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끊기고 인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탕비실로 쏠렸다.신예준도 덩달아 탕비실을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손에 든 데이터를 바라보았다.“당장 수정하세요. 더 듣고 싶지 않습니다.”“알겠습니다.”기세가 너무 강한지라 상대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게 되었다.신예준은 손에 든 서류를 다시 건네주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 층에서 회의를 할 시간이다.그렇게 신예준은 회의실로 유유히 사라졌고 같은 시각, 탕비실 안, 서민규는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커피잔을 바라보았다.우유가 섞인 커피가 여기저기 흘러내리고 강민지는 그의 옷깃을 끌어당겨 그대로 입술을 서민규의 뺨에 들이받았다.서민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완전히 고장 나버렸고 강민지는 뒤로 물러서 바닥에 쏟아진 커피를 바라보며 못내 아쉬워했다.“못 마시겠네요. 아쉽다.”“저, 제가 한 잔 더 타드릴게요. 금방, 금방이면 돼요.”서민규는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옆에 있는 커피머신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강민지는 오늘 연한 색 립스틱을 바르고 가방을 들고 서 있는 등 무심하지만 여유로운 기색이 역력했다.반면, 서민규는 마침내 커피 한 잔을 더 챙겨 전전긍긍하며 그녀의 손에 가져다주었다.“먼저 마셔요. 오늘 우리 층에서 회의가 있어서 저도 참석해야 해요.”곧이어 서민규는 옆에 있는 걸레를 잡고 바닥에 있는 커피 얼룩을 깨끗이 정리했다.한편, 강민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의 설명을 들어주었다.“여긴 원두가 별로인 데다 커피 머신도 반자동이라 커피 맛이 좋진 않을 거예요. 혹시 손으로 간 원두커피를 좋아한다면 집에 도구를 갖춰둘게요.”강민지는 확실히 이런 원두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슬쩍 물어보았다.“와인 만들 줄 알아요?”“네.”“그럼 다음에 와인 만들어요. 사과와 귤껍질을 넣어서요.”“그래요.”같은 시각, 서민규의 머릿속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버렸는데 한쪽에는 꽃이 만발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그는 또 대걸레를 끌고 다른 한쪽으로 가서 옆에서 손을
“그런 거 아니야.”“잘 생각해. 나머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으니 업무에는 지장 주지 마.”신예준도 그의 긴장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속 서민규는 줄곧 우울하고 의기소침하지만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그런 서민규가 언제 갑자기 얼마나 엉뚱한 일을 저지를지는 항상 예상 밖이었다.서민규와 신예준 두 사람은 매우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애틋한 사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해 부모님께서 사고를 당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줄곧 고난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비록 현재 많은 사람이 서민규의 가문을 무시해도 서민규가 신예준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하지만 신예준은 그렇게 많은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 상대에게 손안에 있는 아무 물건이나 쥐여줘도 서민규는 바로 벼락출세할 수 있을 것이다.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신예준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았다.일부는 협력사에서 보낸 문자, 은행 문자, 그리고 조희서가 보낸 문자도 있었다.그는 진작에 강민지와의 채팅방을 맨 위에 고정해놓았는데 유독 고정된 곳만이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어젯밤 그가 보낸 문자 내용에 그대로 머물러 강민지는 여전히 답장하지 않았다. 마치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것처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현재 어떤 심정인지는 신예준조차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저 심장이 가느다란 철사로 꽉 조여져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기분이었다.그리고 이렇게 조이는 과정에서 또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잘 낫지도 않는 그런 고통.저녁 7시, 신예준은 정시에 퇴근해서 참지 못하고 강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강민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말 신예준의 생일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같은 시각, 강민지는 감옥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장하리도 수용되어있는 그 감옥.왜 왔는지는 그녀도 의문이었다. 이전에는 성혜인과 마찬가지로 면회를 시도했지만 장하리는 단호하게 모든 사람을 거절했다.사실 강민지는 왠지 모르게 항상
신예준의 집착에 강민지는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다. 정말 진지하게 신예준에게 정신병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었다.조희서를 좋아할 거면 조희서와 둘이 즐겁게 같이 있으면 안 돼? 왜 굳이 강민지까지 끌어들이냔 말이다.“좀 이따 들어갈게.”“좀 이따가 언젠데?”그의 말이 끝나고 강민지 쪽에서 정적이 흘렀다.강민지의 인내심도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마 지금은 한 마디도 신예준과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흐릿한 눈빛 속에 어두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20분 이내에 들어와.”답장하는 것도 귀찮았던 강민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나 그의 마음처럼 까만 스크린을 바라보는 신예준의 눈앞에서는 케이크를 자르라는 환호성이 쏟아져나왔다.이곳은 호텔의 로비인데 으리으리하고 금빛 찬란한 장식으로 주위에는 우아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그 사람들은 모두 최근에 알게 된 협력업체들이다. 모두 신예준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 이 자리에 그를 초대한 것이다.그러나 신예준은 담담한 안색으로 옆에 놓여있던 외투를 챙기고 손사래를 쳤다. 오늘 밤은 조금 무리해서 달리는 바람에 취기가 조금씩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대표님, 케이크부터 자르세요.”“그래요. 케이크를 자르셔야죠.”결국, 성화에 못 이겨 신예준은 옆에 있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레이어드 된 케이크를 잘랐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박수갈채가 쏟아져나오고 너나 나나 덕담을 해주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듣기 귀찮았던 신예준은 아무 핑계나 대고 비서를 불러 자리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니 벌써 11시 20분, 40분이 지나면 오늘도 그렇게 지나가 버린다.그의 말을 듣고 강민지도 집에 와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대문이 열리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하여 바로 옆에 있는 가정부에게 물어봤다.“제 아내는요?”“사모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순간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신예준은 다시 강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 전화가 연결되었지만 강민지는
조희서는 혹시 강민지가 자신에게 똑같이 복수하려고 이미 별장에 사람을 매복시켜 놓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가증스러운 년, 선심 쓰는 척하지 마. 네가 그렇게 할 리가 없잖아.]조희서는 강민지에 대한 증오가 뼛속까지 깊이 새겨져 있었다. 강민지만 아니었어도 자신은 벌써 신예준과 결혼했을 테니까.강민지는 아무 말 없이 신예준이 침대에 누워 있는 사진 한 장을 조희서에게 보냈다.[네가 와서 신예준을 돌봐. 운이 좋으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나는 지금 나가야 해,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조희서, 이번이 네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신예준을 완전히 네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네 능력에 달렸어. 그때 네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너희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봐. 그러면 신예준은 나와의 결혼을 취소하고 너랑 결혼할지도 모르잖아. 그게 네 꿈이 아니었니?]조희서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민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이런 기회를 주다니.[좋아, 바로 갈게! 강민지, 만약 날 속인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게다가 오늘은 신예준의 생일이었다. 조희서는 저녁에 그에게 많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술에 취해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서둘러 섹시한 옷을 갈아입고 바로 옆 별장으로 향했다.문이 열리기 전까지 조희서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혹시 강민지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건 아닌지 계속 의심했다.하지만 문이 열리고 강민지가 가방을 들고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 불안은 조금 가셨다.조희서는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예준이는 어디 있어?”“위층에 있어. 조희서, 이번에도 신예준을 못 잡으면 넌 진짜 무능한 거야.”조희서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며 비웃듯 한마디를 내뱉었다.“내가 너랑 같은 줄 알아? 네가 자존심도 없이 예준이에게 몸을 던져도 결국 예준이는 널 거부했잖아. 하지만 난 다를 거야. 두고 봐. 오늘 밤이 지나면 예준이는 나에게
“오빠, 정말 힘들어 보이네. 내가 도와줄게.”조희서는 계속해서 몸을 꿈틀거리며 천천히 신예준에게 기어갔다.얼굴이 완전히 어두워진 신예준은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강민지는 어디 갔어?”“강민지는 왜 신경 써? 지금 중요한 건 우리 둘이잖아. 오빠, 내가 도와줄게. 난 이미 준비됐어. 사실 전에도 준비됐었어. 오빠가 나를 아껴서 못 건드린 거 다 알아. 하지만 이제는 내 몸도 괜찮아. 그러니까 오빠, 날 가져.”조희서는 부끄러움도 없이 신예준의 발을 감싸안았다.신예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여전히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그 생각을 억누르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조희서를 내려다보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너 나한테 약이라도 탄 거야?”조희서는 순간 멈칫했다. 신예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강민지가 약을 썼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눈을 굴리며 곧바로 부인했다.“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강민지가 그런 거야. 내가 왔을 때, 오빠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어.”“누가 너를 오라고 했는데?”“강민지가 불렀어. 일부러 나한테 문자까지 보냈다고. 오빠, 강민지 진짜 대단하지 않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가다니, 분명 다른 남자 만나러 갔을 거야. 이제 더는 신경 쓰지 마. 내가 오빠를 편하게 해줄게.”조희서는 일어나 신예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신예준은 그녀를 단번에 밀어냈다.조희서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며 팔꿈치에서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예준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조희서는 자신이 착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눈앞의 신예준은 마치 무섭기 짝이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의 등 뒤로 끝도 없는 어둠이 서서히 퍼져 나와 당장이라도 사람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조희서는 두려움에 입술이 떨렸다. 원래는 그를 더 유혹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조희서는 고개를 떨군 채 몸을 떨며 감히 일어
조희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힘들게 얻은 기회였으니까.그녀는 아예 결심한 듯 몸에 걸친 옷을 전부 벗어버리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수치스러운 자세를 취했다.“오빠, 나 좀 봐. 강민지를 불러서 뭐 해? 여기 있으면 우리 사이를 방해할 뿐이야. 봐, 강민지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그러나 신예준은 시선을 돌리고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가슴속 깊은 곳에서 시작된 통증이 너무 강해져서인지, 오히려 이 순간 매우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신예준은 강민지가 얼마나 단호한지를 똑똑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이 명료한 상태였다.“강민지한테 전화해.”신예준이 전화를 걸었지만 강민지는 받지 않았다.조희서는 이미 옷을 다 벗은 상태였다. 하지만 신예준이 전혀 반응하지 않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심지어 그는 한 번도 그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왜? 도대체 왜 이 중요한 순간에 강민지를 원하고 있는 거지?조희서는 일어나 다시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때 신예준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희서야, 난 강민지만 원해.”조희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정말 미친 걸까?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강민지와 결혼하려는 게 강민지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신예준...”조희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머리를 숙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강민지는 주저 없이 신예준에게 약을 최대한으로 먹였다. 이 모든 건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 그녀와의 관계에서 약이 필요했던 사람은 바로 그였으니까. 이 모든 상황은 자업자득이었다.조희서는 더 이상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어서 결국 목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밖에 있던 사람들이 소란을 감지하고 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문이 밖에서 잠긴 것 같습니다.”신예준은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지르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문 부숴요.”곧바
이때 신예준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사람이 없어서 실망했어?”강민지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지만 이미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강민지는 신예준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아주 큰 분노였다. 그대로 자리에 서 있던 강민지에게 신예준이 다시 말했다.“민지야, 나 화 안 났어. 이리 와.”그러나 강민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신예준은 이불을 확 걷어차고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채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강민지는 침대에 부딪혀 허리가 아팠다. 일어나려던 찰나 신예준이 그녀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침대에 눌러 버렸다. 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을 보며 온몸이 제압당해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콜록콜록참지 못하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신예준은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다가와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강민지는 입안에 피 맛이 느껴지며 눈이 크게 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이 쿡쿡 아파지기 시작했다. 목이 세게 눌려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신예준은 잠시 키스를 하더니 다시 그녀의 목을 따라 내려가며 자국을 남겼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강민지는 자신의 목이 축축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신예준은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묶고 그녀를 뒤집어 눌렀다. 그는 손을 뻗어 방 안의 조명을 모두 껐다.침대 머리맡에 남은 조명 하나만이 방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방 안은 곧 다른 소리로 가득 찼다.강민지는 신예준의 행동에 진심으로 겁을 먹었다. 허리가 그의 손에 의해 끊어질 것만 같았다.“아파, 그만해!”그는 멈추지 않고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강민지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두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신예준은 마치 분노를 해소하듯 그녀의 어깨와 목을 여러 번 깨물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정확히 볼 수 없었다.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조희서가 제대로 못 해줬어? 아직도 이렇게 미쳐 날뛸 힘이 남
강민지는 신예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 그토록 화가 나 있던 그가 이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더 이상 따지려는 마음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지금 그의 감정 상태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최근 들어 그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오늘이 오랜만에 잠을 푹 자는 날이었다.강민지는 갑자기 이유 모를 짜증이 밀려와 휴대전화를 꺼내 조희서에게 문자를 보내려 했다.‘어젯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조희서가 그를 붙잡지 못했지?’만약 신예준이 정말 조희서에게 빠져 있었다면 후반부에서 그렇게 거칠게 밀어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곧 화면에 ‘메시지 발송 실패’라는 알림이 떴다.조희서가 그녀를 차단한 것 같았다. 아마도 조희서가 직접 차단한 것이 아니라 신예준이 그렇게 지시한 걸지도 몰랐다.강민지는 다시 한번 문자를 보냈지만 여전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과 조희서의 모든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문득 어젯밤 방에 설치해 둔 녹화 장비가 떠올랐다. 원래는 신예준과 조희서의 관계를 찍으려던 것이었는데 이제 보니 자신만이 촬영된 셈이었다.그녀는 장비가 있던 곳을 바라봤지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미 누군가가 치운 모양이었다. 아마도 신예준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서 깊이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정오가 되어 신예준이 일어났다.강민지는 그의 움직임을 일부러 무시하며 등을 돌리고 있었다.신예준은 세수를 마치고 양복을 입은 후 그녀 앞에 서서 얼굴을 살폈다. 강민지가 자지 않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이를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강민지는 그의 행동이 너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너무도 평소와 달라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결혼식이 5일 남았어. 오늘 오후에 호텔에 가서 점검해야 해. 넌 집에서 쉬어.”강민지는 온몸이
다음 날 아침, 염정아는 어제 포장해 온 음식을 데워 동생에게 새로 산 옷을 입혀주었다.솔직히 말해 동생은 잘생긴 편이었다.염정아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깨달은 건 그들 모두가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이제 갈게. 아이들 잘 돌봐줘.”“누나...”동생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치 과거 그녀가 수없이 일하러 나갈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며 따라오는 모습이었다.염정아는 마음을 다잡고 문을 닫은 뒤, 공지민의 팔을 붙잡았다.“가자.”공지민은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정아야, 두 달은 제원에 있어야 할 텐데, 집에 더 할 말은 없어?”염정아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도 보다 시피 동생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걱정 마. 큰애는 요리도 할 줄 알아. 동생이 못하면 애들이라도 버텨줄 거야.”그렇지 않다면 이 집이 지금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공지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제원으로 향했다.그들은 이번 여정으로 3일을 보냈다. 출발 전, 공지민이 온시환과 크게 다툰 후 3일 동안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 사이 공지민은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허벅지에 염정아와 같은 모양의 빨간 반점을 새겼다. 그뿐만 아니라 염정아 몸의 모든 점 위치를 기억해 자신의 몸에도 똑같이 재현했다.염정아는 소심하고 큰 도시에 익숙하지 않아 직접 연씨 가문에 들여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연승혁을 만나게 된다면 금방 모든 것을 들킬 것이 뻔했다.그래서 공지민은 다른 계획을 세웠다.그녀는 실종된 연씨 가문의 딸인 척하며 가문에 들어가 연승혁의 누나가 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 위치에서 복수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온시환의 별장 근처에 염정아를 위한 집을 임대했다. 그리고 염정아의 머리카락과 혈액 샘플을 채취해 필요시 친자 확인에 대비했다.모든 준비를 끝낸 뒤, 공지민은 기회를 기다리며 조용히 움직였다.염정아는
공지민은 염정아가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죄책감이 들었다. 원래라면 염정아는 이런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제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을 손쉽게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공지민 자신도 이런 선택이 옳은지 확신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정아야, 내가 카드를 줄게. 하지만 네가 나랑 제원에 가면, 너희 아이들은 누가 돌보지?”“동생이 돌볼 거야. 가끔 아래층 슈퍼 사장님도 와서 봐주실 거고. 슈퍼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다 있으니까 걱정 없어. 내가 매일 일하러 나갈 때도 동생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봤거든.”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염정아를 데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계절 옷들을 한꺼번에 샀다. 아이들이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입을 수 있을 만큼 넉넉히 준비했다.그녀는 염정아와 남동생에게도 새 옷을 사주었다. 동생은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신나게 웃음을 터뜨리며 염정아를 연신 불렀다.염정아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지민에게 물었다.“우리 내일 제원으로 출발해도 될까? 집에서 몇 가지 정리할 게 있거든.”“그래. 네가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이건 내 카드야. 비밀번호는 네 휴대폰으로 보낼게. 필요한 돈은 언제든지 써.”“고마워.”염정아는 곧바로 동생을 옆으로 데리고 가서 세세히 일러주기 시작했다.동생은 비록 지적 장애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었다. 다만 집 밖으로 나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잘 들어. 내가 몇 달 동안 집을 비울 거야. 아이들은 네게 맡길게. 아래층 미숙 이모가 정기적으로 먹을 걸 가져다줄 거야. 분유 타는 법은 이미 두 달 동안 가르쳤고, 기저귀 갈아주는 법도 배웠으니까 잘할 수 있지? 간단한 반찬 만드는 법도 알잖아. 아이들을 잘 돌봐줘.”동생은 순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입을 떼며 말했다.“누나가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아.”“금방 돌아올 거야. 걱정하
아이를 낳는다는 건 여성의 몸에 큰 상처를 남긴다. 염정아의 배가 어떤 상태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마자 염정아의 남동생은 옆에서 토하고 말았다. 너무 많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댄 탓이었다.염정아 역시 속이 더부룩해 고생했지만 토하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남동생은 토한 뒤에도 후회로 가득한 얼굴이었다.염정아는 그의 입가를 천천히 닦아주며 말했다.“그만 먹어, 안 그러면 내일은 아무것도 먹을 게 없을지도 몰라.”남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을 바라봤다.공지민은 계산을 마치고 포장한 음식을 들고 그들과 함께 염정아의 집으로 돌아갔다.집에는 아직 어린 다섯 아이들이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인 쌍둥이는 아직 품에 안겨 있어야 했고 제일 큰 아이도 겨우 일곱 살이었다.염정아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며 막내들에게 줄 분유를 타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반면 남동생은 몇몇 아이를 달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공지민은 그녀가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모든 일이 끝났을 때 염정아의 얼굴은 이미 피곤함으로 가득했다.“지민아, 네가 여기에 찾아온 건 무슨 일 때문이지?”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이었지만 공지민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염정아의 삶이 이미 이렇게 힘겨운데, 연씨 가문으로 엮이는 것이 옳은 일일까?염정아는 그녀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듯 부드럽게 말했다.“그냥 말해. 지금 내가 돈이 절실하다는 건 너도 알잖아. 지민아, 나는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야. 네가 돈을 조금이라도 준다면 뭐든지 도와줄게. 아이들이 굶는 것만은 막아야 하니까. 집에 분유도 떨어졌고, 언제 또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 몸 상태도 별로라 공사판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불안해. 내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될까?”동생과 다섯 아이들은 온전히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정아야, 네 허벅지 근처에 빨간 꽃 모양의 반점이 있지
공지민은 염정아를 품에 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운명은 어쩜 이렇게 잔인하고 불공평할 수 있을까.염정아도, 구은우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두 사람을 철저히 망가트린 현실이 너무도 가혹했다.염정아는 한참을 울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그녀의 눈에 식은 차가 보였다.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밖에서 뭐라도 먹자. 그리고 아이들한테 줄 것도 좀 사자.”염정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지민아, 네가 우리 집 주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한 번도 잊은 적 없어.”공지민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녀는 염정아를 이용해 연씨 가문에 접근하고 연승혁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렇게나 망가진 염정아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품에서 흐느껴 우는 친구를 보니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가 너무도 비열해 보였다. 복수라는 감정에 눈이 멀어 사람의 고통을 이용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염정아는 외출할 만한 옷 한 벌조차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은 군데군데 헝겊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그녀가 옷을 챙기는 동안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그는 순수한 눈빛으로 다가와 물었다.“누나, 어디 가?”“밥 먹으러 나가.”“나도 데려가 줄 수 있어?”늘 침을 흘리던 그는 지금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아마 염정아가 그의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조심하고 있는 듯했다. 염정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같이 가자.”그녀는 이 동생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적 장애를 가진 그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부모가 약을 먹이고 강제로 그와 염정아를 함께 있게 했을 때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한 번도 그녀를 자발적으로 건드리지 않았고 단지 그녀 곁에서 잠을 잤다.염정아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돌보고 막내에게 분유를 타 먹이며 남편과 같은 동생을 데리고 공지민과 함께 집을 나섰
공지민은 여전히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감정의 흔들림조차 없는 차분한 모습이 오히려 더 사람을 화나게 했다.온시환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소파에 밀어 눕히며 말했다.“너는 침대에 있을 때만 겨우 말을 좀 듣더라.”공지민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네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야?’그녀의 반응에 온시환의 자존심은 철저히 짓밟혔다. 그는 그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서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바닥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고급 디저트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거실 테이블은 한쪽으로 넘어가 엉망이었다.온시환은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몰려왔다. 반승제가 이 집 디저트가 아주 맛있다고 추천했기에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사 온 건데, 그녀의 마음을 얻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공지민은 정말 마음이 없는 걸까.그는 아무 말 없이 큰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 표정만 봐도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제야 숨어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나와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움직이며 공지민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지민 씨, 사실 시환 씨가 당신한테 잘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조금만 부드럽게 대처하면 덜 힘들 텐데요.”공지민의 턱에는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방금 온시환이 얼마나 강하게 그녀를 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공지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정부에게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차에 올라 고등학교로 향했다.그곳은 제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녀는 염정아의 집 앞에 서서, 과거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어둠 속의 작은 틈에서 모든 걸 끄집어내는 듯했다.깊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염정아가 바로 허벅지 안 쪽에 빨간 꽃 모양의 반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번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을 때 우연히 보게 되었다. 너무나 독특했기에 그
구은우처럼 좋은 사람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했을까?공지민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수심으로 가득 찼고 구은우를 해친 모든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서두를 수 없었고 우선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사찰을 떠난 순간 온시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어디야?”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퍽 다정했다. 아마 어젯밤의 만족감 때문인지 약간의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공지민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그때의 거래는 여전히 유효한 건지,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언제쯤 말해줄 건지.그러나 연씨 가문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할 수 없었다.“곧 돌아갈게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러야 할 일이 있어요. 친한 친구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해서요, 한번 가서 보려고요.”“그래?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아니요, 이건 제 일이에요. 시환 씨는 그냥 은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조사해주시면 돼요.”온시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공지민의 눈에 조소가 스쳤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공지민이 찾아가려던 고등학교 친구는 그녀와 함께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원아정 일당이 공지민을 표적으로 삼기 전까지 주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말하자면 공지민이 그녀를 구한 셈이었지만 그녀의 정신 상태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다.친구의 이름은 염정아였고 삶은 공지민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가족은 극단적으로 남아선호 사상을 따랐고 그녀는 언제나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해야 했다.염정아의 남동생은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항상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키는 187cm나 되는 거구의 남자였지만 하루 종일 입을 비죽이며 웅얼거리는 모습이었다.어느 날 그녀의 부모는 염정아에게 충격적인 요구를 했다. 동생의 아이를 가지라는 것이었다.그 충격적인 요청에 염정아은 공지민에게 전화했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는 휘말리고 싶지않았지만 구은우의 유골을 돼지에게 먹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공지민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고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공지민의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자 원아정은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듯 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당시 구은우의 유골함이 해외로 옮겨졌다고 하지 않았어? 사실은 그 남자가 구은우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결국 그건 아내가 자기를 배신한 증거였으니까. 내가 돈 몇 푼 쥐여주니까 곧바로 나한테 유골을 팔더라.”공지민의 입술이 떨리며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원아정의 손목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그대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원아정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뺨을 맞았다. 그녀는 분노와 충격으로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너 따위가 감히 날 때려?”고등학교 때 그녀 앞에서 무릎 꿇고 빌었던 걸 벌써 잊은 걸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은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사찰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숙도 현장에 도착했다.안정숙은 두 사람을 쏘아보며 차갑게 물었다.“여기서 무슨 짓들을 하는 거야?”원아정은 마치 피해자인 양 금세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제가 고등학교 동창이랑 조금 오해가 있었어요. 그런데 얘가 갑자기 저를 때리고 발길질을 했어요.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얼굴이 너무 아파요.”원아정의 뺨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면 공지민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상황은 자연스레 원아정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안정숙은 눈썹을 찌푸리며 공지민을 바라봤다. 더 이상 이전의 인자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공지민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원아정을 노려보았다. 원아정의 눈빛에는 조소와 함께 승리의 기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찰을 떠났다.차에 올라서도 원아정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
공지민은 온시환과 함께 차에 올랐다. 의자에 기대앉은 그녀는 머릿속에 온통 연승혁의 실종된 누나에 관한 생각뿐이었다.그 누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만약 그녀를 찾아낸다면 연씨 가문에 접근할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시환은 그녀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너 요즘 뭔가 고민이 많은 것 같아.”“아니에요.”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아니라고? 그냥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은 거 아니야? 네가 파티에 가고 싶다고 해서 데려갔고,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줬어. 그런데 내가 얼마나 더 비참하게 굴어야 해? 나한테도 좀 웃어주면 안 돼?”그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했고 손아귀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눈살을 찌푸린 공지민은 그를 달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깊은 키스를 이어갔다.둘은 몇 분간 키스한 뒤에야 숨을 고르며 멈췄다.밤이 되자 두 사람은 씻고 난 뒤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졌다. 공지민은 그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온시환의 눈빛에 담긴 진심 어린 애정을 보면서도 그녀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연승혁에 대한 일을 속이며 자신을 기만했던 이 남자를 왜 동정해야 할까?무엇보다 온시환이 동정이 필요한 사람인가? 예전에 그를 위해 눈물 흘렸던 여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건 단지 그의 업보일 뿐이었다.다음 날 아침,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온시환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옆에 남겨진 메모에는 그녀에게 푹 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곧바로 씻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목적은 연씨 가문의 노부인을 우연히 만나는 것이었다.전날 밤, 그녀는 안정숙이 최근 몸 상태가 조금 나아져 근교의 사찰에 들러 기도를 드린다는 정보를 얻어냈다.공지민은 차를 몰고 산길을 따라 사찰에 도착했다. 일부러 안정숙보다
강민지와 대화를 마친 후, 공지민은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온시환은 이미 누군가에게 끌려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떠나기 전 공지민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며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소파에 앉아 있던 공지민의 시야에 원아정과 몇몇 여성이 들어왔다. 원아정은 마치 공지민을 못 본 척 지나치려는 듯했지만 그녀 옆의 몇몇 여자는 공지민이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원아정의 곁을 맴돌던 오예슬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오예슬은 공지민이 온시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공지민을 보자마자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어머나, 아정아, 저기 좀 봐. 저 사람 우리 고등학교 때 제일 인기 많았던 공지민 아니야?”오예슬은 거의 뛰다시피 공지민 앞으로 다가가선 위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공지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여기 직원으로 지원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공지민의 옷차림을 보면 그런 말이 어불성설이었지만 오예슬은 그녀를 비하하고 싶어 일부러 그런 말을 내뱉었다.공지민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예슬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지민을 괴롭히며 쾌감을 느껴왔고 지금의 무시당하는 태도는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과거 공지민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공지민에게 그대로 부어버렸다.공지민은 피할 새도 없이 머리에 술을 뒤집어썼다.“어머, 미안해. 내가 잔을 제대로 못 들었나 봐.”오예슬은 원아정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 이런 행동을 했고 이는 과거에도 그녀가 원아정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주 하던 짓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지민을 굴욕 주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원아정에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려 돌아섰다.하지만 공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오예슬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