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도대체 무슨 기억이 떠올랐기에 배현우는 이토록 반승제를 증오하는 걸까. 배현우의 인격이 이미 이 몸을 독차지 하지 않았나? 반승우는 정말 완전히 소멸된 걸까? 그녀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배현우가 다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썩 꺼져. 침대에 가서 잠이나 자.”“해독제, 해독제를 줘.”그녀의 말투 또한 차갑고 고집스럽게 변해갔다.“해독제 같은 건 없으니까 그 짐승 새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나 해.”그 말에 성혜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잃었던 첫 아이를 생각하며 배현우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그녀는 두려웠다. 방금 먹은 그 약이 너무 두려웠다. 심지어는 벌써 배가 아파 오는 착각마저 들었다.“해독제! 해독제를 달란 말이야!”배현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목을 조르는 그녀의 손에 아무런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미친 듯이 테이블 위를 뒤적이며 해독제를 찾기 시작했지만, 테이블 위에 시험관이 너무나 많아 그 중에서 도대체 어느 것이 해독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배현우는 여유로운 자태로 있지도 않은 먼지를 몸에서 털어냈다.“해독제는 아직 만들지도 않았어. 그리고 너는 이제 시간이 없고.”순간 머릿속에서 위잉,하는 소리와 함께 성해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배현우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옆에 앉아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건드렸다.“만지지 마!”그녀는 마치 역겨운 무언가를 보듯 손을 뿌리쳐냈다. 재밌다는 듯 몇 번 웃은 배현우의 눈빛에 노기가 서렸다.“반승제는 건드릴 수 있고 나는 건드리면 안된다는 거야? 참, 애도 가졌으니 둘이 침대에서 몇 번이나 뒹굴었는지 셀 수도 없겠네.”“너랑 뭔 상관이야!”“성혜인, 나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녀의 손을 잡아챈 배현우는 단번에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을 잡아 찢어버렸다.“내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상관있게 만들어줄 수 있어.”성혜인은 화가 나
가정부가 그를 화장실로 안내했다. 한편 구창모는 연태광과 논의를 계속 이어 나갔다.한 모퉁이를 지나갈 때 반승제의 귀에 가정부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니까. 그냥 굶어 죽으라지 뭐.”“배현우 씨의 연구실도 일부러 그 여자의 옆방에 배치해 놓은 것 같던데, 둘이 혹시 커플일까?”“풉, 그냥 아무 남자나 안고 뒹구는 여자가 틀림없어. 여기 들어올 때도 뻔뻔하게 배현우 씨에게 안겨서 들어왔는데, 뻔하지 뭐.”여성의 지위가 지극히 낮은 이곳에서 여자가 연회에 함께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다.더군다나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상상조차 못 할 광경을 보았으니. 이곳에 맞게 길들여진 여자들은 자연스레 성혜인을 적대시했다.반승제는 자신에게 길을 안내한 가정부에게 물었다.“연씨 가문에 손님이 계신 건가요?”“네, 배씨 성을 가진 분이세요. 연가주님께서 귀한 손님으로 모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분이 여자도 한 명 데려오셨어요.”한 남자와 여자가 왔고, 남자의 성이 배씨인 것을 보면 분명 배현우와 성혜인일 것이다.화장실에서 돌아온 반승제는 여전히 구창모의 뒤에 서 있었다. 구창모는 한 달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고집하는 연가주를 결국 설득하지 못한 듯했다. 안색이 어두워진 구창모는 화가 난 모습으로 나가버렸다.반면 반승제는 머무르길 요청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네 개의 가문에서 모두가 반기는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태광은 그를 아주 정중하게 대했다.“제가 이미 사람을 시켜 머물 방을 준비해 놓았으니 들어가 쉬시지요.”고개를 끄덕인 반승제는 가정부를 따라 그가 준비해 놓은 방으로 향했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그는 모두가 잠든 뒤에야 산책하는 척 밖으로 나왔다. 모든 창문을 봉쇄해 놓은 방을 지나갈 때 반승제는 걸음을 멈췄다.창문에는 작은 구멍들이 있긴 했지만, 워낙 굳게 봉쇄해 놓은지라 전혀 열리지 않았다. 그 안을 한번 살펴보니 커튼이 반쯤 쳐져 있었는데 멀리
하지만 그건 다 이후의 이야기다. 지금의 배현우는 이 남자의 정체가 가장 의심스러웠다.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린 옷차림새는 누구라도 쉽게 변장할 수 있었다. 전에도 그는 이런 속임수에 당한 적이 있다.그때의 반승제는 배현우의 별장에서 성혜인을 취할 만큼 간이 컸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기필코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했다.“연가주님, 일전에 반승제를 포로로 잡아두었을 때가 기억나시죠? 지금은 도망쳤지만. 연가주께서는 아마 반승제 같은 사람의 성격을 잘 모르실 수 있어요. 아주 대담하고 치밀하기까지 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연가주께서는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을 꼭 확인하시길 바라요. 혹여 반승제가 그로 변장했을까 염려돼서요. 그는 전에도 이런 짓을 저지른 적이 있어요.”조금 지나치다고 느낀 연태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일개 포로 주제에 감히 내섬의 높은 인물로 변장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반승제는 무려 내섬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란을 일으킨 요주의 인물이었다.“배현우 씨, 하지만 우리도 몇 해를 지나오는 동안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어요.”“그가 반승제만 아니길 바랄 뿐이에요.”배현우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내일 아침, 구씨 가문 어르신이 당신을 설득하러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검은 로브 남자가 얼굴을 드러낼 수 있게 하세요.”“혹시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아닐까요?”검은 로브의 남자는 여러 가문에게 범접할 수 없던 존재였기에, 연태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또한 배현우가 진짜로 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심기를 건드려 그의 눈 밖에 나는 게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만약 배현우가 처음부터 그를 속이고 있었다면 연씨 가문은 앞으로 잃을 것이 너무 많게 될 것이다.배현우가 손에 쥐고 있
한편 응접실에는 구창모와 연태광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어제 구창모는 연태광을 설득하지 못해 몹시 화가 났지만 그럼에도 오늘 다시 찾아왔다. 내섬에 있는 네 가문은 서로 거래하고 있었지만 전부 자기만의 실속을 챙기기 바빴다. 섬에는 자원이 한정적이라 계속 안정을 유지하려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했다.네 가문 중 정직한 가문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를 원했으며 오래 지속된 평화는 단지 겉모습에 불과했다.연태광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누구에게도 밉보이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 사람과 척을 지지 않았다. 구창모는 본디 그를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득은커녕 어젯밤 연태광에게 완곡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노인의 두 번째 방문은 다소 격이 떨어지는 일이었지만 그 무리가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모르니 당장 아군을 끌어와야만 했다.“연 가주, 나와 힘을 합치면 앞으로 구씨 가문은 반년 치의 약을 연씨 가문에 양보하겠네.”그 약은 밑에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모두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제공했다.네 가문이 번갈아 가며 검은 옷을 입은 남자와 거래했고, 분배는 항상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다.이제 구씨 가문은 반년 동안의 거래 자격을 포기할 예정이었으니 비교적 큰 이익을 양보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예전 같았으면 연태광은 무조건 동의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종류의 약을 제조할 수 있는 배현우가 있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거래 자격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최근 우리 하준이가 조금 아파요. 어르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아들을 무척 아끼잖아요. 이번 달에는 조용히 하준이와 함께 사당에서 연씨 가문 조상님들께 절을 올리려고 해요.”구창모는 감정이 격해지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정도까지 양보했는데 연태광은 여전히 호의를 무시했다.그는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막 나가려던 찰나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구창모의 표정이 금세 밝
응접실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긴장해졌다. 모두가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에 총을 든 채 신경을 바싹 조이고 있는 연태광은 마치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총을 쏠 기세였다.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상황에 부하가 보고하러 들어왔다.“가주님, 장로님께서 오셨습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앞에서 한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이 사람은 가면을 썼지만, 젊은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노예찬의 뒤에는 십여 명의 경호원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갖은 고생을 다 겪어 본 모습이었다. 연태광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장로님, 오셨군요.”노예찬은 구창모를 보더니 다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당신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죠?”연태광은 곧 자신이 의심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일의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마침 이분을 알고 계시는 장로님께서 얼굴을 확인해 주시면 안 될까요?”화근을 없앰으로써 저에게 들이닥칠 재앙을 미리 막기 위해서 말이다. 만일 검은 로브의 남자가 반승제로 대체되지 않았다면 연태광은 큰 무례를 범하는 꼴이 되지만, 이제 이 기회를 노예찬에게 떠넘김으로써 노예찬이 검은 로브의 남자에게 무례를 범하는 꼴이 되었다.하지만 검은 로브의 남자와 노예찬은 원래부터 한 배를 탄 사이라서 원한을 사지 않을 것이다.노예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반승제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반승제의 바로 앞에 서서 검은 모자를 뒤로 넘겼다. 반승제의 얼굴이 반쯤 드러나자 노예찬의 손끝이 일순간 굳더니 그는 천천히 모자를 다시 내렸다. 거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고 자기 자신조차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연태광과 구창모의 각도에서는 이쪽이 아예 보이지 않았기에 반쯤 드러난 반승제의 얼굴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오직 노예찬 한 사람만 반승제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제 다시 모자를 내려 얼굴을 덮어버렸다. 노예찬이 자리를 찾아 앉자 연태광이 대뜸 물었다.“장로님, 제대로 확
반승제가 죽으면 성혜인은 어떡한단 말인가? 노예찬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위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수양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만 신경 썼다.하지만 성혜인이 잿더미에서 뼈를 줍던 장면이 계속 잊히지 않았다. 뇌리에 각인되기라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장로님.”“장로님?”누군가 부르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연태광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장로님, 두 분께 점심 식사를 준비해 드렸는데, 가서 식사하세요. 전 이만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자리에서 일어난 노예찬은 배현우를 지나칠 때 발걸음을 멈칫했다. 이 바보가 전에는 멍청한 표정뿐이더니 지금은 아주 예리하고 똑똑해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본모습이었다.배현우는 노예찬이 멈칫하는 순간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 가면에 가려진 사람의 정체를 알았다. 그렇다. 이 사람은 노예찬이었다.배현우는 냉소를 흘리며 제자리에 서서 곁눈으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예찬의 뒤를 따라 나가는 것을 보았다.배현우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양옆에 늘어뜨린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반승제가 어떤 식으로 변장하든 절대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반승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반승제의 매 순간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기에 절대 배현우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이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는 틀림없이 반승제였다. 반승제와 노예찬은 한패였다. 다만 반승제가 노예찬에게 대체 무슨 이득을 줬기에 노예찬이 반승제를 감춰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배현우는 속을 헤아릴 수 없는 눈빛으로 그들을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눈빛에 연태광은 적잖이 놀랐다.“배현우 씨, 왜 그러시죠?”어젯밤 그의 능력을 검증한 연태광은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이는 연씨 가문이 4대 가문의 꼭대기에 설 수 있는 관건이었다. 배현우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제 손에
연태광은 즉시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배현우는 제자리에 서서 살기 어린 눈빛으로 반승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이닝룸에는 반승제와 노예찬이 앉아 있었다. 노예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음식도 건드리지 않았다.그건 반승제도 마찬가지였다. 등을 뒤에 기대고 노예찬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위기는 조용하면서도 미묘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노예찬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당신 K에게 원한이 있어?”“아마도.”“이번에 섬에 들어온 두 세력 중 하나는 K의 세력이고, 10분 전에 상륙한 다른 하나는 당신의 세력이야?”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매우 강압적이었다. 노예찬은 냉소를 흘렸다.“10분 전이면 내가 당신의 정체를 숨겨줬을 때잖아. 반승제, 당신 아주 계산이 치밀한 사람이네.”반승제는 전부터 구금섬 배후의 사람을 조사했지만 그 사람이 너무 깊숙이 숨어 있는 데다가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다.오늘 마침 이 배후의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그를 도와줬다. 반승제는 자신이 들어오며 내섬이 아수라장이 되고,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대 가문들이 연합하여 그에게 대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이제 배후에 있는 사람이 그를 돕고 있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을 눈감아줄 수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에 손끝을 적셔 천천히 두 글자를 썼다. 노예찬은 흘끗 보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응당 거절했어야 한다. 수양아버지의 명령에 한 번도 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노예찬은 계속 구금섬의 주인으로서 대 가문들을 휘둘러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뭔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그는 저를 애지중지 바라보던 성혜인의 진지한 그 눈빛이 그리웠고, 그녀가 넋이 나간 채 잿더미에서 뼈를 줍던 장면이 그리웠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는 어렸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해봤고,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반승제는 원래 외부에 연락할 생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하는 과정은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하지만 노예찬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데 도움을 준 것을 보고는 즉시 마음을 바꿨다.이제 그의 사람들이 섬에 들어왔으니 그 이후의 일은 더욱더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저녁 식탁에 앉은 두 사람은 아무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가정부가 쉴 수 있도록 각자의 방으로 안내하기 전까지 30분 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연태광과 구창모는 노예찬에게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노예찬은 피곤하다며 자리를 떠났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방 문 앞을 지나가면서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창문이 강화되어 있고 커튼이 완전히 쳐져 있어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는 잠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있었다. 밖에서 꽹과리와 장구, 북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윽고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가정부가 송편을 담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곧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테니, 가주님께서 송편을 드시라고 합니다.”“무슨 경사스러운 일인데요?”“배현우 씨가 결혼합니다.”배현우가 결혼한다니. 대체 누구랑? 연씨 가문 또래의 여성과 결혼하는 걸까? 하지만 배현우의 성격상 자신의 평생이 걸린 일을 이런 섬에서 한다고?머릿속에서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배현우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배현우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두 사람의 과거 경험으로 볼 때 배현우가 성혜인에게 결혼을 강요하지는 않을 터였다.성혜인이 임신한 사실은 비밀이 아니었으며 배현우 처럼 오만한 사람이 다른 남자 아이의 아버지가 되려고 하지 않을 거니까.반승제는 손에 든 송편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반면 노예찬의 경호원은 가정부가 들고 온 송편을 바로 거절했다. 노예찬은 송편은 보지도 못한 채 가면을 쓰고 잠긴 방의 문밖에 와 있었다. 그는 옆에 있던 연씨 가문의 경호원에게 물었다.“여기 누가 갇혀 있지?”“배현우 씨의 애인인데, 정신에 문제가 생겨서 가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