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죽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자 가정부는 눈을 흘기며 그릇을 치웠다.“얌전히 침대에 누워있어요. 여기에는 당신을 모실 사람 따윈 없으니까.”방문이 닫히자 성혜인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행히 약 같은 건 주사하지 않아 움직일 힘이 있었다.창밖을 내다본 그녀는 이곳이 바위가 쌓여 산을 이루고 그 위로 물이 흐르는 호화로운 정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성혜인은 창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열리지 않자 문가로 가서 문을 밀어보았다. 밖에서 잠가 놓았는지 문 역시 열리지 않았다.누군가에게 갇힌 걸까?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있는 이 방의 크기가 작지 않았다. 내부에는 별도의 화장실도 갖추어져 있었다.성혜인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현재 상황을 모르는 성혜인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한편 연씨 가문의 응접실에는 배현우가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연씨 가문의 가주는 이제 40대로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전임 가주를 이어 지금의 연태광이 되었다. 연태광은 배현우의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그러니까 배현우 씨는 우리와 다른 사업을 하고 싶다 이 말씀인가요?”배현우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면 담담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업인지는 연 가주님께서 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두발짐승 거래는 당신들의 주 사업이 아니던가요?”두발짐승, 다름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구금섬에서 이 가문들이 뒤로는 어떤 사업을 하는지 누가 모를까. 더럽고 추악하지만 끈질기게 지속되어 온 사업이었다. 게다가 이 가문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섬 전체의 일반인들은 전부 그들의 상품이나 다름없었다.그래서 이곳 여자들의 지위는 극히 낮았다. 아이를 낳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아이를 하나 더 낳을 때마다 적지 않은 보상을 받으니 섬 전체에 외동은 거의 없었다.섬 안의 모든 학교는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기 위해 세워졌고 혹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으면 그들의 눈에 들었다.노예찬이 전에 성혜인에게 말한 것처럼 그렇게 과장 되지는 않았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조차도 이 방을 나가고 싶을 때 문 앞에 있는 경비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성혜인은 벽을 부수는 소리를 듣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의 한쪽 벽은 문만큼 크게 뚫려져 있었고 곧 누군가가 정말로 그 자리에 문을 설치했다.그녀는 이 문을 통해 옆방을 바라보았다. 옆방에는 여러 종류의 유리 시험관이 가득 있었는데 아마도 실험실인 것 같았다. 그 안에는 흰 가운을 입고 눈에는 고글을 낀 배현우가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점잖은 불량배 같아 보였다.공사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성혜인은 다가가서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당신 반승우야, 아니면 배현우야?”반승우는 약물 연구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고 10대 시절부터 연구소의 수석연구원들을 따라다니며 실험을 함께했다. 하지만 배현우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실험을 통해 탄생한 인격이니 제약에 관한 지식을 알 리가 없었다.혹시... 그가 반승우에 관한 기억을 전부 기억해 낸 거라면?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배현우는 그저 실험으로 탄생한 두 번째 인격이지만 반승우야말로 그 몸의 주요 인격인데, 배현우가 반승우를 밀어내고 혼자서 이 몸을 차지할 이유가 없었다.배현우는 손에 든 시험관을 응시할 뿐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성혜인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가 여러 약품을 계량하고 혼합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리고 확신했다. 배현우가 정말 반승우의 기억을 다 가지고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반승우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는 거야? 아니면 일부만 기억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현우는 손에 든 시험관을 부숴버렸다.“약을 먹여야만 조용히 할래?”성혜인은 경계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순간 배현우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치켜들었다.“성혜인, 여기서 너는 무조건 내 말을 들어야 해. 내가 하라고 하는 건 무엇이든 해야 하고 나를 화나게 만드는 일이 생긴다면 나 또한...”이 말을 마치고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훑었다.“나 또한 널 화나게 할
성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도대체 무슨 기억이 떠올랐기에 배현우는 이토록 반승제를 증오하는 걸까. 배현우의 인격이 이미 이 몸을 독차지 하지 않았나? 반승우는 정말 완전히 소멸된 걸까? 그녀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배현우가 다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썩 꺼져. 침대에 가서 잠이나 자.”“해독제, 해독제를 줘.”그녀의 말투 또한 차갑고 고집스럽게 변해갔다.“해독제 같은 건 없으니까 그 짐승 새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나 해.”그 말에 성혜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잃었던 첫 아이를 생각하며 배현우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그녀는 두려웠다. 방금 먹은 그 약이 너무 두려웠다. 심지어는 벌써 배가 아파 오는 착각마저 들었다.“해독제! 해독제를 달란 말이야!”배현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목을 조르는 그녀의 손에 아무런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미친 듯이 테이블 위를 뒤적이며 해독제를 찾기 시작했지만, 테이블 위에 시험관이 너무나 많아 그 중에서 도대체 어느 것이 해독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배현우는 여유로운 자태로 있지도 않은 먼지를 몸에서 털어냈다.“해독제는 아직 만들지도 않았어. 그리고 너는 이제 시간이 없고.”순간 머릿속에서 위잉,하는 소리와 함께 성해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배현우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옆에 앉아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건드렸다.“만지지 마!”그녀는 마치 역겨운 무언가를 보듯 손을 뿌리쳐냈다. 재밌다는 듯 몇 번 웃은 배현우의 눈빛에 노기가 서렸다.“반승제는 건드릴 수 있고 나는 건드리면 안된다는 거야? 참, 애도 가졌으니 둘이 침대에서 몇 번이나 뒹굴었는지 셀 수도 없겠네.”“너랑 뭔 상관이야!”“성혜인, 나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녀의 손을 잡아챈 배현우는 단번에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을 잡아 찢어버렸다.“내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상관있게 만들어줄 수 있어.”성혜인은 화가 나
가정부가 그를 화장실로 안내했다. 한편 구창모는 연태광과 논의를 계속 이어 나갔다.한 모퉁이를 지나갈 때 반승제의 귀에 가정부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니까. 그냥 굶어 죽으라지 뭐.”“배현우 씨의 연구실도 일부러 그 여자의 옆방에 배치해 놓은 것 같던데, 둘이 혹시 커플일까?”“풉, 그냥 아무 남자나 안고 뒹구는 여자가 틀림없어. 여기 들어올 때도 뻔뻔하게 배현우 씨에게 안겨서 들어왔는데, 뻔하지 뭐.”여성의 지위가 지극히 낮은 이곳에서 여자가 연회에 함께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다.더군다나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상상조차 못 할 광경을 보았으니. 이곳에 맞게 길들여진 여자들은 자연스레 성혜인을 적대시했다.반승제는 자신에게 길을 안내한 가정부에게 물었다.“연씨 가문에 손님이 계신 건가요?”“네, 배씨 성을 가진 분이세요. 연가주님께서 귀한 손님으로 모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분이 여자도 한 명 데려오셨어요.”한 남자와 여자가 왔고, 남자의 성이 배씨인 것을 보면 분명 배현우와 성혜인일 것이다.화장실에서 돌아온 반승제는 여전히 구창모의 뒤에 서 있었다. 구창모는 한 달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고집하는 연가주를 결국 설득하지 못한 듯했다. 안색이 어두워진 구창모는 화가 난 모습으로 나가버렸다.반면 반승제는 머무르길 요청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네 개의 가문에서 모두가 반기는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태광은 그를 아주 정중하게 대했다.“제가 이미 사람을 시켜 머물 방을 준비해 놓았으니 들어가 쉬시지요.”고개를 끄덕인 반승제는 가정부를 따라 그가 준비해 놓은 방으로 향했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그는 모두가 잠든 뒤에야 산책하는 척 밖으로 나왔다. 모든 창문을 봉쇄해 놓은 방을 지나갈 때 반승제는 걸음을 멈췄다.창문에는 작은 구멍들이 있긴 했지만, 워낙 굳게 봉쇄해 놓은지라 전혀 열리지 않았다. 그 안을 한번 살펴보니 커튼이 반쯤 쳐져 있었는데 멀리
하지만 그건 다 이후의 이야기다. 지금의 배현우는 이 남자의 정체가 가장 의심스러웠다.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린 옷차림새는 누구라도 쉽게 변장할 수 있었다. 전에도 그는 이런 속임수에 당한 적이 있다.그때의 반승제는 배현우의 별장에서 성혜인을 취할 만큼 간이 컸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기필코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했다.“연가주님, 일전에 반승제를 포로로 잡아두었을 때가 기억나시죠? 지금은 도망쳤지만. 연가주께서는 아마 반승제 같은 사람의 성격을 잘 모르실 수 있어요. 아주 대담하고 치밀하기까지 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연가주께서는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을 꼭 확인하시길 바라요. 혹여 반승제가 그로 변장했을까 염려돼서요. 그는 전에도 이런 짓을 저지른 적이 있어요.”조금 지나치다고 느낀 연태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일개 포로 주제에 감히 내섬의 높은 인물로 변장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반승제는 무려 내섬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란을 일으킨 요주의 인물이었다.“배현우 씨, 하지만 우리도 몇 해를 지나오는 동안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어요.”“그가 반승제만 아니길 바랄 뿐이에요.”배현우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내일 아침, 구씨 가문 어르신이 당신을 설득하러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검은 로브 남자가 얼굴을 드러낼 수 있게 하세요.”“혹시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아닐까요?”검은 로브의 남자는 여러 가문에게 범접할 수 없던 존재였기에, 연태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또한 배현우가 진짜로 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심기를 건드려 그의 눈 밖에 나는 게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만약 배현우가 처음부터 그를 속이고 있었다면 연씨 가문은 앞으로 잃을 것이 너무 많게 될 것이다.배현우가 손에 쥐고 있
한편 응접실에는 구창모와 연태광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어제 구창모는 연태광을 설득하지 못해 몹시 화가 났지만 그럼에도 오늘 다시 찾아왔다. 내섬에 있는 네 가문은 서로 거래하고 있었지만 전부 자기만의 실속을 챙기기 바빴다. 섬에는 자원이 한정적이라 계속 안정을 유지하려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했다.네 가문 중 정직한 가문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를 원했으며 오래 지속된 평화는 단지 겉모습에 불과했다.연태광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누구에게도 밉보이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 사람과 척을 지지 않았다. 구창모는 본디 그를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득은커녕 어젯밤 연태광에게 완곡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노인의 두 번째 방문은 다소 격이 떨어지는 일이었지만 그 무리가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모르니 당장 아군을 끌어와야만 했다.“연 가주, 나와 힘을 합치면 앞으로 구씨 가문은 반년 치의 약을 연씨 가문에 양보하겠네.”그 약은 밑에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모두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제공했다.네 가문이 번갈아 가며 검은 옷을 입은 남자와 거래했고, 분배는 항상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다.이제 구씨 가문은 반년 동안의 거래 자격을 포기할 예정이었으니 비교적 큰 이익을 양보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예전 같았으면 연태광은 무조건 동의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종류의 약을 제조할 수 있는 배현우가 있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거래 자격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최근 우리 하준이가 조금 아파요. 어르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아들을 무척 아끼잖아요. 이번 달에는 조용히 하준이와 함께 사당에서 연씨 가문 조상님들께 절을 올리려고 해요.”구창모는 감정이 격해지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정도까지 양보했는데 연태광은 여전히 호의를 무시했다.그는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막 나가려던 찰나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구창모의 표정이 금세 밝
응접실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긴장해졌다. 모두가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에 총을 든 채 신경을 바싹 조이고 있는 연태광은 마치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총을 쏠 기세였다.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상황에 부하가 보고하러 들어왔다.“가주님, 장로님께서 오셨습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앞에서 한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이 사람은 가면을 썼지만, 젊은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노예찬의 뒤에는 십여 명의 경호원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갖은 고생을 다 겪어 본 모습이었다. 연태광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장로님, 오셨군요.”노예찬은 구창모를 보더니 다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당신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죠?”연태광은 곧 자신이 의심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일의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마침 이분을 알고 계시는 장로님께서 얼굴을 확인해 주시면 안 될까요?”화근을 없앰으로써 저에게 들이닥칠 재앙을 미리 막기 위해서 말이다. 만일 검은 로브의 남자가 반승제로 대체되지 않았다면 연태광은 큰 무례를 범하는 꼴이 되지만, 이제 이 기회를 노예찬에게 떠넘김으로써 노예찬이 검은 로브의 남자에게 무례를 범하는 꼴이 되었다.하지만 검은 로브의 남자와 노예찬은 원래부터 한 배를 탄 사이라서 원한을 사지 않을 것이다.노예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반승제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반승제의 바로 앞에 서서 검은 모자를 뒤로 넘겼다. 반승제의 얼굴이 반쯤 드러나자 노예찬의 손끝이 일순간 굳더니 그는 천천히 모자를 다시 내렸다. 거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고 자기 자신조차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연태광과 구창모의 각도에서는 이쪽이 아예 보이지 않았기에 반쯤 드러난 반승제의 얼굴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오직 노예찬 한 사람만 반승제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제 다시 모자를 내려 얼굴을 덮어버렸다. 노예찬이 자리를 찾아 앉자 연태광이 대뜸 물었다.“장로님, 제대로 확
반승제가 죽으면 성혜인은 어떡한단 말인가? 노예찬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위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수양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만 신경 썼다.하지만 성혜인이 잿더미에서 뼈를 줍던 장면이 계속 잊히지 않았다. 뇌리에 각인되기라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장로님.”“장로님?”누군가 부르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연태광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장로님, 두 분께 점심 식사를 준비해 드렸는데, 가서 식사하세요. 전 이만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자리에서 일어난 노예찬은 배현우를 지나칠 때 발걸음을 멈칫했다. 이 바보가 전에는 멍청한 표정뿐이더니 지금은 아주 예리하고 똑똑해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본모습이었다.배현우는 노예찬이 멈칫하는 순간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 가면에 가려진 사람의 정체를 알았다. 그렇다. 이 사람은 노예찬이었다.배현우는 냉소를 흘리며 제자리에 서서 곁눈으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예찬의 뒤를 따라 나가는 것을 보았다.배현우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양옆에 늘어뜨린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반승제가 어떤 식으로 변장하든 절대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반승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반승제의 매 순간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기에 절대 배현우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이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는 틀림없이 반승제였다. 반승제와 노예찬은 한패였다. 다만 반승제가 노예찬에게 대체 무슨 이득을 줬기에 노예찬이 반승제를 감춰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배현우는 속을 헤아릴 수 없는 눈빛으로 그들을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눈빛에 연태광은 적잖이 놀랐다.“배현우 씨, 왜 그러시죠?”어젯밤 그의 능력을 검증한 연태광은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이는 연씨 가문이 4대 가문의 꼭대기에 설 수 있는 관건이었다. 배현우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제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