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다른 여자는 안 건드려. 나 깨끗해.”그러나 윤혜인은 고개를 휙 돌렸다.“당신이 깨끗한지 아닌지, 나랑은 상관없어요.”“어떻게 상관이 없겠어?” 그러더니 이준혁은 운전기사를 힐끗 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말고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화가 난 윤혜인은 깜짝 놀라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래서 꾸짖듯 말했다.“헛소리하지 마요.”이준혁은 약간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까 나랑 다시 함께하고 싶다며.”그러나 윤혜인은 지금 그 찰나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 제안 취소할게요.”“난 반대야. 지금부터 우리는 남자친구, 여자친구야.”이준혁이 단호하게 말하자 윤혜인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곧바로 그녀는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님, 가주세요.”더 해명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준혁은 고개를 돌려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님, 저랑 차 좀 바꾸시죠. 괜찮으세요?”운전기사는 어리둥절했다.“뭐라고요?”뒤이어 이준혁은 주훈이 건네준 열쇠를 기사에게 건넸다.“제가 기사님 차 쓰고 기사님은 제 차를 쓰시면 됩니다, 괜찮으세요?”그러자 운전기사는 연신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돈을 벌어야 해서요.”윤혜인은 속으로 운전기사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말했다.“기사님, 저희 때문에 시간 지체하게 해서 죄송해요. 타임 미터로 계산할게요.”이준혁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러다 문득 택시의 액정 표시창에 ‘야간 기사 모집'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주훈을 밀어 넣으며 물었다. “이 사람은 어떠세요?”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준혁은 자신이 직접 지원했을 것이다.운전기사는 웃으며 말했다.“젊으신 분이... 장난치지 마세요.”“기사님, 장난 아닙니다.”“네, 장난 아닙니다.”주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비서로서 여러 직책을 겸하는 것은 기본이었으니 말이다.이준혁은 운전기사를 향해 진지한 표정을 내보였다.“이 사람
특히 택시 안에는 가림막도 없었으니 말이다.‘아니 옷을 안 입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어...’“그건 안 되지. 기사님이랑 약속했잖아. 너를 잘 ‘사랑’해주겠다고.”윤혜인은 얼굴이 빨개졌고 이준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그러더니 팔을 들어 그녀의 코앞에 대며 말했다.“냄새 맡아봐. 안에는 냄새 안 나. 아까 안에서 코트 안 벗었거든.”윤혜인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정말 뻔뻔하네요.”“응, 난 뻔뻔해.”이준혁은 팔을 윤혜인의 머리 위로 넘기고 의자 등받이에 걸쳐 마치 그녀를 감싸는 듯한 자세로 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그냥 널 원할 뿐이야.”윤혜인은 귀까지 빨개져 당황하며 말했다.“난 당신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한테 손대고 다녀서 더러워요.”그러자 이준혁은 그녀의 얼굴을 돌려세우고 손가락을 하늘로 올리며 맹세했다.“정말 다른 여자에게 손대지 않았어. 주 비서한테 물어봐도 돼. 그 여자가 나를 가까이하게 하지도 않았고 같은 공기를 마신 게 유일한 죄야.”주훈은 앞길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한 채 증언했다.“맞아요. 대표님은 정말 깨끗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손대지 않으셨어요.”얼굴이 화끈해질 대로 화끈해진 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을 쳐냈다.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주훈 앞에서는 말하기가 불편했다.그래서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준혁은 윤혜인이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놀리지 않은 채 여전히 그녀를 감싸는 듯한 자세를 유지했다.목적지에 도착한 후, 주훈은 눈치껏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윤혜인은 말없이 차 문을 열려고 했으나, 이준혁이 길게 뻗은 팔로 문손잡이를 눌렀다.“혜인아...”이준혁이 차 문을 누르는 동작은 그녀를 뒤에서 안고 있는 듯한 자세였다.곧 그의 차가운 기운이 윤혜인을 완전히 감쌌다.“미안해. 내가 질투를 너무 과하게 부렸어. 널 좀 더 믿어야 했고 다른 남자와 엮인 걸 보고 화내지 말았어야 했어. 나도 고치려고 노력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따지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그럼 집에 가서 다시 만들어 줄게요.”거실에 도착하자 이준혁은 윤혜인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윤혜인이 정말로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이 분명했는데 자신은 그걸 저버린 셈이었다. 그래서 이준혁은 한없이 자책했다.윤혜인은 그가 오랫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여 속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토마토 달걀 국수를 만들어 주었다.국수가 끓는 동안 그녀는 불을 약하게 줄여 더 부드럽게 끓였다.국수를 다 준비하고 나서 이준혁은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그가 여전히 배고픈 듯 윤혜인을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더 먹으면 안 돼요. 소화 시켜야 해요.”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윤혜인은 도우미를 부르지 않고 직접 그릇을 씻으려고 했다.하지만 이준혁이 먼저 그릇을 가져가서 싱크대에서 깨끗이 씻었다.키가 크고 다리가 긴 탓에 싱크대가 그의 허리 높이도 되지 않아 조금은 어색해 보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이준혁은 떠나기 아쉬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름이 좀 봐도 돼?”흔쾌히 승낙한 후 윤혜인은 앞치마를 풀려고 했으나 실수로 그 리본을 더 꽉 묶고 말았다.그러자 이준혁이 뒤에서 다가와서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해 줄게.”이준혁의 손가락이 그 리본을 풀 때, 종종 목덜미 피부를 스치는 차가운 느낌이 윤혜인에게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그녀는 벽을 향하고 이준혁은 윤혜인의 뒤에 있는 모습이 마치 은밀한 상황을 연상시켰다.곧 윤혜인의 호흡이 가빠지자 이준혁은 씩 미소를 지으며 낮게 웃었다.“왜 귀가 그렇게 빨개졌어?”남자의 느긋한 웃음소리는 마치 우아한 첼로 음악처럼 피부를 뚫고 스며들었다. 윤혜인은 귀뿐만 아니라 목까지 붉어졌다.“다 풀었어요?”그녀가 물었다.“다 풀었어.”이준혁은 앞치마를 풀어
심장 자폭기를 삽입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그 조직은 매우 강력할 것이다.만약 정말로 찰스 가문이라면 후환이 클 수밖에 없다.국내에서는 어떻게든 윤혜인과 아름이를 보호할 수 있겠지만 해외에서는 그만큼 어렵다.이준혁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계속해서 그 사람들이 왜 혜인이를 노리는지 알아봐!”그는 냉랭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혜인이와 아름이 곁에 각각 두 명의 엘리트를 배치해. 너무 가까이 있지는 않되 반드시 두 사람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네.”주훈이 대답했다....그 후 며칠 동안, 윤혜인은 업무로 바빴다.이준혁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직접 스튜디오로 식사를 가져왔다.곧 스튜디오 사람들 사이에서는 윤혜인에게 아주 잘생긴 남자친구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그리고 윤혜인은 그가 일부러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것 같아 머리가 아팠다.그 사이에 눈에 띄는 일이 있었다. 바로 원지민이 기자회견을 열고 이준혁과의 관계에 대해 해명했다는 것이다.그녀는 기자회견에서 이준혁과는 업무 외의 어떤 관계도 없다고 밝혔다.그러나 기자회견 내내 원지민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이후 이 일은 화제가 되었고 인터넷에서는 원지민이 재벌 가문에서 밀려났다는 소문이 돌았다.이에 따라 이선 그룹은 네티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호감도가 계속 하락했다.윤혜인은 이 기자회견이 원지민에게만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에 대해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요즘 그녀는 자선 프로젝트로 분주했으니 말이다.예전 윤혜인의 모친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고 항상 자선 프로젝트에 열심히 참여했다.그래서 이번에 윤혜인은 달밤 스튜디오의 이름으로 어린이 사랑 재단과 함께 자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산간 지역 아이들에게 기부와 함께 직접 방문하여 아이들과 어울리곤 했다.3일간의 지원 활동 중 오늘은 두 번째 날이었고 내일이면
이 한 마디에 윤혜인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이어서 벌떡 일어난 그녀의 바로 눈앞에는 찬장 위의 장식품들이 모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또한 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함께 울려 퍼졌다.아무런 여유도 없이 윤혜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가려 했다.그러나 문이 마치 용접된 것처럼 아무리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았다.산간 지역에는 호텔이 없어서 모든 자원봉사자들은 일부는 마을 주민들의 집에, 일부는 학교에 머물고 있었다.학교 건물은 대부분 매우 낡았지만 문은 모두 철문으로 된 거라 오래 사용해도 쉽게 썩지 않았다.그러나 문 잠금장치는 오랫동안 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문제가 발생하여 밖에서만 열 수 있었다.안에서 차도 소용없었고 밖에서 차야만 열릴 수 있었다.윤혜인은 문을 열 수 없어서 철문을 힘껏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거기 누구 없어요? 누구 와서 문 좀 열어주세요!”하지만 밖에서는 모두 혼란스럽게 도망치는 발소리뿐이었다.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어서 윤혜인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남임산에서 갑작스러운 산사태 위험이 발생했습니다. 모두 마을 중심의 안전한 장소로 신속하게 대피하세요!”마을 방송에서는 이렇게 외쳤다.윤혜인은 그제야 이해했다.이것은 지진이 아니라 산사태였던 것이다.그러나 이 초등학교는 산기슭에 위치해 있었고 소리와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매우 위험한 중심지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윤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도구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그러나 실내에는 쇠막대 같은 도구가 없었고 의자 다리가 부러져도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찾아 자원봉사자 팀장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쿵!”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철문을 차는 소리와 더불어 밖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인 씨, 안에 계신가요?”윤혜인은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있어요! 여기 있어요!”“문에서 떨어져 주세요.”윤혜인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밖에서 다시 두 번 ‘쿵쿵' 소리가 났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안으
한 경호원이 조명을 켜자 할머니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그 옆에는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할머니 위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남자아이는 사람들이 들어오자마자 윤혜인을 알아보았다.아이에게 있어 그녀는 마치 요정 같은 착한 누나였다.소년은 흐느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요정 누나, 제발... 할머니를... 구해주세요...”우선 윤혜인은 두 경호원에게 할머니를 데리고 나가라고 손짓했고 자신은 어린 남자아이를 안으려고 했다.경호원들이 할머니를 들어 올리고 나가자 윤혜인은 아이를 안았는데 아이의 발이 무언가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아이의 발이 마끈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주머니에서 호신용 군용 칼을 꺼내 힘껏 마끈을 자르기 시작했다.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떨며 말했다.“요정 누나, 나 무서워요...”아이는 윤혜인이 자신을 버릴까 봐 두려웠다.아직 부모님을 뵙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은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걱정 마, 누나는 널 버리지 않을 거야!”마침내, 마끈이 잘리고 윤혜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안아 일어서는 순간, 강력한 충격이 그들을 덮쳤다.그녀는 충격파에 의해 벽에 부딪혔지만 다행히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산사태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지금 산사태가 내려가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은 매우 현명하지 않았다. 완전히 매몰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이윽고 그녀는 결단력 있게 아이를 안고 측면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일정 거리를 달린 후, 그녀는 이번 산사태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최근 비가 많이 내린 탓에 토양은 매우 질퍽질퍽해져 있었다.어느 방향으로 가든 흙이 계속 쏟아져 내려왔다.잔뜩 놀란 아이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간 듯 보였다.소년은 윤혜인의 목을 꼭 껴안고 계속 울었다.“누나... 요정 누나...”윤
서준은 얌전하게 듣고 있었다.윤혜인이 말했다.“일단 나무를 꽉 잡고 있어. 절대 자면 안 돼. 조금만 더 버티면 누가 구해주러 올 거야. 사람들은 너 포기하지 않아.”“네...”“무슨 소리 들리면 빨간 스카프를 마구 흔들어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너 발견할 수 있어. 알겠니?”서준이 울먹이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발밑은 갯벌에 빠진 것처럼 꽉 조여왔다. 그런 압박감에 윤혜인은 점점 더 허약해졌다. 숨통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에 윤혜인은 천천히 입을 열며 이렇게 말했다.“서준아, 만약에 아름이라는 여자애 만나면 대신 전해줄래? 아줌마 딸이거든. 엄마가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줘... 아름이는 늘 엄마의 자랑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말이야...”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눈앞이 점점 흐릿해져갔고 더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온몸에 힘이 점점 풀려갔다.“...”윤혜인은 이제 의지할 데가 없었다. 어렴풋이 서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몸이 거의 물에 잠기려는 순간 아직 인사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떠올랐다.아빠, 오빠, 소원, 구지윤, 홍 아줌마, 그리고 그 남자까지... 너무 화가 났다.‘이럴 줄 알았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였는데...’의식을 잃기 전 윤혜인은 힘껏 입꼬리를 당겼다.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면 웃으면서 떠나고 싶었다.무섭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무서웠다. 무서울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지 못한 걸 후회했다.하지만 이런 상황이 다시 닥쳐온다 해도 윤혜인은 서준이 죽어가는 걸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줄기 희망만 있다면 꼭 살리려고 노력했을 것이다....해남 공항.까만 슈트는 이준혁의 기다란 체구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 모습이 점잖으면서도 우아했다.손에는 빨간 장미를 한 다발 안고 있었는데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과는 살짝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하지만 김성훈은 와이프에게 선물하려면 꽃부터 선물해야 한다고 했다.이준혁은 윤혜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먼저 공
작은 촌이라 주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봉사팀은 거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현재 실종된 사람은 5명밖에 없었는데 그중에 윤혜인과 서준이 있었다.“윤혜인 씨는 어떤 아이를 구하다가 제때 대피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표님...”풉.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피를 왈칵 토해냈다.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입술에서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대표님.”보디가드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이준혁을 부축하려 했지만 이준혁이 그를 밀어냈다.그렇게 바닥에 오랫동안 꿇어있던 이준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지금 당장 헬리콥터 불러서 수색 범위 확대하고 수색 인원도 더 추가해. 동진촌을 갈아엎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내.”이준혁의 명령에 보디가드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맴돌던 헬리콥터가 큰 공터에 착륙했다.이준혁은 헬리콥터에 올라 전용 안경을 쓰고 손짓했다. 그러자 헬기가 낮게 선회했다.몇 바퀴 둘러봤지만 사람은커녕 생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회색뿐이었다.옆에 있는 동진숲은 아직도 진흙 덩어리가 떨어지고 있었다.이곳은 산사태의 중심에 속해 있었고 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그렇게 두 바퀴 선회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같이 타 있던 보디가드도 희망을 잃고 포기했다.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회색으로 뒤덮인 폐허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살아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이준혁은 믿지 않았다. 하늘이 이 정도로 무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절대 그렇게 무심할 리가 없다.보디가드는 이준혁의 병적인 모습에 낮은 소리로 설득했다.“대표님, 아니면 일단 돌아가서 좀 쉬세요. 나머지는 저희가...”“북위 45도, 꺾어.”이준혁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조종사가 이를 듣고 방향을 꺾었다.보디가드는 그제야 깡마른 나뭇가지에 빨간 스카프가 걸려있는 걸 발견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선명하게 보였다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