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 30분 정도 있다가 밖으로 나가니 민지가 복도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피곤한 듯 머리를 까딱이며 졸고 있던 민지는 문을 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달려왔다.엘리베이터에 함께 탑승했고, 민지는 그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화가 나지 않은 것을 확신하고서야 그와 팔짱을 꼈다.“희서 씨는 깼어? 이제 더 걱정 안 해도 되는 거 맞지? 이제 매일 집에 올 수 있는 거지?”“민지야.”그가 민지의 손을 맞잡았다.“난 너랑 헤어지기 싫어.”그의 말에 강민지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하마터면 냅다 등에 업힐 뻔했다.“나도, 나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 아빠는 상관 안 해도 돼. 그냥 세력이 걸맞은 가문과 결혼하길 원하시는 거야. 방금은 내 카드까지 끊어버리겠다고 협박했는걸. 내 명의의 별장도 모두 쓸어갔어. 차까지! 하지만 난 절대 타협 안 해.”민지가 해맑은 눈으로 예쁘게 웃어 보였다.“너만 내 손 놓지 않으면 우린 영원히 함께 할 거야!”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민지는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어렸다. 영원이라는 길이 얼마나 걷기 힘든 길인지 그녀는 생각하지 못했다.게다가 노력하는 사람은 그녀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우습게 여기며 손님처럼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을 구경하기만 하니까.강상원은 정말 당일날 밤 민지의 모든 은행카드를 동결시켰다.신예준과 연애하는 이 몇 달 동안 그녀는 돈을 별로 쓰지 않았다. 전에 매달 받던 수억 원의 용돈에 비하면 지금은 아파트 한 채의 월세만 내고 있었으니까.그녀는 샤브샤브 가게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자주 지각했고, 지각할 때마다 3만 원을 깎았으므로 한 달 동안 버는 돈은 200만도 되지 않았다.하지만 아파트는 500만이었고 카드가 정지됐으니, 집세를 벌 방법도 찾아야 했다.강민지는 집요해서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일을 꼭 해야만 했다.신예준이 하지 말라는 일까지 굳이 하려고 하는 사람이니 뼛속까지 고집이 세다고 할 수 있었다.어릴 때부터 온실 안에
희서의 병원비로 모두 지급하기 이제 남은 돈은 4,000만 원 가량이었다.선물 세트를 산 이후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그러나 그가 알지 못한 것은, 이곳에서 희서의 친구가 그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신예준을 발견한 친구는 조금 놀라운 마음에 사진까지 찍었다.병원에서 몸조리하고 있던 희서가 친구에게서 사진 한 장을 받았다.[예준 씨 정말 너무 좋은 것 같아. 너랑 그렇게 오래 있어 주고, 일도 많이 하고 네가 병에 걸렸대도 포기하지 않았잖아. 이제 네 수술이 끝나니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사주려고 하네. 질투 나 죽겠어.]비록 이 브랜드를 써본 적은 없어도 익히 들어온 것이었다. 친구의 칭찬에 희서가 예쁘게 웃었다.[그러니까. 오빠는 항상 이래. 모든 좋은 걸 나한테 주려고 하지. 이번 수술이 성공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오빠 혼자 얼마나 힘들었겠어.][네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어. 예준 씨는 잘생긴 데다가 순정남이잖아!]생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신예준이 자신의 생일 선물로 준비한 것이라 생각하며 계속 웃었다.스킨케어 제품 세트는 확실히 비쌌다. 아마 200만은 족히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기꺼이 사주려 하다니.그녀는 기분이 좋아져 지금 당장 예준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하지만 서프라이즈이니 모른 척해야 했다. 예준이 실망하지 않도록....신예준이 선물을 들고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까지도 민지는 여전히 소파에 누워있었다.그는 상자를 옆에 놓고 식탁 위의 음식을 랩으로 싸서 냉장고에 다시 넣었다.그리고 민지를 안아 침대에 눕힌 뒤 옷을 벗겨 주었다.잠에서 어렴풋이 깬 민지가 그의 손을 쳐냈다.“아직 샤워 못 했어.”청결을 중시하는 그녀는 아무리 힘들어도 샤워한 후에 자곤 했다.게다가 샤브샤브 집에서 일하면 온몸에 기름 냄새가 뱄다.“피곤하면 자고 내일 아침에 씻어.”“안 돼. 몸에서 냄새나서 못 견뎌.”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욕실로 가서 물 온도를 조절해 주었다.얼른 샤워를 마친 강민지는 문득
조금 전 방에서 이미 약을 먹은 터라, 신예준은 씩 웃고는 민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밤은 여전히 고통과 쾌락이 함께했다.아침 일찍 일어나 날이 밝기 전 출근하러 나갔다.신예준 역시 출근했고 점심시간이 되자 희서를 만나러 병원으로 향했다.오늘 희서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종일 미소를 짓고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다음엔 비싼 거 사지 마. 오빠 돈 없는 거 내가 다 아는데.”신예준은 생일 선물에 대한 얘기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안 들었어.”거짓말, 찾아보니 제품이 200만은 족히 하던데?그녀는 종래로 이렇게 비싼 물건은 써본 적이 없었다.“참, 민규 오빠는 안? 수술 하기 전에도 후에도 못 봤네.”“전에 서천으로 발령받아서 지금은 돌아왔어. 오후에 보러 오겠대.”“좋아. 오랜만에 만나는데 생일에 외식하지는 못해서 너무 아쉽네. 아프지만 않았으면 우리 자주 가던 꼬칫집에 갔을 텐데. 가격도 싸고 사장님도 착하시고.”신예준은 아무 말 없이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오후에 병실에 도착한 서민규는 신예준을 야유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이번에 희서의 수술이 성공한 것은 모두 강씨 가문 덕분이었다.강민지는 아마 아직도 신예준과 조희서의 실제 관계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신예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암묵적인 제스처였다.신예준은 그의 제스처를 무시한 채 서 있었다.이때 강민지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는 병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고 안에선 희서와 민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서민규는 신예준이 강민지와 사적으로 어떻게 연락하는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티브이에서나 볼 수 있는 명문가의 자제였기 때문에. 그는 참지 못하고 몰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그러나 신예준의 말투는 정말 한결같이 차분했고 마지막에 한마디만을 했다.“난 정말 필요 없어. 사주지 마.”집세를 벌겠다더니 또 쇼핑몰에 가서 그를 위해 옷을 샀단다.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사치품을 살 여유는 없었고 길가에 있는 아무 매장에 가서 산 것이
강민지는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소문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화가 났다.강상원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민지가 카톡으로 강상원에게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그러나 강상원은 여전히 받지 않았고 아마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상대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민지는 크게 심호흡한 뒤 전화를 껐다.한바탕 말다툼하고 나니 옷을 사고 싶은 생각까지 모두 사라졌다.한 편, 신예준이 전화를 끊자 서민규가 나타나 야유하며 등을 툭툭 건드렸다.“민지 씨랑 통화한 거야? 안 헤어지려고? 희서가 알면 어떡하려고 그래?”신예준은 아무 말도 없이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신예준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아지자 다시 한번 불렀다.“예준아?”“어?” 말을 다시 되풀이하려던 서민규는 무언가 떠올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됐어. 나라도 헤어지기 아쉬울 거야. 무려 강씨 가문 아가씨인걸. 10년을 봐도 질리지 않을 얼굴이라고.”그가 신예준의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 덧붙였다.“내일 희서 생일인데 선물은 샀어?”“응.”그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서민규는 더 물어볼 게 없는 듯 손을 흔들었다.“그럼 내일 같이 병원 오게 연락해. 마침 셋이 희서 생일에 모일 수 있겠네. 나도 선물 준비했어.”“그래.”서민규가 떠난 후 신예준은 병실로 들어갔다.침대에 앉은 희서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분명 방금 전까지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오후에 일 있으니까 먼저 가도 돼. 내일 민규 오빠랑 같이 와.”“그래. 푹 쉬어.”그가 희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희서는 아무 말 없이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신예준은 몇 마디 당부를 더 한 뒤에야 병원을 나와 병실로 향했다.그러나 밤이 되어도 민지는 돌아오지 않았다.전화를 걸었으나 민지는 받지 않았고, 신예준은 저도 모르게 민지가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생각했다.강상원이 말하길 제 딸은 그런 고생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그러나 누군가 그에게 강민지가 계산대에서 잠든 사진과 함께 메시지 한 통을 보
신예준의 뺨에 순식간에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뺨을 때린 후에야 민지는 또 조금 후회했다. 여태 자라오면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은 종래로 없었다.그러나 가슴에 맺힌 분노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급기야 눈시울이 붉어졌다.“지금 나도 포기를 안 했는데, 네가 날 버리겠다는 거지? 우리가 전에 어떻게 약속했어? 너가 나한테 어떻게 하겠다고 했는데?”신예준이 입가를 닦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아무렇게나 한 약속이지 진심이 아니었어. 강민지, 너도 참 웃겨.”철썩.또 한 번 손이 날아왔고 이번엔 얼굴이 자국대로 붓기 시작했다.분명 때린 건 그녀인데 오히려 눈앞이 흐려졌다. 저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신예준은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평온하게 말했다.“그냥 이렇게 끝내자.”그가 몸을 돌려 떠나려는데 민지가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안 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있으면 말해줘. 말도 안 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알고 고쳐? 혹시 내가 밥을 할 줄 몰라서 그래? 나 다 배울 수 있어. 나 정말 헤어지기 싫어.”팔에 힘을 준 탓에 신예준은 조금 아픈 느낌까지 들었다.그러나 더 아픈 건 오히려 가슴인 듯했다.신예준은 입술을 짓씹으며 방금 강상원이 보내온 문자를 떠올렸다.감정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또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해양처럼.강민지는 그가 마음을 돌린 것 같아 사과하려 했다.그러나 신예준의 손이 그녀의 손을 덮더니 강제적으로 푸는 것이었다.본디 성질이 좋지 않은 강민지는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래, 좋아. 내가 너 없이 못 살 줄 알아? 네가 날 버려도 난 더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 수 있어. 그런데 넌 절대 나같이 훌륭한 사람 만날 수 없을 거야!”민지는 그를 확 밀어내고 침실로 돌아갔다.침실 문을 쾅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신예준은 거실 현관에서 망설임 없이 집을 나갔다.강민지는 침실 문 뒤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그러나 아무런 기척도 발소리도 들리지
서민규와 둘은 약속하고 함께 병실로 왔고 오는 김에 꽃다발도 선물로 들고 왔다.휴대폰이 계속 울리자 서민규가 물었다.“누가 자꾸 너한테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일 때문에.”서민규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다가섰다.“정말? 왜 좀 냉정해 보이지? 혹시 민지 씨는 아니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신예준이 먼저 나섰다.“그런 말 희서 앞에서는 하지 마.”“그런데 둘, 헤어진 거 아니었어?”서민규는 그저 물어본 것이었다. 전에 신예준이 하도 인기가 많아 희서가 한때 헤어지자고 소란 피웠던 적이있었다. 그 이후에 바로 사고가 생겼고, 어쨌든 헤어지자는 말이 오간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혼약은 그 옛날 어른들끼리 정해놓은 것이고.다만 신예준이 어머니의 유언 때문에 조희서에게 잘해주는 것이었다.신예준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병실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서민규도 곧 입을 다물었다. 희서의 질투심이 강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희서는 신예준의 곁에 있는 모든 여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희서는 놀라는 기색 없이 예쁘게 웃었다.“오빠.”서민규는 자신이 가져온 생일 선물을 옆에 두었다.“희서야. 내 선물은 안 비싸. 최근에 승진하긴 했지만 다음 달에야 월급이 오를 거라서. 그때 좋은 걸로 사줄게.”“선물을 준비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난 기뻐.”희서의 시선이 꽃다발이 아닌 핑크색 포장지를 들고 있는 신예준의 손을 향했다.그런데 지난번 친구가 보내주었던 사진 속의 물건이 아닌 것이 확인되자 안색이 급격히 흐려졌다.“이게 오빠가 준비한 선물이야?”신예준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한정판 향수 하나가 들어 있었다.예전에 선물했을 때 좋아하는 것 같아 더 비싼 향수를 산 것이었다.조희서는 더 이상 웃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침대보를 움켜쥐었다.신예준은 희서가 아픈 줄 알고 얼른 침대 옆 벨을 누르려다 희서에게 저지당했다.“전에 내 친구가 사진을 보내줬었어. 오빠가 스킨케어 제품을 사던 모습
서민규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니야. 예준이 민지 씨랑 연애한 건 널 위해서야. 전에 너희 가문 회사를 인수한 제이엔 쥬얼리 기억나지? 민지 씨 아버지가 인수한 거야. 이번에 널 수술해 준 의사도강씨 가문 세력으로 초청한 거고. 정말 그냥 널 살리기 위해서 잠시 연애한 거야. 네 수술에 필요했던 돈 2억도 민지 씨가 낸 거야. 예준이는 정말 널 사랑해. 이 모든 걸 민지 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예준이는 지금까지 속이고 있어. 예준이 마음속에서 너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이제 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분명 민지 씨랑 헤어질 거야.”눈물을 흘리던 조희서가 그의 말에 희망을 품고 신예준을 바라보았다.“정말이야? 오빠, 그 사람이랑 연애한 게 정말 내 치료를 위해서야?”신예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서민규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그래. 민지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준이 도구였을 뿐이야. 그때 민지 씨 아빠가 낸 교통사고에 또 네 회사를 인수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데 예준이가 어떻게 실수를 하겠어. 전에는 심지어 강씨 가문의 주식도 속여서 손에 넣을지 이야기했었어. 그래야 나중에 너랑 더 잘 살 테니까. 강씨 가문이 너한테 진 빚은 영원히 갚을 수 없어.”희서가 얼른 눈물을 닦고 신예준의 손을 잡았다.“오빠, 직접 말하는 거 듣고 싶어. 민지 씨랑 그냥 한 번 논 거지? 맞지?”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신예준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응.”대답에 확신을 얻은 조희서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하하. 그러니까 강민지 그년은 지금 이용당한 거네? 통쾌하게도!그녀는 서둘러 신예준의 목에 뽀뽀했다.“미안해. 아까 다치진 않았지?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미안해.”“괜찮아.”강민지가 단지 이용당하는 도구일 뿐이고, 제 병 치료를 위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니 더 기뻤다.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 없더라니, 알고 보니 강상원의 딸이었어?“그럼 언제 헤어져? 나 수술도 끝났고 두 달만 더 있으면 완전 회복 될 거야. 이제 그
“고마워, 오빠. 역시 오빠한텐 내가 제일 소중한 사람이지?”조희서는 만족하며 웃었다.의자에 앉은 신예준이 막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전화가 또 울렸다.강민지인 줄 알았는데 전의 그 낯선 전화번호인 것을 발견했다.[네 부모님 산소에 왔다. 이렇게 외진 곳일 줄은 몰랐어.]그때 신예준은 너무 어렸고 돈도 얼마 없었기에 네 명을 같은 곳에 모시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들였었다. 그런데 어떻게 비싼 산소를 살 수 있겠는가.지금 이 메시지는 그의 한계를 건드렸다.아마 강상원은 아직 이들이 모두 본인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단지 신예준을 건드리고 싶어 이런 상처 주는 말을 했을 것이다.신예준이 순간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럼 제이엔 쥬얼리에 칼을 들 수밖에.잘난 척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강 대표더러 대가를 치르도록.병원을 떠난 그는 아파트로 돌아갔다.강민지가 혼자 소파에 누워있었는데 정말 열이 나고 있었다.그를 발견한 민지는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화를 냈다.“왜 왔어? 그냥 열 나서 죽으면 되는데. 헤어지자며? 난 너 없어도 돼.”신예준이 덥석 민지를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민지가 순간 눈물을 흘리며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내가 제이엔 쥬얼리에 가서 일할게. 밑바닥부터 시작해서.”강민지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신예준이 먼저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네 아버지한테 증명할게.”강민지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신예준의 집에 있던 금융 서적들을 떠올렸다. 아마 그 역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정말?”“응.”강민지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열이 났으므로 손바닥도 뜨거웠다.“좋아. 내가 아버지께 부탁할 테니 걱정하지 마. 무조건 내 말 들어줄 거야. 그럼 이제 나랑 안 헤어지는 거지?”신예준이 민지의 코를 톡 쳤다.“당연하지.”강민지가 갑자기 기침을 몇 번 했다. 눈앞이 흐릿하고 하늘 땅이 뒤집히는 듯 어지러웠다.신예준이 물 한 잔과 해열제를 건넸다.그녀는 발 자리에서 일어나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
[원진과는 이미 연락했어요. 원진도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는 데 동의했어요. 다만 문제는 원아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당장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흥, 그 정도는 해줘야지.]연승혁은 이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공지민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그녀의 시선은 곧장 연승혁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첫눈에도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분명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연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한 친구, 이상우예요.”순간 공지민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이상우, 이 사람은 과거 그녀가 찾아갔던 유명한 최면술사의 수제자였다.최근 그 대가가 은퇴하고 이제 그의 제자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공지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공지민입니다.”하지만 이상우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과거 그녀와 짧은 시간 교류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그녀를 최면하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의 스승은 공지민의 마음속 집착이 너무 깊어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더군다나 스승과 함께 수련하던 한 달 동안, 이상우는 공지민에게 진지하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속 그 사람을 잊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지금 이 순간, 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이상우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이상우는 한순간 흔들리는 눈빛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혁이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서요. 오늘 저랑 편하게 얘기 나눠보실래요?”얘기를 나누자는 말은 곧 그녀를 최면에 빠뜨리겠다는 의미였다.공지민은 그제야 연승혁을 흘깃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연승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앉아요, 누나.”공지민은 자리에 앉
원아정은 팔꿈치로 미친 듯이 차창을 내리치며 동시에 운전대를 잡아당겼다. 게다가 뒤따라오는 경찰도 따돌리지 못하자 운전자는 결국 공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차는 이리저리 우회하며 간신히 경찰들을 따돌렸지만 결국 사람들로 붐비는 번잡한 지역에 들어서고 말았다.원아정은 문을 발로 차며 열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은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들어 경호운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경호원들은 이마에 땀이 맺히며 초조하게 멀어져가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를 공항까지 데려가라는 지시였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을까.진작에 마취라도 시킬 걸 싶었지만 마취한 상태로는 공항 보안검색을 통과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운전자는 급히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은 연승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해?”경호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승혁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다음 기회에 다시 처리하면 되니까. 우선 원진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겠군.”원진만 동의하면 원아정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원아정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공지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다 그년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연승혁과 결혼해서 상류층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꼴을 당할 필요도 없었어.’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이전의 공지민은 그저 그녀 발밑에 있는 하찮은 존재였는데,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원아정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가던 노숙자와 옷을 바꿔 입은 뒤, 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초라하고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거리를 전전하며 숨어 지
하지만 연승혁은 이 일을 아주 은밀하게 처리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고작 연예계에서 떠도는 무명 배우에 불과한 공지민이 진실을 알아낼 리 없었다.설령 나중에 공지민이 온시환과 얽혔다 해도, 온시환이 처음부터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겼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이런 일을 조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연승혁은 지금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공지민이 아직 진실을 모르고 진짜 연씨 가문의 딸이며 구은우와의 관계는 그저 악연일 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모든 일을 계획해 구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연승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만약 후자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최근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런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 불쑥 나타나다니.그는 안정숙을 찾아가 당시 진행했던 두 번의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하나는 머리카락을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쓰레기통에 버린 이쑤시개를 쓴 결과라는 말을 들은 연승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만약 이 정도까지 속일 수 있다면, 공지민도 참 대단한 사람이겠네.’“승혁아,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너 솔직히 말해봐. 원아정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긴 한 거니?”“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진행한 두 번의 친자 검사는 꽤 신뢰할 만한 결과잖아요. 그런 걸 조작하는 건 쉽지 않죠.”“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일인지 원... 난 그저 내 손녀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걱정하지 말라니! 내가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겠니!”안정숙은 화가 난 듯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네가 조사한 구은우에 대한 자료, 나도 봤어. 그 아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더라. 만약 지민이가 정말 그 아이를 좋아했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에 잃었다면? 너 같으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을 잊을 수 있겠니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