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규는 신예준을 언급하면서 강민지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강민지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을 뿐, 아무런 말 없이 국 한 그릇을 마셨다. 옆에서 서예나가 계속 강민지에게 권했다.“언니, 이거 정말 맛있어요. 오빠가 말하길 미용에도 좋대요.”서민규는 비록 외모나 성격이 눈에 띄지 않고 여자 앞에서는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했지만 그동안 동생에게는 꽤 잘해준 편이었다.강민지는 서민규가 요리한 고기를 한 입 먹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문득 집에 돌아가기 싫어졌다. 하지만 그때 전화가 울렸다. 신예준이었다. 강민지는 이마를 찌푸리며 귀찮은 듯 전화를 받았다.“어디야?”요즘 들어 신예준이 가장 많이 묻는 말은 ‘어디야? 어디가?’였다. 강민지는 시계를 보았다. 이미 밤 8시가 넘었다. 설날에 서민규의 집에서 이렇게 늦게까지 머물러 있었다니.“밖에 있어.”“집에 와서 밥 먹어.”“이미 먹었으니까, 신 대표님 혼자 드세요.”신예준의 목소리가 순간 차가워졌다.“강민지, 내가 말했지? 나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강민지는 짜증이 확 밀려왔지만 신예준이 화를 내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조금 있다가 갈게.”“9시 전에 와.”그 말을 듣고 강민지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두 사람의 통화를 들은 서민규는 그녀가 곧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아쉬움이 밀려왔다. 강민지는 일어나 옆에 있던 가방을 집었다.“오늘 고마웠어요.”서민규는 얼른 따라나섰다.“제가 태워다 줄게요.”강민지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차에 오를 때 강민지는 발목을 살짝 삐끗했고 서민규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정말 부드러웠다. 그는 참지 못하고 살짝 주물렀다. 강민지는 손을 빼고 차에 올라탔다.“집 가까운 곳까지만 태워줘요. 거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갈게요.”서민규는 조금 아쉬웠다. 그 손을 잡고 있었던 시간이 겨우 2초 남짓이었다.“네, 알았어요.”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30분쯤 지났을 때 신호등에
서민규는 긴장한 나머지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지만 강민지는 그저 그에게 다가왔을 뿐이었다.“유혹하는 게 아니에요. 난 그저 신예준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에요. 솔직히 말해봐요. 그 약은 당신이 먼저 추천한 거예요? 아니면 신예준이 먼저 원한 거예요?”“당연히 예준이가 먼저 원했죠! 민지 씨에게 아무 감정도 없다고 말했거든요.”“그렇군요. 그럼 내가 복수하는 게 맞겠죠? 참 역겨운 사람이네요. 그렇지 않나요?”서민규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감각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는 모든 걸 잊고 키스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강민지 같은 여자를 자신이 더럽힐 수 있을까? 하지만 신예준은 어떻게 감히 그랬을까?강민지의 손끝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민규 씨 지금 제이엔 쥬얼리에서 일하고 있죠? 신예준과의 관계는 괜찮나요?”“괜찮아요.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예요.”사실 신예준이 강씨 회사를 차지할 때 서민규도 뒤에서 부추긴 공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린 사람은 결국 신예준이었다. 그가 강민지를 좋아하지 않고 복수하려 한 것이었다. 서민규는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강민지의 손끝은 여전히 그의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목소리마저 갈라졌다.“민지 씨는 저를 이용해 예준이에게 복수하려는 거죠?”강민지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손을 뿌리치며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이미 충분히 신호를 보냈는데 더 이상 눈치 없는 척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남자를 찾으려면 모델도 고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서민규의 평범한 얼굴도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그저 못생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서민규가 그녀를 붙잡았다.“민지 씨와 자고 싶어요.”강민지는 그 말에 너무 역겨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민규도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를
신예준은 전화를 끊고 강민지를 더 이상 보지 않은 채 문밖으로 나갔다. 조희서의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소파에 앉아 울고 있었다. 손바닥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오빠...”조희서는 그를 보자마자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신예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집으로 불렀다.“무슨 일이야?”“흑흑. 방금 사과 깎다가 손을 다쳤어. 너무 아파. 그리고 오빠가 강민지랑 결혼한다는 생각만 하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이제 오빠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정말 숨도 못 쉴 만큼 힘들어.”조희서는 속으로 독기를 품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결혼을 깨버려야 했다. 신예준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신경 쓴다면 그녀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주치의가 도착해 조희서의 상처를 확인하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꿰매지 않아도 되지만 피가 나서 보기에 좀 심해 보일 뿐이었다.의사가 떠난 후 조희서는 신예준의 소매를 붙잡았다.“오빠, 오늘 여기서 쉬고 가. 나 너무 어지러워. 당장 쓰러질 것 같아.”신예준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열이 나고 있었다.“해열제를 가져올게.”그러나 조희서는 그에게 기대며 말했다.“해열제 말고, 침대에 데려다줘. 눈도 너무 아파.”신예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부축해 2층 침실로 데려갔다.이 별장은 신예준이 조희서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왜 강씨 저택 옆에 별장을 사게 되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사버린 뒤였다.위층에 올라간 후 조희서는 침대에 누워 다시 신예준의 소매를 붙잡았다.“오빠, 나 너무 더워. 옷 좀 벗겨줘. 진짜 너무 더워.”조희서는 정신이 흐릿해졌다. 이번 기회에 절대 신예준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붙잡아두고 사진을 찍어 강민지에게 보여줄 계획이었다.‘강민지는 고고한 재벌가의 딸이니, 남자가 밖에서 바람피우는 걸 못 견디겠지?’조희서는 마음속으로 온통 더러운 생각들을 품고 있었다. 특히 강민지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더 큰
강민지가 잠에 들려던 순간 조희서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신예준의 사진이었다. 신예준은 침대 옆 소파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다. 그 얼굴은 한때 강민지를 단번에 사로잡았던 이유이기도 했다.[오늘 밤 오빠는 안 돌아갈 거야. 나랑 여기 있을 거거든. 강민지, 넌 참 한심해. 네가 오빠랑 결혼해도 오빠는 계속 나한테 올 거라는 걸 생각해 봐. 오빠가 나한테 사준 이 별장이 네 집 바로 옆에 있다는 것도. 내가 너라면 정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우리 예전에 이미 다 했어. 그리고 한 가지 말해줄까? 오빠는 너랑 할 때만 약을 먹었어.]강민지는 예전에 조희서가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신예준에게 보여주곤 했다. 처음 몇 번은 신예준이 냉담하게 말했다.“희서는 우울증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을 때가 많아. 게다가 몇 년 동안 병으로 누워 있었으니까, 네가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몇 번을 반복해도 똑같은 대답을 듣자 강민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지금은 신예준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조희서가 보낸 메시지가 여전히 역겹긴 했지만 예전만큼 크게 불쾌하지는 않았다.차라리 그들이 평생 서로 얽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예준이 결혼을 포기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강민지는 진정으로 신예준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모든 일을 겪고도 그와 결혼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스스로 모욕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고 잠에 들려던 찰나 조희서에게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빠가 깼어. 방금 나한테 키스했어. 우리 시작하려고 해. 라이브로 보여줄까, 민지 씨?]강민지는 조희서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번 만나본 결과 그녀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강민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꾼 후 베개 옆에 놓았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신예준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 것도 아니었다.그녀는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강민지는 메시지를 보내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신기하게도 오랜 불면증 끝에 처음으로 깊이 잠들었다. 그녀는 항상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병원에서 조희서가 진실을 폭로하던 그날이 떠오르곤 했다. 그날 이후 강민지는 겁쟁이처럼 도망치듯 교외의 별장에 혼자 숨어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씨 집안의 회사가 넘어가고 강상원이 과거에 일으킨 교통사고가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었으며 신예준은 미지의 신흥 재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이 모든 일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다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서민규와 대화를 나누고 난 후 강민지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아침 6시까지 깨지 않고 자던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가 침대에 누군가 있는 것을 느꼈다.눈을 떠보니 신예준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방금 막 집에 돌아온 듯한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강민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설명하려는 듯했지만 강민지는 눈을 뜨자마자 3초도 안 돼 다시 감아버렸다. 신예준은 슈트를 입은 후 갑자기 이불을 걷어내더니 강민지를 힘껏 누르며 거칠게 입을 맞췄다.강민지는 신예준의 입술이 점점 더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거친 키스에 입술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지만 신예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듯 더욱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물고 늘어졌다. 숨이 막혀서 본능적으로 밀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신예준은 잠시 멈추고는 그녀를 응시하더니 이번에는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가 몇 번이나 세게 빨아 자국을 남겼다. 선명한 흔적들이 그녀의 목에 또렷하게 새겨졌다.강민지는 아픔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신예준은 그녀의 두 손목을 억지로 끌어올려 침대 머리맡에 고정했다.“놔!”강민지는 힘겹게 외쳤다. 최근 들어 신예준이 가장 많이 묻는 말은 ‘어디야? 어디 가?’였고, 그녀가 가장 많이 외친 말은 ‘놔!’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놓아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기 욕구를 채우는 데만 급급했을 뿐이었다.신예준은 뼛속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신예준은 먼저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는 두 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점심 무렵 서민규를 만났다.서민규는 신예준을 보자 잠시 멈칫했다. 오늘따라 신예준의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최근 회사에 올 때마다 늘 어두운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눈가에 미소가 서려 있었다. 서민규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아니, 별거 없어.”“희서랑 관련된 거지? 어젯밤에 희서가 SNS에 올렸더라. 네가 자기를 돌봐줬다고 말이야. 희서는 여전히 한결같던데, 너만 옆에 있으면 항상 쉽게 만족하는 것 같아.”신예준의 눈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점차 희미해졌다.“어젯밤에 희서가 손을 다쳤어.”“그렇구나. 의사 말로는 희서가 우울증이 있다고 하니까, 네가 신경 좀 써야 할 거야. 희서는 네 말밖에 듣지 않잖아. 내가 전화해도 제대로 대답도 안 하더라고. 전부 네가 너무 애지중지했기 때문이야.”서민규가 매번 조희서를 언급할 때마다 신예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신예준은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서민규의 기분도 좋아 보였다.“여자 생겼어?”서민규는 바짝 긴장하며 잠시 당황했다. 곧 강민지와 드라이브를 하러 갈 생각에 너무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심결에 자신의 기분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었다.“아니야.”“회사 사람이야?”신예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서민규는 더욱 불안해졌지만 문득 강민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당신은 너무 겁이 많고 배짱이 없어요.’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계속 신예준에게 눌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용기가 갑자기 폭발했다.“아니,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야. 그쪽에서 고민 중이거든.”“어디까지 갔어? 손은 잡았어?”“응.”“손도 잡았는데 사귀지 않았다니, 혹시 널 갖고 노는 거 아니야?”신예준은 서민규와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예전 많은
“그래요. 정말 너무 지나치죠. 하지만 내가 뭘 어쩌겠어요.”강민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서민규는 강민지의 입장에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자신이 강민지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강상원은 신예준의 합의서가 꼭 필요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강상원이 얼마나 더 그 안에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서민규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운전했다. 새로 생긴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차에서 내려 길을 확인했다. 얼마 전 내린 눈 때문에 땅이 조금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오전 내내 쨍쨍하게 내리쬔 햇살 덕분에 지금은 이미 마른 상태였다.“민지 씨, 내려오세요.”강민지는 하이힐을 신고 공원 바닥에 발을 디디며 잠시 새 공원을 둘러봤다. 여기가 개발된다는 소식을 미처 알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꽤 잘 꾸며져 있어서 놀라웠다.서민규는 앞장서서 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15분쯤 걷다가 강민지는 지친 듯 공원 한쪽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목말라요.”서민규는 근처를 둘러보더니 재빨리 말했다.“내가 가서 물 사 올게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그는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지도를 켜서 근처에 매점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강민지는 그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눈가에 약간의 비웃음이 서렸다.진심은 짓밟히고 가식은 오히려 칭송받는 상황이 어쩐지 얄궂었다.입가에 서린 비웃음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지며 왠지 모르게 울고 싶었다.강민지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빈 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을 보니 울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20분 후 서민규가 돌아왔다. 손에는 물이 몇 병 들어 있는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아마도 가격이 비싼 순서대로 물을 산 것 같았다. 비록 이런 매점에서 파는 물이 비싸 봐야 3천 원 정도겠지만 말이다.강민지는 물 한 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열려 했다. 그러자 서
“좋아요. 민지 씨가 와 준다면 나야 좋죠!”서민규는 이 말을 반복하며 뜨거운 시선으로 강민지를 바라보았다.“신예준한테 들킬까 봐 두렵지 않아요?”“민지 씨.”서민규의 눈빛은 더욱 결연해졌다. 아름다운 여자의 품에서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솔직히 말할까요? 민지 씨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예준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강민지는 말없이 서서히 입꼬리를 올렸다. 신예준은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친구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줄은. 게다가 그 여자가 신예준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여자라니. 강민지는 웃음이 났다.서민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을 들어 천천히 그녀의 머리 위에 얹었다. 강민지의 머리카락은 정말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완벽했다. 그러니 신예준이 한 번 잠자리를 가지고 잊지 못할 만했다.서민규는 예전에는 신예준을 그리 심하게 질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민지가 신예준의 곁에 나타난 이후 그 질투는 마치 광란의 잡초처럼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났다.서민규는 멍청하지 않았다. 강민지가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예전에 BK사에서 일할 때 서민규는 멀리서 강민지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성혜인의 곁에 서 있었고 눈빛은 환하게 빛났다. 강민지의 존재는 태양처럼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그녀 같은 여자를 평생 만나볼 기회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피할 뿐이었다.사실 그보다 훨씬 전에도 강민지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굴욕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당시 팀장은 서민규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기 좋아했고 그의 학력을 비하하며 조롱하곤 했다. 그날도 그는 술에 완전히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상사와 동료들은 계단 위에서 그를 비웃었다.“저 자식은 평생 저기 들어갈 자격도 없을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
안정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니?”원아정은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아, 할머니. 정말 모르신다면 승혁 오빠를 불러보세요. 저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공지민이라는 친손녀를 얻으셨으니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아정아, 너 나를 원망하는 거니?”원아정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꽉 쥐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르신, 아정 씨는 아마 결혼식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무례했습니다.”안정숙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아정이가 뭘 원망할 자격이 있나. 그날 일을 문제 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관대했던 거야. 저 아이는 단지 체면만 구긴 거지. 하지만 지민이는 그날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역시나 반성할 줄 모르고, 저 아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길 정말 잘했어.”가정부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했다.“어르신, 보시는 눈이 정확하십니다. 아정 씨는 확실히 그런 그릇이 아니죠.”설령 공지민과 관련된 일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원아정이 연씨 가문에 들어오면 결국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최근 공지민과 관련된 일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숙은 원아정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혹시 그 당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그녀는 즉시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나가 있었다. 최근 거래에 문제가 생겼고 돌아오려면 사흘이 걸릴 거라고 했다.“할머니, 사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안정숙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그녀는 결국 직접 공지민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야만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연승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원아정은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황급히 액셀을 밟아 한적한 도로 위에 차를 멈췄고 주변 교통경찰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확실한 정보야?”“확실해. 연씨 가문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혹시 연승혁이 너를 차단해서 SNS에 올린 글을 못 본 거 아니야?”이 말은 원아정의 정곡을 저대로 찔렀다. 연승혁은 정말 그녀를 차단했다.원아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전화를 끊고 바로 안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안정숙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직감했다.그래서 안정숙이 그렇게 공지민을 신경 쓴 거였다. 심지어 내 결혼식도 취소하면서까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원아정은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설마 결혼식장에서 안정숙이 공지민을 알아본 걸까?‘망할!’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상황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연승혁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끝났고 그녀는 자신이 공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공지민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어떡하지?’그녀는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안 돼.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해.’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구은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원아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내가 왜 구은우를 잊고 있었지? 구은우를 죽인 건 연승혁 아니었나? 공지민이 이제 연씨 가문의 사람이 됐다면 당연히 복수를 원하지 않을까?’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우연 아닌가?’공지민이 정말 연씨 가문의 사람일까?혹시 공지민이 연승혁에게 접근해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닐까?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원아정은 갑자기 연승혁과 공지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떠올랐다.이 생각이 들자
안정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연승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지민이를 잘 지켜봐.”연승혁은 안정숙과 함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원아정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차단해 버렸다.원아정은 화가 치밀었다. 최근 연승혁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SNS에 올려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만 같아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이게 다 공지민 때문이야!’원아정은 즉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아가씨, 공지민이 오늘 외출해서 쇼핑 중입니다.”“주소를 보내요.”원아정은 바로 차를 몰아 그 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공지민을 발견했다.공지민은 아직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 있었다.강민지는 공지민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녀를 불러냈다.공지민은 목발을 짚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한 시계 매장을 지나던 중 눈길을 멈췄다. 한정판 시계를 보며 염정아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가진 40억을 전부 염정아에게 넘겨주고 정작 자신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온시환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연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들에 자극받은 탓인지, 공지민은 보상의 의미로 염정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시계를 꺼내 보여달라고 했다.강민지는 옆에서 시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정말 예쁘다! 피부 톤이랑도 잘 어울려요. 게다가 다이아까지 박혀 있어서 완전 고급스럽네요.”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환 씨가 오늘 아침에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
공지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무슨 일이시죠? 시환 씨를 찾으러 오셨다면 오늘 집에 없어요.”아침 일찍부터 온시환은 외출한 상태였다. 어디로 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난 누나를 만나러 온 거예요. 누나, 정말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할머니가 오늘 아침 너무 상심하셔서 거의 쓰러질 뻔하셨어요.”연승혁은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입에 붙은 듯 자연스럽게 누나라고 부르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반면 공지민은 그 호칭이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그 호칭 좀 하지 마요.”연승혁은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아 정원에 활짝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지민과 그 꽃들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문득 과거에 자신이 창피당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그럼 뭐라고 부르죠?”연승혁은 깔끔한 외모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가의 십자 흉터는 그의 인상에 강인하고 냉혹한 분위기를 더했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는 그를 이국적인 매력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냥 제 이름을 부르면 돼요.”“하지만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시던데.”그의 시선은 계속 공지민에게 머물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누나, 원아정 때문이에요? 그래서 연씨 가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공식적으로 발표했어요. 앞으로 원아정과는 더 이상 어떤 관계도 없을 거라고.”공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게 이유 중 하나긴 해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다른 이유라니? 설마 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 누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문제는 내가 다 처리할게요.”공지민은 앞에 핀 꽃 한 송이를 만지며 차갑게 말했다.“승혁 씨, 당신은 나를 연씨 가문에 진심으로 환영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나를 시험하거나, 관찰
마치 자기기만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이미 온시환에게 약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그 감정이 더욱 커졌다.사실 온시환의 말은 맞았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앉아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속이려는 의도만 가득했다.온시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차는 두 사람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집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공지민은 그를 바라보더니 양손으로 그의 목을 감쌌다.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공지민이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언제나 자신을 대체품으로 여긴 것이 분명했다.그렇다면 지금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는 걸까?온시환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대신 그녀를 안아 올려 2층으로 올라갔다.그 뒤의 일들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는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이미 한밤중이었다.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잠들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풀리면서 묵었던 긴장감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지민아,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어?”“연씨 가문 사람들은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어요. 당장 들뜬 표정으로 연씨 가문에 들어갈 순 없어요. 그 사람들과 조금 더 연극을 해야 해요.”처음으로 공지민은 온시환 앞에서 자신의 이기적이고 냉혹한 면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봤고 그의 눈에는 단지 부드러운 미소만이 담겨 있었다.“그래서 너 처음 연예계에 들어간 것도 이걸 준비하기 위해서였어?”공지민은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분하게 보냈다.반면 연승혁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연기한 것이었다.“맞아요. 그렇다고 봐도 돼요. 언젠가 연기가 필요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공지민이 수년간 연기를 했음에도 여전히 조연 배우에 머무른 것도 바로 이 이유였다. 그녀는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 한마디의 여파는 매우 컸다. 온시환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공지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를 버티게 한 것은 오직 구은우를 위한 복수라는 목적뿐이었다. 그녀는 그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목숨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럼 온시환은 대체 뭘까?그가 한 모든 일은 결국 그녀의 눈에 광대짓에 불과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공지민 역시 침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온시환은 마침내 자신이 최근 느꼈던 불안의 근원을 깨달았다. 그는 공지민이 절대로 평범하게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언젠가 그녀가 폭발할 것임을 예감했었다. 단지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행동에 나설 줄은 몰랐을 뿐이다.그는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이제 공지민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의 속임수가 들통난다면 연승혁과 안정숙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략임을 알아챌 것이고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공지민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두 사람을 무사히 속여 넘기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핸들을 꽉 쥐고 있던 온시환은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이번에는 공지민이 저항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의 질문이 들려왔다.“구은우를 위해 어떻게 복수할 생각인데? 연승혁을 죽일 거야?”공지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죽이는 게 제일 좋겠지.”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금 네가 연승혁의 명목상 누나가 됐다고 해서, 연승혁이 너를 경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공지민, 넌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공지민은 그의 품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적어도 지금은 기회가 있어.”온시환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내일이면 더는 그녀를 안을 수 없을 것처럼.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더는 그녀에게 화내지 않겠다고. 그런
공지민은 온시환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의견도 내비치지 않을 줄은 몰랐다.안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지민을 따라가며 외쳤다.“지민아, 정말 의논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거니? 우리 다 같은 가족인데,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잖아.”연승혁이 안정숙을 부축하며 부드럽게 웃었다.“맞아요, 누나. 그냥 남아서 얘기 좀 해요. 할머니께서 누나 일로 오랫동안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연씨 가문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할머니 생각해서라도 우리랑 잘 얘기해 보는 게 좋잖아요.”공지민의 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온시환이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아챘다.그의 힘은 너무 강해서 손가락뼈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풀리지 않았다.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온시환은 위험했다.안정숙이 계속 말을 이었다.“지민아, 우리가 잘못했어. 네 정체만 밝히면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어. 네가 겪은 일이 많아서 이미 마음이 많이 변했을 거란 걸 잊었어. 하지만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줘. 앞으로는 승혁이가 널 잘 보호하게 할게. 너희 남매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화 좀 해봐.”공지민은 돌아서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조금 쉬고 싶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래, 그래. 아직 상처도 채 회복되지 않았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어.”온시환은 그녀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오르자마자 온시환이 갑자기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공지민은 얼굴이 붉어지며 숨이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온시환은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공지민은 알고 있었다. 온시환은 이미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그녀는 연승혁에게 접근하여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했다.“공지민! 너 정말 미쳤어?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나를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