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이 별장 밖에 서서 서성였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뒤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별장 내부는 풍경이 좋았다. 이곳은 거창하고 큰 별장이 아니라 노인들이 살만한 아늑한 스타일의 별장이었다.천천히 숨을 내쉰 성혜인이 열쇠로 별장 문을 여니 안에는 도우미 몇 명이 청소하고 있었다.성혜인을 본 그들은 표정 변화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이어서 청소했다.온종일 이동한 성혜인은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그녀가 도우미에게 물었다.“혹시 옷 몇 벌 준비해 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음식도 준비해 주세요. 배고파서요.”“아가씨, 사장님께서 이미 분부하셨습니다. 위층으로 모실게요.”성혜인은 진세운이 세심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네, 고마워요.”위층에 도착한 그녀는 편안하게 샤워했고 몸에 채찍 자국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반승제가 본다면 무조건 가슴 아파할 것이다.그러나 특별한 약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 이상 채찍 자국은 예전처럼 빨리 낫지 않았다.손끝으로 채찍이 남긴 자국들을 만지며 성혜인은 문득 자신과 미스터 K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다른 세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신기한 약물이 있을 수가 있을까. 통증은 증폭시키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고작 며칠이면 되었다.성혜인은 더 이상 그곳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반승제와 빨리 만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반승제와 만나면 그녀는 그곳으로 가는 노선을 알려주고 함께 미스터 K가 살고 있는 그 별장으로 갈 것이다.BKS에 있어서 그 별장은 분명 중요할 것이고 002나 003과 같은 핵심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반승제와 통화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이 중요한 소식들을 알려줄 것이다.성혜인은 아직도 그 길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후에도 피곤함은 여전했고 동시에 배도 고파져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해졌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밥을 먹고 나서야 성혜인은 소파에 웅크리고 잠에 들었다.임지연을 다시 찾기만 하
반승제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반승제에게 사전에 언질을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목숨을 잃고도 남았을 것이란걸.이것이 바로 반승제가 노린 부분이었다.그는 원진을 향해 환히 웃으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내리쬐는 햇볕을 만끽하며 입을 열었다.“원진 씨, 배가 참 편하고 좋네요. 행복하겠어요.”그의 빈정거림에 원진은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군자라도 이러한 반승제를 앞에 놓고 보면 화낼 만했다. 원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춤에 찬 칼을 향해 손을 더듬었다.그러나 바로 이때, 곁에 서 있던 경호원이 겁에 질린 채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사장님, 아가씨께서 방금 전화가 와서 언제 도착하시는지 묻습니다. 함께 식사하시고 싶답니다.”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의 한없이 차갑던 표정이 삽시간에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환한 미소만이 자리 잡았다.“전해. 3일이면 도착한다고.”배를 두 번, 비행기를 한 번. 긴 여정이니 집에 도착하는 데에 3일은 족히 걸렸다.“네. 아가씨께서 몸조심하랍니다.”이에 원진이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의자에 편히 기대어 있던 반승제가 그의 놀라운 모습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보았다. 잘못 본 것 같았다. 이렇게 악명 높은 사람이 인자한 웃음이라니.제원에서 원씨 가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원진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피하고 싶어 했다. 백현문이 백씨 가문의 후대를 모두 죽이려 했다는 것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원진은 그보다도 더한 인물이었다. 원진은 자신의 친부모를 모두 죽이고, 가족의 목숨까지 모두 앗아가서야 가문의 일인자가 된 사람이다.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어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원씨 가문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원진의 계략으로 인한 포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마침 그 자리에 원진의 부모가 있었고, 마침 집안의 중요한 직위를 가
서주혁이 있는 별장은 제원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다.배가 이곳 기슭에 세운 것은 서주혁을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이어 배에서 내려 마중 나온 차에 올라탔다.별장에 도착한 이후 그는 혼자 걸어 들어갔다.방 키를 건네주는 원진의 표정으로부터 마음이 내키지 않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반승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키를 빼앗아 갔다.원진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늘 여러 번이나 손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반승제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별장의 로비로 걸어 들어갔다.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반승제는 위층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러나 혼수상태인 서주혁이 있어야 할 방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 주혁 씨... 아, 저 정말 이제 힘들어요.”“조금만 있으면 돼요.”장하리의 이마는 땀범벅이었다. 서주혁이 퍼붓는 키스에 숨이 막혔고 그녀는 익사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서주혁은 그녀가 제원에서 가져온 정장을 입고 있었다. 비록 그가 평소에 입던 정장보다는 재질이 좋지 않았지만 그가 입으니 용모가 더 돋보이는 듯했다.장하리의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므로 전부 그의 손에 의지하고 있었다.방의 문이 열려있었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별장 전체에 그들을 제외하면 외부인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빨리해 줘요. 정말 못 견디겠으니까.”“그럼 이혼 얘기 또 꺼낼 거예요?”장하리는 침묵했다. 지금 서주혁은 사고에 대한 여파로 기억을 잃었고 장하리와 이혼 얘기가 오가는 사이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단 장하리가 이 관계를 부인하면 그는 장하리가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내리깔고 타이르듯 말했다.“안 해요. 안 할게요.”이 무렵, 반승제는 문밖 복도에서 담배를 두 대나 피웠다. 금방 서주혁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안도했었다. 그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부상이 거의 나았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마치 심문하는 듯한 말투였다. 서주혁에게 무엇이라도 알아낸 것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고생스럽게 달려온 건데, 서주혁은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장하리는 차마 반승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서주혁의 옷깃을 만지작거렸다.“대표님, 주혁 씨가 많이 다치는 바람에 기억을 잃었어요. 그래서...”장하리는 목까지 빨개져 마치 삶아진 새우 같았다.서주혁이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저 사람이 해칠까 봐 그래요?”장하리는 온몸에 열이 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옷을 꼭 쥐었다.반승제는 심란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장하리에게 말했다.“주혁이 먼저 올라가라고 해요. 따로 할 말이 있어요.”장하리가 얼른 서주혁의 손을 잡았다.“주혁 씨, 대표님은 주혁 씨의 가장 친한 친구시고 주혁 씨가 걱정돼서 온 거예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릴 순 없지만 거짓말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먼저 올라가요.”서주혁은 내키지 않았다.이 소위 말하는 친구라는 녀석의 생김새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꼈다.그러나 이 며칠간 장하리를 밤마다 괴롭혀 왔으니 바람피울 생각은 절대 못 할 것이다.서주혁은 일어나 그녀의 입에 입맞춤한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장하리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더 숙였고 손바닥은 땀투성이였다.“대표님, 할 말이 무엇입니까?”장하리는 반승제가 자신과 서주혁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서주혁이 올라가는 것을 다 확인하고서야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관계는 하되 마음은 주지 마요. 주혁이는 절대 그쪽 사랑할 수 없으니까.”그의 말에 장하리의 몸이 굳어졌다. 얼굴의 핏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이 며칠간 서주혁에게 안겨서 관계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처음에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서주혁이 자신에게 이리 대하는 것은 모두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을.그러나 점점 현혹되었다.그녀는 자신을 미워했으므로 마음을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자기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었고, 지금
모두 사실이었다. 이 오해의 심각성을 확실히 상기시켜 주어야만 나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장하리는 마치 혈도가 찍힌 것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가는 반승제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서주혁과의 옛날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무표정으로 모욕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었다.생리적인 면에서의 도움을 제외하고 서주혁이 장하리와 함께 한 이유는 단지 그녀가 속궁합이 잘 맞는 상대였기 때문이다.이는 서주혁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한 말이었다.서주혁은 다른 여자와는 관계를 맺은 적도, 맺으려고 시도를 한 적도 없었다. 여자에 대한 혐오가 뼛속 깊이 새겨졌으니까.그러나 장하리가 자발적으로 침대에 오름으로써 그의 전례를 깨뜨렸다. 그는 관계를 맺는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지만, 이미 해버린 김에 성욕 해결용으로 여러 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이것이 서주혁의 진심이었다. 그러니 굳이 장하리에게 착한 척, 다정한 척할 필요가 있겠는가.소파에 몸이 뻣뻣해질 때까지 앉아 있었을 무렵, 서주혁이 내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왜 그래요?”흐린 안색에 서주혁이 걱정했다.장하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주혁은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추고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울긋불긋한 예쁜 자국들이 드러났다.서주혁이 오동통하게 부은 그녀의 입술을 보고 참지 못하고 또 뽀뽀하려 했다. 그러나 장하리가 급히 막는 바람에 손바닥과 입술이 닿았다.“주혁 씨, 저 이제 피곤해요.”하지만 그의 키스는 이미 파고들어 와 부드럽게, 젖는 줄 모르는 가랑비처럼 한순간에 장하리를 함락시켰다.그가 애틋한 얼굴로 바라보면 장하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키스를 퍼붓다 짭짤한 맛이 느껴져 그가 몸을 일으켰다.언짢은 표정으로 눈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엾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하리 씨, 왜 그래요.”한참을 망설이던 장하리가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에 서주혁이 웃으며
반승제는 진세운을 의심하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의심들이 순식간에 타격을 받을 줄은 몰랐다.얽힌 실타래 같던 생각들이 조금 풀어지려는 찰나 더 엉켜버린 느낌이 들었다.“주소를 보낼 테니 여기로 와. 최근 네가 조사했던 사람들을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오기 전에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 잘 확인하고.”옛 친구가 그리웠던 온시환은 얼른 그러자고 대답했다.반승제에게 사고가 났을 때 온시환은 구체적인 상황을 모른 채로 갑자기 반승우와 함께 도주범의 신분으로 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그는 서둘러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반승제가 보낸 주소로 향했다.중간쯤의 지점에서 온시환은 불안한 마음에 심지어 헬리콥터로 교통수단을 바꾸었다.헬리콥터는 아무래도 하늘에서 나는 것이므로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한 시간 후에야 두 사람은 선박 아래에서 만나게 되었다.늦가을이었으므로 노란 나뭇잎들이 바람 따라 아래로 흩날리고 있었다.온시환은 종래로 이런 모습의 반승제를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십몇 년을 함께 해온 친구들이 이렇게 생사가 갈릴 줄은 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승제야.”그가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주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온시환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반승제의 미간도 덩달아 찌푸려졌다.안색이 창백해진 온시환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몸이 굳었다. 분명 주의하고 또 주의하며 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반승제를 도망치게 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상황에서 어디 도망갈 곳이 있겠는가.게다가 이미 경찰이 출동해 온시환의 손에 수갑을 채운 상태였다.허락 없이 도주범과 통화에 심지어 고의로 모두를 속이고 도주범과 만나려 했다. 온시환은 반드시 조사를 받아야 했다.“얼른 도망가.”온시환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이었다.하지만 반승제는 아무런 말 없이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
모두가 두 사람의 높은 신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기에 몸을 사리고 있었다.온시환은 다른 차에 끌려갔고 반승제는 여전히 원래 차에 있었다.자동차가 한 산비탈을 지날 무렵, 한 구간에서 갑자기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안개에 모두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안개가 커브 길이 연달아 있는 곳의 대략 200여 미터를 덮고 있었으므로 자동차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잇달아 멈추어 섰다.총구가 반승제의 이마를 겨누었다.“이거, 당신 쪽 사람이 한 짓이죠? 수작 부릴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방아쇠를 당겨버릴지도 모르니까.”말을 마친 남성은 반승제의 수갑 반대쪽을 자동차 난간에 고정했다.차 주변은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였다. 모두가 알고 있듯 갑자기 특정된 구간에 안개가 몰린 것을 보아 분명 누군가 반승제를 구하기 위해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반승제를 이렇게 쉽게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윗선 분들께 보고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총을 겨눈 남성이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다.“쾅.”육중한 물건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에 반승제는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고 곧이어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누군가 전기톱으로 난간과 수갑을 절단한 것이었다.심인우는 쓰러진 사람의 호주머니를 더듬어 열쇠를 찾은 후 공손하게 수갑을 풀어주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반승제가 손목을 움직여보며 고개를 저었다.차에서 내린 그는 곧바로 온시환이 있는 차로 향했다.혼미한 정신상태로 앉아 있던 온시환이 코를 찌르는 냄새에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승제?”주변에 가득한 흰 안개와 쓰러져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보고 온시환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위에서 총살하면 어쩌려고!”“시환아. 알려줘. 진세운을 의심했던 이유가 뭔데?”“전에 룸에서 내가 코끝에 점으로 농담 삼아 허세 부렸잖아. 그 이후에 재벌 2세 친구가 진세운 귓불에 작은 붉은 반점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온시환의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 그럼에도 온시환은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반승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돌아가서 차에 있어. 윗사람들이 곧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백 할아버지께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줄거야. 그럼 다음에 보자.”다음을 기약함에도 그 다음이 언제일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온시환은 온몸이 굳어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떠나던 반승제가 멀리에서 한마디 보탰다.“나중에 휴대폰 잘 봐봐. 혹시 도청 장치 같은 것이 또 붙어있는지. 진세운 그 자식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이야.”온시환은 여전히 아무 말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보이지 않는 두려운 힘이 자신을 먹어 치우는 듯했다. 마치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나방같이 느껴졌다.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고 발버둥 치는 멍청한 나방 말이다.그는 거미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갖지 못한 채 거미가 군침을 흘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다.그 무기력함, 그 상실감은 누구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반승제가 기선으로 돌아왔을 때 원진은 여전히 의자에 누워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그는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의 얼굴이었는데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은 그가 또 화를 낼까 두려워 모두 자리를 피해 있었다.반승제가 그에게 다가가 의자 다리를 툭 건드렸다.“다시 보내줘요.”눈을 천천히 뜬 원진이 입을 열었다.“여기가 어디라고. 혹시 당신 집 앞마당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당씨 집안 아가씨 모시고 식사하러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갑자기 느긋해진 거죠? 당신이 전에 눈을 멀게 했던 놈 종적을 알게 되니 아가씨가 위험할까 봐 두려워진 거예요? 그래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죠?”원진이 천천히 똑바로 앉더니 반승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새X가 어디에 있는지 안단 말이요?”그 사람은 원진의 둘째 형이며, 유일하게 포탄에서 운 좋게 탈출했던 사람이다.둘째 형은 임시로 다른 임무를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