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 몇 년 동안 난 계속 자기 보러 갔어. 하지만 원씨 가문 문제들이 끝나질 않아서 자꾸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어. 자기한테 위험이 갈까 봐 꾹꾹 참았지. 매일 사진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원진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감정을 눌러 담고 고개를 들었다.“자기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 자칫 내 감정을 참지 못하고 억지로 데려오려 했다면 우리 사이가 끝나버릴까 봐... 그렇게 버티다 보니 5년이나 지나가 버렸어.”수많은 날을 그는 그 작은 희망 하나만을 붙잡고 버텼다. 당시연 주변에 다른 남자가 나타날 때마다 원진은 어김없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다행히도 당시연은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안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백화점에서의 그날 만남은 당시연에게는 첫 재회였겠지만 원진에게는 수없이 지켜보던 순간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당시연이 눈 내리는 거리에서 걷는 모습,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 사소한 표정 하나하나까지 그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원진만큼 당시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병적일 정도로 소유하고 싶어 했다.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전부 털어놓았다가는 그녀가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도망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저 평범하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원진이 당시연을 향한 사랑이 백 퍼센트라면 그는 그중 단 삼십 퍼센트만 표현할 뿐이었다.그런데도 그 삼십 퍼센트만으로도 당시연은 이미 마음 깊이 감동하고 있었다.“원진, 난 그동안 네가...”그녀는 원진이 나이 많은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이 창피해서 관계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당시연은 반지를 낀 채 그의 품에 안겼다. 키 큰 원진이 그녀를 꼭 끌어안자 그녀는 그의 품 안에 푹 파묻혔다.원진은 단톡방의 대화를 힐끗 보았다. 그 안에는 친구들이 그와 당시연의 관계를 두고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는데 아직도 못 꼬
반진율과 설서율이 첫돌을 맞은 날, 설우현은 플로리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돌아왔다.원래는 설기웅과 함께 오려 했으나 설기웅이 연구 기지에서 데려온 소녀가 갑작스레 열이 나 쓰러지면서 항공편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설우현은 혼자 먼저 비행기에 올랐다.설기웅은 오기 전 설씨 가문의 먼 친척들을 만나게 되었다.설의종이 병을 앓은 후부터 이들 친척은 저마다 꿍꿍이를 품고 있었고 성혜인 쪽으로 지분이 모두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가문이 크게 흔들렸을 상황이었다.이제 설의종의 건강이 호전되어 지분이 다시 설기웅과 설우현에게 돌아오자 이들 친척은 다시금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모습이었다.설우현은 이들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몇 년 전 설준석의 딸이 실종되었고 설연주는 그가 삼촌이라 부르던 설준석네에서 불과 며칠 전에 찾은 딸이었다.설우현은 원래 설준석네와 왕래가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삼촌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직계 가족은 아니었고 단지 설씨 성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었다.설준석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고 설경필이 살아 있을 때는 자주 설씨 가문을 찾아와 설경필을 뵙곤 했었다.그러던 어느 날 설경필에게 일이 생겼고 다행히 설연주가 한바탕 울며 소란을 피운 덕분에 사람들이 상황을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설연주는 돌연 사라져 버렸다. 설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찾으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설경필은 자신 때문에 설연주가 실종되었다는 죄책감에, 죽기 전 설의종에게 설연주가 돌아오면 감사의 표시로 가문의 1% 지분을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현재의 설씨 가문 규모로 볼 때 1%의 지분은 수천억에 달하는 금액으로, 평생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보통 사람들은 평생 손에 쥐어보지 못할 거액이었다.하지만 그동안 설준석은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여 왔고 이번에 갑자기 설연주를 찾았다는 사실이 설우현에게는 무척 의심쩍게 느껴졌다. 자꾸만 그들이 그 1%의 지분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설우현은 며칠
성혜인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한참 뒤에야 그녀는 설우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오빠, 내 생각엔 오빠는 속셈 부리는 데 서툴잖아요. 그러니 그 여자가 수상쩍다 싶으면 그냥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내가 그 여자를 무서워할 것 같아?”설우현은 다소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처음 그 여자를 만났을 때부터 그 여자가 내연녀 노릇을 하며 음모를 꾸미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그 여자의 속셈을 반드시 밝혀내겠다고 다짐했다.성혜인은 설우현을 더 설득해 보려 했다. 사실 설씨 가문에서 그녀의 둘째 오빠인 설우현의 성격이 가장 단순했다.어릴 때부터 가문의 모든 상업적 일들은 설기웅이 처리했고 설우현은 그저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며 편히 지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설기웅 또한 동생을 잘 챙겨 주었고 자신의 지분 배당금을 나눠 주며 설우현을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해 주었다. 덕분에 설우현은 사람들 사이에서 손해를 본 적도, 사업에서 남들과 신경전을 벌인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설연주 같은 사람을 상대하다가는 분명 손해를 볼 터였다.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상대의 음모를 밝혀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성혜인의 조언 따위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더는 말리지 않기로 했다.첫돌 잔치에서 설우현은 반승제를 은근히 깎아내렸고 이에 반승제는 화가 나서 발끈했다. 서주혁에게도 몇 마디 장난스럽게 찔러 보며 그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고, 곧이어 온시환을 비꼬아 한마디 던지자 온시환은 결국 화가 나서 잔을 깨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설우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위층으로 올라가 쉬었다.온시환은 최근 연애 문제로 몇 킬로나 빠졌고 설우현의 빈정거림에 더욱 이를 갈았다.서주혁이 옆에서 그를 위로했다. 온시환은 손바닥의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설우현이 한 번쯤 연애에서 제대로 당하는 꼴을 꼭 보고 말 거야. 두고 봐, 저 자식이 한 번 추락할 날이 오면 내가 제일 먼저 비웃어 줄 테니까.”모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반승제가 아닌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반승제의 비서인 심인우였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건 사모님께 전해달라고 하신 선물입니다.”백연서는 반승제에게 돌아와서 저녁밥이나 먹으라고 했지 성혜인이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그의 성격으로 원래 오려고 했던 것도 안 올수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심인우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래, 승제가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대신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주렴.”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백연서는 성혜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손을 휘적였다.“너도 이만 돌아가. 승제가 시간 있을 때 다시 부를 테니까.”“네.”성혜인은 애초부터 남아서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심인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흐릿한 뒷모습 만으로도 반승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게다가 오늘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혼 서류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다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성혜인은 빨간불을 기다리며 회사 단톡방을열어 봤다.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톡방은 아주 시끄러웠다.‘반승제가 이번에 결혼하러 돌아왔다면서요? 네이처 빌리지에 비싼 값을 주고 펜션을 샀다고 하던데 곧 인테리어도 하겠죠?’‘사장님이 반승제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실내 디자인 일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을까요?”“만약 가능하다면 저희가 엄청 덕을 보겠는데요? 반승제 정도의 재벌이라면 일은 둘째 치고 말이라도 섞어보고 싶어요...”반승제가 결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뉴스에도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일이었다.이 화제에 관심 없었던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끄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 양한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지금 잠깐 문라이트로 올 수 있어? 네가 디자인했던 펜션에 관심 있는 고객이 있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
반승제 근처의 아우라는 마치 여름이란 겪어본 적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가지.”성혜인은 반승제를 따라 문라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저마다 단정한 태도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그렇게 조용히 걷고 있던 반제승가 갑자기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 성혜인도 따라 멈춰서서는 덤덤하게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너 임경헌한테서 얼마나 받았어?”성혜인은 임경헌과 반승제가 어떤 사이인지 몰랐다. 반씨 일가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니 이것도 당연하였다.반승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그냥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다.“사장님 말로는 2억 정도 한다고 했어요.”“이 짓거리를 하는데 사장도 있어?”반승제는 진심으로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문라이트에서 비밀스러운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을 임경헌에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자신이 당사자가 될 줄은 또 몰랐다.어찌 됐든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고민하기에는 늦었다.반승제는 다시 몸을 돌려 룸으로 걸어갔고 성혜인도 묵묵히 따라갔다.“임경헌 말로 너희가 부르는 값은 높지만, 서비스는 확실하다고 했지?”성혜인은 그동안 많은 고객을 만나왔다. 대부분 사람이 다 부자라서 가격만큼은 충분하게 줬지만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말을 듣자마자 기계처럼 대답했다.“반승제 씨, 가격에 관해서는 충분히 서비스와 정비례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서비스와 정비례 한다라...’반승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네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했다면?”어색한 반응에 가만히 있을 줄밖에 모르던 성혜인에게는 서비스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반승제는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수억 원을 주고 살 정도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돈 벌기 참 쉬운 직종이군.’성혜인은 ‘고객이 왕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제가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