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마디에 윤혜인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이어서 벌떡 일어난 그녀의 바로 눈앞에는 찬장 위의 장식품들이 모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또한 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함께 울려 퍼졌다.아무런 여유도 없이 윤혜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가려 했다.그러나 문이 마치 용접된 것처럼 아무리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았다.산간 지역에는 호텔이 없어서 모든 자원봉사자들은 일부는 마을 주민들의 집에, 일부는 학교에 머물고 있었다.학교 건물은 대부분 매우 낡았지만 문은 모두 철문으로 된 거라 오래 사용해도 쉽게 썩지 않았다.그러나 문 잠금장치는 오랫동안 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문제가 발생하여 밖에서만 열 수 있었다.안에서 차도 소용없었고 밖에서 차야만 열릴 수 있었다.윤혜인은 문을 열 수 없어서 철문을 힘껏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거기 누구 없어요? 누구 와서 문 좀 열어주세요!”하지만 밖에서는 모두 혼란스럽게 도망치는 발소리뿐이었다.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어서 윤혜인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남임산에서 갑작스러운 산사태 위험이 발생했습니다. 모두 마을 중심의 안전한 장소로 신속하게 대피하세요!”마을 방송에서는 이렇게 외쳤다.윤혜인은 그제야 이해했다.이것은 지진이 아니라 산사태였던 것이다.그러나 이 초등학교는 산기슭에 위치해 있었고 소리와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매우 위험한 중심지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윤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도구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그러나 실내에는 쇠막대 같은 도구가 없었고 의자 다리가 부러져도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찾아 자원봉사자 팀장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쿵!”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철문을 차는 소리와 더불어 밖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인 씨, 안에 계신가요?”윤혜인은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있어요! 여기 있어요!”“문에서 떨어져 주세요.”윤혜인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밖에서 다시 두 번 ‘쿵쿵' 소리가 났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안으
한 경호원이 조명을 켜자 할머니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그 옆에는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할머니 위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남자아이는 사람들이 들어오자마자 윤혜인을 알아보았다.아이에게 있어 그녀는 마치 요정 같은 착한 누나였다.소년은 흐느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요정 누나, 제발... 할머니를... 구해주세요...”우선 윤혜인은 두 경호원에게 할머니를 데리고 나가라고 손짓했고 자신은 어린 남자아이를 안으려고 했다.경호원들이 할머니를 들어 올리고 나가자 윤혜인은 아이를 안았는데 아이의 발이 무언가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아이의 발이 마끈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주머니에서 호신용 군용 칼을 꺼내 힘껏 마끈을 자르기 시작했다.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떨며 말했다.“요정 누나, 나 무서워요...”아이는 윤혜인이 자신을 버릴까 봐 두려웠다.아직 부모님을 뵙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은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걱정 마, 누나는 널 버리지 않을 거야!”마침내, 마끈이 잘리고 윤혜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안아 일어서는 순간, 강력한 충격이 그들을 덮쳤다.그녀는 충격파에 의해 벽에 부딪혔지만 다행히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산사태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지금 산사태가 내려가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은 매우 현명하지 않았다. 완전히 매몰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이윽고 그녀는 결단력 있게 아이를 안고 측면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일정 거리를 달린 후, 그녀는 이번 산사태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최근 비가 많이 내린 탓에 토양은 매우 질퍽질퍽해져 있었다.어느 방향으로 가든 흙이 계속 쏟아져 내려왔다.잔뜩 놀란 아이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간 듯 보였다.소년은 윤혜인의 목을 꼭 껴안고 계속 울었다.“누나... 요정 누나...”윤
서준은 얌전하게 듣고 있었다.윤혜인이 말했다.“일단 나무를 꽉 잡고 있어. 절대 자면 안 돼. 조금만 더 버티면 누가 구해주러 올 거야. 사람들은 너 포기하지 않아.”“네...”“무슨 소리 들리면 빨간 스카프를 마구 흔들어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너 발견할 수 있어. 알겠니?”서준이 울먹이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발밑은 갯벌에 빠진 것처럼 꽉 조여왔다. 그런 압박감에 윤혜인은 점점 더 허약해졌다. 숨통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에 윤혜인은 천천히 입을 열며 이렇게 말했다.“서준아, 만약에 아름이라는 여자애 만나면 대신 전해줄래? 아줌마 딸이거든. 엄마가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줘... 아름이는 늘 엄마의 자랑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말이야...”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눈앞이 점점 흐릿해져갔고 더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온몸에 힘이 점점 풀려갔다.“...”윤혜인은 이제 의지할 데가 없었다. 어렴풋이 서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몸이 거의 물에 잠기려는 순간 아직 인사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떠올랐다.아빠, 오빠, 소원, 구지윤, 홍 아줌마, 그리고 그 남자까지... 너무 화가 났다.‘이럴 줄 알았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였는데...’의식을 잃기 전 윤혜인은 힘껏 입꼬리를 당겼다.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면 웃으면서 떠나고 싶었다.무섭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무서웠다. 무서울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지 못한 걸 후회했다.하지만 이런 상황이 다시 닥쳐온다 해도 윤혜인은 서준이 죽어가는 걸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줄기 희망만 있다면 꼭 살리려고 노력했을 것이다....해남 공항.까만 슈트는 이준혁의 기다란 체구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 모습이 점잖으면서도 우아했다.손에는 빨간 장미를 한 다발 안고 있었는데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과는 살짝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하지만 김성훈은 와이프에게 선물하려면 꽃부터 선물해야 한다고 했다.이준혁은 윤혜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먼저 공
작은 촌이라 주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봉사팀은 거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현재 실종된 사람은 5명밖에 없었는데 그중에 윤혜인과 서준이 있었다.“윤혜인 씨는 어떤 아이를 구하다가 제때 대피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표님...”풉.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피를 왈칵 토해냈다.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입술에서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대표님.”보디가드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이준혁을 부축하려 했지만 이준혁이 그를 밀어냈다.그렇게 바닥에 오랫동안 꿇어있던 이준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지금 당장 헬리콥터 불러서 수색 범위 확대하고 수색 인원도 더 추가해. 동진촌을 갈아엎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내.”이준혁의 명령에 보디가드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맴돌던 헬리콥터가 큰 공터에 착륙했다.이준혁은 헬리콥터에 올라 전용 안경을 쓰고 손짓했다. 그러자 헬기가 낮게 선회했다.몇 바퀴 둘러봤지만 사람은커녕 생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회색뿐이었다.옆에 있는 동진숲은 아직도 진흙 덩어리가 떨어지고 있었다.이곳은 산사태의 중심에 속해 있었고 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그렇게 두 바퀴 선회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같이 타 있던 보디가드도 희망을 잃고 포기했다.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회색으로 뒤덮인 폐허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살아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이준혁은 믿지 않았다. 하늘이 이 정도로 무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절대 그렇게 무심할 리가 없다.보디가드는 이준혁의 병적인 모습에 낮은 소리로 설득했다.“대표님, 아니면 일단 돌아가서 좀 쉬세요. 나머지는 저희가...”“북위 45도, 꺾어.”이준혁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조종사가 이를 듣고 방향을 꺾었다.보디가드는 그제야 깡마른 나뭇가지에 빨간 스카프가 걸려있는 걸 발견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선명하게 보였다
“윽...”쓰러졌던 윤혜인이 눈을 떴다.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하지만 한편 기쁘기도 했다.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했다.윤혜인은 팔을 들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치우고 주변 상황을 살피려 했다.차리리 보지 않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상황을 확인한 윤혜인은 혼비백산했다.산자락의 움푹 들어간 곳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벼락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크고 낡은 타이어가 놓여 있었다.의식을 잃어가는데 진흙이 밀려오길래 살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는 물건을 잡았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덕분에 진흙에 매몰되지 않은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상황은 매몰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움푹 팬 곳은 혼자 서 있어도 꽉 찰 정도로 작았다. 그것도 모자라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돌덩이가 마구 흘러내렸다.그리고 지금 밟고 있는 곳이 25kg이 넘는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날씨를 보니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으면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았다.잠들어도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기엔 너무 모험적이었다.윤혜인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굵은 넝쿨이 자라난 걸 발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넝쿨에 손을 뻗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움직이자마자 뒤에서 돌이 후드득 떨어졌다. 깜짝 놀란 윤혜인이 얼른 다시 몸을 벽에 바짝 붙였다. 낙석이 타이어에 부딪히며 굴러떨어졌다. 얼마나 깊은지 바닥에 닿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윤혜인은 벽에 바짝 붙어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진동에 의해 돌이 다시 부서져 떨어질까 봐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너무 오래 서 있었더니 몸 곳곳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손에는 구조신호를 보낼 수 있는 물건도 없었고 큰소리로 살려달라고 외칠 수도 없었다.여기에 이렇게 있는 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절망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왔다.“거기 누구 없어요?”“거기 누구 없어요?”“윤혜인 씨...”“혜인아...”마지막 한마디가 윤혜인의 귀
윤혜인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절망에 빠졌다.밟고 있는 진흙도 비가 와서 물컹한 상태였다. 윤혜인이 서 있는 곳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더는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 무너질 것 같았다.윤혜인은 손으로 넝쿨을 잡아당겼다. 꽤 탄탄한 것 같았다.마음을 단단히 먹은 윤혜인은 넝쿨을 손에 감고는 무게를 두 개의 넝쿨에 실으려 했다.그렇게 위로 올라가려는데 돌이 후드득 떨어졌다.밟고 진흙은 낙석에 의해 크게 갈라지고 말았다.윤혜인은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졌다.“아악.”윤혜인이 절규했다. 밟고 있던 곳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방법이 없었던 윤혜인은 이를 악물고 허공에 떠 있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발로 벽을 짚으려 했다.전에 곽경천이 암벽 등반할 때 같이 가서 놀아본 적이 있었지만 혼자 해본 적은 없었다.그저 전에 봤던 등반 동작을 떠올리며 조금씩 위로 타기 시작했다.다행히 몸이 가벼웠기에 넝쿨 두 개가 그녀의 무게를 이길 수 있었다.윤혜인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고통을 참으며 위로 기어 올라갔다.희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상과 겨우 두 걸음 남은 상태였다.순간.후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넝쿨 하나가 부러졌다. 나머지 하나로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하기엔 너무 무거웠다.마음이 급해진 윤혜인은 돌이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을 서둘렀다.후드득.갑자기 중력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머지 한 개도 끊어진 것이다.순간 윤혜인은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지면을 짚었다. 하지만 윤혜인이 잡은 건 곧 떨어질 것 같은 돌부리였다. 이제는 정말 나락으로 떨어질 일만 남은 것 같았다.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윤혜인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때 손목이 누군가에게 단단히 잡혔다. 윤혜인은 돌벽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걸 멈추었다.팔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팔이 그대로 뜯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윤혜인이 힘껏 고개
보고 싶었다는 말에 이준혁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윤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더는 숨길 수 없었다.“너무 보고 싶었어요...”곧 죽을 마당에 내려놓지 못할 원망과 증오가 어디 있겠는가.끝내 윤혜인은 마음이 흔들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돌아온 후로 이준혁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다.아무리 그녀가 과거를 내려놓지 못해 막무가내 화내고 때리고 투정을 부려도 그는 여전히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켜줬다.이 생각을 조금만 빨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깨달았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가볍게 말했다.“이준혁 씨, 이제 놔요...”윤혜인의 눈빛에 이준혁은 순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내가 너 아무 일 없게 지켜줄 거야.”이준혁이 확고하게 말했다.윤혜인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에 입술에 하얀 이빨 자국이 남았다.“준혁 씨, 우리 같이 떨어질 수는 없잖아요.”윤혜인은 이렇게 말하더니 먼저 꽉 잡은 그 손을 떼려고 했다.“떼기만 해봐.”이준혁이 낮게 소리쳤다.그 바람에 이준혁의 몸이 앞으로 조금 더 미끄러졌다.“혜인아...”이준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아직 희망이 있어.”윤혜인의 눈빛은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더는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이준혁도 따라서 끌려 내려갈 것이다.윤혜인이 차가운 눈동자로 매섭게 쏘아붙였다.“이준혁 씨, 당신 정말 최악인 거 알아요? 놓으라니까요.”이준혁은 윤혜인이 일부러 그를 화나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말에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준혁이 씁쓸하게 웃었다.“최악이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좋은 걸 어떡하라고.”이준혁은 가느다란 팔목을 꽉 붙잡고 눈시울을 붉혔다.“벗어날 생각하지 마. 평생.”이때 바닥이 다시 붕괴했다. 이제 더는 두 사람을 지탱할 힘이 없어 보였다.많아도 겨우 1분일 것이다. 최악의 경우 1분도 채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윤혜인은 더 잔인한 말을 생
물이다. 물이 있었다. 그러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윤혜인은 수영을 전혀 못 할 줄 알았는데 물에 떨어진 순간 익숙한 느낌과 함께 물 위로 떠 올랐다.하지만 이내 당황한 윤혜인이 어쩔 바를 몰라 하며 큰 소리로 불렀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물은 고요하기만 했다.겁에 질린 윤혜인이 심호흡을 하고는 물속으로 들어가 이준혁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내 윤혜인은 누군가에 의해 수면으로 건져졌다.이준혁은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매혹적이었다.그는 윤혜인을 안고 물가로 헤엄쳐 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여기 있어.”윤혜인이 멈칫하더니 그를 품에 꽉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당신 정말... 놀랐잖아요.”윤혜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같이 뛰어내릴 생각을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짜증이 치밀어오른 윤혜인은 이준혁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며 원망을 쏟아냈다.“정말 미쳤어. 미쳤다고...”때리고 나서는 마음이 아팠는지 바보처럼 웃기 시작했다.“다행이에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이준혁은 아이처럼 울다가 웃는 윤혜인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힘껏 꼭 끌어안았다.“미치지 않았어.”잠깐 뜸을 들이던 이준혁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너를 잃었다면 정말 미쳐버렸을지도 모르지.”윤혜인은 무언가에 부딪쳐 구멍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준혁은 복잡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꼭 끌어안았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몸을 파르르 떨고 있음을 발견했다. 눈을 깜빡이며 생각해 봐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이내 깨달았다. 이준혁은 무서웠던 것이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약속해.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나는...”이준혁이 갑자기 그녀를 풀어주더니 어둡고 차가운 눈동자로 말했다.“약속해.”말투는 명령조였고 어딘가 화나 보이기도 했다. 아니, 매우 화나 있었다. 죽다 살아났으니 이제 따질 시간은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