람을 시켜서 멀리 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사라졌어.”이상하게도 설연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설연주와 얽힌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설우현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허튼수작을 부리는 여자일 뿐이었다.두팔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설연주를 찾아, 이 땅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두팔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설우현은 이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설기웅은 이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말했다.설우현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누구예요?”“최용호의 사촌 여동생이야. 한동안 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 넌 항상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약까지 구해왔더군.”설우현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여자는 얼굴이 낯익었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집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형,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아버지를 찾아갔어. 아버지는 너와 그 여자의 결혼을 고려하고 계셔.”설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 나더러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하지만 이내 설기웅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다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설우현이 가문을 위해 혼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면 최용호의 사촌 동생과 결혼해도 문제가 없었다.최용호는 설기웅의 친구였고 최씨 가문도 플로리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였다. 이 결혼은 양 가문에도 손색없는 혼사였다.설우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형,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는 특정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자신이 여자의 계략
설우현은 잠시 발걸음을 주춤했다.‘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뻔뻔해? 그래, 무릎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설연주는 두팔에게서 이미 잔혹한 고통을 겪은 뒤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우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설우현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그는 부하에게 설연주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설연주는 이번에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지난번처럼 고열이 계속되었다. 의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녀를 보내는 일을 미루고 오늘 밤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그도 병원에 머물며 그녀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설연주는 그가 떠나자마자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팔한테서 나왔어요?”오번은 원래 두팔을 따라다니며 설연주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떠난 뒤로 자신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약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당장 필요해요.”오번은 무슨 약인지 듣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연주 씨, 설마...”설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화 중임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네, 바로 그걸 원해요. 곧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설우현이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그 전에 딱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요?”오번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미쳤어요? 이 일이 들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이런 약 구할 수 있잖아요?”오번은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비밀 약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밤이 되어 설우현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흰색 정장을 입고 설기웅의 뒤를 따라 몇몇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는 중간에 2층에 올라가 친구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대신 술 한 잔을 마신 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평소 설연주는 다른 남자들에게 무척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유독 설우현에게만큼은 어딘가 진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그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설우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설연주가 더욱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설연주는 두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반면 두팔은 그녀의 이런 상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설연주를 탐하고 싶었고 지난번 사람을 시켜 길들였지만 그녀는 끝내 도망쳤다.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두팔은 설연주를 침대에 내리눌렀다.설연주의 얼굴에 잠시 공포가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게 변했다.두팔은 그녀의 겉옷을 벗겨내고 더 안쪽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설연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설연주는 반항할 마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심지어 마음속 깊이 설우현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후회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후회하거나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도 설연주의 머릿속엔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두팔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두팔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침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마침내 그가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려던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팔의 부하가 문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형님, 저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깜짝 놀란 설연주는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설우현이 서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두팔은 그를 알아보고 즉시 옷을 바로잡았다.“우현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 찾아
오번은 설우현의 선택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설연주를 정말로 혐오하는 듯했다. 결국 오번은 자기 힘으로 계속 설연주를 찾아야 했다.그러던 이틀 후 그에게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마침 그 의뢰는 두팔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팔이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오번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설연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음이 흔들렸다.“형님, 설연주를 계속 무릎 꿇리고 있을까요?”두팔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설우현의 사람들이 직접 설연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전에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당당하더니 이제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사흘 동안 계속 무릎 꿇리고 있어. 음식은 주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내버려둬.”오번은 통화 속 두팔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설연주가 두팔에게 넘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팔은 다시 한번 조건을 제시하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듣자 하니 해킹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우리 쪽으로 와볼 생각 없나? 충분한 보상은 보장하지.”오번은 고민 끝에 결국 두팔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그는 설연주를 만났다.설연주는 이미 이틀 밤낮을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등은 채찍 자국으로 가득했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그 끝은 두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설연주는 고개를 떨군 채 누구의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두팔은 갑자기 사슬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이윽고 두팔은 사슬을 조금씩 당기며 설연주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주야, 성씨를 바꿔가며 꼼수를 부렸지만 결국 설우현이 직접 널 내게 넘겨줬잖아. 기분이 좀 상했겠다?”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팔의 구두가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설연주는 손가락을 오그리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두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저번에 겨우 길들였더니 네가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도망갈 기회를 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