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문자를 보고도 못 본 척 답장하지 않았다.병원에 오자마자 또 어제 그 고양이와 마주쳤다. 오늘 아무래도 재검사를 받으러 온 모양이다.하지만 이번에는 윤단미는 오지 않았고 어젯밤의 그 도우미가 함께 왔다.도우미의 얼굴에 아직도 시뻘건 손가락 자국이 선명했다. 어젯밤 윤단미가 얼마나 힘을 주어 때렸는지 가히 짐작이 갔다.도우미는 케이지에 있던 고양이를 꺼내 의사에게 맡겼다.의사가 고양이를 안고 성혜인의 앞을 지나갔다. 지금까지 본 랙돌 고양이 중에서 가장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눈은 바다처럼 파랬고 털도 보들보들한 게 자꾸만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윤단미의 고양이라는 생각에 이내 마음을 접고 겨울이 상태를 살폈다.오늘 그나마 정신을 차린 겨울이는 그녀를 보자마자 케이지 안에서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했다. 아직 상처가 덜 아물었고 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의사는 겨울이를 케이지에 넣었다.하지만 지금까지 성혜인은 겨울이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키웠다. 포레스트 뒤에 있는 방도 꽤 커서 마음껏 뛰어다녔었다. 자유롭던 겨울이가 케이지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도 마음이 아팠다.“선생님, 겨울이를 모레 데려가도 돼요?”“네, 매일 약 발라주는 거 잊지 마시고요.”성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겨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울이와 잠깐 놀아준 후 동물 병원을 떠나 집에 가려고 했다.이 동물 병원은 번화한 길거리에 있는 게 아니라 별장 주민 구역 주변에 있어 무척이나 조용했다. 하여 별장에 사는 주민들이 애완동물을 데리고 자주 찾았다.성혜인이 차 타러 가던 길에 조급하게 울고 있는 한 도우미와 마주쳤다. 그리고 도우미 옆에 빈 케이지가 놓여있었다. 도우미 옆을 지나야 했던 성혜인이 모른 척하려다가 말을 걸었다.“고양이가 도망갔어요?”앳된 얼굴의 도우미는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너무 놀라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네. 어떡해요? 단미 아가씨가 아시면 절 죽이려 할 거예요. 그 랙돌 고양이를 4천만 원 주고 샀대요. 엉엉... 이제 무슨 수
윤단미가 싸늘하게 웃었다.“난 지금 승제네 집에 밥 먹으러 가던 길이야.”그녀가 도우미에게 손가락질하며 차갑게 말했다.“너 두 시간 후에 바로 나한테 전화해. 페니 씨가 고양이를 찾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처리하겠어!”그러고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그녀가 자리를 비운 후 성혜인이 도우미를 쳐다보았다. 도우미도 이리 쉽게 상황을 모면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제 발 저리긴 했지만 잊지 않고 성혜인에게 당부했다.“얼른 고양이나 찾아요.”성혜인은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으로 보여?’그녀는 도우미를 거들떠보지 않고 곧장 자기 차에 올라탔다.조금 전 윤단미가 가던 방향은 포레스트 쪽이었다. 반승제와 함께 식사한다고 했었고 백연서도 갑자기 문자를 보낸 걸 보면 윤단미를 앞세워서 위세를 떨쳐 보이려는 게 분명했다.그녀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쥐었다. 원래는 반씨 집안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윤단미가 스스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양이는 그저 도화선일 뿐이었다.그녀는 휴대 전화를 꺼내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전화에 반태승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혜인아, 무슨 일이야? 승제가 또 널 괴롭혔어?”반승제 얘기에 반태승의 말투가 싸늘해졌다. 반승제의 외도만 생각하면 채찍을 들어서라도 아주 혼쭐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반태승의 목소리에 성혜인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 편에 서준 사람은 오직 반태승뿐이었고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보다도 그녀를 더 믿어줬다.원래는 그저 고자질만 할 생각이었으나 갑자기 억울함이 밀려와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자 반태승의 낯빛이 진지해졌다.“그 자식 또 무슨 잘못을 한 거 맞지? 혜인아, 진정해. 윤단미가 돌아왔다고 들었어. 3년 전에 우리 집안에 들어오지 못했으니 3년 후인 지금도 못 들어와.”성혜인이 코를 훌쩍였다. 반태승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생각에 이내 당부했다.“할아버지, 꼭 건강 챙기세요.”“난 괜찮아. 이 할아버지가 걱정하는 건 너
윤단미의 시선이 유경아에게 향한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벌써 한참이나 지났는데 마실 것도 안 내오고 뭐해요? 포레스트에 오늘 마실 것도 준비 안 됐나요?”유경아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질타했다.유경아는 무의식적으로 반승제를 쳐다보았다. 윤단미는 반승제의 팔짱을 꽉 끼고 있었다. 계속 열이 내렸다 올랐다 반복한 바람에 안색이 조금 창백했지만 그만의 아우라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그가 자리에 앉자 윤단미도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유경아는 분통이 터졌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 차를 내리면서 성혜인에게 몰래 문자를 보냈다.「사모님, 아무래도 포레스트에 오셔야겠어요. 도련님이 어떤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두 사람 아주 다정해 보여요.」그 시각 로즈 가든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포레스트의 일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유경아는 차를 가져와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윤단미가 위층을 힐끗 보더니 씩 웃었다.“승제야, 네 와이프는 집에 없어?”아내의 행방을 몰랐던 반승제는 유경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유경아가 재빨리 설명했다.“사모님 아직 들어오지 않았어요.”윤단미가 놀란 척하며 입을 움켜쥐었다.“아까 아주머니랑 통화할 때 네 와이프가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 자꾸 외박한다고 하더라고. 결혼했으면 일찍 집에 들어와야지, 안 그래? 승제 너 지금 몸도 안 좋은데 옆에서 챙겨주지도 않고 대체 어딜 갔대?”반승제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챙겨줄 필요 없어.”그녀가 없으면 오히려 더 자유롭고 편했다.그 말에 윤단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더는 그 꼴을 볼 수 없었던 유경아는 대충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거실에 반승제와 윤단미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반승제가 한창 오전 회의 때의 데이터를 생각하고 있는데 윤단미가 옆에서 재잘거렸다.“아까 오는 길에 페니 씨를 만났는데 페니 씨가 내 고양이를 잃어버렸어. 승제야, 나 우리 집 고양이를 좋아하는 거 너도 알잖아. 고양이한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너무 걱정돼
반태승이 소파 앞에 가서 앉자, 유경아는 빙그레 웃으며 황급히 차 한 잔을 내왔다. 반태승은 그것을 받아 천천히 잔을 들어 위에 둥둥 뜬 찻잎을 옆에 있는 잔에 덜어냈다. 그러고는 기세등등한 말투로 윤단미를 꾸짖었다.“윤단미 씨, 우리 승제가 이미 결혼까지 한 유부남인 것을 모를 리 없을 테죠? 포레스트 별장은 내가 혜인이에게 선물한 신혼집입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렇게 무례하게 남의 신혼집에 들어온 겁니까? 윤씨 집안에서는 윤단미 씨에게 이런 기본적인 인간 됨됨이도 가르치지 않았단 말입니까? 윤단미 씨는 예의도 염치도 모르는 사람이에요?”“할아버지,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입 다물어요, 누가 당신 할아버지입니까?”반태승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째려보았다.“지금 당장 윤단미 씨 부모님께 전화하세요. 난 윤단미 씨 부모가 직접 포레스트 별장에 와서 딸을 데려가는 꼴을 꼭 봐야겠으니까요! 기왕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남의 가정이나 파탄 내는 상간녀 노릇을 자청했으니, 그렇다면 어른으로서 내가 오늘 제대로 가르쳐 줘야겠네요.”윤단미는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눈물을 흘렸다.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할아버지, 단미는 그저 지나가다가 잠깐 들린 손님일 뿐이에요.”“너도 입 닥쳐!”반태승은 책상을 다시 두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승제야, 만약 네가 한마디만 더 한다면, 나는 병원에서 진행하는 그 어떤 치료에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반승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반태승은 다시 윤단미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더니 차갑게 말했다.“어서 전화 걸지 않고 뭐 해요, 자기 부모님 연락처도 모르는 겁니까?”윤단미는 울면서 주춤거리더니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 순간 그녀는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약 부모님이 친히 포레스트 별장까지 와서 자기를 데려간다면, 내일 이 일은 제원 전체에 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더 이
반태승은 말을 마치자마자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윤단미를 배웅하려던 반승제의 발걸음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다급히 할아버지를 부축하러 달려왔다.“할아버지, 제발 화내지 마세요. 제가 연락할게요, 혜인이한테 연락하면 되잖아요.”그가 반태승을 부축하여 소파에 앉히자, 반태승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애당초 네가 왜 윤단미와 함께하려 했는지 내가 모를 거로 생각하지 마, 단지 네 형의 일 때문이잖아.”반승제는 반태승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그의 등을 다독였다.“할아버지, 좀 괜찮아지셨어요?”반태승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대답했다.“진심으로 내 건강이 걱정된다면, 나를 화내게 만들지 말거라. 혜인이는 내가 너를 위해 고르고 고른 짝이다. 그러니 네가 그 아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틀림없이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있는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반승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혜인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이때 안정을 되찾은 반태승이 몸을 돌려 반승제의 손을 밀어냈다.“당장 혜인이한테 전화해. 다음에 또 네가 한 이런 황당한 일을 알게 되면, 내가 어떻게 너를 혼내줄지 두고 봐!”반승제도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반태승이 다른 것으로 그를 위협했다면, 예를 들어 반씨 집안의 후계자 자리나 BH그룹의 대표 자리를 내세워 그를 위협했다면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태승은 하필이면 자신의 건강을 내세워 협박했다.그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그녀의 번호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이 번호는 성혜인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였다.이때, 성혜인은 이미 로즈가든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피곤이 많이 쌓였었다. 유현숙에 관한 일이 잘 마무리되자, 그녀는 마침내 푹 잘 수 있게 되었다.전화벨 소리를 듣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윤단미가 시비를 걸려고 전화를 걸어온 줄 알았다. 어쨌든 그녀가 먼저 윤단미를 찾아가지 않았으니 말이다.성혜인
그날 밤, 성혜인은 한잠 푹 자고 났더니 유달리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 후, 가장 먼저 휴대전화를 켰다. 반승제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표시되어 있었는데, 게다가 전부 자신의 개인 번호로 걸려 온 부재중 전화였다. 성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또 할아버지한테 혼난 건 아니겠지?’그녀는 씻으면서 메시지를 보냈다.「무슨 일 있어요?」어젯밤 폭풍우가 불고 간 포레스트 별장에 비해,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비로소 담담하게 적어 보낸 답장은 분명 울화가 치밀어 오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반승제는 여자 때문에 쉽게 감정 기복을 느끼는 편이 아니었다.그는 문자를 읽고 나서 바로 삭제했다. 할아버지도 더 이상 따지지 않으셨으니 굳이 이 여자와 연락할 필요도 없었다. 성혜인도 반승제가 답장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개인 번호로 전화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할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간단하게 씻은 후, 그녀는 급히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건강을 물었다. 뜻밖에도 반태승은 그녀를 남편이 바람나서 버려진 불쌍한 처지로 알고 있었다.“혜인아, 걱정하지 말거라. 할아버지는 항상 네 편이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할아버지한테 직접 말하거라. 내가 승제 그 자식을 끌고 와서라도 네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할 테니.”반승제는 어려서부터 독립적인 아이였다. 그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다. 그래서 그 당시 할아버지가 강력하게 결혼을 밀어붙이실 때에도 그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되어 반항조차 하지 못했었다.“윤단미 그 여자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 쓰지 말거라. 그 여자도 별수 없을 거야. 내가 절대로 그 여자를 반씨 집안에 들이지 않을 테니까! 혜인이가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그 여자는 반씨 집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거야.”‘윤단미는 애초에 할아버지가 허락할 만한 여자가 아니었네.’성혜인은 반태승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할아버지,
윤선미는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언니, 걱정하지 마. 그 여자가 다시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어 줄게.”윤단미가 냉랭하게 웃었다.‘원래 못생긴 얼굴, 이젠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어 주겠어.’윤선미는 윤단미의 말을 듣고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러 카페와 단톡방에 이런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반승제랑 결혼한 그 여자가 글쎄 매일 밤 밖에서 유흥을 즐긴다고 하더라고요. 듣자 하니 반승제 대표님은 이 여자를 아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하더라니까요.”“정말인가요? 그런데도 반태승 회장님께서 지켜보시기만 한다는 말이에요? 회장님이 직접 고른 사람이라고 들었는데요?”“지금까지는 회장님께서도 그저 생명의 은인이라 눈 감아주셨나 본데요, 하지만 자기 손자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두고 볼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어요. 이미 그 여자에게 어떻게 돈을 주고 떼어낼지 의논하고 하루빨리 반씨 집안에서 쫓아내려고 할 겁니다.”“하긴, 이런 여자를 어찌 감히 윤단미 씨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어쩐지 윤단미 씨가 돌아오자마자 반승제 대표님이 윤단미 씨와 붙어 다니더라니.”이 소문들은 각 커뮤니티에 퍼졌고, 결국 모두가 반승제와 윤단미의 결혼을 기대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이 한 달 내에 결혼할 것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다음 주 중으로 윤단미가 반씨 집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내기를 했다.그때, 성혜인은 강민지와 함께 병원에 있었다.강민지는 워낙 부잣집 아가씨인데다 강씨 집안은 진정한 재벌가였기 때문에 그녀도 상류사회의 사람들만의 카페나 단톡방 한두 곳에 가입되어 있었다.그녀는 평소에는 이런 카페나 단톡방에서 발언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요란법석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혜인아, 잠자다 이 사람들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봐봐. 네가 못생겼다고? 그 와중에 바람둥이라고? 지금 당장 사진을 찍어서 이 사람들한테 보여주자. 네가 못생긴 거면 윤
이어서 강민지도 자리를 떴다.성혜인은 두 변호사의 뒤를 따라 걸으며 아버지 성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변호사 두 명과 근처 공원에서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 의논하려던 그때,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스케치가 한창이던 반승혜를 보았다.반승혜도 그녀를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페니 씨! 오랜만입니다!”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스케치하고 있었어요?”반승혜가 한숨을 쉬었다.“그럼요. 오빠를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요즘 통시간이 안 나는 모양이더라고요. 풀 스케줄이라고 들었어요.”반승혜는 옆에 있는 양복 차림의 두 사람을 한 번 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는데, 어디서 인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페니 씨, 바쁜 것으로 보이는데, 일 보세요. 전 스케치 좀 더 할게요. 이따가 시간 나면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음식 대접할게요. 어때요?”성혜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반승혜는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스케치를 이어갔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두 변호사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두 사람은 반씨 집안사람이 이곳에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성혜인은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아버지께서 변호사님들께 어떤 것을 문의하셨나요?”“성혜인 씨, 카페나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건 어떨까요?”성혜인은 조금 의아했다. 이곳은 병원과도 가까워서 얘기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가기도 편리했는데, 굳이 왜 카페에 가려고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마음속에 언뜻 위기감이 스치자, 그녀는 즉시 일어섰고 손에 식은땀을 쥐었다. 설마 두 사람은 변호사가 아니란 말인가?한편, 반승혜도 붓을 놓으려다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어디선가 본 적 있었던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정체가 생각났다. 그들은 바로 윤선미의 곁을 지키던 윤씨 집안의 경호원들이었던 것 같았다.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설연주는 나한테 없어. 원래 사람을 시켜서 멀리 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사라졌어.”이상하게도 설연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설연주와 얽힌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설우현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허튼수작을 부리는 여자일 뿐이었다.두팔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설연주를 찾아, 이 땅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두팔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설우현은 이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설기웅은 이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말했다.설우현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누구예요?”“최용호의 사촌 여동생이야. 한동안 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 넌 항상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약까지 구해왔더군.”설우현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여자는 얼굴이 낯익었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집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형,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아버지를 찾아갔어. 아버지는 너와 그 여자의 결혼을 고려하고 계셔.”설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 나더러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하지만 이내 설기웅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다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설우현이 가문을 위해 혼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면 최용호의 사촌 동생과 결혼해도 문제가 없었다.최용호는 설기웅의 친구였고 최씨 가문도 플로리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였다. 이 결혼은 양 가문에도 손색없는 혼사였다.설우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형,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는 특정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자신이 여자의 계략
설우현은 잠시 발걸음을 주춤했다.‘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뻔뻔해? 그래, 무릎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설연주는 두팔에게서 이미 잔혹한 고통을 겪은 뒤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우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설우현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그는 부하에게 설연주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설연주는 이번에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지난번처럼 고열이 계속되었다. 의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녀를 보내는 일을 미루고 오늘 밤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그도 병원에 머물며 그녀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설연주는 그가 떠나자마자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팔한테서 나왔어요?”오번은 원래 두팔을 따라다니며 설연주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떠난 뒤로 자신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약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당장 필요해요.”오번은 무슨 약인지 듣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연주 씨, 설마...”설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화 중임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네, 바로 그걸 원해요. 곧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설우현이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그 전에 딱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요?”오번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미쳤어요? 이 일이 들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이런 약 구할 수 있잖아요?”오번은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비밀 약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밤이 되어 설우현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흰색 정장을 입고 설기웅의 뒤를 따라 몇몇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는 중간에 2층에 올라가 친구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대신 술 한 잔을 마신 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평소 설연주는 다른 남자들에게 무척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유독 설우현에게만큼은 어딘가 진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그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설우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설연주가 더욱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설연주는 두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반면 두팔은 그녀의 이런 상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설연주를 탐하고 싶었고 지난번 사람을 시켜 길들였지만 그녀는 끝내 도망쳤다.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두팔은 설연주를 침대에 내리눌렀다.설연주의 얼굴에 잠시 공포가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게 변했다.두팔은 그녀의 겉옷을 벗겨내고 더 안쪽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설연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설연주는 반항할 마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심지어 마음속 깊이 설우현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후회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후회하거나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도 설연주의 머릿속엔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두팔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두팔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침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마침내 그가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려던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팔의 부하가 문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형님, 저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깜짝 놀란 설연주는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설우현이 서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두팔은 그를 알아보고 즉시 옷을 바로잡았다.“우현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 찾아
오번은 설우현의 선택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설연주를 정말로 혐오하는 듯했다. 결국 오번은 자기 힘으로 계속 설연주를 찾아야 했다.그러던 이틀 후 그에게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마침 그 의뢰는 두팔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팔이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오번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설연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음이 흔들렸다.“형님, 설연주를 계속 무릎 꿇리고 있을까요?”두팔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설우현의 사람들이 직접 설연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전에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당당하더니 이제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사흘 동안 계속 무릎 꿇리고 있어. 음식은 주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내버려둬.”오번은 통화 속 두팔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설연주가 두팔에게 넘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팔은 다시 한번 조건을 제시하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듣자 하니 해킹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우리 쪽으로 와볼 생각 없나? 충분한 보상은 보장하지.”오번은 고민 끝에 결국 두팔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그는 설연주를 만났다.설연주는 이미 이틀 밤낮을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등은 채찍 자국으로 가득했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그 끝은 두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설연주는 고개를 떨군 채 누구의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두팔은 갑자기 사슬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이윽고 두팔은 사슬을 조금씩 당기며 설연주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주야, 성씨를 바꿔가며 꼼수를 부렸지만 결국 설우현이 직접 널 내게 넘겨줬잖아. 기분이 좀 상했겠다?”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팔의 구두가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설연주는 손가락을 오그리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두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저번에 겨우 길들였더니 네가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도망갈 기회를 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