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규는 비록 신예준을 약간 질투했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특히 사람들과 협상할 때 신예준의 기세는 전혀 강상원에게 뒤지지 않았다.서민규는 예전에 신예준이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조희서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예준은 무엇이든 시도했었고 매번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다.지금은 제이엔 쥬얼리라는 거대한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여전히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비록 바쁘긴 했지만 모든 일을 질서 정연하게 처리해 내고 있었다.이 생각에 서민규는 다시 한번 기가 죽었다.강민지가 신예준을 좋아하는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반면, 자신은 능력이 괜찮다고 해도 그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나 통할 뿐이었다.“민규야, 나중에 강민지가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절대 말하지 마.”서민규는 의아해했다. 강민지가 자신에게 뭘 물어본다는 말인가?“전에 예나한테 보낸 선물들, 내가 나중에 가서 챙겨올 거야. 예나한테는 더 좋은 걸로 줄게.”서민규는 그 선물들이 강민지가 보낸 것임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강민지가 그의 집에 있는데, 신예준이 저녁에 여길 온다고?그는 순간 더욱 큰 불안감에 휩싸였다.“대략 언제쯤 올 거야?”“새벽쯤. 그때까지 회의가 있어.”서민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 내가 먼저 그 물건들 챙겨둘게. 그런데 그걸 강민지한테 돌려줄 생각이야? 너 지금 강민지와 거리를 두는 게 좋아 보여. 예준아, 희서는 항상 너만 기다리고 있어. 희서를 실망시키지 마.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부모님께도 설명하기 어려울 거야.”과거 신예준의 어머니가 아파트에서 투신하기 전 신예준에게 조희서를 잘 돌보고 행복하게 해주라고 당부했었다. 신씨 집안이 조씨 집안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며 말이다.신예준은 부모님을 대신해 조씨 집안에 대한 빚을 갚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희서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게다가 그는 조희서를 좋아했다. 자신이 조희서와 결혼할 거라고 늘 생각해 왔었다.하지만 서민규
서민규는 신예준을 언급하면서 강민지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강민지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을 뿐, 아무런 말 없이 국 한 그릇을 마셨다. 옆에서 서예나가 계속 강민지에게 권했다.“언니, 이거 정말 맛있어요. 오빠가 말하길 미용에도 좋대요.”서민규는 비록 외모나 성격이 눈에 띄지 않고 여자 앞에서는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했지만 그동안 동생에게는 꽤 잘해준 편이었다.강민지는 서민규가 요리한 고기를 한 입 먹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문득 집에 돌아가기 싫어졌다. 하지만 그때 전화가 울렸다. 신예준이었다. 강민지는 이마를 찌푸리며 귀찮은 듯 전화를 받았다.“어디야?”요즘 들어 신예준이 가장 많이 묻는 말은 ‘어디야? 어디가?’였다. 강민지는 시계를 보았다. 이미 밤 8시가 넘었다. 설날에 서민규의 집에서 이렇게 늦게까지 머물러 있었다니.“밖에 있어.”“집에 와서 밥 먹어.”“이미 먹었으니까, 신 대표님 혼자 드세요.”신예준의 목소리가 순간 차가워졌다.“강민지, 내가 말했지? 나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강민지는 짜증이 확 밀려왔지만 신예준이 화를 내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조금 있다가 갈게.”“9시 전에 와.”그 말을 듣고 강민지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두 사람의 통화를 들은 서민규는 그녀가 곧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아쉬움이 밀려왔다. 강민지는 일어나 옆에 있던 가방을 집었다.“오늘 고마웠어요.”서민규는 얼른 따라나섰다.“제가 태워다 줄게요.”강민지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차에 오를 때 강민지는 발목을 살짝 삐끗했고 서민규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정말 부드러웠다. 그는 참지 못하고 살짝 주물렀다. 강민지는 손을 빼고 차에 올라탔다.“집 가까운 곳까지만 태워줘요. 거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갈게요.”서민규는 조금 아쉬웠다. 그 손을 잡고 있었던 시간이 겨우 2초 남짓이었다.“네, 알았어요.”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30분쯤 지났을 때 신호등에
서민규는 긴장한 나머지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지만 강민지는 그저 그에게 다가왔을 뿐이었다.“유혹하는 게 아니에요. 난 그저 신예준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에요. 솔직히 말해봐요. 그 약은 당신이 먼저 추천한 거예요? 아니면 신예준이 먼저 원한 거예요?”“당연히 예준이가 먼저 원했죠! 민지 씨에게 아무 감정도 없다고 말했거든요.”“그렇군요. 그럼 내가 복수하는 게 맞겠죠? 참 역겨운 사람이네요. 그렇지 않나요?”서민규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감각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는 모든 걸 잊고 키스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강민지 같은 여자를 자신이 더럽힐 수 있을까? 하지만 신예준은 어떻게 감히 그랬을까?강민지의 손끝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민규 씨 지금 제이엔 쥬얼리에서 일하고 있죠? 신예준과의 관계는 괜찮나요?”“괜찮아요.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예요.”사실 신예준이 강씨 회사를 차지할 때 서민규도 뒤에서 부추긴 공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린 사람은 결국 신예준이었다. 그가 강민지를 좋아하지 않고 복수하려 한 것이었다. 서민규는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강민지의 손끝은 여전히 그의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목소리마저 갈라졌다.“민지 씨는 저를 이용해 예준이에게 복수하려는 거죠?”강민지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손을 뿌리치며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이미 충분히 신호를 보냈는데 더 이상 눈치 없는 척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남자를 찾으려면 모델도 고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서민규의 평범한 얼굴도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그저 못생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서민규가 그녀를 붙잡았다.“민지 씨와 자고 싶어요.”강민지는 그 말에 너무 역겨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민규도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를
신예준은 전화를 끊고 강민지를 더 이상 보지 않은 채 문밖으로 나갔다. 조희서의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소파에 앉아 울고 있었다. 손바닥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오빠...”조희서는 그를 보자마자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신예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집으로 불렀다.“무슨 일이야?”“흑흑. 방금 사과 깎다가 손을 다쳤어. 너무 아파. 그리고 오빠가 강민지랑 결혼한다는 생각만 하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이제 오빠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정말 숨도 못 쉴 만큼 힘들어.”조희서는 속으로 독기를 품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결혼을 깨버려야 했다. 신예준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신경 쓴다면 그녀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주치의가 도착해 조희서의 상처를 확인하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꿰매지 않아도 되지만 피가 나서 보기에 좀 심해 보일 뿐이었다.의사가 떠난 후 조희서는 신예준의 소매를 붙잡았다.“오빠, 오늘 여기서 쉬고 가. 나 너무 어지러워. 당장 쓰러질 것 같아.”신예준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열이 나고 있었다.“해열제를 가져올게.”그러나 조희서는 그에게 기대며 말했다.“해열제 말고, 침대에 데려다줘. 눈도 너무 아파.”신예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부축해 2층 침실로 데려갔다.이 별장은 신예준이 조희서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왜 강씨 저택 옆에 별장을 사게 되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사버린 뒤였다.위층에 올라간 후 조희서는 침대에 누워 다시 신예준의 소매를 붙잡았다.“오빠, 나 너무 더워. 옷 좀 벗겨줘. 진짜 너무 더워.”조희서는 정신이 흐릿해졌다. 이번 기회에 절대 신예준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붙잡아두고 사진을 찍어 강민지에게 보여줄 계획이었다.‘강민지는 고고한 재벌가의 딸이니, 남자가 밖에서 바람피우는 걸 못 견디겠지?’조희서는 마음속으로 온통 더러운 생각들을 품고 있었다. 특히 강민지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더 큰
강민지가 잠에 들려던 순간 조희서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신예준의 사진이었다. 신예준은 침대 옆 소파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다. 그 얼굴은 한때 강민지를 단번에 사로잡았던 이유이기도 했다.[오늘 밤 오빠는 안 돌아갈 거야. 나랑 여기 있을 거거든. 강민지, 넌 참 한심해. 네가 오빠랑 결혼해도 오빠는 계속 나한테 올 거라는 걸 생각해 봐. 오빠가 나한테 사준 이 별장이 네 집 바로 옆에 있다는 것도. 내가 너라면 정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우리 예전에 이미 다 했어. 그리고 한 가지 말해줄까? 오빠는 너랑 할 때만 약을 먹었어.]강민지는 예전에 조희서가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신예준에게 보여주곤 했다. 처음 몇 번은 신예준이 냉담하게 말했다.“희서는 우울증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을 때가 많아. 게다가 몇 년 동안 병으로 누워 있었으니까, 네가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몇 번을 반복해도 똑같은 대답을 듣자 강민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지금은 신예준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조희서가 보낸 메시지가 여전히 역겹긴 했지만 예전만큼 크게 불쾌하지는 않았다.차라리 그들이 평생 서로 얽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예준이 결혼을 포기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강민지는 진정으로 신예준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모든 일을 겪고도 그와 결혼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스스로 모욕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고 잠에 들려던 찰나 조희서에게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빠가 깼어. 방금 나한테 키스했어. 우리 시작하려고 해. 라이브로 보여줄까, 민지 씨?]강민지는 조희서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번 만나본 결과 그녀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강민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꾼 후 베개 옆에 놓았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신예준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 것도 아니었다.그녀는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강민지는 메시지를 보내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신기하게도 오랜 불면증 끝에 처음으로 깊이 잠들었다. 그녀는 항상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병원에서 조희서가 진실을 폭로하던 그날이 떠오르곤 했다. 그날 이후 강민지는 겁쟁이처럼 도망치듯 교외의 별장에 혼자 숨어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씨 집안의 회사가 넘어가고 강상원이 과거에 일으킨 교통사고가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었으며 신예준은 미지의 신흥 재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이 모든 일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다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서민규와 대화를 나누고 난 후 강민지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아침 6시까지 깨지 않고 자던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가 침대에 누군가 있는 것을 느꼈다.눈을 떠보니 신예준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방금 막 집에 돌아온 듯한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강민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설명하려는 듯했지만 강민지는 눈을 뜨자마자 3초도 안 돼 다시 감아버렸다. 신예준은 슈트를 입은 후 갑자기 이불을 걷어내더니 강민지를 힘껏 누르며 거칠게 입을 맞췄다.강민지는 신예준의 입술이 점점 더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거친 키스에 입술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지만 신예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듯 더욱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물고 늘어졌다. 숨이 막혀서 본능적으로 밀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신예준은 잠시 멈추고는 그녀를 응시하더니 이번에는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가 몇 번이나 세게 빨아 자국을 남겼다. 선명한 흔적들이 그녀의 목에 또렷하게 새겨졌다.강민지는 아픔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신예준은 그녀의 두 손목을 억지로 끌어올려 침대 머리맡에 고정했다.“놔!”강민지는 힘겹게 외쳤다. 최근 들어 신예준이 가장 많이 묻는 말은 ‘어디야? 어디 가?’였고, 그녀가 가장 많이 외친 말은 ‘놔!’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놓아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기 욕구를 채우는 데만 급급했을 뿐이었다.신예준은 뼛속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신예준은 먼저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는 두 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점심 무렵 서민규를 만났다.서민규는 신예준을 보자 잠시 멈칫했다. 오늘따라 신예준의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최근 회사에 올 때마다 늘 어두운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눈가에 미소가 서려 있었다. 서민규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아니, 별거 없어.”“희서랑 관련된 거지? 어젯밤에 희서가 SNS에 올렸더라. 네가 자기를 돌봐줬다고 말이야. 희서는 여전히 한결같던데, 너만 옆에 있으면 항상 쉽게 만족하는 것 같아.”신예준의 눈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점차 희미해졌다.“어젯밤에 희서가 손을 다쳤어.”“그렇구나. 의사 말로는 희서가 우울증이 있다고 하니까, 네가 신경 좀 써야 할 거야. 희서는 네 말밖에 듣지 않잖아. 내가 전화해도 제대로 대답도 안 하더라고. 전부 네가 너무 애지중지했기 때문이야.”서민규가 매번 조희서를 언급할 때마다 신예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신예준은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서민규의 기분도 좋아 보였다.“여자 생겼어?”서민규는 바짝 긴장하며 잠시 당황했다. 곧 강민지와 드라이브를 하러 갈 생각에 너무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심결에 자신의 기분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었다.“아니야.”“회사 사람이야?”신예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서민규는 더욱 불안해졌지만 문득 강민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당신은 너무 겁이 많고 배짱이 없어요.’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계속 신예준에게 눌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용기가 갑자기 폭발했다.“아니,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야. 그쪽에서 고민 중이거든.”“어디까지 갔어? 손은 잡았어?”“응.”“손도 잡았는데 사귀지 않았다니, 혹시 널 갖고 노는 거 아니야?”신예준은 서민규와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예전 많은
“그래요. 정말 너무 지나치죠. 하지만 내가 뭘 어쩌겠어요.”강민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서민규는 강민지의 입장에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자신이 강민지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강상원은 신예준의 합의서가 꼭 필요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강상원이 얼마나 더 그 안에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서민규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운전했다. 새로 생긴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차에서 내려 길을 확인했다. 얼마 전 내린 눈 때문에 땅이 조금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오전 내내 쨍쨍하게 내리쬔 햇살 덕분에 지금은 이미 마른 상태였다.“민지 씨, 내려오세요.”강민지는 하이힐을 신고 공원 바닥에 발을 디디며 잠시 새 공원을 둘러봤다. 여기가 개발된다는 소식을 미처 알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꽤 잘 꾸며져 있어서 놀라웠다.서민규는 앞장서서 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15분쯤 걷다가 강민지는 지친 듯 공원 한쪽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목말라요.”서민규는 근처를 둘러보더니 재빨리 말했다.“내가 가서 물 사 올게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그는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지도를 켜서 근처에 매점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강민지는 그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눈가에 약간의 비웃음이 서렸다.진심은 짓밟히고 가식은 오히려 칭송받는 상황이 어쩐지 얄궂었다.입가에 서린 비웃음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지며 왠지 모르게 울고 싶었다.강민지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빈 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을 보니 울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20분 후 서민규가 돌아왔다. 손에는 물이 몇 병 들어 있는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아마도 가격이 비싼 순서대로 물을 산 것 같았다. 비록 이런 매점에서 파는 물이 비싸 봐야 3천 원 정도겠지만 말이다.강민지는 물 한 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열려 했다. 그러자 서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